아나뱁티스트와 제자도

김복기 (캐나다 메노나이트 교회, 선교사)


초기 교회의 역사에 따르면 스데반에게 가해진 박해 때문에 흩어진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다. 특별히 페니키아와 키프로스와 안디옥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말씀을 전하면서 믿는 사람들이 생겨났다(행11:19). 바나바와 사울이 안디옥에 일 년 동안 머물면서 많은 사람을 가르친 결과 많은 신도가 생겨났고, 거기에서 처음으로 예수를 믿는 신도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행11:26). 신도들은 어려울 때 힘닿는 대로 서로를 도우며 살았다.

2천 년이 넘는 교회의 역사에는 수많은 이정표가 존재한다. 교회에 대한 역사를 언급할 때마다 등장하는 마태복음 16장의 베드로의 고백은 현재 신약성서 순서상 에클레시아에 대한 첫 기록으로 교회의 정체성을 언급할 때마다 등장한다. 실제로 예수께서 직접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여야하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온전한 표지가 되어야 한다. 이 마태복음 16장의 말씀에 뒤이어 마태복음 18장에서 그리스도는 교회의 표지이자 하나님 나라의 통치 원리로서 섬김, 돌봄, 사랑, 용서의 방식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다(마태복음 18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겠다고 약속하셨을 때, 제자들은 그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우선은 성육신으로 오신 것과 메시아로 오신 분이 갑자기 자신들을 떠나면서 약속하신 성령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부족했고, 그 실체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가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기능해야 하는지 그 뜻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사도들이 십자가 사건으로 모두 흩어졌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하면서부터였다. 무엇보다도 예수께서 살아계실 때 약속하신 성령을 몸소 체험하면서(사도행전 2장) 교회의 실체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제대로 깨닫기 시작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고,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면서부터였다. 우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1차로 약속하신 성령을 직접 제자들에게 부어주시는 장면(요 20:22)은 죽음의 공포로 인해 도망가 숨어버렸던 제자들에게는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각자가 그리던 인간적인 차원의 만남과 모임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로는 불가능한 새로운 성령의 공동체와 부활을 경험한 생명의 공동체를 맛보게 된 모임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는 새 세상, 새 교회, 새 공동체의 탄생함을 알리는 신호탄이자 창조적 선언으로 자리한다. 흩어졌던 제자들이 부활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다시 모였고 역사에서 처음으로 예수가 약속한 성령의 공동체가 태동하였다.

결국, 인간적인 종말을 고했던 사도들의 공동체는 가룟인 유다 대신, 맛디아를 뽑음으로써 보수되었고, 이어서 경험한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이 오순절 성령 강림을 체험한 사람들은 이전에 없던 새로운 영(정신)에 의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성령의 공동체적 체험과 사도들의 열정적인 가르침으로써 믿는 자들의 수가 늘어났고, 이전에 없던 새로운 유형의 공동체가 생겨났다. 사도행전 2장의 기록에 따르면 신도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였고,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

초기 교회를 연구한 교회사가들은 이 사도행전 2장의 사건을 그리스도 교회의 태동으로 이해하였고, 이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으로 인해 형성된 공동체를 교회의 원형으로 이해하였다. 당시 성령을 경험한 사람들이 즉시로 실천하기 시작한 신도들의 공동생활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사도행전 2:44-47)

여기에서 믿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을 의미하며, 수년 후에 비로소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사도행전 11장과 그 이전의 기록에 따르면 사람들은 이들을 제자들이라고 불렀다(행11:26, 9:1,10,19,25,26.28,36,38). 사도행전에 기록된 제자라는 용어는 크게 사도행전 전반부인 1:10,12 및 2:6의 기록과 한참 뒤인 9장 이후의 기록을 나뉘어서 생각해야 한다. 그 이유는 전반부의 제자는 주로 열두 사도를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던 용어로서 9장 이전까지는 사도라는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9장 이후부터 사도와 제자들의 구분이 생겨났고, 열두 제자들은 사도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신자, 제자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렸다.

이러한 분기점으로서 사도행전 11장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가져다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전 사도들과는 뭔가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것이 바로 성경이 사용하기 시작한 ‘제자’라는 말을 통해 그 특성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든, 믿는 사람들이라 부르든 이들이 가진 어떤 특징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 삶의 방식으로서의 ‘제자도’이다.

이 논문은 아나뱁티스트 아카데미의 한 부분으로 아나뱁티스트와 제자도를 설명하기 위해 준비되었다. 16세기 아나뱁티스트 운동이 발견한 아주 중요한 핵심가치 중 하나가 제자도인데, 이 운동이 드러내는 제자도의 핵심이 무엇인지 설명하려는 목적이 있다. 그러나 원래의 제자 됨, 즉 제자도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 가르침, 죽음 그리고 부활과 연관되어 있으므로 아나뱁티스트 운동의 제자도가 1세기 제자도의 원형에 비추어 볼 때 그 양상이 특별하지는 않다. 그러기에 이 논문은 아나뱁티스트와 제자도라는 제목을 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서의 가르침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에 근거하여 제자도를 설명할 것이다. 또한 아나뱁티스트 운동의 핵심 가치로 자리하는 제자도라고 하면서 다른 교단이 이해하는 제자도와는 뭔가 다른 특별한 것으로 설명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여 이 글은 우선 1. 제자도란 무엇인가? 라는 제목아래 제자도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개괄하고 2. 제자도를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이분법적 제자도에 대해 설명한 뒤 3. 16세기 아나뱁티스트들이 견지했던 제자도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는 방식을 취할 것이다.

우선 1. 제자도란 무엇인가라는 첫 번째 단락에서는 제자도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성경의 기록 중에 첫 번째 제자들로 선택된 열 두 제자들의 삶을 살펴보고, 사도들과 제자의 차이에 대해 살펴보게 될 것이다. 또한 용어상 제자라는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의미상 사도들을 지칭하는 제자들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제자들에 대한 미묘한 차이를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한다. 아울러 초기교회와 사도시대를 넘어선 기록, 즉 신약성서의 기록 이후부터 현재까지 기독교가 이해하고 있는 제자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기독교 잡지, 논문, 책에 실린 제자도 관련 제목을 통해 제자도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돕고자 한다.

2. 제자도에 대한 이분법적 이해라는 두 번째 단락에서는 제자도를 설명할 때 자주 혼동되기도 하고, 애매하게 설명되는 제자도의 두 유형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여기에서는 김경진 교수가 연구한 “유랑제자”와 “정착제자”라는 용어를 통해 역사 속에 존재하는 제자들의 두 유형을 간략하게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3. 아나뱁티스트와 제자도라는 세 번째 단락에서는 소위 급진적 개혁운동 혹은 근원적 개혁으로 불리는 아나뱁티스트들이 이해하였던 제자도에 대해 살펴보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이 글은 학문적인 이론을 다시 살펴보려는 의도보다는 그동안 삶과 유리되어 있던 그리스도의 제자도, 즉 일상 속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결국 제자도의 핵심임을 드러내고자 함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현장 속에필요한 것이 제자도 임을 강조하기 위한 작은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이 글이 매일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의 자기 정체성에 명확한 이해를 돕는 작은 선물이 되기를 희망한다.

1. 제자도란 무엇인가?

제자도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기독교 역사 내내 끊임이 없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제자도(discipleship)라는 단어의 어근인 제자(disciple)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 사용하는 제자라는 단어는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배우는 학생으로서의 제자와는 뭔가 다른 독특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일반적인 교육기관인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 더 나아가 대학교에서조차도 학생이라는 말은 쓰지만 제자라는 말은 잘 쓰지 않는다. 가끔 선생님과 학생, 교수와 학생의 특수한 관계 혹은 돈독한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스승과 제자라는 말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그들의 관계를 ‘제자도’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더 나아가 현재 존재하는 여러 종교에서도 이러한 교사와 학생,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존재할지 모르지만, 이들의 관계를 두고 제자도라는 표현을 쓰거나 ‘이것이 바로 제자도다’라는 식으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용법과 맥락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제자도라는 용어에 그리스도교에서 사용하는 어떤 특정한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제자도”에는 기독교 역사나 교회가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어떤 가치나 정신이 깃들어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제자들이란 어떤 사람들이며, 과연 제자도란 무엇인가?

우선 제자 및 제자도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제자들로 선택된 열두 제자들의 삶을 살펴보고, 사도들과 제자의 차이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용어상 제자라는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의미상 사도들을 지칭하며 그 무엇으로 대체할 수 없는 예수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이었던 열두 제자(사도)들과, 그 후 이들의 가르침을 받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또 다른 제자들에 대한 미묘한 의미 차이를 나누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울러 초기 교회와 사도 시대를 넘어선 기록, 즉 신약성서의 기록 이후부터 현재까지 기독교가 이해하고 있는 제자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기독교 잡지, 논문, 책에 실린 제자도 관련 제목을 살펴봄으로써 제자도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그리스도교에서 사용하는 제자는 아주 특이한 개념이다. 그리스도교에서 우선 제자라고 하면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불러 세우신 열두 명의 제자를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복음서의 기록에 따르면 이 열두 제자들은 스스로 제자가 되겠다고 나선 사람이 아니라, 선생님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선택되고, 지명되고,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자 그 부름에 응답한 사람들을 말한다. 스스로 제자가 되겠다고 나선 사람이라기보다는 예수의 부르심이 선행되었고,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듣고 그를 따라다니겠다고 결정한 사람들을 뜻한다. 이들 주변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부자 청년과 같이 스스로 예수를 따르겠다고 한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모두가 제자가 될 수 없었던 것을 보면, 이 열두 제자들의 위치와 지위는 독보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위치와 지위는 부르심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시몬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 빌립을 부르심 (요한복음 1장), 열두 사람을 택하여 사도라 부르심(눅 6:13-16), 네 제자를 부르심(마4:18-22, 막1:16-20, 눅5:8-11), 마태를 부르심(마 9:9-13, 막2:13-17, 눅5:27-32), 열두 제자를 보내심(마 10:5-42, 막 8:7-13, 눅 9:1-6) 등의 기록을 통해 동역자로서 이들의 역할이 잘 드러나 있다.

무엇보다도 열두 제자들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따라 배우는 사람들임을 잘 알 수 있다. 특별히 마태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두 번째 강화로서 등장하는 마태복음 10장의 기록은 이러한 제자들의 특성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그 마태복음 10장에 기록된 구체적인 지침은 다음과 같다.

이방 사람의 길로 가지 말 것, 사마리아 사람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 것, 길 잃은 양 떼인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갈 것, 선포의 내용은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앓는 사람을 고쳐 주며, 죽은 사람을 살리며,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낼 것, 저저 받았으니, 거저 줄 것,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 전대에 금화도 은화도 동전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 것, 여행용 자루도, 속옷 두 벌도, 신도, 지팡이도, 지니지 말 것, 아무 고을이나 아무 마을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서, 그 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 있을 것, 그 집에 들어갈 때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할 것,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않거나 너희의 말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 버릴 것,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할 것, 사람들을 조심할 것, 법정에 넘겨지고, 회당에서 매질을 당하고, 또 그리스도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나가서, 그들과 이방 사람 앞에서 증언할 것, 사람들이 너희를 관가에 넘겨줄 때에, 너희가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그때에 지시를 받을 것이니 어떻게 말할까, 또는 무엇을 말할까, 하고 걱정하지 말 것,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서 미움을 받더라도 끝까지 견뎌 구원을 얻을 것, 이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고을로 피할 것,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 것, 몸은 죽일지라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이를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도 몸도 둘 다 지옥에 던져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할 것,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거나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지 말 것,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를 것.

마태복음 10장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처음 부름을 받은 열두 제자들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특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1) 예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

2)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받고, 온갖 질병과 온갖 허약함을 고치는 사람

3) 구체적인 그리스도의 지침을 받은 사람들이다.

마태복음 10장의 지침은 모든 그리스도인들 즉 모든 제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사도라고 부름을 받은 열두 제자들에게만 해당하는 사항으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엄격한 의미에서 그들만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직접적으로 선택받은 제자들이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름을 받은 사도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할 때, 우리는 이 열두 사람으로 그 범위를 축소해서 생각해야 할지 아니면, 훗날에 언급된 폭넓은 의미의 제자들을 의미하는지 따져보고, 그들에게만 주어진 제자도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만약 성서의 기록이 이 열두 제자를 두고 제자도를 이야기한다면, 사도성으로 그 의미를 대치해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제자라고 할 때, 열두 사람에게 주어진 사도성과 제자됨에 머무를 수 없는 이유는 그 외의 제자들이 존재하였고, 특별히 사도행전 이후 열두 제자들의 가르침을 통해 또 다른 제자들 즉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부른 사람들이 여러 곳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2) 열두 제자들 외의 다른 제자들

성경을 읽다 보면 열두 사도로 칭함을 받은 제자들 외에 또 다른 제자들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다른 제자들에 대한 설명은 사도행전 9장 이후부터 등장하는데, 소위 말해 사도들이 전한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의미한다(행13:52; 14:20,21, 22,28; 15:10; 16:1; 18:27; 19:1,9,30; 20:1,2,30, 21:4,5,16).

소위 말해 이들은 사도들의 복음을 전해 들음으로써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따르기로 한 사람들로서 앞서 말한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 외에 또 다른 부류의 제자들로 불렸다. 이들은 사도행전 11장에서 최초로 그리스도인들이라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 이후로부터 신도, 신자, 믿는 이들로 표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주변 사람들이 조롱조로 부른 말이었지만, 예수쟁이가 됨으로써 예수처럼 사는 사람들 그리스도(Christ)의 사람들(ian)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서가 제자들이라고 부를 때 거기에는 열두 제자들 외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또 다른 부류의 제자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이나 서신서보다 나중에 기록된 것으로 여겨지는 복음서에도 열두 제자 외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들 못지않게 잘 섬기고 복음을 전파했던 예들이 많이 있다. 비록 복음서는 이들에게 제자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예수의 공적인 사역을 든든히 지원한 또 다른 제자들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이 보여준 제자도는 열두 제자들처럼 말씀과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지는 않지만, 일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갔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자명하다. 즉 이들이 보여주는 제자도의 특성은 사도들과 구분되는 기능적 차원과 그리스도인의 성품이라는 차원으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다. 우선 교회의 리더로 부름을 받은 일곱 명의 또 다를 섬김이들 (사도행전 6장), 서신서의 집사, 장로, 감독들의 자격조건과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의 성품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이 글에서 그들에 대한 구체적인 집사의 자격, 장로나 감독의 자격은 생략하기로 한다.

3) 사도 시대 이후 현재까지 기독교가 이해하는 제자도

위에서 우리는 열두 제자들에게 해당되는 내용과 그 외의 다른 제자들에게 해당되는 제자도가 있음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성서의 기록을 근간으로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제자도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역사의 흐름에 따라 기독교에 대한 오해, 뒤틀려진 교회의 모습뿐만 아니라, 제자도에 대한 이해 또한 뒤틀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 천 년의 역사 속에서 자리하게 된 기독교의 제자도란 과연 무엇일까 질문할 필요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제자들인 사도들이 죽고 난 후, 사도들의 제자들이었던 초대교회 교부들의 시대에 이미 기독교에 대한 오해와 제자들에 대한 오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오해는 기독교 공인이라는 크리스텐덤(Christendom 기독교제국) 기간에 더욱 가속화되었고, 처음 조롱조로 자리했던 그리스도인이 자부심과 영예의 타이틀이 될 정도로 왜곡되고 변질되었다. 이러한 변질을 초기교회 역사가인 알렌 크라이더는 『회심의 변질』로 정리하였고, 윌리엄 에스텝[1]이라든가, 프랭클린 리텔[2], 도날드 던바[3], 존 하워드 요더 등 신자들의 교회나 자유교회 전통에 속한 많은 교회사가들은 복음의 변질로 설명하기도 했다.

이들의 교회론과 제자도에 대한 설명을 일일이 살펴보는 일은 의미가 있지만, 이 글에서는 현재까지 기독교 잡지나, 논문에 발표된 많은 제목들을 살펴보는 것으로 그 흐름을 잡는 정도로 논의를 제한하고자 한다. 2020년 현재, 영문 데이터베이스인 EBSCO를 이용하여 영어 단어 discipleship을 검색한 결과 이에 대한 논문이 총 1,238개가 검색되었다. 그 검색한 내용을 분류해 보면, 제자도인 discipleship은 다양한 주제와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제자도가 얼마나 중요하며 그 분야가 얼마나 광범위하고 다양한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직업에 있어서의 제자도 Vocational discipleship, 복음주의와 제자도 Evangelism and discipleship, 감정과 제자도 Emotional health and discipleship, 성령이 이끄는 제자도 Spirit-driven discipleship, 자연보호 제자도 Creation care discipleship, 예전과 제자도 liturgy and discipleship, 진짜 제자도 Authentic discipleship, 소명과 제자도 Call and discipleship, 가장 신실한 제자도 The most sincere form of discipleship, 선교를 부양하는 제자도 Mission-shaped discipleship, 선교와 제자도 Mission and discipleship, 하나님과 동행으로써의 제자도 Discipleship as living with God, 리더십으로써의 제자도 Discipleship as leadership, 갈등 상황에서의 제자도 Discipleship in the midst of conflict, 제자도의 비용 The cost of discipleship, 제자도의 과정 The process of discipleship, 급진적 제자도 Radical discipleship, 공동체와 제자도 Community and discipleship, 미셔널 제자도 Missional discipleship, 부활 후의 제자도 Discipleship after resurrection, 창조적 제자도 Creative discipleship, 성육신적 제자도 Incarnational discipleship, 내러티브 제자도 Narrative discipleship, 제자도의 정치학 The Politics of discipleship, 제자도와 나이듦 Discipleship and aging, 신실한 제자도 Faithful discipleship, 가족의 제자도 The family discipleship, 21세기 제자도 The 21st Century discipleship, 포스트모던 제자도 Post-modern discipleship, 십자가와 제자도 The cross and discipleship, 제자도와 영성 Discipleship and spirituality, 우정과 제자도 Friendship and discipleship, 제자도와 목회 Discipleship and ministry, 일상의 제자도 Daily discipleship, 디지털 제자도 Digital discipleship, 제자도의 부담 Burden of discipleship, 제자도로서의 자녀양육 Parenting as discipleship

이상의 목록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 하나는 제자도란 어떤 특정한 프로그램이나 특정한 사람들만이 갖고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삶의 전 영역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다양한 주제들과 연관되어 있는 제자도란 과연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것만이 절대적인 제자도라고 제시할 수 있는 특별한 개념을 도출해내려는 노력보다는 과연 이 모든 논문들이 표현해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제자도라는 단어에 갇혀 있기 보다는, 과연 앞서 설명한 제자도의 원래 그림으로써 존재하는 스승의 가르침, 그리고 그 길을 따르는 제자라는 원의미를 올바로 잡아줄 절대적인 개념의 스승, 선생님의 모습을 설명하는 것이 더 절실하다. 이 말은 그리스도교에만 존재하는 제자도는 결국 유일한 길, 진리, 생명으로 칭해지는 살아계신 주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라는 선생님의 삶과 가르침을 끊임없이 언급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즉 제자나 제자도에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승, 선생님의 존재와 그분의 삶과 가르침과 죽음과 부활에 방점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제자 됨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인 개념일 뿐이며, 이는 오로지 절대적인 개념의 선생님, 스승론에서 모든 것이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제자도를 언급할 때는 제자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방법론의 차원이나 인식론의 차원보다는 생명의 근원이시고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조명하는 존재론적인 차원이 먼저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제자도란 선생님의 길을 따르기 위해 그리스도론과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애초부터 뭔가를 가르치기보다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존재로 이 세상에 오셔서, 자신의 삶을 따르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한마디 외침, 즉 “나를 따르라! Follow me!”라는 말씀에 모든 것이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모든 가르침이나, 행동이나, 신학이나, 그 무엇을 이야기한다고 할지라도 기독교의 핵심은 제자도이고 그 제자도는 결국 “예수 따름”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2. 두 종류의 제자도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제자도가 “예수 따름”이라면 예수의 제자들은 어떤 방식으로 예수를 따라야 할까? 한편으로 제자가 되려면 예수 외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모든 가치를 예수께 두어야 한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모든 현재의 삶을 뒤로 하고 무작정 집을 떠나야만 하는 것인가? 앞서 설명한 마태복음 10장의 열두 제자처럼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만이 제자의 길인가? 만약 그러한 방식만이 제자의 길이라면 지금 수백만 수천만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일상의 삶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라는 두 가지 상반된 삶의 방식에서 갈팡질팡, 우왕좌왕하거나, 좌고우면할 수밖에 없다. 이는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이 고민하는 바요, 삶 속에서 갈등으로 경험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정말로 어느 정도까지 그리스도를 따라야 제대로 제자가 되는 것일까?

이는 현재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고자 매일 묵상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두고 끊임없이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특별히 말씀을 설교하는 설교자들이나, 신학자들의 논점을 따라가다 보면 삶을 전적으로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따라나서든지, 아니면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가는 속세의 그리스도인으로 늘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든지 양자택일의 문제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는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도에 대해 설명할 때 자주 범하는 오류 중 하나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야 한다는 설명이 한 편에 있고, 일상을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기는 어려우므로 제자도는 일반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책임과 삶의 길이 아니라, 특별히 믿음 좋은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그 무엇이 또 다른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형국이다. 실제로 많은 논문이나 설교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성서의 가르침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도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어느 때는 이 쪽편을 강조하고, 어느 때는 저 쪽편을 강조하여 설명하다가, 결론은 청중들이 그냥 알아서 선택하도록 얼버무리고 마는 경향을 보여왔다.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성서의 가르침도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더더욱 아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초기 기독교에 등장한 두 종류의 제자도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장신대학교의 김경진 교수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던 사람들을 크게 두 종류로 분류하였는데, 열두 제자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여행하고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일에 모든 일을 집중했던 제자들을 위한 제자도가 한편에 있고, 그 외 일상생활을 영위하면서 삶의 전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했던 제자도가 또 다른 한편에 있다고 설명하였다. 그는 전자를 순례자의 성격을 띤 Itinerant disciple로, 후자를 직업을 갖고 한 장소에 오래 살면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소임을 다하는 sedentary disciple로 설명하였다. Itinerant disciple은 순례제자, 순회제자, 혹은 유랑제자로 번역할 수 있다면 sedentary disciple은 일상의 제자, 정착제자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약 성서 특별히 복음서가 이 두 종류의 제자들을 어떻게 규정하는지 살펴보자.

1) Itinerant disciple / 유랑제자

유랑제자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에 함께 먹고 함께 사역했던 제자들을 말한다. 특별히 이들은 주님의 부름과 선택을 따라 제자로 부름을 받았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전도 여행을 준비하고, 돕고, 직접 동참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하나님 나라의 강화로 잘 알려진 마태복음 10장에 그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이들은 “사명의 완수를 위하여 가정과 재산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들로서 (막 3:21, 31-35; 눅 9:58), 하나님 나라와 복음의 선포를 위하여 가진 바 모든 재산과 가정 그리고 직업을 포기하고 문자적으로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동안 동고동락한 사람들이다. 이처럼 스승을 따르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는 태도는 매우 독특하고 이례적인 삶의 모습으로써 이들은 스승-제자라는 특별한 관계에 삶의 모든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로 이해된다.” 따라서 이들 유랑제자들은 예수님과 같은 운명을 택한 사람들로 이해되며 처음에는 열두 제자로 불리다가 후에 열두 사도로서 사도라는 특성상 역사적으로 반복될 수 없는 형태의 제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이 유랑제자들의 특성을 따르도록 요구되거나 특별한 열심을 강요받곤 한다. 이는 성서가 가르치는 삶의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의 삶을 주로 기록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사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분명 자신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여김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유랑제자의 삶을 그대로 살 수 없다. 그러기에 이 첫 번째 종류의 제자도는 믿음의 공동체가 유랑제자로 부르지 않는 한, 일반적인 신자들에게 요청할 수 있는 제자도가 될 수는 없다. 물론 헌신과 열심이라는 차원에서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두 주인을 섬기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주로 섬기며 따르겠다는 마음의 결심이나 결단의 차원에서는 이해되지만, 실제적인 삶의 방식으로서 첫 번째 제자도는 “선교사” “순회설교자” 혹은 고교회와 같은 제도 교회의 직제상 “수도사”나 “신부” “수녀”등의 구별된 직제를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제자도라고 할 수 있다.

2) Sedentary disciple / 정착제자

위의 유랑제자와 다른 종류의 제자로서 정착제자가 있다. 이들은 유랑제자인 사도들처럼 문자적으로 주님을 따르거나 모든 재산과 가정과 직업을 포기하지는 않으나, 자신이 처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 주님의 말씀과 그 가르침을 따라 제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복음서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순례하던 제자들이 있는 반면, 이들을 공궤하고 섬기던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들을 정착제자라고 할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갈릴리 여인들을 들 수 있다.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막달라 마리아 등의 갈릴리 여인들은 다른 남성 제자들과 함께 주님의 전도 여행에 동참한 여제자들이었으나, 자신들의 소유를 전부 포기하거나 3년 내내 예수를 따라다니지는 않았다. 대신에 자신들의 살던 지역에 예수와 제자들이 방문하면 자신들의 집에 그들을 받아들였고 예수님과 제자들의 일행을 섬겼다. 복음서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지는 않지만, 예수와 그 제자 일행이 어떻게 전도여행을 3년 이상 긴 세월 동안 지속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단서를 얻게 된다.

이러한 여제자들의 지속적인 헌신, 봉사, 희생, 물질적인 도움이 없이 전도여행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부분적으로 이 여인들은 예수의 여행에 잠깐 참여하기는 하였지만, 주님을 지속적으로 따라다녔다는 증거는 성서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아 이들은 유랑제자라기보다는 정착제자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우리가 잘 아는 누가복음 10장의 마리아와 마르다에 대한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의 일행을 영접하는 제자들이 여러 마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할 때, 어느 마을에 들어가거든 한집에 유숙하라는 가르침이 있는데, 이들을 정착제자들의 그룹이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이 외에도 김경진 교수는 여리고의 삭개오라든가, 아리마대 요셉을 정착제자의 예로 들었다.

이처럼 정착제자들은 비록 자신이 가진 모든 소유를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나그네가 된 (눅9:58; 9:3; 10:4) 예수님과 그 제자들 일행을 포함하여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하여 기꺼이 자신들의 재물을 사용하였다(눅 19:8; 8:3; 10:38; 23:52-53). 정착제자들은 실제로 재산을 수중에 소유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그 재산의 소유권은 포기한 것과 다름없이 살았다.

김경진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유랑제자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역할에 국한하여 반복될 수 없는 단회적인 인물로 제한하였는데, 이는 잘못된 이해이며 위에서 간단하게 설명하였듯이 역사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순회설교자, 선교사 혹은 고교회와 같은 제도 교회의 직제상 수도사, 신부, 수녀 등 자신을 삶을 온전히 하나님 나라에 드리기로 작정한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제자도로 이해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이 두 종류의 제자도는 기독교 역사에 뚜렷이 드러나는 제자도의 유형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이 두 종류의 제자를 한 사람에게 동시에 요구할 수는 없으며, 성경에서 기능하는 것처럼 상호보완의 제자도로 이해하면 큰 무리 없이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한 편만이 옳은 것으로 설명하는 것은 제자도에 대한 온전한 이해라고 볼 수 없다.

3. 아나뱁티스트와 제자도

1) 아나뱁티스트에 대한 이해

아나뱁티스트 운동은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과 그 맥락을 같이하며 시작되었다. 종교개혁 기념일이 1517년 10월 31일이라면, 아나뱁티스트 기념일은 1525년 1월 21일이다. 종교개혁 기념일이 루터의 95개 논제를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게시한 날을 기념한 것이라면, 아나뱁티스트 기념일은 스위스 취리히 시의회의 유아세례 반대가 불법임을 판결한 데 대해 몇 명의 사람들이 펠릭스 만츠의 집에 모여 성인 세례를 시행한 것을 기념한 날이다.

이렇게 아나뱁티스트 운동은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적 흐름을 배경으로 스위스에서 시작이 되었다. 초기 교회 때,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불린 것처럼, 16세기 종교개혁 당시에 관행이었던 유아세례 대신에 신앙고백을 근거로 성인세례를 시도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붙여진 이름이 아나뱁티스트였다. 비록 겉으로 드러난 운동의 시작은 유아세례를 거부하는 모습이었지만, 실제로 더 중요한 것은 성경적 교회의 회복이었다.

아나뱁티스트들은 종종 제3의 종교개혁가들이라고 소개되는데, 이는 동시대의 종교개혁이 온전한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뒷걸음 칠 때, 성경의 가르침을 온전히 시행함으로써 종교개혁을 완성하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나뱁티스트들이 누구인가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매일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따라 살고자 애쓴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 “따름”을 가장 소중히 여겼던 이들은 초기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자신들의 삶을 직접 연결시켜, 사도행전 5장 29절의 말씀과 산상수훈을 실천하고자 애썼다. 그렇게 그리스도 따름을 실천하기 위해 그들은 먼저 말씀을 옳게 해석하고, 해석한 말씀에 제대로 반응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들은 사람의 말을 듣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좋아했으며(행5:29), 일상생활 속에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따르며,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범을 통해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를 이루고자 애썼다. 박해 중에서도 그리스도의 평화를 실천하며 살고자 애쓴 평화의 사람들로 기억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500년을 지내오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아나뱁티스트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신앙의 핵심은 제자도, 평화, 공동체로 요약할 수 있다. 무엇보다 아나뱁티스트들은 기독교를 이해할 때, 가장 먼저 “제자도”를 언급한다. 여기에서 제자도는 우리에게 익숙한 제자 훈련이나, 어떤 프로그램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제자들이 모인 곳을 교회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아나뱁티스트들은 교회를 형제 됨과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신앙공동체이자 가족으로 이해한다. 교회를 이루기 위해 구성원은 우선 그리스도께 자신을 헌신하는 것은 물론 공동체인 그리스도의 몸에 기꺼이 헌신하고자 애쓴다. 그리고 그 헌신의 방법은 항상 세상의 원리가 아닌 그리스도의 원리로서 평화의 하나님과 맞닿아 있다. 제자도를 말로만 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원수 사랑을 말로만 외치는 것이 아니라, 무저항과 사랑의 윤리 (ethic of love and nonresistance)를 실천하고자 애써왔다. 그래서 아나뱁티스트들에게 주어진 별명 중 하나가 “산상수훈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어찌 보면 이상주의자들이었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성서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는 기독교실존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아나뱁티스트들은 그리스도를 매일의 삶 속에서 따르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2) 한국의 아나뱁티스트 운동

한국의 아나뱁티스트 역사는 1952년 한국전쟁의 난민들을 돕기 위해 들어온 메노나이트 중앙위원회 (Mennonite Central Committee –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교육, 개발, 구제를 담당하는 메노나이트 구호기관)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메노나이트 구호기관이었던 MCC는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약 20년간 전쟁고아들과 난민들에게 물자를 공급하였고, 전쟁미망인들을 대상으로 재봉기술교육,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메노나이트 직업중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한국전쟁직후 복음의 핵심인 고아와 과부를 도우라는 말씀에 반응하여 구호활동을 전개하였다. MCC가 한국에 발을 디디면서 펼친 첫 활동은 전쟁 피난민을 대상으로 가장 시급한 물자 구제사업이다. MCC는 집을 잃고 먹을 것조차 없었던 전쟁난민들에게 필요한 물자를 제공하였고,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위해 메노나이트 직업훈련학교를 세우고, 가족/어린이 지원프로그램을 만들고, 전쟁미망인들을 위한 재봉기술 교육의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이러한 활동 외에도 병원 자문봉사, 지역개발봉사, 기독교 어린이 위탁 훈련교육 등 대구와 부산지역을 중심으로 다양한 구제, 교육, 지역개발, 사업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빠른 경제개발과 더불어 MCC 사역은 더 많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나라로 옮겨 가면서 사역을 마감하기에 이르렀다. 1971년, 20년 동안 시행했던 메노나이트 직업훈련학교의 마지막 수업이 진행되었고, 당시 한창 전쟁의 피해로 씨름하던 베트남 등 더 많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나라로 사역을 옮기게 되었다.

MCC 사역 이후, 메노나이트 직업훈련학교 졸업생을 중심으로 메노나이트 정신을 이어가려는 노력이 있었다. 구호사역으로서의 목적은 달성하였으나, 선교사역과 구호사역을 분리하여 시행하는 메노나이트 교회의 전통에 따라 아나뱁티스트 운동은 이렇다 할 교회운동으로 정착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990년대에 직업훈련 학교 동문을 비롯하여 메노나이트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기독교인들이 생겨났고, 캐나다 메노나이트 교회와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공식적인 교류는 1996년 캐나다 메노나이트 교회로부터 선교사가 파송되면서 재개되었다. 이러한 관계속에서 한국 메노나이트 교회에 대한 관심이 싹트게 되었고, 현재 캐나다와 미국 메노나이트 교회는 물론 세계 메노나이트 교회 협의회 Mennonite World Conference와 형제애를 나누고 있다. 현재 한국 아나뱁티스트와 전 세계의 메노나이트 교회는 가능한 여러 형태를 통해 형제애를 나누고 있다. 무엇보다도 성서가 말하는 교회회복을 꿈꾸며, 제자도, 평화, 공동체의 핵심가치를 실천하는 자생적인 아나뱁티스트 운동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고 있다.

비록 한국에서의 활동이 구호활동을 중심으로 펼쳐졌지만, 성서의 관점에서 보자면 세계 도처의 어려움과 돌봄이라는 필요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3) 아나뱁티스트 제자도

위에서 설명한 열두 제자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명령(마태복음 10장)과 기타 복음서의 내용을 살펴볼 때, 우리가 알고 있는 제자도와 성경이 알려주는 제자도는 사뭇 다름을 알 수 있다. 역설적이지만 제자도discipleship란 무엇인가? 를 정의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 중에 무엇이 제자도가 아닌가를 설명함으로써 제자도를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다음의 설명은 그 몇 가지 예이다.

  1. 제자도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2. 제자도는 교회성장학의 어떤 분과가 아니다.
  3. 제자도는 학생에 관한 무엇이 아니다.

이를 좀 더 상세하게 부연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제자도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우선 제자도는 어떤 특정한 교회의 프로그램이나, 학교에서 전문적으로 양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위해 학교를 개설하지 않고 삶의 자리를 내어 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제자도는 교회에서 막대한 예산과 뜨거운 열정과 몇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만들어 내면 되는 그 어떤 프로그램이 아니다. 그러므로 제자학교, 제자훈련프로그램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2. 제자도는 교회성장학의 어떤 분과가 아니다.
특정한 교회에서 교회 성장을 위한 방식으로 제자를 양성하기 위해 어떤 분과를 마련하여 제자들을 배출한 적이 있다. 제자 훈련 과정으로서 인기를 구가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것처럼 제자도는 훈련 프로그램도 교회성장을 위한 도구로는 더더욱 사용되어서도 안 되고 그럴 수도 없다. 교회 성장은 성령께서 일하시는 결과물이지, 그 자체로 목적이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만큼 현재 교회는 제자도에 대한 오해를 하고 있거나, 진정한 의미의 제자가 결여된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제자도는 학생에 관한 무엇이 아니다.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제자도는 학생에 관한 무엇이 아니라, 제자로서 선생님의 길을 따르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과연 선생의 길은 무엇인가 질문할 수밖에 없으며, 그 선생님의 모습에 따라 제자도가 결정되는 것이 당연하다.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유일무이한 선생님, 주인, 교사가 누구이며 그 가르침의 본령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간디가 그리스도인들을 두고 한 말로 인해 뼈아픈 상처를 안고 있다. “나는 예수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닮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기독교인이 예수와 같이 행했다면 저는 기독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I like your Christ. I do not like your Christians. They are so unlike your Christ.”

간디의 지적처럼 우리가 말로 “예수는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아주 쉽다. 그러나 삶으로 “예수는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렇다면 과연 제자도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 제자도는 매우 실제적인 모습으로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표현되어야 한다.
  • 그러므로 제자도는 매일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어야 한다.
  • 또한 그 모습은 어떤 프로그램이나 도구가 아니라, 또 누군가에 의해 통제되거나 조정되는 모습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본받는 모습이 자발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이러한 내용은 16세기에 1세기 교회의 모습을 다시 복원하고자 노력했던 아나뱁티스트의 삶에 잘 드러나 있는데, 무엇보다 아나뱁티스트가 말하는 제자도는 아주 단순하며, 성경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다지 낯설지 않을 것이다. 사실 16세기 아나뱁티스트들이 모진 박해를 받은 이유는 가톨릭이나 개신교 정부가 복음을 말한다하면서도 복음과는 너무 멀리 떨어진 당국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단순히 예수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라 살고자 하는 모습을 고집스럽게 반복한 것일 뿐이라서, 뭔가 기발하고 특별한 내용이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적잖이 실망스러운 모습으로 비치곤 한다. 이들의 제자도는 이론적인 정교함보다는 삶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습으로 자리하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조금 특이한 점이 있다면 아나뱁티스트 신학에서 제자도는 항상 십자가, 고난과 함께 이야기된다는 점이다. 이는 16세기에 아나뱁티스트들이 제자들로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아나뱁티스트들이 주장했던 제자도의 모습이 어떠한지 잠시 살펴보자.

한스 뎅크 (1500-1527)

한스 뎅크는 최초로 남부 독일의 아나뱁티스트 운동을 이끈 아주 매력적인 지도자 중 한사람이다. 그의 신비롭고 인간적인 성향은 루터의 가르침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그런 까닭에 그는 뉘른베르크에 있는 유명한 성 제발트 학교 교장으로 있는 동안에 ‘오직 믿음으로’를 주창했던 루터의 가르침을 신랄하게 비판하여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는 1526년 5월 아우스크부르크로 가서 후브마이어와 협력했고 프로테스탄트 당국에 의해 추방되어 스크라스부르에서 잠시 머무는 동안에는 보름스와 아우크스부르크 지역의 아나뱁티스트 지도자로 활동했다. 보름스에서 그는 구약의 예언서를 완역하는 일을 도왔다. 1527년 11월 전염병으로 사망하였다. 뎅크는 당시 혹독하고 증오스러울 만큼 맹렬한 논쟁에 휩쓸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저술은 영혼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특별히 한스 뎅크는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의 말씀에 복종해야 함을 Gelassenheit로 설명하였는데, 겔라센하이트는 그리스도의 권위에 온전히 항복함, 순종함, 복종함을 뜻하는 아나뱁티스트 신학의 핵심 사안이자 제자도의 정수이기도 하다. 그는 항상 “자신이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걸어가야만 한다.”고 제자도의 핵심을 설명하였다. 또한 “매일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는 결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아나뱁티스트로서 제자도를 가장 명쾌하게 설명한 내용이기도 하다.

조르그 바그너 (1527)

아나뱁티스트 리더 중 한 사람이었던 조르그 바그너는 아우스분트 찬송집에 다음과 같은 가사를 썼다.

누구든지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세상의 모욕과 고난이라는 수모를 겪어야 하며, 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네.

이것만이 보좌로 나아가는 길,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길.

그리스도의 종들은 죽기까지 그를 따르며

그들의 몸을 십자가 위의 삶과 죽음에 내어주어야 하리.

금이 정련되듯이 그리스도의 종들도 발의 시험을 견뎌야 하리.

모든 것을 포기하되 십자가는 선택해야 하며,

십자가를 붙들며 가정, 자녀, 아내 등 다른 모든 것을 버려야 하리.

이익을 포기하고 고통을 잊는 종들에게 생명이 주어지리.

이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 제자도의 내용은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로 요약할 수 있다.

마이클 잣틀러 (1490-1527)

스위스 형제단의 중요한 지도자이자 전도사였던 마이클 잣틀러는 1526년에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다. 그는 1527년 슐라이트하임에서 열린 아나뱁티스트 비밀 회합을 주관했고, 아나뱁티스트 역사 상 최초의 고백서로 알려진 슐라이트하임 고백서를 입안했다. 이 고백서는 주로 제자도, 새로운 공동체의 생활과 질서에 대한 질문을 다루고 있다.

이 회합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회의에 참여했던 다른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로텐부르크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의 재판과 사형은 아나뱁티스트 순교자들 중 가장 유명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높은 학식과 겸손한 비폭력 그리스도인이었다. 그에 관한 많은 기록이 있지만, 조르그 바그너처럼 그가 쓴 찬송가 가사가 아우스분트 찬송집에 실려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진정한 가르침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실 때,

그리스도께서 무리를 불러 모으실 때,

그리고 인내심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예수께서 우리에게 너희 참된 제자들은 매일의 삶을 점검하고 주의하라고 하셨네.

나보다, 나의 말보다 세상의 것을 더 사랑하면 내게 합당치 않으리.

…….

나의 말을 따르면 세상은 너희를 박해하고, 욕하고, 죽이게 될 것인데,

너희를 위해 상이 준비되어 있으니 기뻐하라!

누가 그리스도를 따를 것인가?

한스 후트 (1485-1527)

한스 후트는 남부 유럽의 유능한 아나뱁티스트 전도사로 다른 지도자들 전체가 인도한 사람들 수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회심시켰다. 그는 오스트리아와 모라비아에 존재했던 모든 아나뱁티스트 그룹을 시작한 사람이었다. 무역업을 경영하는 제본업자이자 도서판매상이었던 후트는 여행을 하면서 1520년대의 종교적 격동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1526년 한스 뎅크에게 세례를 받은 후, 아우크스부르크로 갔다. 그 후 18개월 동안 설득력 있는 순회 전도사로 활동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이끌었으며, 많은 재능 있는 리더들을 아나뱁티스트 운동으로 이끌었다. 1527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며, 감옥의 화재로 목숨을 잃었다. 그는 로마서 8장 17절을 근간으로 “누구든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진정으로 알기 원한다면,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자신에게도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해야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려면 그와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한다.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뜻”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레온하르트 시머 (1500-1528)

초기 아나뱁티스트 리더이자 평화주의자로 그의 글 역시 초기 아나뱁티스트 찬송가인 아우스분트에 남겨져 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경험하신 것과 똑 같은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선생님보다 제자가 더 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신 것은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신 것으로 우리도 그의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 그는 죄가 없으시고 그 입에 간사한 말이 없으신 분이시다. 그럼에도 그는 육체적인 질고를 짊어지셨다. 우리가 죄를 지어서 받게 되는 고통으로부터 자유하려면 스스로 준비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고난 그 자체가 우리를 죄에서 자유롭게 만들지 못한다.”고 하면서 제자도와 그리스도의 고난을 분리시키지 않았다.

한스 스라퍼 (???-1528)

가톨릭 사제였다가 아나뱁티스트가 된 한스 스라퍼는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침을 따르며 받게 될 고난을 준비해야 한다. 그럴 때 그리스도께서 하늘 아버지와 천사들 앞에서 그들을 모른다 하지 않으실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 하는 자는 나를 따라야만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들도 있어야 한다. 나를 따르는 자는 아버지께서 기억하실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는 자는 자신을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 간단히 말해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다. 이는 세상이 변한다 해도 결코 변치 않을 진리다.”라는 글을 남겼다.

제이콥 후터 (1500-1536)

모라비아 지역에서 활동했던 아나뱁티스트 리더로서 유무상통의 공동체인 후터라이트를 시작하였다. 모자를 만들어 파는 사람으로서 조지 블라우락의 뒤를 이어 티롤 지방의 아나뱁티스트들을 위한 목사가 되었다. 그는 박해가 한창이던 16세기에 모라비아가 아주 평화로운 지역이라는 소식을 듣고 티롤 지역의 아나뱁티스트 그룹과 연합하였다. 그에게 제자도란 성서의 가르침을 따라 그대로 살아가는 모습으로 이해되었고, 특별히 사도행전 2장의 가르침을 따라 기독교 공동체를 시작하였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독교 공동체들 중 하나로 알려진 후터라이트 공동체는 그의 이름을 따라 후터라이트가 되었다.

메노 시몬스 (1496-1561)

메노 시몬스는 16세기 네덜란드에 살았던 가장 중요한 아나뱁티스트 지도자였다. 그를 따랐던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따라 메노나이트라 부르게 되었다. 그는 아나뱁티스트 운동을 시작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2세대 아나뱁티스트 운동을 통합하고, 조직하고, 영적인 지침을 마련하였다.

1524년 그는 사제로 서품을 받았고, 곧 바로 몇 교구를 담당하였다. 네덜란드의 목회초기부터 화체설의 기적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된 것은 그다지 놀랄만한 일이 못되었는데 이는 주의 만찬에 대한 상징적인 관점을 변호하는 운동이 몇 년 동안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입장에 대해 성경의 확증을 찾은 후, 성경의 권위를 따를 것인지 아니면 교회의 전통을 따를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몇 년 뒤, 그는 세례를 다시 받았다는 이유로 아나뱁티스트들을 처형하면서 점화된 세례에 대한 관점을 바라봄에 있어 비슷한 위기를 겪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1531년, 그는 아나뱁티스트 입장이 맞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아나뱁티스트 운동에 가담하지 않았다. 아마도 당시에 이 운동이 점점 더 세상의 종말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가기 시작했고, 점차로 폭력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마침내 가톨릭교회를 떠난 것은 1536년에나 이르러서였다. 그는 비록 소행의 실수가 있기는 하지만 결국 자신들의 신념을 따라 고난과 죽음까지 받아들인 아나뱁티스트들의 용기를 따라 가톨릭을 떠나야 했다고 말하였다. 그는 세례를 받자마자 이내 네덜란드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아나뱁티스트의 중요한 리더가 되었다.

그는 뮨스터로부터 영광을 기대하다가 절망하게 된 여러 상처받은 심령들과 잘못 인도받은 아나뱁티스트들을 상대로 훈련받은 공동체를 이루도록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의 목에는 현상금이 걸려 항상 숨어 다녀야 했지만, 그는 말과 글로서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훈계하고, 설득하였다.

프로테스탄트들과 가톨릭에 의해 동일한 박해를 받으면서 그는 결국 1554년 홀스타인의 귀족의 영지에 은신처를 마련할 수 있었다. 말년에 그는 자신의 첫사랑이자 위대한 사랑인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글을 저술하고 출간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메노 시몬스는 위대한 학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저술들은 자신이 소유했던 믿음에 관해 분명하고 강한 어조로 기록되어 있다. 후브마이어와 마펙이 보다 훌륭한 신학자였지만 점도 없고 흠도 없는 교회를 위해 자신의 수고를 아끼지 않는 점에 있어서는 그 누구도 메노를 능가하지 못했다.

메노 시몬스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발자취를 따르며, 회개하고 위로부터 다시 태어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다. 이는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을 갖고, 그가 걸었던 길을 걸으며,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라야 한다. 누구든지 그보다 아버지, 어머니, 자녀, 혹은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합당치 않으며 그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1539년에 쓴 책 Foundation에서 그는 “나는 내 주께 공식적으로 고백합니다. 나는 그와 분리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만약 당신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았다면, 성령 안에서 믿음, 삶, 예배 등에 있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가 되지 못했다면, 여러분의 불쌍한 영혼들은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성경이 말하는 대로 가르치고 고백하는 것과 다른 모든 것은 당신을 속이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가 구원을 얻으려면 좁지만 올바른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 어떤 황제나, 왕이나, 제후나, 공작이나, 기사나, 귀족이나, 의사나, 목사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남자나, 여자나, 예외는 없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걸으셨던 길을 똑같이 걸어야 합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성령을 갖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대로 살지 않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함으로써 제자도는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대로 사는 삶으로 정의하였다.

또한 1540년에 제자도를 주제로 그가 지은 찬송이 있는데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이 세상에서 잠시 잔치를 누리기보다는.

바로의 창고에 있는 모든 것을 갖기 보다는.

나는 차라리 슬픈 상처를 선택하리라.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 고난을 선택하리라.

바로의 왕국은 영원하지 않으나,

그리스도의 왕국은 확실하고 영원하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팔로 자녀를 감싸 안으시며,

말씀으로 비판받는 성도들을 위로하시며,

신실한 자들을 보호하신다.

우리를 자유케 하시고

죄를 사하시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원수로부터 멸시를 받으셨으니

이제 원하면 당신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으리!

만약 당신이 불로 연단을 받는다면, 생명의 좁은 길로 들어가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며,

그가 하신 말씀을 굳게 붙들라.

만약 네가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으면,

사람들 앞에서 나의 말을 굳게 붙들면,

기쁨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다!

이상에서와 같이 아나뱁티스트 제자도는 그리스도를 따름과 십자가 및 고난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들에게 있어서 제자도는 보이지 않는 믿음을 보이도록 삶으로 드러내는 것이었고, 그러기 위해서 사랑과 복종(Gelassenheit)을 통해 그리스도를 매일 삶 속에서 따르는 삶을 살았다. ( 아놀드 스나이더, pp88-89)

4. 나가는 말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16세기에 아나뱁티스트 운동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운동과 아주 다른 점을 보인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제자도”라고 할 수 있다. 아나뱁티스트는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당연히 그의 길을 따라야 한다고 보았다. 그들은 제자도는 모든 영역에 걸쳐 요구되는 항목으로 이해하였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태어난 신자들이라면 하나님 나라의 기준을 따라 살아야 할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요청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성역이나 성속의 구분이 필요하다기 보다는 사회, 경제, 윤리적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의 모습은 당연히 서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들에게 교회의 경제정의 및 사회정의는 당연한 제자들의 삶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에도 아나뱁티스트들이 사회 운동에 관심이 많은 것은 그들이 사회운동을 일으켜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신앙과 삶이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드러난 모습일 뿐이다.

아나뱁티스트들에게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동,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활동 등은 모두 제자도와 연결되며 결혼 생활에 있어서도 제자도는 예외가 아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모든 것은 남녀 구분 없이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모두에게 요청되는 총체적인, 전인적인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보았다. (아놀드 스나이더, p232)

제자도에 있어서도 성령께서 남녀를 동일하게 부르셨으므로 동일하게 제자도를 요청하신다고 믿었다. 성령께서 부르실 때, 남자 여자 따로 구분해서 부르지 않으신다고 믿었다. Discipleship/Nachfolge (following after)는 결국 누군가의 뒤를 따르는 것 (335)이며 필그람 마르펙이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것처럼 사는 사람들이다.

이상의 내용으로 보아 “예수 따름”으로 요약 가능한 아나뱁티스트의 제자도는 결국 Christlikeness (예수처럼 되기)에 다름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처럼 되는 삶이어야 한다. 이것이 아나뱁티스트 제자도가 말하는 제자도다.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자라나는 것이 제자도다.

역사에 있어서 가정은 없다지만, 글을 마치면서 간디가 아나뱁티스트를 만났더라면 어떻게 말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해 나름의 상상력으로 답을 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만약 간디가 아나뱁티스트를 만났더라면…….., 아나뱁티스트들의 삶을 바라보며 뭐라고 했을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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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C. Norman Kraus, Discipleship and Grace? Brethren Life and Thought

아나뱁티스트 영성: 그 급진성의 생성과 소멸 그리고 희망에 대하여

박준형 (캐나다 메노나이트 교회 사역자, 작가)


본 글의 배경(Background)

2010년에 영국의 신종 아나뱁티스트이자 신학자인 스튜어트 머레이가 아나뱁티스트 신앙의 본질을 여과없이 밝히겠다며 쓴 책이 <발가벗은 혹은 발가벗겨진(naked) 아나뱁티스트>이다. 한국어로는 점잖게 하지만 단정적으로 <이것이 아나뱁티스트다>로 번역되어 2011년에 대장간에서 출간됐다. 그렇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말한다’는 이 책의 부제가 말해주듯이 머레이는 20세기 후반 하락을 면치 못하는 영국의 기독교계에서 아나뱁티스트에 대한 관심의 폭이 증가되는 현상을 접하면서, 그리고는 메노나이트 초기 기독교 역사학자인 알렌 크라이더의 직접적인 영향과 영국 런던의 아나뱁티스트 네트워크에서 처치 플랜터(church planter)로 일한 경험을 발판 삼아 아나뱁티스트의 급진적인 믿음의 본질들을 여과없이 소개했다. ‘여과없다’라는 것은 이 책의 제목 ‘네이키드(naked)’가 말해주듯이, 16세기 아나뱁티스트의 신앙적 가치들을 현대로 가져와 알몸 그대로 평가했다는 것이다. 그는 흔히 현대판 중산층 거주자(settler)/안정자가 되어버린 북미의 메노나이트들이 그러듯 과거의 정신적 유산에 대한 향수 어린 16세기 아나뱁티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속한 영국의 특수한 정황 속에서 영국의 기독교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과거 스위스/독일/네덜란드의 아나뱁티즘을 다시 불러내 현재의 상황에 맞게 재해석하는 공을 세웠다.

이 책은 나오면서부터 지대한 관심을 끌었다. 아나뱁티스트의 유산을 직접적으로 물려받은 토종/진골 아나뱁티스트 후손이 자신의 신앙 유산을 홍보하려고 쓴 게 아니라 영국인이며 자발적/후천적 아나뱁티스트가 그것도 또 현재 북미의 중산층 유럽계 백인 거주 문화를 고수하고 있는, 자신들이 대단한 아나뱁티즘의 상속자라 생각하고 있는 메노나이트들을 대상으로 썼다는 자체가 센세이셔날하고 신선했기 때문이다.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고 그 내용으로 들어가보더라도, 전통적인 아나뱁티스트/메노나이트 학자들이 쓴 책들과는 접근방법 자체가 달랐다. 대단히 객관적이려고 노력했다. 많은 이들의, 교단과 신앙의 부류에 상관없는 증언이 포함됐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에 머레이는 현대판 아나뱁티즘에 대해서 평가를 했다. 이 부분이 결국은 북미의 메노나이트들 사이에서 논란의 대상이 됐다. 그는 “이들의 율법적인 성향과 선택적인 성경의 활용 그리고 지나치게 지성화된 문제(머리만 너무 발달했다는 것), 마지막으로 이들의 침묵과 타성(제도화의 문제)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그래서인지 간단히 다뤘다. 하지만 이 일은 간단히 끝날 일이 아니었다.

덕분에 그는 더 유명해졌다. 여기저기 초청하는 곳이 더 많아졌다. 그래서 결국 이 책은 오늘 부로 5판까지 개정이 되었다는 것 아닌가?

내가 왜 이 얘기를 이렇게 길게 하나?

2011년 머레이의 책을 미국 인디애나에 있는 아나뱁티스트 메노나이트 신학대학원에서 처음 접하고는 여러 번 ‘아하’를 했다. 특히 그가 본 21세기 아나뱁티스트 메노나이트들의 문제점은 한결같이 옳았다. 지성화되고 제도화되고 타성에 젖고. 16세기 아나뱁티스트 전통에 대해서는 이미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으니 그리 새로울 것은 없었다. 그러면서 번쩍 드는 생각이, 머레이가 무엇이 아나뱁티스트인지에 대해서 썼다면 나는 이제는 ‘무엇이 아나뱁티스트의 영성인지(The Naked Anabaptist Spirituality)’에 대해서 쓰면 아나뱁티스트를 좀 더 폭 넓게 이해하는데 더 좋겠다라는 것. 바로 담당 지도교수이자 아나뱁티스트 신학자인 존 렘펠 선생에게 이 제안을 했다. 도와줄 수 있겠냐고. 그와 몇 번의 커뮤니케이션이 이어졌다.

그리고는 수년이 더 흘러 나는 신학교를 졸업했고 목회보다는 선교의 길로 들어서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축축한 초기 아나뱁티스트들의 영성 관련 문헌 찾기를 그만두고, 존 렘펠 선생과의 약속조차 기억에서 멀어져 갔다. 이게 지금으로부터 약 7-8년전의 이야기다.

그러는 사이 척박한 한국의 기독교 지형에 메노나이트 교회들의 연합이 생기고 여기저기 아나뱁티즘 혹은 아나뱁티스트에 관한 책들이 출간되고, 이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전국적으로 생겨났다. 드디어 한국의 아나뱁티스트 센터(KAC)가 올해로 20주년을 맞는다고 하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다시 머레이가 그의 책 <’발가벗겨진’ 아나뱁티스트>, 아니 <이것이 아나뱁티스트다>를 쓴 배경에 눈이 간다. 영국 기독교의 급속한 세속화와 퇴보 속에 하나의 희망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16세기 아나뱁티즘. 그 급진적인 믿음. 그 신앙의 본질. 어쩌면 머레이가 당시 20세기 말 이 책을 쓸 때의 배경과 지금 21세기 초 한국 땅의 기독교 상황은 많은 면에서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특히 그 기독교의 생명이 다했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이런 절체절명의 시기에, 한국 기독교의 쇠락과 한국 아나뱁티스트 센터의 20주년 기념의 교차 시기에 ‘아나뱁티스트의 영성과 그 전망과 진단’에 대해서 글을 써 달라고 부탁을 받은 것은 운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결국은 글을 이처럼 쓰게 됐으니 우선은 존 렘펠 선생과의 약속을 지키는 셈이 되고, 이 글을 쓰도록 요청해 주신 김복기 형제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나의 과거를 어떻게 알고 이런 주제로 글 청탁을 한단 말인가? 이렇게 모든 것이, 모든 자들의 협력을 통해 하나의 선을 이루게 되는가 보다. 아니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한 말은, 그게 뭐라도, 반드시 책임질 날이 온다는 예정설인가?

본 글의 한계 고백(Disclaimer)

스튜어트 머레이는 영국의 아나뱁티스트 네트워크를 통해 많은 교단 또는 종파에 상관없이 많은 부류의 사람을 만났고 그런 경험에 근거해 아나뱁티스트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썼다. 우선 나는 그에 비해 경험이 적다. 나는 목사도 아니고 그처럼 신학 박사도 아니다. 캐나다 임마누엘 메노나이트 교회의 ‘평’신도이자 계절별 설교자이고(일년에 한 4번쯤), 교회와 교단의 여러 위원회를 전전하며 지식과 관점을 팔고 있는 한 명의 ‘지적’ 봉사자에 불과하다. 원래 화공과 전공자가 미국에서 대학원을 2군데 다녔다는 것 정도가 학력으로서는 전부다. 기업에서 ‘문화관계’를 가르쳤고 다양한 책들을 써왔으며 뒤늦게 미국 인디애나의 아나뱁티스트 메노나이트 성경대학원에 들어가 M.Div.를 했다.

머레이와 굳이 공통점을 찾자면, 그와 나의 스승이 같다는 것이다. 알렌 크라이더. 초기 기독교역사학자인 그에게 첫 수업을 받게 되면서 나는 그의 제자가 되기로 작정을 했고, 2017년 그가 인디애나 고센에서 이생의 삶을 마칠 때까지 기도의 친구가 되었다. 머레이는 그가 속한 런던 아나뱁티스트 네트워크의 창립자 중의 한 명인 알렌 크라이더와의 직접적인 교류를 통해 그의 정신을 물려받았다. 그런 결과는 기독교의 역사를, 그 부흥과 쇠락의 경계를 4세기초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에 의해서 세워진 크리스텐덤(기독교의 국가화)을 전후해 보게 된 것이고, 국가와 정치와 종교가 ‘짬뽕’이 되어 죽도 밥도 안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게 됐다는 것이다(교회의 대형화도 같은 맥락으로 본다—이 점에서는 장로교 전통의 유진 피터슨도 맥락을 같이한다. 아, 그는 교회가 커지는 것을 얼마나 싫어했던가, 우리들의 목사!)

한 가지 앞으로 전개하는 나의 글이 머레이와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은, 이 글의 독자를 굳이 학자층으로 삼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로 지루한 인용문이나 인명으로 초기 아나뱁티즘에 대해서 생경한 독자들의 기를 죽이지 않을 것이고(메노 사이몬즈와 필그람 말펙의 신학적 차이가 뭔지 굳이 설명하지 않을 것이다), 소위 아나뱁티즘을 안다는 자, 조롱하는 자들과 지적인 경쟁을 벌이지도 않을 것이다(누가 정통인지 싸울 맘이 없다—아, 나는 정녕 비폭력/비저항주의자인가?).

즉 이 글은 실용적이고 실질적인 판단에 근거해 전개해 볼 것이다. 관점은 북미를 근거로 한 21세기 한국계 메노나이트가 보는 아나뱁티즘의 과거와 오늘과 미래다. 근본적으로 16세기 아나뱁티스트와 더 가까운 후터라이트와 브루더호프에 대해서는 단 하루도 그 공동체에 들어가 살아 보지 않았으니 뭐라 딱히 할말이 없고(있어도 참아야 하고), 나의 관점은 내가 지난 17년간 경험해 온 4개의 북미 도시 외곽형 메노나이트 교회(메노나이트 교회와 다운타운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의 물리적인 범위와 기억의 한계를 넘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이 글의 ‘본’의도를 밝히는 게 독자의 오해를 줄이는데 도움이 되겠다. 이 글은 아나뱁티즘을 홍보하려는 게 아니다. 한국 기독교의 처절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어떤 대안/대승적인 차원에서 아나뱁티즘, 그것의 영성의 고갱이에 대해서 소개하려는 게 아니다.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내가 경험한—공부만이 아니라—메노나이트 교회 그리고 그 메노나이트 교회 안에서 알게 되고 배우고 깨닫고 실망도 한 아나뱁티즘의 실체에 대해 밝혀 보는 것이다.

이러는 것은, 앞으로 아나뱁티즘에 대해서 알게 되고 배우게 되고 한국 상황에 적용하려는 사람들이 너무 이상적으로 아나뱁티즘을 보고 따라하다 실족하지 않게 함이다. 모르는 자에게는 진실, 그 빛과 어둠을 둘 다 알게 하는 것은 글 쓰는 자의 윤리라고 생각한다. 글 쓰는 자는 선동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바라기는, 이 글을 통해, 이 글을 읽고도 여전히 아나뱁티즘에 대해서 알기를 원하고 아나뱁티스트가 되기를 작정한다면, 본인이 처한 특수 상황에서 그 상황에 맞는 제3의 아나뱁티즘, 제3의 아나뱁스트적인 믿음과 영성을, 하지만 반드시 공동체와 함께 창출해 내기를 바란다. 지독한 현실의 바탕 위에서 세워진 신앙이 굳건 하듯이 아무리 16세기 아나뱁티즘이 이상적이고, 아무리 21세기 북미의 메노나이트 교회관이 공동체답다 하더라도 한국의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그대로 수입해 적용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16세기 아나뱁티스트들에게 붙여진 거룩한 ‘레디칼(Radical)’ 즉 ‘급진주의자’라는 이름에 먹칠하는 행위다. 급진성이 창의성과 미래지향성과 맞물려 있듯이 21세기 한국의 상황에서 읽히고 적용되는 아나뱁티즘, 아나뱁티스트 영성 역시 철저한 제고와 비판과 의심과 성찰의 영성 위에서 새롭게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이게 전통 아나뱁티스즘에 대한 가장 고결한 보상이고 진보다. 자, 말이 길었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 보자! 과연 뭐가 진실인지 파 헤쳐보자!

아나뱁티스트 영성의 시작: 그 급진성(Radicality)에 대해!

16세기 아나뱁티스트들의 출현과 그들의 활동에 대해 ‘운동(movement)’이라고 말 붙이는 것은 후세의 노력이다. 스위스에서 16세기초 기존 가톨릭 교리—유아세례—에 대항해 생긴 것이 아나뱁티스트(Ana-Baptist), 말 그대로 성인이 되어 자기의 의지로 ‘다시 세례를 받는 자’이다. 한국에서는 ‘재’세례, 거기다가 ‘파’까지 갖다 붙여, 어느 동네의 마피아나 이단 부류같은 발음하기에도 불편한 이름이 되어버렸다. 이러기는 여전히 루터나 칼빈의 영향이 지배적인 한국 기독교의 낯설고 소수인 기독교 형제 종파에 대한 폄하나 조롱의 표현이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이 둘은 지긋지긋하게도 아나뱁티스트의 출현이나 그들의 발달과 확장에 대해서 과민하게 반응하지 않았었던가?

아나뱁티스트들은 아주 단순한 동기에서 시작한 하나의 작은 그룹, ‘섹트(sect)’에 불과했다. 그후 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들을 ‘섹테리안(sectarian)’이라고 부르니 그들의 소규모 그룹-마이너러티-지향의 성격은 변하지 않았다고 보는게 맞다. 이들의 동기란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아주 단순하다. 가톨릭 교회에서의 유아 세례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초창기 그들의 리더격이었던 쯔빙글리는 종교 개혁의 필요성은 인정했으나 굳이 가톨릭의 교리까지 건드려 미운 털 박히기는 싫었다. 스위스가 아닌 독일 동네의 루터도 이와 같은 지향이었다. 이들은 끝까지 유아세례를 인정했다.

양쪽의 지향 근거는 다음과 같다.

아나뱁티스트: “왜 성경에 쓰여있지도 않았는데 유아에게 세례를 베푸는 거야? 유아세례는 성경적이기보다는 통치적, 정치적 논리로 교회에 의해서 인용되고 활용되고 있는 것 아닌가? 더 깊게 들어가보면, 사회를 종교의 영향권 아래 놓기 위한 장치로, 4세기 콘스탄티누스가 이룩한 크리스텐덤의 연속성 아닌가? 사회나 국가의 기독교화?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본인의 의지하고는 상관없이 기독교인이 되어버리는 것이 과연 기독교적인가?”

쯔빙글리와 루터와 칼빈: “성경에 유아세례 주지 말라고 쓰여 있어? 꼭 성경에 쓰여 있는 여부로만 기독교를 알면 안 돼! 사람이 태어났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님의 섭리, 즉 하나님에게 근본적으로 속해 있는 거야. 본인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아. 세례도 마찬가지야. 세례는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길’이지 거듭난 자들만 들어가는 좁은 문이 아니야.” [사족: 이건 그럴듯한 신학적인 견지이고 더 깊게 이들은 교회와 국가론 역시 상호-보충-호환-협력의 기조 아래(‘국가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속해 있다.’) 개혁은 필요하되 굳이 기존의 교회와 국가 체제까지 흔들 필요는 없고 개혁의 실효성을 고려해 기존 권력세력과의 연합을 도모하겠다고 작정하게 된다.]

결국 이 두 그룹, 순진하고 성경 문자적인 그래서 타협주의자들의 눈에는 과격하고 급진적으로 비춰지는 아나뱁티스트들과 개혁의 성공을 위해서는 기존 세력과 타협과 합의도 마다하지 않는 온건하고 타협적인 개혁주의자들은 화해하지 못하고 자기의 길을 각각 가기로 결정한다. 이 성경 한 구절의 차이로 인해 이 초기의 개혁 그룹들은 각자도생 혹은 연횡을 하게 되는데, 특히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고, 신학적인 배경이 (상대적으로) 일천하고, 그리고 기존의 교회 제도권과 국가정치세력으로부터의 분리까지 한꺼번에 도매급으로 선포해버린 이 소수의 개혁자들에게 새로운 이름이, 그것도 조롱이 함께 어우러진 이름이 상대편들에 의해 붙여지는데 그게 바로 ‘레디칼들(the Radicals), 즉 급진주의자들’이다.

동시대 개혁자 리더 중의 한 명인 라인리히 불링거는 이들을 “악마와 같은 적들이고 하나님의 교회의 파괴자(destroyers of the church of God)”라고 했고, 루터는 창의적으로 “슈베르머(Schwaermer)” 즉 벌집 주위를 왕왕 소리 내며 몰려드는 벌이나 나방 떼와 같다고 했고, 칼빈은 더 과격하게 ‘광신자(fanatics) 혹은 미친 개들(mad dogs)’이라고 불렀다(미친 개는 때려잡아도 되니까). 이들의 눈에 아나뱁티스트들은 기존 교회를 파괴하는 악마 수준의 과격주의자, 급진주의자였다. (이 점은 가톨릭과 궤를 같이 한다. 그리고 이들 모두 여기저기 나방 떼, 벌 떼처럼 불어나는 아나뱁티스트들을 잡아 쳐 죽이는 경쟁을 시작한다. 이런 교회가 주축이 되는 폭력의 허용에 대해서는 4세기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이 컸다. ‘교회=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놈은 다 잡아 죽여도 돼!’가 이 자의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법과 정의였다. 이런 폭력 정당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곧 세상 법도 의미가 없어진다. 아나뱁티스트와 같이 지독하게 성경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폭력의 사용과 국가에 대한 복종에 대해서 거부감을 표현하는 사람에게는, 법 제도에 호소할 필요없이 교회가 알아서 잡아서 맘대로 처형할 수 있도록 제도적인 기반이 만들어진다. 순진한 레디칼들을 잡아 죽이기 위한 ‘손에 칼을 든’ 강도 같은 레디칼들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다.

레디칼이란 말이 도대체 뭐 길래? 이 말은 원래 라틴어의 ‘라딕스(radix)’, ‘뿌리’라는 말에서 유래됐다. 결코 부정적인 표현이 아니다. 뿌리는 근본을 상징한다. 즉 온건하다고 평을 받는 쯔빙글리나 루터의 관점에서 아나뱁티스트들은 (급하며 비타협적인) 근본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성경의 문자에 천착하며 예수의 제자로서 국가와 교회를 분리하려고 한다. 그래서 한국어의 표현대로 이들은 급하게(急) 앞으로 나아가는(進), 마치 뭔 가에 홀린 급진주의자들이 된다.

급진주의자라는 한국어적 표현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왜냐하면 이 말이 정치적인 상황과 연계되어 오역/오용되기 때문이다. 일전 어느 한국 신학자가 나의 선생인 알렌 크라이더를 ‘좌파’라고 불러 사과를 받아낸 일이 있다. 이 말을 들으면 크라이더 교수는 아마 무덤에서도 기분 나빠할 것이다. 이미 말했지만 레디칼은 앞으로 나아간다는 급진성보다는 오히려 뒤로(성경과 초대교회적인 삶으로) 돌아간다는 환원적인 근본성의 의미가 더 크다. 아는가? 당시 루터는 아나뱁티스들을 ‘우익’에 올리고 가톨릭을 ‘좌익’에 할애했다는 것을. 맞는 말이다. 신앙 안에서 좌우의 차이는 오직 성경에 대한 수용의 범위로만 가늠할 수 있다.

18세기가 되면서 이런 근본주의적인 레디칼의 의미가 사회주의적 혁명을 도모하는 급진주의의 의미로 탈바꿈되어 정치의 영역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반공 이데올로기에 천착해온 한국의 기독교 역시 급진주의자나 급진성이라는 말만 들어도 마치 자유민주주의에 반하는 전투적이고 불온한 의미로 거부하기 시작했다. 즉 가장 성경적으로 ‘근본적인(radical)’ 아나뱁티즘을 사회주의적 가치지향으로 폄하해 버린 것이다. 이들의 판단대로라면, 누가복음이 말한 예수야 말로 가장 급진적인 사회주의자가 된다.

다시 레디칼, 급진으로!

이 말의 시작은 ‘응급성 혹은 긴박성(immediacy)’에 있다. 이건 두말할 나위 없이 변화, 혁명, 의식의 전환의 시작을 말한다. ‘이 세상에서 변화를 환영하는 사람은 오줌 싼 아이 밖에 없다’는 말이 있다. 위급하고 긴박해야 변화를 원하게 된다. 혁명에 단계가 필요한가? 온건하고 절차적인 혁명이라는 말 자체가 난센스다. 혁명은 그야말로 기존의 것을 갈아엎는 전복적인 행위다. 이미 잘못되고 부패한 것으로부터의 결별하는 데는 오직 단순하고 즉각적인 결심과 돌아서서 왔던 곳이 아닌 새로운 방향으로 전진하는(進) 용기만이 필요하다. 이게 ‘회심(conversion)’의 의미이고, 이게 16세기 아나뱁티즘의 시작이었다. 결과에 상관없고 그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모르나, 오직 말씀에 충성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조금도 주저함 없이 나아가는 것, 그 급진의 영성!

16세기 아나뱁티스트들은 초기 개혁자인 쯔빙글리와의 한번의 만남과 한번의 성경적인 깨달음을 가볍게 치부하지 않았다. 이건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난 것만큼이나 단순하지만 위대한 사건이 되었다. 자신들의 깨우친 신념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내놓았다. 그렇게 죽어 나간 순교자들이 16세기가 지나기도 전에 독일과 네덜란드에서만 2천5백 명 가량 된다. (후에 틸레만 잔쯔와 브락트가 기록한 ‘순교자들의 거울’에는 803명의 초기 아나뱁티스트 순교자들의 증언이 포함된다.) 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삶이 지극히 경건하다는 이유만으로, 무기를 소지하지 않고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거짓 맹세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재세례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교회와 국가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혀가 뽑히는 고문을 당했고(말하면 안 돼!) 수장을 당했고(이게 진짜 재세례야!) 화형(가장 극적으로 죽여야 돼!)에 처해졌다. 그 누구도 그들의 편은 없었다. 이들은 꼭 그래야만, 그렇게 급하게 혼자서 나아가야만 했을까? 예수님의 고난(Bitter Christ)을 본받아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이들의 신앙적 급진성의 근원은 무엇인가? 과연 이들의 이런 급진적인 믿음은 오늘날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이제부터는 아나뱁티스트 영성의 고갱이인 이런 급진성이 어떻게 지난 약 5백년 동안 아나뱁티스트 믿음을 형성해 왔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1525년 1월 스위스 취리히에서 쯔빙글리의 몇몇 제자들이 따로 모여 시의 명령에 대항해서 ‘재세례’를 베풀면서 시작된 아나뱁티스트들의 신앙적 혁명, 그 급진적인 믿음이 어떤 모습으로 21세기의 우리들에게 전해졌고 현재까지 남아 있고 변해왔는지 한발 더 전진해 보자.

아나뱁티스트 영성의 초기 흐름

초기 아나뱁티즘의 영성을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지금이라고 다를까?). 지역이 다양했고(스위스와 남부 독일/오스트리아와 네덜란드와 모라비아(지금의 체코 지역), 리더들의 성향/개성/신학적 수준도 다양했다. 대단히 성경적인 근거로 아나뱁티즘 즉 재세례의 관습이 생겨났으나 요즘 표현대로 초기 아나뱁티스들은 신앙의 모든 권위를 성경에만 두는 문자주의자들은 아니었다. 이들은 성령에 대한 이해, 성령 의존도도 컸다. 성령으로 인해 그들은 누구나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들이 추구한 공동체의 모델 역시 사도행전 2장에서 그 원형을 발견했다. 그래서 지난 천년 이상 가톨릭 교회에서 유지되어온 사제주의를 버리고 자발적이고 회중중심적인 모임과 운동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었다. 이러한 성령중심적인 그래서 위계 중심의 교회구성에서 자유로운 성격 때문에 초기 아나뱁티즘은 주로 평민과 장인 계층에서 더 성장하고 부흥할 수 있었다.

남부 독일이나 스위스를 배경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아나뱁티즘은 그들의 리더격인 한스 후트와 레온하르트 쉬머와 한스 슐라퍼와 한스 댕크의 영향으로 대단히 성령중심적이고 경건함을 지향하는 신비주의적인 신앙관을 갖게 되었다. 이중 가톨릭 프란치스코 사제였다가 아나뱁티스트로 개종한(1527년 재세례) 오스트리아의 레온하르트 쉬머의 ‘세번의 은혜(그는 은혜를 빛이라는 메타포를 사용해 하나님의 말씀과 십자가(예수)와 성령의 약속으로서의 기쁨을 설명한다.)’와 ‘세번의 침례(성령, 물, 피(순교))’는 성령주의에 바탕을 둔 영적 보고로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이 지역 출신(스위스 티롤)들의 일부, 존 후터와 피터 발포트 등이 독일 동부 현 체코의 모라비아 지방으로 이주해가면서 더욱 더 오순절 사건에 입각한 성령의 공동체를 세우게 되는데 그게 오늘날까지 현존하는 후터라이트이다.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체 안에서 다 함께 공유하는 이 공동체의 영성의 근간에는 대단히 영적인 ‘자기포기/순종(yield-ness)’의 정신이 담겨 있다. 상호신뢰/책임/포기 없이 공동체가 세워지고 유지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들은 향후 500년 동안 이런 영적인 근간을 손상하지 않고 계승발전하게 되고, 이런 정신에 감화된 독일의 에버하르트 아놀드에 의해 20세기 초 브루더호프(형제들의 집)’라는 이름의 새로운 공동체 운동이 시작된다.

이와는 정반대의 지역, 북서부의 네덜란드에서는 성령보다는 성경으로의 무게 중심이 활발해졌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다양한 영적 흐름을 보였던 초기 아나뱁티즘이 성경으로, 성경의 문자로 무게중심이 본격적으로 이동하게 되는 사건이 터진 것이 바로 독일 서북부에서 일어난 뮌스터 사건(1534-35)이다. 이 사건의 주인공인 멜키오르 호프만은 초기 스위스 지역의 아나뱁티스트 성령주의자 한스 댕크로부터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도시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침례를 받고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스스로에게 권위를 부여해 다른 사람들에게 아나뱁티스트 신앙을 가르치고 침례를 줬다.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2의 엘리야라고까지 불리게 됐다. 그의 카리스마적인 영성에 많은 사람들이 몰리고 자신의 종말론적 세계관이 당시 북서부 독일의 사회정치적인 맥락과 연결되면서 당초 그의 평화주의적인 아나뱁티즘이 이 땅에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극단의 환상으로 발전한다. 드디어 폭력의 사용까지 허용되면서 교회와 도시를 약탈하고 사유재산을 몰수하며 뮌스터라는 동네에 멜키오르의 천년왕국이 건설된다. 이 왕국은 그런데 얼마 못 가, 약 18개월의 환상 후 가톨릭 교회와 신성로마제국의 군대에 의해 몰살되고, 소위 지도자라 불리는 3인방의 시체는 성 람베르티 교회의 첨탑 철창에 전시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 사건은 초기 아나뱁티즘의 형성에 대단한 기여(?)를 하게 된다. 물리적으로는 가톨릭과 다른 종교개혁자들에게는 이들을 합법적으로 그것도 대량으로 제거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이 되었지만 아나뱁티스트 안에서는 성령주의의 극단화와 폭력의 사용에 대한 경각심이 커지게 됐다. 한때 멜키오르의 신학에 감동받기도 했던 네덜란드의 가톨릭 수사 메노 시몬즈는 이 사건을 계기로 아나뱁티스트 운동의 중심무대로 들어오게 되는데 그가 강조하기 시작한 것은 철저한 성경적인 삶이다. 앞으로 메노 시몬즈의 영향권 안에 있는 모든 아나뱁티스트 운동은 철저히 성경 중심의 삶, 비폭력의 삶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오해하지 말 것은, 성경중심적인 것과 성경문자주의적인 것과는 다른 차원이라는 것이다. 초기 아나뱁티스트든 오늘날의 메노나이트든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고 해석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 어떻게 보면 같은 아나뱁티스트 리더 중 가장 고리타분한 성경주의자라고 라벨이 붙는 메노 시몬즈의 성경관 역시 문자에 천착하는 교리 중심의 삶보다는 철저한 복음주의적이고 실질적인 삶에 그 방점을 둔다. 그가 말한 ‘진실한 복음적 믿음(True evangelical faith)’은 전통이건 신종이건 모든 아나뱁티스트에게 여전히 읽히는 아나뱁티스트 신앙의 고전으로 통한다. 간단히 소개하면 이렇다.

“진실한 복음주의적 믿음은 결코 잠잠한 것이 아니며 모든 종류의 의와 사랑의 열매 안에서 퍼져 나간다. 그것은 피와 육에 죽고, 그것은 모든 탐욕과 금지된 욕망을 파괴하며, 그것은 영혼의 가장 깊숙한 데에서 하나님을 찾고 봉사하고 두려워한다. 그것은 벌거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고, 배고픈 자의 배를 채우고, 슬퍼하는 자를 위로하고, 잘 곳이 없는 자에게 거처를 제공하고, 슬픔에 젖은 자를 위로하고 돕는다. 그것은 해악을 끼치는 사람에게 선을 베풀고, 도우며, 그것은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권면하고 판단하고, 그것은 길을 잃어버린 자를 찾으며, 그것은 상처 난 곳을 감싼다. 그것은 아픈 자를 낫게 하고, 그것은 강함을 보존하고,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된다(it becomes all things to all people). 주님의 진실을 위해서 받는 핍박과 고난과 슬픔은 영광스러운 기쁨과 위로가 된다.”

흔히 그렇듯 성령주의의 영향이 크면 클수록 외부로 드러나는 의식적 행위/외식—세례나 교회출석이나 성만찬 등과 멀어지게 된다. 즉 반사회적, 반교회적인 성향이 강화되기 쉽다. 아나뱁티즘 역시 메노 시몬즈의 시대로 들어오면서 네덜란드로부터 시작해 더욱 더 신학적, 교리적으로 안정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교회성(ecclesiology)을 세우고 유지하기 유리한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이런 성령주의적 신앙관에서 멀어지게 되고 이들의 자취도, 영향도 미미해지기 시작한다.

초기 아나뱁티스트 지도자들 안에서는 ‘성령(Spirit)과 말씀(Letter)’의 권위에 대한 논쟁이 대단히 뜨거웠다. 당시 타 도시에 비해 종교의 자유가 상대적으로 느슨했던 스트라스부르그를 배경으로 한 실용적 성경주의자 필그람 말펙과 경건주의자이며 성령주의자인 카스펜 슈뱅크펠트의 논쟁이 그중 특히 유명하다. 말펙은 성령주의를 가장 반대한 초기 아나뱁티스트 리더 중의 한 명으로 1528-32년까지 약 4년에 걸쳐 많은 성령주의자들을 만나 대단히 광범위한 논쟁을 펼쳤다. 이런 초기 아나뱁티즘 안에서 성령주의는 그 성격이 더욱 급진적으로 바뀌어 성령의 직접적인 감화를 제외한 성경의 말씀조차도 잉여의 계시로 여기게 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아나뱁티스트 (영성)안에서 성령과 성경의 분명한 분리 현상은 1540년쯤으로 보는게 일반적인 주장이다. 뮌스터 사건이 완전히 종결된 이후 약 5년 후다.

존 하워드 요더의 연구에 의하면 독일 남부/스위스에서는 이러한 성령과 성경의 분리 현상은 1530년보다 먼저 일어났다고 한다. 이 근본적인 이유를 설명하는 데는 독일 남부/오스트리아 지역 아나뱁티스트 성령주의(‘교회는 성경보다 성령이 중심’)의 원조격인 토마스 뮌처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민중을 위한 농민전쟁(1524-1525)를 이끌다 실패하고 본인마저 처형당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당시 그에게 영향을 받았던 다른 아나뱁티스트 리더들(한스 댕크, 한스 후트 등) 역시 편향되고 종말론 중심의 성령주의 관점(선민적 천년왕국설)에서 한발 물러나 아나뱁티즘의 본연의 바운더리(교회와 사회/국가/정치의 분리와 비폭력 그리고 성경)안에서의 온건한 성령주의로 전향하게 된다. 이렇게 되는 외부적인 이유로는 이 농민전쟁의 실패로 루터가 이끌고 그를 지지하는 세력들의 탄압이 더 노골화됨으로 이런 외부 핍박에 대한 자기방어/자기조정의 기능으로서도 성령주의적인 관점에서 한발 물러나게 되었다고 보는게 맞다.

21세기 들어 토마스 뮌처의 혁명적인 신앙관이 재조명되면서 한때 그가 추종했던 동시대의 종교개혁자 루터와 비교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다음은 최근 한국의 <가톨릭프레스(2016-5-27, 조영규)>에 기고된 글의 내용이다.

“500년 전 토마스 뮌처가 왜 가톨릭교회에 반기를 들고 실상은 같은 흐름이었던 소위 교회개혁자 루터에게 등을 돌렸는지 되새겨보아야 한다. 루터는 농민들의 피폐한 삶에 동참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활로를 찾기 위해 세상과의 어설픈 타협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이다. 뮌처는 그의 사망 500주년을 기점으로 재평가 되어야 하며 21세기 ‘혁명의 신학자’로 복권되어야 한다.”

21세기의 루터교/루터 추종자 그룹에서는 뮌처를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하다. 아마 여전히 그는, 종말론적 환상에 사로잡힌 예언자로, 사회적 불만을 이용하여 자신의 환상을 현실로 바꾸어 놓으려고 시도한 이단적 좌파의 수장 정도이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루터에게) 죽어도 싸다, 정도? (‘신학적인 견지가 다르다고 폭력을 사용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그렇다라고 말한다면 여러분 역시 500년전의 루터주의자에 가깝다. 아나뱁티스트는 초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어떤 이유로든, 그것이 개종/선교의 문제라도, 강제나 폭력이 동원되는 것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반대해 왔다.)

21세기 오늘 시점에서 앞으로 전개될 아나뱁티즘의 영성의 본질 재고 및 전망 역시 위 메노 시몬즈의 영향을 받은 성경과 공동체 중심적이고 비폭력지향의 메노나이트 영성을 근간으로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밝힌다. 아마 여전히 세상과 분리해 공동체적인 삶을 유지하고 있는 후터라이트나 브루더호프 그리고 전자의 두 그룹에 비해 사유재산과 신자간 어느 정도의 사적 공간을 허락하고 있는 아미쉬의 입장에서는 또 다른 관점과 다른 질의 아나뱁티즘을 지향하고 아울러 내가 속한 세상 한 가운데 나와있는 메노나이트 교회를 평가할 것이다.

아나뱁티스트 영성의 원천

한 교단이나 교회, 아니 개인이라고 쳐도, 그 영성을 무엇으로 평가할 것인가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할 것이다. 영성이 신학적인 사유의 결과인가 아니면 삶의 증거인가? 아나뱁티즘은 아우구스티누스부터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는 루터식 신학적 재정립의 결과가 아니다. 초기 아나뱁티스트들은 물론 루터와 같이 기존 가톨릭 교회의 교리와 통치 논리에 대한 개혁의 필요성은 공감했으나 루터식 이신칭의나 이신득의의 신학적 관점을 다시 세우고 설파하는데 노력하지 않았고 이런 관점을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도 않았다(현재도 그렇다).

초기 아나뱁티즘이 알려지고 확대되면서 기존 교회(국가교회)의 지도자들/신학자들과 많은 논쟁이 있어왔지만 아나뱁티스트들의 신학적인 설득력은 늘 기존 교회, 기존 신학자들의 논리처럼 정교하지 않았다. 당장 (재)세례라는 것만 봐도 그렇다. 루터나 칼빈 그리고 그들의 후손들은 여전히 이것을 인정하고 신학적으로도 문제가 없다고 본다. ‘하나님의 신학’을 크게 보는 것이다. 이들의 관점이라면 아나뱁티즘적인 재세례의 개념은 더 편협하고 인본주의적이다.

초기 아나뱁티스트들의 관점은, 신학적인 논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게 아니라 그래서 신학적인 완전성으로 호소하는 게 아니라, 오직 예수와 예수의 말씀 그리고 그 예수를 따르는 고난에의 동참, 즉 ‘예수 따름(Nachfolge)’에 더 비중이 많았다. 이들의 믿음은 십자가의 예수를 본받아(고난의 예수) 오직 삶으로만 증거(고난과 순교)되어야 하기에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외친 루터의 추종자들과는 질적으로 대비됐다. 그들의 삶의 변화와 그 증거의 효력은 대단해 같은 편이든 반대 편이든 목격자들을 놀라게 했다.

“재세례신자들이 급속히 늘어나고 있는 것을 볼 때 그들의 가르침이 곧 이 나라를 뒤덮을 것 같다. 그들은 아주 빠르게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하나님을 향한 열정에 가득 찬 수 천명의 사람들에게 (재)세례를 주었다. 이들은 아주 신실한 사람들이다……비록 이런 두려움이 정당화될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있지만, 그들의 숫자는 너무나 빠르게 일어나고 있고, 온 세상은 그들에 의해 동요가 일어날까봐 두려워하고 있다.”

이 말은 아나뱁티스트들의 자평이 아니다. 도리어 그 반대편에 섰던 취리히의 제바스티안 프랑크의 말이다. 당시 쯔빙글리 계승자 하인리히 불링거 역시 사람들이 아나뱁티스트들의 성인과 같은 삶에 매혹되어 전도되는 것을 가장 경계했다. 물론 그것에 대한 그의 대응은 무자비한 폭력의 사용이었다.

반면 교리적 완전성(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예수 등 ‘오직’ 신학—여기에 ‘오직 삶’은 없다.)에 무게를 둔 쯔빙글리나 루터의 종교개혁은 말은 거창했지만 실제 사람들의 삶을 바꾸는 데에는 큰 도움이 안되었다. 실제 루터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사랑의 행위가 뒤따라야 한다고도 말했다. 그는 어찌 보면 대단히 균형 잡힌 신학자였다. 문제는 그의 말대로 사람들의 행위가 안 바뀌었다는 게 문제다. 루터는 스스로 이런 고백까지 하게 한다.
“그리스도인의 이름 하에 거의 불신자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는 현재의 우리는 아직도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 모임을 조직하지 못했다.” (해럴드 벤더의 <재세례 신앙의 비전> 중)

결국 쯔빙글리와 루터는 제도 교회에서 신약중심적 교회로 나아가지 못하고 기존의 체제를 인정함으로 다수 중심의 국가 교회를 지향하게 된다. 이후 500년이 지났지만 이들의 교리/전례 중심의 신앙이 예수 중심의 제자도로 그 포커스가 전향되었다는 소식은 아직까지 들리지 않는다(과연 이들은 전통주의자들인가?). 루터 역시 자신의 말년에 의식장애까지 겪으며 낙담과 실망에 찬 인생을 살았다는 것은 그가 시작한 종교개혁의 참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그의 개혁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따라서 아나뱁티즘의 영성에 대해서 알려면, 아나뱁티스트들의 이런 급진적인 삶의 다양한 면을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고 이들이 만들어 나가는, 하나님과 세상과 인간과의 관계를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이들에게 영성은 곧 ‘움직이는 관계’로만 해석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아나뱁티스트들의 관계적 영성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를 고민해 보자. 물론 가장 확실하고 직접적인 것은, 실제 이들을 만나 직접 그들의 이야기와 삶의 증거들을 대비해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기는 제한적이다. 내가 보고 겪은 아나뱁티스트 메노나이트들의 숫자와 연도가 상대적으로 일천하기 때문이다. 17년간 메노나이트 교회에 있었다는 것은, 이들의 (원조의) 관점으로는 여전히 ‘신입생’ 정도이고, 나에게 축적된 기억과 체험들도 제한적이고 국소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나뱁티스트들이 지난 500년 어떤 삶의 족적들을, 어떤 삶의 증거들을 보여왔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물론 답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신앙의 고백(Confession of Faith)’의 역사를 통해 살펴보는 아나뱁티스트의 관계적 영성

교인/교회의 삶은 고백으로 확증된다.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에 이르게 된다(롬 10:10)”는 것은 진리다. 삶으로 보여지는 게 우선인지 말에 의한 고백이 우선인지에 대한 신학적 논쟁은 여기서 무의미하다. 아나뱁티스트들 역시 그들이 삶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바 또는 구현된 삶을 신앙 고백의 형태로 남기고 계승해 왔다. 따라서 아나뱁티스트들의 영성의 흐름을 알려면, 이들이 초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어떤 신앙적 고백을 만들고 나눠왔는지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미리 알아둘 것은, 아나뱁티스트들은 고백이나 신조나 신경의 의존도가 타 교단에 비해 훨씬 적다는 것이다. 분명히 하자면, 이들은 하나의 고백-사도신경-에 올인하는 ‘신조고백교회(Creedal Church)’의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다. 이들은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그룹을 위해 만들어진 인간들의 고백을 문서화해서(신경神經의 형태로) 보편적으로 나누고 주입하는 행위 자체(교리화)에 거부반응을 보인다. 더 근본적으로 이들은 전통교회에서와 같이 신조나 고백을 성경의 권위와 동일하다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는다고 이단으로 규정하지도 않는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구체적인 이유가 있을 수 있는데 그중 첫번째는, 신경의 효과성에 대한 의심이다. 아나뱁티스트들은 기존 가톨릭 교회나 주류 종교개혁자들이 이끄는 국가교회의 시스템에서 사도신경이 의무적으로 암송되었지만(그리고 지금까지 여전히), 이런 행위가 신자들의 행위, 삶을 바꾸는 데에는 큰 구실을 하지 못했다고 믿는다. 즉 이건 하나의 교리적 요식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신경의 내용을 보더라도, 신자의 믿음의 강화에 목적이 있지 신자의 윤리적인 삶의 변화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는 신경의 교회정치적인 목적이다. 4세기 크리스텐덤 이후의 국가교회들은 신경의 강화를 통해 교회내 위계를 세웠고 신자와 비신자의 자격을 엄격하게 구분하게 시작했다. 그러면서 더 나아가 비신자에 대한 폭력까지도 허용하게 되는 신학적 발판을 제공하기도 했다. 5세기 아나타시우스에 의해 만들어진 아타나시우스 신경에는 온전하고 오염되지 않는 믿음을 제외하고 조금이라도 의심하는 믿음을 가진 자는 영원히 멸망한다는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 이야기는 이런 의심자/불결자들에 대한 물리적인 처단도 가능하다는 신학적 근거를 간접적으로 제공한다. 그리고 실제로 신경/신조교회들은 아우구스티누스를 기점으로 역사적으로 자신들과 신학적인 기조가 다를 경우 ‘하나님의 이름’으로 죄인들을 처분해 왔다. 아나뱁티스트들에 대한 루터나 칼빈 교회의 폭력은 이미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로 말미암아 아나뱁티스트들에게 신조나 신경은 교회의 폭력을 일상화하고 다름에 대한 불관용을 정당화하는 제국주의적이고 권위적이고 압제적인 수단으로 각인되어 왔다. 문제는 종교개혁이 500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루터/칼빈을 따르는 한국 교회는 이 사도신경을 절대화해 이 신경에 대한 완전하고 절대적인 믿음 여부로 참된 신앙과 거짓 신앙을 가리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셋째는 ‘예수따름’을 신앙의 근본이라고 생각하는 아나뱁스트들에게 신경은 불완전한 신학적 고백으로 평가된다. 즉 신경의 내용에는 예수의 탄생과 고난과 죽음 외에 그의 공생애에 대한 강조가 일절 없다는 것이다(이 이야기는 예수의 삶의 정수인 산상수훈 역시 추상적인/영적인 영역에 그칠 공산이 크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오늘날의 아나뱁티스트 메노나이트들은 오리지날 사도신경의 암송이 ‘굳이’ 필요하다고 여길 시 자체적으로 예수의 삶까지 포함한, 자체적으로 개정된 사도신경을 사용한다. 이게 과히 프로테스탄트적(도전적) 아닌가? 신성불가침의 신경조차 손을 댈 수 있다는 것!

그렇다고 해서 아나뱁티스트들이 기존의 신경이나 신조를 싸잡아 무시했다고 보면 안된다. 초기의 아나뱁티스트들은 사도신경을 많이 암송했고 이 내용을 근간으로 신학적 기초, 특히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학을 배우고 세워갔다. 종교개혁 당시 루터의 추종자들이 아나뱁티스트들을 잡아 신문할 때 신경의 믿음 여부를 묻는 경우들이 있었는데 이들 초기 순교자들은 신경의 내용에 대해서 거부하거나 부인하지 않았다. 도리어 루터측 추종자들이 아나뱁티스트들을 잡아 죽일 목적으로 이런 명목을 만들어 뒤집어씌우는 경우들이 있었다. (죽이기 위해서는 무슨 짓은 못하겠는가? 그리고 이런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고문 시 아나뱁티스트들의 혀까지 뽑는 잔인함을 과시한 것이다.)

하지만 아나뱁티스트들이 믿고 나누고 전승해 온 고백에는 한가지 분명한 차이(그걸 혁신이라고 하자!)가 두드러지는데 그것은 기존의 신경(삼위일체 하나님과 예수의 죽음과 부활) 외에 신자들의 삶에 대한 강조가 포함된다는 점이다. 그러니 아나뱁티스트 혹은 이들의 교회가 굳이 고백교회가 아니라고 해서 이들이 고백의 중요성조차 소홀히 한다고 보면 대단한 오해다. 이들만큼 시대와 장소와 경우에 따라 다양한 고백서를 나눠온 교회가 있으면 나와보라고 하라! 따라서 아나뱁티스트들은 화석화되고 고대의 신경을 더 포괄적이고 유연하게 그리고 더 현실에 맞게 발전시킨 자들로 보는게 합당한 평가일 것이다.

굳이 고백(confession)을 신조(creed)와 간략히 비교해 보자면, 고백은 더 포괄적이고(내용도 더 길다는 말이다), 지역적이고, 적용에 있어 유연하다. 즉 이 고백을 믿고 믿지 않는다는 여부로 성도를 교회 밖으로 몰아내고 이단의 죄명을 씌워 처단까지 하는 폭력은 결코 있을 수 없다. 폭력에 정당성을 주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1527년 스위스 슐라이트하임의 고백에서부터 시작해서 1995년 <메노나이트 관점에서의 신앙의 고백>이 나오기까지 아나뱁티스트들은 다양한 환경에서, 다양한 목적을 위해, 다양한 아나뱁티스트 그룹들에 의해서 고백서를 만들고 나눠왔다.

아나뱁티스트 신앙 고백의 역사는 1527년 스위스 슐라이트하임이라는 동네에서부터 시작한다. 이곳에 초기 스위스 아나뱁티스 그룹들이 모여 가톨릭 도미니칸 수도사였던 마이클 새틀러의 손을 빌려 고백서를 작성한다(그는 곧 처참하게 처형된다). 이 고백서에는 7개 항목이 포함되어 있다. 1) (재)세례/자발적 세례, 2) 출교(ban: 상호책임성), 3) 주의 만찬(재세례된 자만의 나눔), 4) 세상으로부터의 분리(순결주의), 5) 교회의 목자(목사의 권위), 6) 칼(비폭력성과 직업의 제한), 7) 맹세(세상 권력에 대한 불복종과 진리 수호)에 대한 선포. 내용은 대부분 신자의 윤리적인 삶을 다룬다. 후에 추론하기는, 당시 기존 교회와 시의 숨가쁜 압박과 처형의 위험 가운데 이 고백서가 쓰여졌기 때문에 사도신경의 내용에서와 같이 보편적인 신학의 근간 부분은 의도적으로 누락했다고 보았다. 이 슐라이트하임 고백서가 등장한 이후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각각의 특수한 상황을 감안한 다양하고 더욱 더 정교해진 고백서들이 등장한다.

초기 아나뱁티스트 리더 가운데 가장 신학적인 배경이 탁월한 자는 발트하저 후브마이어이다. 그는 스위스/오스트리아를 거쳐 특히 모라비아 지역을 중심으로 주로 활동했는데 그는 신자의 삶과 초신자의 교리문답에 관한 많은 소고와 사도신경의 전통에 의거한 자신의 신앙 고백서를 남기기도 했다. 그가 죽고(1528) 약 15년이 지난 뒤 본래 제화공이었다가 모라비아의 후터라이트 지도가가 된 피터 리더만이 감옥에서 쓴 후터라이트 신앙 고백서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약 500년에 걸쳐 후터라이트 공동체(그리고 후에 만들어진 부르더호프 포함)의 신앙적 유산으로 자리매김을 된다.

기독교 신앙의 12개 신조부터 시작하는 이 고백서는 아주 구체적으로 하다못해 신자의 옷차림까지 포함해 모든 것을 나누는 공동체 안에서의 신자의 행동과 삶의 자세까지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이 모든 고백의 내용들은 철저히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지만(총 2부로 되어있는 이 고백서 중 1부에만 최소한 1432번의 성서적 언급과 암시가 있다.)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와 적용을 경계한다. 피터 리더만은 다른 아나뱁티스트 리더, 한스 뎅크나 필그람 말펙과 같이 성경의 문자적 의미는 경직되고 기계적인 방식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무엇보다 이 고백서는 기존의 신경과 같이, 개인주의적 혹은 국가주의적 믿음의 확인과 강화에 목적을 둔 게 아니라 성령 중심의 공동체적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지침의 역할을 한다. 이중 ‘성도의 공동체’ 항목의 일부를 소개해 본다.

“사귐을 갖는다는 것은 이러한 교제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며, 각 사람이 다른 사람과 모든 것을 함께 나눕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버지께서는 자신을 위해서 아무것도 갖지 않으시며,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아들과 함께 나누십니다. 그리고 아들 또한 자신을 위하여 아무것도 갖지 않고,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아버지와 그리고 그와 함께 교제하는 모든 자들과 나누십니다.” (피터 리더만의 후터라이트 신앙고백서 가운데서)

리더만에게 공동체의 삶이란, 세상의 어느 그럴싸한 집단의 삶을 본받는 게 아니라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모형을 발견하는 통로로 인식된다. 그에게는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공동체의 삶은 동일체가 된다.

아나뱁티스트 메노나이트들의 신앙 고백서의 역사

현대 북미의 아나뱁티스트 메노나이트 영성에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역사적인 고백서로는 1625년 네덜란드 메노나이트 리더인 아드리안 코넬리우스에 의해 쓰여지고 1632년에 채택된 네덜란드 메노나이트들을 위한 도르트레히트 고백서가 있다. 스위스에서 최초 슐라이트하임 고백서가 나오고 약 백 년 후에 네덜란드에서 등장한 이 고백서에는 위 슐라이트하임 고백서를 근간으로 새로운 교리와 실질적인 지침들이 더 보강되었다. 하지만 과거의 고백서에 비해 눈에 띄는 변화는 후터라이트 고백서와 마찬가지로 신학적으로 더욱 더 정교해졌고 고백서의 권위도 한층 강화됐다는 점이다. 신학적인 골자로는 우주의 창조주로서의 하나님, 인간의 타락, 회복과 화해의 예수, 신약의 법, 회개의 중요성, 세족식, 세속 권위의 인정, 죄 지은 자와의 분리, 죽은 자의 부활 등이 포함된다.

이 도르트레히트 고백서의 정신을 계승해 그로부터 약 100년이 지난 후 1766년 또 다른 고백서가 나오는데 이는 네덜란드 메노나이트 교회의 목사인 코넬리우스 리스가 썼다고 해서 리스(Ris) 고백서라고 불린다. 이 고백서는 앞선 도르트레히트 고백서(길이 총 5000자)보다 더욱 길고 정교해져 약 17,000자가 사용된다. 내용 중 더욱 더 본래의 아나뱁티스트 정신으로의 복귀 경향이 돋보이는데 그것은 그동안 말도 많았던 (국가에 대한) 맹세나 서약에 관해 종지부를 찍었다는 것이다. “모든 경우의 맹세나 서약 그리고 군 복부를 금한다.” 그런데 과연 정부가 이런 일개 소수의 교단의 과격한 주장을 받아들일까?

18세기 초 들어 유럽의 아나뱁티스트들은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신앙적 고백을 실행하기 용이한, 소속된 정부의 관용이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와 종교적 분리/자유성을 인정해주는 미국의 펜실베니아와 버지니아로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고백서의 중심 무대도 자연적으로 북미로 옮겨진다. 그리고는 20세기 초가 되어서야 전통적인 메노나이트들(Old Mennonites) 그룹에서 과거 보수적인 도르트레히트 고백을 다시 재현해낸 ‘크리스찬의 기초들’이란 고백서가 나온다(1921). 재미있는 것은, 이 안에 신자들의 비밀서약이라든지 아니면 생명보험 같은 것도 들면 안된다고 나온다는 것이다. 세속과의 분리 성향은 여전히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이로부터 약 40년이 지난 1963년 지난 과거의 고백서들을 모두 아우르는 신학적으로도 구성이 아주 단단한 고백서가 등장한다. 이 고백서의 작성자는 이보다 약 20년 전에 나온 메노나이트 신학자 해롤드 S. 벤더가 쓴 아나뱁티즘에 관한 한 근세의 고전이 된 <재세례신앙의 비전>에 영향받은 그의 동료 J.C.웽어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메노나이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고백서의 내용 중에는 세족식, 거룩한 입맞춤(벧전 5:14), 안수, 술 담배의 금지, 결혼과 여성의 베일 착용 등이 포함되었다. 하지만 모든 내용이 다 전통적이지만은 않았다. 신자의 정부나 사회 참여의 면은 많이 진보되어 폭력이 수반되지 않는 직업이라면 허용된다고도 밝힌다. 하지만 고백서 안의 여성의 베일 착용의 문제는 곧 메노나이트들 사이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고 이 고백서의 활용도 역시 급속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 이후 1995년에 미국과 캐나다의 메노나이트 교회 총회에서 채택된 ‘메노나이트 관점에서의 신앙의 고백’이 가장 최근의 고백서이고,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지금까지의 고백서와 가장 다른 점은, 고백서의 제목에 ‘메노나이트의 관점에서’라는 표현을 삽입한 것인데 이는 앞으로 메노나이트 교회는 하나의 교단으로서 타 교회와 일치를 지지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메노나이트 외의 다른 관점도 존재한다, 수용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인 것이다. 이는 신학적으로도 큰 진보다. 드디어 교단간/종교간 대화의 문이 열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2021년 오늘 메노나이트 교회에 들어오는 모든 신자/목사들은 이 고백서를 근간으로 신입 교리문답을 하도록 권장되고 있다. 이 안에 있는 총 24개의 조항들은 교회와 삶의 유익한 가르침과 양육을 위한 실질적인 지침으로 쓰이고 있다.

지역과 시대에 따른 이런 고백서들의 등장은 각 그룹의 신앙적인 고백이 주 목적이나 각 그룹 안에서의 분리와 분파를 막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으로도 쓰여졌다. 그러면서 최초 슐라이트하임의 고백서의 내용에서 일부가 첨부되기도 하고 수정되기도 했다. 특히 출교에 관한 부분은 강제성이 동반되기 때문에 많은 논란의 핵심이 되기도 했으며, 교인/교회의 순결성을 위해 세상과 분리해야 한다, 폭력이 수반되는 혹은 폭력에 노출되는 직업(경찰관 등)은 피한다 등의 보수적인 생각 역시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발달해온 메노나이트들이 사회문화경제적으로 수직적으로 계층 이동을 하게 됨에 따라 적용의 유무에 대한 찬반 논란이 많았다.

그리고 약 4백년이 지나 21세기 북미의 아나뱁티스트 메노나이트 관점에서 ‘출교/치리/훈육/폭력과 유관한 직업 제한’등 보수적이고 강압적인 지침들은 더이상 아나뱁티스트들의 입에서는 다뤄지지 않고 있다. 즉 이런 내용은 사문서화 되었다고 보는 게 맞다. 존 하워드 요더의 말대로, 21세기의 메노나이트는 16세기 아나뱁티스트가 아닌 것이다. 이들은 더 이상 핍박을 피해 이곳저곳으로 도망하는, 알렌 크라이더의 말대로, 이 세상에 일시적으로 거주하는 외계인 같은 거주민의 신분이 아니다. 많은 메노나이트 교인들은 백인 유럽계 영어권 정착자로서의 안정된 삶을 구가하고 있다.

21세기 아나뱁티스트 메노나이트 영성에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고백서/선언은?

(공동의) 고백서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근대에 들어와서 그리고 오늘날까지 아나뱁티스트 메노나이트 영성에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선언으로는 1944년 21세기의 메노나이트 신학자 해롤드 S. 벤더가 ‘메노나이트 계간지’에 기고한 <재세례신앙의 비전>이다. 급진적인 종교개혁 이후 약 4백년 동안 아나뱁티스트들은 그들의 조상을 닮아 교회를 세우고 이끌어 가는데 신학적인 교육의 필요성에 대해 그다지 강조하지 않았다(그렇다, 이들은 오직 삶이다.). 그렇다는 것은 20세기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 알려진 아나뱁티스트 신학자들이 거의 전무했다고 보는 게 맞다. 여전히 이들은 지역적이고 분파적인 수준을 넘지 못했다. 이런 환경에서 드디어 스타 학자가 탄생했는데 그가 바로 해롤드 S. 벤더이다. 그는 미국 메노나이트들의 작은 동네 미국 인디애나 엘크하르트 출신으로 고센이라는 메노나이트 성경대학을 나온 뒤 동부의 장로교파 프린스턴 신학교를 거쳐 독일의 튀빙엔과 하이델베르그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분파적인 아나뱁티스트의 경계를 넘어 소위 정통 신학의 세계로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그의 유산을 따라 존 하워드 요더와 알렌 크라이더가 나온다.).

그가 쓴 <재세례신앙의 비전>은 그가 미국 종교사 학회장을 맡고 있을 당시 작성된 것이라 그 효과가 더 컸다. 즉 이 선언문은 아나뱁티스트 메노나이트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전 미국의 교회에 도전하는 대범한 시도였다. 무비판적으로 루터의 종교개혁과 그의 정신을 받아들여왔던 많은 미국의 신자들에게 그는 주류 신학자들에 의해 잘못 전달된 종교개혁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편협하게 인식되어 왔던 아나뱁티스트 신앙이 얼마나 복음의 본질에 가까운지 설파한다. 그의 말이다.

“믿음에 강조점을 둔 종교개혁은 훌륭한 것이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생명에 대한 새로움없이 그들이 붙들고 있는 믿음은 위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에 대한 재세례신자들의 이러한 비판은 신랄했지만 부당한 것은 아니었다. 루터와 쯔빙글리가 추구했던 원래의 목표가 만인을 위한 ‘진정한 기독교’를 되찾고자 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결과는 너무 달랐다. 이는 개신교인으로서 그리스도의 삶의 수준이 그전의 가톨릭 시대보다 못했기 때문이다.” —<재세례신앙의 비전> 중에서.

그가 말한 신앙의 본질은 간단히 세가지로 설명된다. 예수의 삶을 따르는 제자도와 자발적인 교회공동체와 무저항과 성경적 평화주의다.

그의 마지막 말이다.

“이 재세례신앙의 비전이 인간 사회를 재조직하기 위한 구체적인 청사진은 아니지만, 예수께서 의도하셨던 하나님 나라가 지금 여기 이 땅 위에서 건설되어야만 하는 것이며 이것이 아나뱁티스트 형제들이 믿고 시행하고자 의도하던 것이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산상수훈이나 여러 곳에서 제시하신 예수의 비전을 두고 하늘에서나 실현될 비전이라고 말하지만 재세례신자들로서 우리는 그들이 말하는 바를 믿지 않는다. 이 비전은 마지막 끝날 때까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긴장 속에서 지켜야 할 비전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가 친히 걸으셨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다고 믿으며,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바를 실행해 나가야 할 것이다.”

벤더의 비전은 지금으로부터 약 5백년전 독일 뮌스터에서 멜키오르 호프만이 꾸었던 극단적이고 비평화적이고 종말론적인 환상하고는 다르다. 계시록적인 종말론을 현실로 가져온다는 점에서 이 둘은 같지만(here and now), 그 실행의 방법은 정반대다. 멜키오르는 당시의 불안정한 환경을 폭력으로 극복하려 했지만 벤더는 오히려 긴장을 안고서라도 예수의 길—비폭력과 비저항—-을 따라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게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이 하나의 추상적인 가르침으로 그치지 않고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거룩하고 구체적인 지침이 된다. 이런 벤더의 비전은 현실이 되어 수많은 메노나이트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이 선언이 나오고 64년만인 2008년 벤더의 제자인 미국의 파머 베커는 벤더의 ‘<세례신앙의 비전>을 21세기적으로 표현한 <아나뱁티스트 크리스천>이라는 소책자를 발간한다. 그는 제목에서 메노나이트란 말을 크리스천으로 대체함으로 메노나이트 신앙의 대중화에 기여하게 된다. 벤더의 세가지 신앙의 본질을 베커는 ‘중심(center)’이라는 말로 부연해 다시 설명한다. 첫째, 예수는 우리 신앙의 중심이시다. 둘째, 공동체는 우리 생활의 중심이다. 셋째, 화해는 우리 사역의 중심이다.

가장 최근 2017년에 그는 <아나뱁티스트의 본질들: 유일한 크리스천의 믿음의 열 가지 증거들>이란 책으로 이전의 세가지 본질에서 좀 더 부연된 차원에서의 메노나이트 신앙의 본질을 설명한다. 그가 말하는 열 가지 신앙의 본질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1. 크리스천은 제자도다. 2. 말씀은 예수를 통해서 해석된다. 3. 예수는 주님이시다 4. 용서는 공동체의 핵심이다. 5. 하나님의 뜻은 공동체 안에서 분별된다. 6. 공동체의 일원(신자)은 서로에 대한 책임이 있다. 7. 신자들은 하나님과 화해한다. 8. 신자들은 서로서로 화해한다. 9. 세상의 갈등들은 화해되어야 한다. 10. 성령의 사역은 크리스천의 삶에 있어 근본적이다.

현재 베커는 동시대 아나뱁티스트 제자도/영성에 관한 한 가장 존경받는 학자이자 목회자이자 선교사이자 처치 플랜터이자 저자다. 그는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및 남아메리카의 15개 이상의 국가에서 미국의 메노나이트 미션 에이전시인 미국의 미션네트워크와 캐나다의 위트니스와 함께 아나뱁티스트의 정체성에 관한 강의를 해 왔다. 북미의 메노나이트 교회 안에서는 ‘새롭게 다시 시작하자(Begin Anew)’는 총 16 세션으로 이루어진 제자도 훈련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있다. 현재 한국의 메노나이트 선교사인 김복기 형제의 멘토가 이분이라는 것이 새삼 새롭고 희망적이다. 역사는 흐르고 있으니….

지금까지는 역사적인 아나뱁티스트의 개략적인 역사와 그들의 영성에 영향을 주었던 고백/선언의 긴 역사를 간략히 살펴봤다. 지금까지 이 글을 읽어온 독자의 인상이, 아마 여느 열정적인 아나뱁티스트의 자기네 믿음에 대한 프로파겐다 수준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까봐 우려가 된다. 이제부터는 나의 주관적인, 유색인종이자 유전적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메노나이트가 된 한국인의 관점으로 다시 한번 아나뱁티스트의 영성을 간추려 보려한다. 아마 보수적인 벤더나 좀더 전향적인 하지만 역사적인 아나뱁티스트와 그 결을 같이 하는(그러기를 바라는) 베커와는(유럽계 백인) 좀 더 다른 관점을 나눌 수 있지 않나 기대해본다.

비전통 자발적 소수 한국인 메노나이트가 본 21세기 아나뱁티스트 메노나이트의 영성의 본질

21세기전만해도 북미의 메노나이트 교회 안에서 인종간의 차이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그저 전통적인 메노나이트와 나와 같은 후천적인 메노나이트 정도의 차이만 부각될 정도였다. 그리고 나와 같은 별종의 신종 메노나이트들 숫자가 워낙 미미해 늘 주류 백인 메노나이트들에 의해 환대받고 보호받는 수준이라, 인종간의 문제가 불거질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주인과 손님의 관계). 이 말은, 메노나이트들의 다인종/다문화에 관한 인식도 그다지 예민하지 않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2021년 9월 시점에서 전통적이고 보수적이고 백인 주류의 북미 메노나이트 교회는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백인 일색의 교회가 대단히 문화적으로 다양한 복합문화적인 교회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전세계적으로도 북미의 유럽백인계 메노나이트들의 숫자는 지구의 남쪽 신종 메노나이트들에 의해 추월 당한지 오래다. 아프리카 이디오피아 한나라 메노나이트 숫자가 북미 전체의 메노나이트들 숫자(60만 수준)와 맞먹거나 이미 추월한 것으로 예상한다. 이디오피아에는 2017년 기준으로 세례자만 31만명이 넘고 전체 메노나이트 교회수가 천개가 넘었다. 교회성장율이 매년 4.5% 이상이다. 이디오피아는 20세기말 약 17년의 공산정권의 체제 안에서 기독교는 지독하게 탄압되었다. 이런 핍박 가운데 메노나이트 교회들이 살아남음으로서(지하교회) 오늘날과 같은 신자의 폭발적인 증가 현상을 가져오게 됐다. 이런 세계의 아나뱁티스트 메노나이트 세상의 지형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북미의 메노나이트들이 장자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파워의 문제는 늘 돈의 문제와 연관되지 않던가?)

이러한 상황에서 나와 같은 한국계 메노나이트의 등장과 도전의 목소리는 때로 기존의 메노나이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어, 우리 전통적인 메노나이트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 유색인종이 생기네?’ 현재 미국과 캐나다에는 “이문화/다문화 교회로 나아가기 위한 조정 위원회”까지 만들어지고 나는 그 중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기존의 주류라 생각하고 있는 메노나이트들의 관점에 대해서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너희의 백인주의, 순수혈통주의(메노나이트는 성만 보면 누가 누군지 안다.)가 문제야!”

이런 포스트모던적인 논쟁의 과정에서 16세기 아나뱁티스트 역사나 영성을 불러오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다시 존 하워드 요더의 말로 돌아가서, 21세기의 메노나이트는 16세기 아나뱁티스트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붙들고 있는 아나뱁티스트적인 영성의 고갱이는 뭘까? 이들은 과거 500년 아나뱁티스트 선조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지속성장이 가능한 교회일까? 북미의 메노나이트 교회는 쇠퇴하고 있지 않은가? (문제는 이런 교회 쇠락의 과정조차 너무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이게 그들의 비저항적 신앙과도 연결이 되는가?)

다시 한번 동시대의 아나뱁티스트 작가가 인정하는 스튜어트 머레이의 <이것이 아나뱁티스트이다>와 파머 베커의 <아나뱁티스트의 본질들> 가운데 공통분모만 간추려 오늘의 관점으로 비평해 보고자 한다. 21세기 아나뱁티스트의 영성을 가장 쉽게 설명해 줄 수 공통분모 세가지는, 예수 중심성과 회중성과 평화지향성이다.

예수 중심성부터 시작해보자.

2004년 한국의 교회를 떠나 캐나다 메노나이트 교회로 적을 옮긴 이후로 성경을 읽고, 세상 일을 판단하고, 나의 삶을 살아가는 관점이 바뀐 게 있다면 그것은 예수와 그의 말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위 아나뱁티스트의 후손이고 그게 메노나이트라면 최소한 예수가 우리 삶의 중심이라는 것에는 그 어떤 이의도 달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예수 중심성은 16세기 아나뱁티스트들의 생각과 여전히 동일하다. 16세기 메노 시몬스의 말을 다시 불러내 보자.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의 말씀이 진리이며, 그가 자신의 피와 진리로 우리를 사셨다는데 기초한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다시 태어나게 되었고 성령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이며 그의 회중이다. 이에 대해 아나뱁티스트는 이렇게 답변한다. 만약 당신의 믿음이 당신이 말하는 대로라면 왜 예수께서 그의 말씀 안에서 당신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지 않는가? 당신이 예수가 바라고 명령하시는 대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할지라도, 당신은 결국 그를 믿지 않는다는 사실만을 드러내는 셈이다.” (월터 클라센의 <가톨릭도 프로테스탄트도 아닌 아나뱁티즘> 중에서)

그렇다. 아나뱁티스트들에게 예수는 삶의 중심이고 삶의 방향이다. 16세기 남부 독일/오스트리아를 배경으로 활동한 한스 후트의 말은 간명하고 힘이 좋다. “삶으로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진정으로 모르는 것이다.” 이들은 예수를 믿는 것이 예수를 따르는 것으로 연결되어야만 했다. 이 글의 모두(冒頭)에 소개한 21세기 영국의 신종 아나뱁티스트이자 작가인 스튜어트 역시 런던 아나뱁티스트 네트워크의 첫번째 신념으로 예수따름으로 선언하고 다음과 같이 부연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의 모범이요, 선생이요, 친구이자 구원자이며, 그리고 주님이시다. 그는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며, 우리의 믿음과 삶의 방식과 참다운 교회 모습과 사회 참여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예수님을 예배의 대상으로 믿을 뿐 아니라, 그분을 따르기로 작정한다.” (스튜어트의 <이것이 아나뱁티스트다> 중에서)

이들이 묘사하는 예수는 믿음의 대상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스튜어트의 말대로라면, 예수는 우리의 사회참여에 대한 기준까지 제시하시는 구체적인 분이시다. 이런 예수 중심의 삶 즉 제자도는 다음의 세 단어로 축약되어 현재 메노나이트 교회에서 회자되고 있다. 우선 (공동체에) 속하고(Belonging), 그 다음 (예수님을) 믿고(Believing), 마지막에 (예수님을 따라) 행동하라(Behaving)!

아나뱁티스트들의 이처럼 급진적인 예수 중심성은 단지 신자들의 삶에만 강조되고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파머 베커가 <아나뱁티스트 크리스천>에서부터 지속적으로 강조해 온 것은, 예수 중심이라는 것은 예수를 믿고 따르는 것뿐만 아니라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예수님의 말씀을 중심/권위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대단히 동시대적으로도 중요하다. 우리는 여전히 성경의 해석의 문제로 싸우고 있다. 시대가 다양해지고 다원화해지면서 성경이 쓰여진 시대에는 다뤄지지 않았던 많은 문제들이 부각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성의 리더십의 문제가 뜨거웠고, 최근에는 동성애 문제가 온 세상의 교회를 들었다 놓았다.

아나뱁티스트 전통이 우리에게 알려준 성경해석의 본질은, 예수 중심으로 해석하라는 것이고 반드시 교회공동체와 함께 해석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가능할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지 않은 것은 그렇다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물론 이런 태도는 대단히 문자적이다. 성경에 쓰여있고 않고가 그렇게 중요하다는 말인가? 성경은 그렇다면 만병통치, 백과사전인가? 아나뱁티스트들은 이런 문제—성경이 답을 안해 줄 때—한결같이 사용하는 말이 있다. “여지space를 남기세요.” 물론 여지, 공간이 있어야 우리의 사고가 더 유연하고 느긋해 질것이고 그래야 성령이 활동하시기에 수월할 것이다. 잔은 비워야 물이 채워지는 것처럼!

하지만 21세기 메노나이트들 역시 문화의 영향인지 이런 여유와 인내는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예수 중심으로 해석하라는 데 구약의 레위기가 등장하고 바울의 서신서가 등장해 말씀 겨루기를 시작한다. 지난 5백년 훈련된 불복종의 피가 거꾸로 솟아 목소리를 높이고 급기야 교회까지 뛰쳐나가는 신도들이 있다. 나중에 메노나이트 교회에 합류한 유색인종들의 메노나이트 교회는 교단을 나가겠다고 위협하기도 한다. 단지 하나의 이슈로 북미의 메노나이트 교회는 많이 갈라졌다. 이제는 문제만 터지면 쉬쉬하는 분위기다. 이게 올바른 (예수를 따르는) 태도인가?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크고 작은 문제가 많지만 그럼에도 메노나이트들의 예수 중심적 삶은 이들의 표준이 된다. 교회가 갈라졌다고 교회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들에게 교회를 떠나라면 글쎄, 거의 사형선고와 같은 정도의 무게로 다가올 것이다. 이들에게 교회공동체는 삶 그 자체다. 나의 과거 한국 교회 경험과 비교해 볼 때 이들이 보여주는 불일치와 불협화음은 그래도 점잖은 편이다. 그래도 부패와 폭력은 없으니 말이다.

다시 이들의 예수중심적인 삶으로 돌아가보자. 이런 삶에 또 다른 문제는 없는지?

이런 예수 중심의, 예수 따름의 급진적인 삶에는 원치 않는 피해가 따른다. 예수를 따르는 것과 세상을 따르는 것은 동시에 가능하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오직 선택의 문제가 매일 하루에도 아마 수백 번씩 우리의 머리를 괴롭히게 된다. 이거야, 저거야? 예수를 따를 것인가 세상에 순종할 것인가?

아나뱁티스트들의 이런 이상적이고 단순한 예수 따름의 삶, 제자도는 때론 대항문화적이고 반순종적이고 불복종의 자세를 견지하게 된다. 세상에 속하고 세상의 문화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여전히 분리하려 하고 세상이 요구하는 반대로 가려고 한다. 미국 인디애나 엘크하르트에 있는 아나뱁티스트 메노나이트 신학대학원의 채플의 모습 역시 이런 비순종적인 삶을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어느 관점으로 봐도 다 다른 건축양식을 구사했다.

16세기부터 유전되어온 이런 예수를 따름으로 생기는 세상과의 분리 현상 즉 대항문화적 삶은 이들이 정착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만들었고(누가 이런 자들을 쉽게 환영하겠는가?), 더욱 더 이주의 횟수를 늘려가게 했고(나라에서 나라로, 지역에서 지역으로) 그러다 보니 결국 교인 숫자가 늘어나질 않게 되고(누가 이런 삶을 쉽게 받아들이겠는가?), 따라서 소수의 종교집단으로 남게 되고, 윤리적으로는 더욱 까다로워져 하다못해 여느 복음주의자하고도 말을 섞지 못할 정도로 까탈스러운 평화와 정의의 사도들이 되었다. 이건 축복인가 저주인가?

물론 이건 일반론이다. 가끔 북미의 아나뱁티스트 메노나이트들을 놀라게 하는 사건들이 터지곤 하는데 가장 최근의 일로는 미국의 메노나이트 중에서 트럼프 지지자가 꽤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진보적인 크리스천 미디어 소저너스(Sojourners)는 공공연히 밝혔다. “트럼프는 제거되어야 한다!”. “그를 따르면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병행될 수 없다!” 그렇다. 예수를 죽기까지 따른다면서 트럼프를 지지한다는 것은 논리가 맞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한국 메노나이트 중에서 박근혜의 태극기 부대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예수 중심의 삶과 도저히 연결이 되지 않는 일들이 메노나이트 교회에서도 빈번히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일전에 밴쿠버의 어느 메노나이트 교회에서 성인들을 위한 주일학교를 진행한 적이 있다. 교재로는 카일 아이들만의 <팬인가 제자인가>를 골랐다. 아이들만 역시 대표적인 복음주의 진영의 목사이자 작가로 아나뱁티스트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의 책의 내용은 간결하나 그 본질은 아나뱁티즘과 많이 닮아 있었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요한복음 3:16은 누가복음 14:27과 같이 가야 완전해진다고. 그렇다. 예수를 믿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결국 예수를 따름으로 완전해진다. 아멘!그러면서 그는 결국 우리가 예수의 팬이 아니라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조차 버릴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을 하자 그 교회의 핵심멤버라고 말할 수 있는 전통 메노나이트 백인이 이렇게 대꾸를 했다. “자기 같으면 죽어도 그렇게 못한다고! 다 내려놓지는 못하겠다고!” 이걸 솔직하다고 해야할 지 아니면 메노나이트 교회도 타락했다고 해야할지 막연해 했던 기억이 난다.

예수의 영성은 두말할 나위 없이 ‘건너편’ 영성이다. 복음서에 자주 등장하는 그는 자주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21세기 북미의 아나뱁티스트이자 평화운동가이자 신학자인 체드 마이어는 이 ‘건너편’ 영성을 그의 전문분야인 ‘마가복음’을 가르치면서 많이 강조한다. 그를 닮아 우리도 낯선 곳으로, 주변부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건너가야 한다고. 그렇다. 이게 예수 복음의 본질이다. 더 낮고 더 춥고 더 피곤하고 더 필요로 하고 덜 익숙한 곳으로 나아가는 것. 이게 급진적인 믿음 아닌가?

물론 이러려면, 체드 마이어의 말대로 거주자, 정착자적 삶/영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예수의 제자들처럼, 그나마 가진 것조차 다 내려놓고, 급진적으로 따라갈 수 있는 자기포기와 무모한 용기만 필요할 뿐이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그런가? 21세기 백인 영어권 중산층 혹은 기득권 메노나이트들이 과연 그런가? 이들의 삶이, 여행하기 가벼울 정도(Travel light)로 단순하고 가난한가? 16세기 초기 아나뱁티스트들처럼 뭐를 해야만 할 것 같은 타는 목마름을 가지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내가 오늘 마주하는 있는 21세기 북미의 메노나이트 교회에서 이런 급진성의 정신, 급진적인 믿음을 보기는 많이 어려워졌다는 안타깝지만 솔직한 의견이다. 이들은 이미 너무 정착되었고 그 편안함을 맛보았고 그래서 도전과 고난보다는 안정과 유지가 우선이고 그러다 보니 다른 제도권의 교회와 다를 바 없이 관료화 되었고 여전히 백인남성중심의 리더십과 점잖은 척하는 인종주의자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더 큰 정신심리학적 문제점은 이들은 여전히 16세기 순교자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들은 피해자라는 의식.

두번째는 이들의 회중성이다. ‘공동체는 우리 삶의 중심이다가 이들의 한결 같은 고백이다.

아나뱁스트들의 예수따름 즉 제자도는 개인의 영역에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회중과 함께 세워진다. 기존의 제도 교회와 가장 대비되는 아나뱁티스트 교회의 차별성은 사제/목회자 중심이고 권위적이고 엘리트/전문가 중심이 아닌 자발적이고 회중 중심적이고 평등한 교회 질서/구조에 있다.

기독교 저자로 한국에서 책을 낼 때 내가 속한 메노나이트 교회에서 늘 사용해오던 회중이란 말을 사용하게 되면 늘 편집자의 수정요구를 받는다. 한국 교회 교인들에게 회중이란 말은 낯설다는 것이다. 교회를 이루는 구성원을 통칭할 때 회중이라는 말 외에 어떤 말이 적절한지 모르겠다. ‘신자들의 모임’이라고 풀어 써야 할지. 한국 교회에서는 왜 회중이라는 말이 생경할까? 교회의 주인은 회중이고 교회의 운영의 주체 역시 회중이라는 게 그렇게 급진적인 표현인가?

사실 그렇다.

신앙의 자발적 선택권과 시민의 자유/자율성이 보장된 21세기에는 가장 평범해 보일 것 같은 이 말은, 4세기 이후 국가교회, 기독교의 국가화가 마치 마태복음 28장의 실현인 것처럼 광고해온 기존의 위계 중심의 교회, 즉 사제중심/신학전문가 중심의 교회에게는 그들의 질서에 반하는 하나의 위협으로 들릴 수 있다. 교회의 운영 주체, 아니 교회의 소유권 자체가 사제/전문가집단에서 일반 회중으로 넘어간다는 것은 마치 교회 자체가 사회주의 체제로 전복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실제 회중 교회, 회중성의 내용을 보더라도 기존 교회의 시스템과는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뭐가 다른가?

내가 아나뱁티스트 메노나이트 교회에서 경험한 회중 교회의 특징들은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목사직의 제한적 기능, 아마추어리즘, 공동체적 성경해석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동체적 분별 정도.

먼저 회중 교회에서 목사를, 목사의 기능을 어떻게 보는지 살펴보자.

회중교회에서의 목사란, 성경에 충실하게 해석해서, 다른 여러 직분과 같이(그 위가 아니라)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하나의’ 구성요소이고 기능이다. 즉 가르치는 기능이 그들의 주 임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부연해 보겠다.

십 수년도 훨씬 전에 밴쿠버 리젠트 칼리지 입학(제임스 휴스톤과 유진 피터슨과 J.I.패커와 폴 스티븐스와 고든 피의 정신이 살아 숨쉬는 곳!)을 염두에 두고 있을 때 이미 그곳에 재학중인 여러 한국인 학생들을 만나 문의를 한 적이 있다. 왜 M.Div.를 하는가? 왜 크리스천 스터디를 하는가? 한국에서 기자였고 회사원이기도 했던, 사회 경력이 출중했던 그들은 꿈이 컸다. 전공이 뭐든 그들은 비전 있는 목사가 되기를 염두에 두고 공부하고 있었다. 그들은 목사가 되어 자신의 ‘선한’ 영향력을 끼치길 바라고 있었다. 교회와 세상을 위해!

영향력이라는 말은 쉽지만 어렵고도 무서운 말이다. 누가 누구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파워’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파워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위계(hierarchy)와 부과성(imposition)과 일방성(unilaterality)과 교차되어 때론 ‘폭력’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하지만 목사가 목회를 하는데 회중을 이끄는데 ‘영향력이 없다’는 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이런 목사는 그렇다면 어떻게 보여질까? 아마 무능력하게 보이지 않을까? 특히 한국 교회 정서에서는. (이들은 늘 카리스마적인 리더, 갑갑한 가슴을 빵하고 뚫어줄 정도의 과감하고 대범한 리더를 바라지 않던가? 즉 파워’풀’한 리더!)

만약 영향력을 지향하고 본인 스스로도 영향력 있는 목사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속한 메노나이트 교회에는 들어오지 말라고, 말리고 싶다. 메노나이트 교회에서 목사는 영향력을 함부로 구사할 수 없고 그러도록 회중이 허락하지도 않는다. 교회에 정책(policy/polity) 입안이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면 목사는 뭘 하는가?

그는 한 명의 회중으로서 주어진 일’만’ 하도록 위임된다. 그 일이란 회중을 돌보고 설교하는 것이다(주일 설교는 통상 한 달에 2번 한다-이것도 목사의 영향력을 줄이는 일환이기도 하다.). 하지만 교회의 정책이나 방향에 자신의 생각을 함부로 주입하는 행위 즉 ‘영향’을 미치면 안된다. 목사의 영향력이 함부로 행사되지 않게 하는 일은 회중의 대표로 구성된 ‘운영위원회(Council)’에서 담당한다. 그러다 보니 운영위원회와 목사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긴장감’이 존재한다. 이건 좋은 것이다. (편하면 늘 문제가 터지지 않던가?)

메노나이트 교회 목사는 그러니 본인의 영향력을 시험하거나 본인의 비전을 펼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어진 일에만 ‘입 닥치고’ 순종하는 인내만을 배운다. 아무리 문제가 많은 교인이라도 누구에게도 누설할 수 없다(입이 무지무지하게 무거워야 한다). 아무리 본인과 친하고 본인에게 잘 하려고 하는 교인이라도 어느 직분에 추천하거나 동의하거나 하는 ‘인사권에 영향력’을 미칠 수 없다. 만약 이러다간 사달이 난다. 목사가 회중의 자율적인 판단에 ‘영향력을 미쳤다’는 것이다. 영향을 미치다는 말은 영어로 (인플루엔싱(influencing)’이라고 한다. 아주 좋은 말이다. 하지만 자신의 주어진 범위를 벗어나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킬 때 이 말은, 하지 말아야 할 ‘부정의 뜻’으로 해석된다.

그러니 메노나이트 교회는 목사는 ‘보상받기’ 어려운 직업이다. 회중의 감시와 평가가 사뭇 엄중하다. 그리고는 2년에 한 번씩 회중의 재신임 절차를 겪는다. 70% 이상의 찬성. 하지만 본인은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영향력을 미치면 안된다. 오직 본인의 진정성으로만 평가된다.

이런 교회에 과연 ‘선한’ 영향력을 꿈꿔왔던 한국 목사가 들어올 수 있을까? 견뎌낼 수 있을까? 오직 철저히 ‘종의 신분’만을 담당하기 위해? 그러다가 회중이 가라면 가야만 하는. 이게 목사를 바라보는 회중의 시각이다. 단지 한 명의 형제로, 공동체를 위해 ‘주어진 범위 안에서(분별의 시각)’ 헌신하는 것.

두번째는 회중성이 가진 아마추어리즘에 대해서 살펴보자. 아마 많은 한국 교회의 독자들은 아마추어리즘과 교회가 무슨 상관이 있나 의아해 할 것이다. 스포츠 세계에서만 쓰일 것 같은 이 말은 어찌 보면 아나뱁티스트의 정신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말이기도 하다. 아나뱁티즘은 루터나 쯔빙글리 같은 신학 전문가들의 향연이 아니었다. 초기 쯔빙글리의 제자였던 콘라드 그라벨이나 펠릭스 만츠 정도를 제외하고(이들은 단명했다) 초기 아나뱁티스트 운동의 중심에는 신학 전문가들이 많이 포진해 있지 않았다. 이전에 간략히 언급했던 후브마이어 외에 대부분은 신학적인 배경이 두드러지지 않았다. 도리어 대부분의 리더들은 성령의존도가 컸고 그런 의미에서 신학적인 전문성은 리더의 첫째 자격이 못되었다.

이후 17세기 들어 아나뱁티스트들이 정착하고 교회의 형태를 이뤄감에 따라 오늘날과 같은 전문적인 목사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신학 지식의 유무가 첫번째 자격조건은 못되었다. 회중 안에서 삶으로 증명된 자를 선출하는 게 관례였다. 그리고 목사직 자체도 봉사직으로 했다. 즉 자신의 직업을 수행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부르심, 공동체로의 부르심의 차원에서 목사직을 병행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한 목사가 오래 교회 일을 하기 어려워 어느 정도하면 또 다른 회중에서 선출하게 되는 절차를 밟았다. 현재와 같은 직업으로서의 목사직은 근대의 산물, 산업화에 따른 적응이라고 봐야 한다.

21세기가 되어 모든 게 전문화되고, 목회자의 학력 수준이 청빙의 우선 기준이 된 오늘날에도 메노나이트 교회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느 정도의’ 신학 수준만 요구한다. 굳이 신학대학원에서 M.Div.를 하지 않아도 된다. 성경 대학 정도의 학력이면 오케이다. 이러기는, 앞에서 말했지만, 목사의 신학이, 목사의 비전이 교회를 좌지우지 못하도록 한 회중의 질서가 이미 견고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모든 기능은 자원자로 이뤄진 회중의 각종 위원회에 의해서 유지된다. 내가 속한 예배위원회에서는 예배의 기획과 진행과 평가를 다 주관한다. 이 위원회의 일원이 목사이기는 하나 그의 기능은 설교에 대한 기획을 할 뿐이다. 이 위원회 위원에 자격이 있을까? 없다. 어리든 늙든 배웠든 성소수자든 손들면 환영한다. 이런 자들이 모여 회의하고 교회의 예배를 정의하고(define) 집행한다(perform). 나와 같이 신학 배경이 있는 사람이 보기에는 대단히 (신학적으로) 엉성하고 즉흥적일 때도 있다. 그럼에도 예배는 굴러가고 회중은 크게 개의치 않는 분위기다. 예배 시 내가 늘 앉는 교회 2층 발코니에는 주로 ‘교회에 갓 들어와 주목되기를 회피하는 유색인종이나 불만이 가득한 20대나 성소수자나 아이들이 많아 시끄러운 젊은 부부들이 앉는다. 어느 20대 백인 여성이 새로 참가하기 시작해 인사를 나눴다. 그는 늘 혼자 와 이곳에 앉아 예배를 드렸고 예배가 끝나면 조용히 교회를 떠났다. 그가 교회를 나오는 이유에 대해서 물었다. ‘예배가 기성교회 같지 않아서요.” 뭔 말인가? “다른 교회처럼 인위적이지 않아서 좋아요.” 아, 이럴 수도 있구나! 아마추어들이 기획하고 실행해 나가는 이런 회중 교회의 예배의 엉성함(다른 말로는 자연스러움이라고 하자)이 좋아서 오는 자매도 있구나!

회중교회의 아마추어리즘은 예배에만 국한되지 않고 교회의 운영 전반이 그렇다. 모든 위원회의 문은 모두에게 열려 있다. 더 적극적으로 교회의 운영에 참여하고 싶고 자신의 의견을 반영하고 싶은 사람은 ‘운영위원회’에 손들고 들어가면 된다. 이런 위원회적/회중적 사고와 집행 그리고 이들의 해 나가는 의사결정의 모든 순간과 기억(이 가운데에는 아픔도 물론 있다)들이 합해져 이들의 공동체적 분별의 전통이 세워졌다. 그러니 이들이 분별의 전통 역시 학문적으로 공부해 배운 것이 아니다. 순전히 초짜들이 몸으로 때워가며 배운 것이다. (한가지 주의할 점은, 그렇다고 북미의 모든 교회가 아마추어들의 경합장은 아니다는 것이다. 교회에 따라, 지역에 따라 교회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교인들의 신학적인 수준은 크게 차이가 난다.)

나의 멘토이셨던 103세까지 장수하며 살다 작년에 돌아가신 어빈 코넬슨 역시 독일 목수 출신이었다가 회중에 의해 선택된 목사다. 죽을 때까지 눈에 시력이 남아 있을 때까지 책을 읽으셨지만 그분은 정식으로 신학대학교를 나오지 않으셨다. 도리어 신학한 자들의 이중적인 삶에 대해 탐탁치 않게 여기셨다.

이런 아마추어리즘은 그 자체로 위험할 수도 있다. 배가 산으로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래도 이들은 크게 개의치 않을 거라는 것을 안다. 교회가 제정신일 때가 언제 있었던가? 하지만 이런 아마추어리즘의 부족한 면을 잘 알고 있는 메노나이트들은 그래서 성경에 대한 공부나 해석도 공동체 즉 회중과 같이 하기를 권고하고 실제로 그렇게 한다.

공동체적 성경 해석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아나뱁티스트들은 고래로 성경은 개인적으로 읽고 묵상함과 동시에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공동체와 함께 연구해야 한다고 믿어왔다. 이런 활동은 교회내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많은 소그룹을 통해서 이뤄지고 있다. 세대별, 관심사별로 구분해 소그룹들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한번 만들어진 이런 소그룹들은 이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한, 타지로 이주하지 않는 한, 나이 들어 죽지 않는 한 지속되는 경향이 있다. 메노나이트 교회의 본 모습은 겉으로 드러나는 엉성한 예배에 있지 않고 이런 겉으로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소그룹 활동에 있다.

메노나이트 교회에 처음 출석하기 시작한 사람들이 놓치기 쉬운 점이 여기 있다. 그들의 첫 인상은 대동소이하다. “메노나이트 교회는 사람을 별로 환영하지 않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보기만 할 뿐 잘 달려와 인사하지 않아요. 말수도 적구요….” 맞다. 이들은 여전히 유전적으로 내려오는 수줍음과 특유의 과묵함이 있다(과연 순교자들의 자녀답다!). 아마 최소한 수개월은 참고 다녀야 인사하거나 집으로 초대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 이들의 환대와 너그러움 그리고 우애를 알려면 이들이 교회 뒷면에서 만들어가는 소그룹 활동에 참여해 봐야 한다. 여기에 그들의 삶이 그대로 드러난다. 아마추어적이고, 그러한 만큼 순수하고 단순한.

이런 소그룹안에서 그들은 성경을 읽고 해석한다. 사안에 따라 전 교회적으로 이런 성경 읽기/해석의 과정이 이뤄지기도 하고 전 교단적으로 확대되기도 한다. 알아둘 것은 이런 공동체적 성경읽기/해석이란 하나의 정답에 도달하는 과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누가 신학적으로 더 완전한가를 가리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럴 바에는 아마추어 회중이 모여 다같이 성경을 읽고 해석할 이유가 없다. 이 세상에서 신학적으로 가장 완전한 자, 권위 있는 자를 초빙해 그의 말을 들으면 될 터이다. 메노나이트 교회에서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이들이 공동체적 성경읽기/해석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앞에서 언뜻 이야기한 바 있는 ‘해석에 있어 공간이나 여지(space)’를 남기는 것이다. 네 말이 맞니 내 말이 맞니 하고 싸울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상대방의 해석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만남을 계속하고 성경에 대한 공부와 해석을 지속해 나가자는 것이다. 이게 공동체라는 것이다. 이질적인 집단이 예수를 중심으로 만나 사귐과 나눔의 행위를 계속해 가는 것(Diversity in Unity).

이런 가치가 지난 세월 회중 가운데 나눠지고 전승되어 메노나이트 교회의 공동체적 분별의 문화를 세웠다. 메노나이트 교회의 분별은 퀘이커의 ‘분별(Clearness Committee)’과 더불어 공동체적 분별의 가장 좋은 본보기로 알려져 있다.

메노나이트 교회의 공동체적 분별

미국의 퀘이커와 <가르칠 수 있는 용기>로 잘 알려진 세계적인 교육사상가인 파커 파머의 인연은 유명하다. 미국 조지타운 대학에서 잘 나가는 사회학과 교수였던 파머가 안식년을 퀘이커들이 운영하는 학습 공동체 펜들 힐이라는 곳으로 가면서 인생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다. 그는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지 않았는데 그런 분별의 과정에 퀘이커들의 독특한 분별 방법인 ‘명료화위원회’의 도움이 컸다. 이 분별의 과정을 통해 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 성찰하게 되고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 남게 된다.

파머에게는 퀘이커의 분별이 도움이 되었다면, 장애 신학의 리더였던 루터교 전통의 마르바 던에게는 메노나이트 교회의 공동체적 분별이 있다. 그녀는, “내게 평등 의식과 공동체 의식을 가장 많이 체험하게 해 주고 분별의 문화에 가장 숙련되었다는 느낌을 준 교파는 메노나이트 교회였다” 고 고백한다. 그녀는 미국 인디애나 노트르담 대학에서 대학원 공부를 하던 시절 그 옛날 자신의 영적 조상 마틴 루터에 의해 핍박 받았던 메노나이트 교회를 알게 되고, 메노나이트의 공동체적 분별을 경험하게 된다. 그녀가 분별하는 목적은 본인이 장애자로서 이런 장애를 경험하면서 학업을 지속할지 말지에 대해서 결정해야하는 것이다. 메노나이트 교회와 이런 분별의 과정을 경험하면서 그녀는 학위의 필요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고, 노트르담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마치고 장애신학자로서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그녀가 배운 메노나이트 공동체의 분별의 두 가지 요소는, 첫째 “성령께서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이 말을 주신다고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을 때만 말하는 것이고, 둘째 개인적인 문제일 경우에는 “성령께서 개인의 유익을 위해 이 말을 주신다고 믿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녀가 경험한 메노나이트 교회의 분별의 기초는 오직 ‘성령’에 의존한 것이었다.

메노나이트 교회의 신앙고백서 제16조 <교회의 질서와 일치>장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교인들(회중)이 교회의 지도자를 선택하거나 어떤 문제를 해결할 때 항상 성경을 지침으로 삼고―이 부분이 퀘이커의 명료화 위원회식의 분별의 방법과 근본적인 차이가 된다. 퀘이커들은 전적으로 성령중심적인 분별을 추구하기 때문에 성경의 말씀에 대한 강조가 없거나 덜하다―상대방의 의견을 기도하는 열린 심령으로 듣고 또 말해야 한다.” 즉 교회의 어떤 문제도 소위 특정한 일부가 (밀실에 모여)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교인들은 칭찬받기를 기대해서만은 안되고 교정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고 공동체는 분별하는 과정에서 성급해서는 안되며 의견 일치를 위해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인내로 기다리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밝힌다.

메노나이트 교회는, 이처럼 전체 성도들과 함께 결정하는 것이 교회의 일치를 이루는 중요한 가치로 인정하고 있고, 이 가치의 보존을 위해 지난 500년 죽기까지 수고를 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교회의 규모에 대해서 민감해 보통 200명 이상의 교인이 모이게 되면 분리를 고민한다(교회는 크면 안된다는 생각이 확고하다.). 공동체적인 교회를 추구하면서 성도들의 가정 환경에 대해서 모르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교회의 모든 회중이 서로 알 수 있는 교회. 그래서 서로의 사정에 대해서 묻고 돕고 보완할 수 있는 교회. 목사의 설교에 대해서 토론할 수 있는 교회. 그러려면 교회의 사이즈는 제한 받아야 하고 이럴 때만이 허울좋은 가족 같은 교회가 아닌 진정한 나눔의 공동체 교회가 될 수 있다고 메노나이트 교인들은 믿는다.

그렇다면 메노나이트 교회는 늘 분별을 잘 해 왔고 성도들은 이런 성령 중심의 삶을 구현하고 있는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과거의 역사적인 아나뱁티스트들이 (대부분) 그래왔다는 것은 부인할 수없는 사실이나 21세기 현대판 메노나이트 교회에서의 분별은 교회마다 중구난방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 이게 아마추어리즘의 폐해일 수도 있다. ‘표준화’되기 힘들고 한결 같은 전통이 유지되지 힘들다는 것. 그 누구의 권위도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교단의 권위는 없다). 회중이 누구고, 그 회중의 수준이 어떠냐에 따라 모든 게 다 달라질 수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앞의 예수 중심성과 회중성에 이어 아나뱁티스트들의 ‘평화지향성’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이 말의 또 다른 표현으로는 비저항, 비폭력, 불순응, 불복종의 태도라고도 할 수 있고, 여기에 파머 베커는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평화의 제스처인 ‘화해’라는 의미를 추가했다. 아나뱁티스트의 시작이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비폭력의 삶의 추구였다면(순교자 영성), 이런 관점은 시대를 거쳐 오면서 더 적극적인 저항적 비폭력으로, ‘평화 지키기(Peace-keeping)’에서 ‘평화를 만들기(Peace-making)’로 진화되었다. 16세기 평화의 아나뱁티스트 신학이 점점 윤리적인 사회정의로 그 무게중심이 바뀌는 것이다.

북미의 아나뱁티스트 그룹 안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평화만들기’에 주력하는 창구가 생겼는데, <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으로 한국 기독교에 잘 알려진 로날드 사이더의 1984년 메노나이트 세계총회의 연설(“우리는 우리의 십자가를 메고 예수를 따라 골고다로 가야 한다. 우리는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에 대한 가시적인 행동으로 나타난 ‘기독교 평화사역팀(Christian Peacemaker Team)’이다. 1986년에 세워진 이 기관은 세계의 특정한 분쟁지역에 팀원을 직접 파견해 그 지역의 사람들과 같이 (비폭력적으로 위험에 노출되어) 살게 한다. 이런 사역의 결과는 극단적인 경우를 불러일으키기도 해 2006년에는 이라크의 바그다드에서 4명의 팀원들이 납치되었다가 톰 폭스 한 명을 제외하곤 풀려난 적이 있다.

아무튼, 평화를 지키든 만들든, 아나뱁티스트들의 평화지향성은 지난 500년간 변함없이 유지되어온 정신적 유산이고, 오늘날 메노나이트 교회 전반에 걸쳐 이유불문하고 통용되는 태도다. 그렇다고 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제2차 세계전쟁 당시 독일 메노나이트 교회는 히틀러의 독주와 독재에 반대의 소리를 구체적으로 내지 않았고, 실재로 많은 독일의 메노나이트 젊은이들이 히틀러의 군대에 입대하기도 했다. 그러니 역사적으로 아나뱁티스트 공동체안에서 폭력이 인정되거나 묵인된 경우는 공식적으로 1542년 독일 뮌스터 사건과 (2차 대전 당시 독일 메노나이트 교회의 나찌 동조라고 볼 수 있다. 여전히 진보적인 메노나이트 그룹 안에서 나찌 시대의 메노나이트의 참여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고 비판의 목소리도 크지만 20세기 중반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메노나이트 교회의 총회에 의해서 2차 대전 당시 나찌 참여에 대한 공식적인 회개나 사과는 없는 듯하다(이런 행동을 개인차원으로 돌린 것이다.). 나찌의 군대에 참여했다 하더라도 의무병이나 여타의 비전투병으로 참여했다는 것이 과연 비폭력적이고 평화지향의 아나뱁티스트적인 태도였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 외에, 최신 들어 아나뱁티스트들의 평화지향성이 더욱 구체화되고 적극화되는 과정에서 이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행동만이 가장 정의롭다는 마인드셋이 작용하게 되고 이런 생각은 결국 자신들의 사역의 우월성을 조장하게 된다. 즉 이런 평화지향성이 신학적, 태도적 교만함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즉 다른 교인, 다른 복음주의 진영의 교회들과 협력하기 힘든 독불장군식의 사역을 진행하게 된다. 그리고 대단히 행동주의적인 신앙의 자세를 견지하게 됨으로 영적인 경건의 삶이나 영적인 지도받기에는 소홀해지기 쉽다. 이런 가운데 가장 예상하기 쉬운 결과는, 개인의 신앙의 삶의 균형이 깨지고 분쟁지역이 주는 긴장과 폭력성에 노출되면서 정신적 장애를 겪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는 죽음까지 희생하는데 진즉 자신의, 가족과의 영적 균형과 건강을 해치게 되는 경우다. 이건 또 무슨 종류의 평화주의인가?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아나뱁티스트들의 비폭력적이고 평화지향적인 삶의 태도와 그들이 세상의 정의와 평화와 화해에 미친 영향은 과소평가할 수 없다. 이들이 순교자의 후손인 것은 맞는 사실이고 이들의 DNA에 이런 태도는 여전히 살아 숨쉰다. 메노나이트 중앙위원회(MCC)의 세상을 향한 정의와 평화의 활동들은 온 세상의 기독교가 다 인정하고 있는 바다. 한국에 메노나이트 교회가 소개된 것은 한국 전쟁 후 북미의 메노나이트 활동가들이 한국에 정착해 학교를 세우면서 부터이다.

스위스 아나뱁티스트의 시조라고도 할 수 있는 콘라드 그레벨의 고백을 보자(헤롤드 벤더의 <재세례신앙의 비전>에서 인용했다).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그들의 삶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예전의 언약 하에 있지 않기 때문에,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세속적인 검을 사용하지 않으며, 전쟁에 참여하지도 않는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검에 위해 보호를 받지도, 또 그렇게 검으로 자신을 보호하지도 않는다.”

네덜란드의 메노 시몬즈는 거듭남의 교리를 이렇게 설명한다.

“새로이 개심한 사람들은…….자신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셔 낫을 만들 것이며, 더 이상 전쟁을 알지 못하는 평화의 자녀들이다……무력을 사용하는 것은, 사람의 피나 돼지의 피를 같은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이다.”

굳이 문제를 지적하라면 21세기에 이런 순종 아나뱁티스트들을 만나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세상의 글로벌화로 인해 수많은 인종과 배경을 가진, 나와 같은 후천적인 메노나이트들이 이미 메노나이트 교회의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이들이 이런 전통의 회중교회안에서 많은 긴장과 갈등을 생산해내기도 한다는 점이다. 교회의 목사들 역시, 내가 살고 있는 캐나다의 B.C.주의 경우는 비 메노나이트 전통에서 넘어온 경우들이 많다. 기독교 교단 중에서 메노나이트 교회는 타 교단의 목사가 이적하기 가장 손쉬운 교단이다. 이적의 조건이 ‘거의’ 없다. 회중이 원하기만 하면 어느 교단의 목사이건 환영한다. 이런 다원화, 다중화, 다문화된 오늘날의 메노나이트 교회에서 평화주의는 일치된 관점을 유지하기는 사실상 힘들다. 보라, 트럼프 지지자들이 나오지 않는가? 그리고 나와 같은 유색인종들의 메노나이트 교회가 과연 얼마나 세상의 정의와 평화에 대해서 간절히 사모해왔는가? (나는 전방 15사 출신이다. “김일성의 대가리를 갈아서 마시자”란 군가를 많이 불렀다.) 남북한 대치라는 지정학적 상황이 주는 불안감을 안고 있는 특수한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 안에서 과연 이런 아나뱁티스트들의, 자기 목숨까지 포기하는 비폭력적이고 비저항적인, 예수 중심적인 평화주의가 시작될 수 있을까? 또한 이런 암묵적 폭력지향성이 마치 애국의 표현이고 교회의 의무인 것처럼 교육되어온, 그리고 후에 그 어떤 인연으로 아나뱁티스트가 되겠다고, 메노나이트가 되겠다고 작정한 한국의 교인들에게, 이런 급진적인 사상과 행동의 전환이 가능할까? 칼이 보습이 되고 양과 사자가 함께 뛰노는 일이, 우리 살아생전에 한국 지형에서 과연 일어날 수 있을까?

이상으로 아나뱁티스트들의 영성을 그들의 고백의 역사를 통해서, 그리고 오늘의 시점에서 여전히 유효한 이들의 급진적인 신앙의 본질 세가지에 대해 나의 경험과 관찰과 비평적인 생각을 곁들여 살펴봤다. 자, 어떤가? 내가 전술한 내용들이 여러분이 생각해온 아나뱁티스트들의 진정한 모습인가? 아니면 여러분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가? 실망인가? 희망인가?

마지막으로 이런 아나뱁티스트의 영성과 고백의 과거와 현재가 21세기 한국 교회와 한국에서 새롭게 형성되는 아나뱁티즘과 메노나이트 교회에게 주는 당부는 뭔지 생각해 보자.

21세기 한국의 아나뱁티스트 메노나이트들이 나아갈 방향

역사적인 아나뱁티스트들의 영성의 골격인 이들의 급진성, 급진적인 믿음을 오늘의 21세기에서 구현해 내기는 쉽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그리고 내가 지금 북미에서 마주하는 메노나이트 교회/교인들의 급진성은 소멸됐다고 보는게 맞는 평가이다. 급진성은 ‘갈급함’을 먹고 자라는데 이들에게 갈급함을 찾기는 힘들다. 이들은 대단히 느긋하고 만족적이다. 21세기 북미의 메노나이트들은, 일부 스튜어트도 지적했지만, 이미 충분히 제도화됐고(교회질서와 교단성의 면에서), 백인중심적이고(인종주의의 면에서), 역사적인 반지성주의의 벽(배우면 도리어 신앙에 반대가 된다는 생각)을 넘어 충분히 지성적이고 지식적이고 스마트한 교인들이 되어 있다. 교인들 중에서 백만장자도 나오고 변호사도 나오고 의사도 나오고 경찰도 나온다. 학자들은 너무 많아 세기가 어려울 정도다. 물론 여전히 이들의 삶의 모습에는 가장과 사치가 없고, 단순하고 너그럽다. 자신들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 조심하고 자신의 삶 가운데 신앙적으로 충실하려고 애를 쓴다.

이런 이들의 교회가 쇠락하고 있다. 이 말은, 새로 들어오는 신자는 없고, 죽어가는 신자가 늘어난다는 말이다. 젊은이들은 메노나이트 교회의 전통적인 노아의 방주같이 생긴 독일식 교회에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떠나고, 과거의 향수에 젖은 머리가 은색으로 바뀐 전통 메노나이트 노인들이 자리를 채운다. 옆 동네의 메노나이트 형제(Brethren) 교회는 대대적인 투자를 해서 예배당을 현대화하고 교회 이름조차 커뮤니티 교회로 바꾸고, 누구든 막론하고 교회로 다 들어오도록 문턱을 낮춘다. “예수”만 빼고는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일 채비다. 그렇다. 설교자가 설교 시 커피를 마시든 앞에 나와 춤을 추든 말리지 않는다. ‘거의’ 자유가 허락되는 곳이 그들의 예배당이다. 이런 외부 사람들이 찾기 쉬운 좋은 위치에 있는 현대식 예배당을 지나 지역적으로도 한산하고 도시 외곽이고 한 50년동안은 외벽 색칠조차 안한 것 같은 교회가 나오면 이게 바로 메노나이트 교회다. 교회 간판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이들은 여전히 라면 국물도 남기면 보관해 뒀다 먹을 정도로 지독하게 검소하다. 이런 극도의 절약의 정신으로 예배당도 본인들이 직접 짓고 유지에 들어가는 비용도 최대한 아낀다.

메노나이트 교회에서 사용하기를 가장 싫어하는 단어들이 있는데 그것은 처치 플랜팅(교회개척)이고, 복음주의란 말이다. 이들은 인위적이고 급하고 목적 중심인 것을 아주 싫어한다(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이 누군지도 모르고 그가 쓴 책에도 관심이 없다!). 교회에는 그러니 거의 프로그램화되어 있지 않다(오, 아마추어리즘!). 교회가 비니 사람을 더 받기 위해서 교회 인테리어를 고쳐야 한다면 난리날 것이다, 이런데 돈을 쓰냐고!. 더 많은 유색인종을 받아 이문화, 다문화 교회로 가자고 하면 이것 역시 인간의 인위적인 프로그램 취급을 한다. 모든 게 자연스러워야 좋다는 게 이들의 주된 생각이다. 이들은 이런 면에서 교회의 쇠락과 멸망도, 인간의 필연적인 죽음의 과정과 같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교회가 죽어가고 있어요, 하고 외쳐도 누구 하나 소란 피우는 일이 없다.

과연 이들이 5백년전 아나뱁티스트 조상들을 닮아 오직 하나의 정신, ‘나흐폴게(Nachfolge)’의 정신으로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예수님을 쫓아갈 수 있을까? 초기 스위스 아나뱁티스트의 역사에서, 스위스 형제단이 세례를 받기 위한 후보자에게 던졌던 질문은 여전히 유효한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을 섬기는데 자신들이 잠시 맡고 있는 모든 재산들을 바칠 수 있는가?” 초기의 아나뱁티스트들은 두말하지 않고 이 질문에 ‘예’했다는 게 아닌가? 내가 만약 지금 메노나이트 교인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면 아마 미친 사람 취급할 것이다. 이들은 더 이상 다급하지도 않고 더 이상 예전의 그 다급하고 절박한 상황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제도와 교회와 가정의 유지. 이게 이들의 궁극적인 신앙의 목적인 듯하다.

이제는 한국 교회, 한국의 아나뱁티스트, 한국의 메노나이트들이 답할 차례다.

당신은 아나뱁티스트가 될 자발적인 의지가 있는가? 다시 세례를 받음으로 물과 더 나아가 성령과 피(고난)의 세례까지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있는 것 다 내려놓고 오직 예수만 따라갈 용기가 있는가? 평화와 화해와 정의의 사도가 될 수 있는가? 이런 길을 혼자 가기 두렵다면 같이 갈 운명의 공동체가 있는가? 공동체에 순종하고 공동체를 위해 살기를 작정하는가? 마지막으로 역사적 아나뱁티스트의 전통과 영성을 배우고 북미 메노나이트 교회의 복잡한 상황을 성찰해 한국의 상황에 맞는 한국적 아나뱁티스트의 정신을 새롭게 창조해낼 수 있는가? 유진 피터슨이 <메시지>를 통해서 보여줬고, 존 쉘비 스퐁 주교가 강조한 것처럼, 구대의 신경이나 고백이나 나아가 급진적 종교개혁의 정신을 21세기의 ‘살아있는’ 믿음으로 재현해 낼 수 있는가?

이 질문들에 대답하는 것은 더 이상 북미의 소위 전통 아나뱁티스트 후손인 메노나이트들만의 숙제가 아니다. 시대와 문화가 바뀌었고 영성은 흐른다. 누가 16세기의 아나뱁티스트 정신을 계승복원하고 새로운 시대에 맞도록 재창조낼 수 있는가는 더 이상 어느 특정 유럽계/백인/남성중심의 북미 메노나이트들의 고유한 역할이 아니다. 이제는 새롭게 아나뱁티스를 발견하고, 새롭게 아나뱁티스를 발전시킬 덜 타성에 젖고, 비주류에 속하며, 인종에 구별 받지 않고, 더 개방적이고, 더 신선한 시각을 가진 급진주의자들이 필요하다. 그건 어찌 보면 나와 당신 같은, 북미의 메노나이트들은 죽어도 상상할 수 없는, 아직은 먼 나라의 이웃 같은 하지만 오직 예수를 찾아 갈급한 심령으로 목숨을 걸고 산을 넘고 사막을 지나고 강을 건너는 그 옛날의 동방 박사와 같은 그 누군가일 수 있다. 급하다, 목이 탄다, 앞으로, 앞으로 전진해 나아가자, 생명의 근원을 찾아가자!


참고문헌

  • 스튜어트 머레이, 이것이 아나뱁티스트다, 대장간, 2011
  • 메노나이트 신앙고백 편찬위원회, 메노나이트 신앙고백, 2007
  • 파머 베커, 아나뱁티스트 크리스천, 2008
  • 피터 리더만, 후터라이트 신앙고백서, 2018
  • 해롤드 벤더, 재세례신앙의 비전, 2009
  • Denny Weaver, Anabaptists & Postmodernity, Pandora Press, 2000
  • Thomas N. Finger, A Contemporary Anabaptist Theology, IVP, 1989
  • Daniel Liechty, Early Anabaptist Spirituality, Paulist Press, 1994
  • Jill Raitt, Christian Spirituality, Crossroad, 1988
  • C. Arnold Snyder, Anabaptist History and Theology, Pandora Press, 1995

아나뱁티즘과 한국교회: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배덕만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교회사)


I. 글을 시작하며

코로나바이러스-19의 창궐과 함께 세상은 더 이상 예전과 동일하지 않게 되었다. 과학기술의 발달이 절정에 달하면서, 지리적·시간적 한계가 상당 부분 극복되고 물리적 환경에 대한 인간의 통제가 무한히 확장된 것 같던 바로 그 시점에, 코로나바이러스-19가 인간의 성취와 능력을 한순간에 조롱거리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런 재난은 교회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다. 현장 예배가 중단되고 성도의 교제가 단절되면서, 또한 지역교회들이 집단감염의 주범으로 떠오르면서 이미 추락한 한국교회의 사회적 평판은 바닥까지 떨어지는 것 같다. 텅 빈 예배당과 그리스도인에 대한 세상의 조롱은 이 시대 교회의 자화상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나뱁티즘에 대한 교계·학계의 관심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16세기 이래 주류 교회들에 의해 이단ㆍ광신도로 정죄되었기 때문에, 아나뱁티스트들은 오랫동안 세상을 등지고 살아야 했다. 무엇보다, 보수적인 장로교회가 압도적으로 우세한 한국에서 아나뱁티즘은 그동안 기피대상이었고, 지금도 편견과 오해의 그늘에서 충분히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아나뱁티즘이 한국사회와 교회 내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입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규모와 세력은 여전히 작고 소박하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과 삶의 방식은 조용히 그러나 뚜렷하게 한국교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제자도, 공동체, 평화는 어느덧 한국교회에서 익숙한 개념이 되었고, 이 가치들에 주목하고 실천하려는 그리스도인들의 수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앞으로도 지속될 전망이다.

이런 고민과 문제의식을 배경으로, 이 글은 아나뱁티즘의 역사와 신념을 간략히 정리하고, 한국적인 상황을 소개할 것이다. 특히, 타 교단에 속해 있지만,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의 유용한 대안으로 아나뱁티즘에 주목하는 학자들의 주장을 검토하면서, 아나뱁티즘에 대한 동시대 그리스도인들의 기대와 아나뱁티스트들이 감당해야 할 과제를 함께 살펴볼 것이다. 이로써, 지난 역사를 성찰하고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는 이 땅의 아나뱁티스트들에게 작은 응원과 도움이 되길 소망한다.

II. 교회사 속의 아나뱁티즘

1. 16세기 종교개혁과 아나뱁티즘

(1) 역사

중세 말 유럽은 근원적인 변화에 직면했다. 민족주의와 중상주의가 발흥하면서, 유럽의 정치와 경제에 지각 변동이 일어난 것이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와 인쇄술의 발전으로 인간에 대한 새로운 지식과 이해가 확산되면서 지식의 대중화가 빠르게 진척되었다. 이 과정에서, 문제의 핵심인 교황제와 봉건제를 개혁하려는 종교개혁과 농민전쟁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흔히, “급진적 종교개혁”으로 알려진 아나뱁티즘(혹은 재세례파운동)은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출현했다.

1525년 1월 21일, 스위스 취리히에서 조지 블라우록(George Blaurock)이 콘라드 그레벨(Conrad Grebel)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자신의 믿음을 성찰한 후 유아세례를 부정하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다시 세례 받은 것이다. 이후, 이 운동은 취리히 외곽으로, 즉 동쪽으로 상트 갈렌과 아펜첼, 서쪽으로 바젤과 베른, 북쪽으로 할라우, 샤프하우젠, 발츠후트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1527년 1월 펠릭스 만츠(Felix Manz)가 수장을 당하는 등 가혹한 박해를 겪었지만, 같은 해 2월 스위스와 독일 국경에 위치한 슐라이트하임(Schleitheim)에서 아나뱁티스트 지도자들이 회합을 갖고 「슐라이트하임 신앙고백서」를 발표했다. 이것은 자신들의 신념을 7개 조항으로 정리한 것[1]으로서, 그들은 이렇게 박해 속에서 내적 결속을 강화해나갔다.

스위스의 뒤를 이어, 독일 남부와 오스트리아에서도 아나뱁티스트 공동체가 출현했다. 이곳에선 스위스 형제단의 영향과 함께 독일 농민전쟁을 이끈 토마스 뮌처(Thomas Muntzer)의 영향이 지대했다. 한스 후트(Hans Hut)와 멜키오르 링크(Melchior Rinck)는 뮌처의 영향 하에 사회정의, 신비주의 영성, 역사적 종말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한편, 한스 뎅크(Hans Denck)는 사회개혁에 대한 관심은 부족했지만 신비주의적 성향은 공유했다. 스튜어트 머레이(Stuart Murray)에 따르면, 이 지역에서 4개의 하부 그룹이 탄생했다. “하나는 후트의 종말론적 비전을 따랐고, 두 번째 그룹은 뎅크의 신비주의적 영성을 받아들였고, 세 번째 그룹은 후트와 뎅크의 강조점을 혼합했으며, 그리고 네 번째 그룹은 분리주의자적 비전을 심화하였다.”[2]

독일 북부와 네덜란드에선 멜키오르 호프만(Melchior Hofmann)의 주도 하에 1530년대 초반부터 아나뱁티스트들이 급증했다. 호프만은 새 예루살렘이 스트라스부르크에 도래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후, “신비주의적, 계시적, 혁명적, 그리고 (정도는 덜 하지만) 성서주의적 요소들을 종합”한 “멜키오르파 아나뱁티즘”이 이 지역에서 유행했다. 호프만의 영향은 네덜란드로 이어졌다. 그 결과, 얀 마티스(Jan Mattys)와 얀 반 라이덴(Jan van Leiden)이 뮌스터를 새 예루살렘으로 선포하고 지방 군대와 전쟁을 벌였다. 뮌스터 시민들의 대량학살로 막을 내린 이 사건은 “초기 아나뱁티스트 역사 속에 가장 큰 재앙”[3]이었다. 하지만 이후 메노 시몬스(Menno Simons)를 중심으로 메노나이트라는 평화주의적 재세례파운동이 출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끝으로, 스위스, 독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로 확장된 아나뱁티즘은 예외 없이 혹독한 박해를 겪었다.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순교를 당했고, 일반 교인들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사실, 16세기에 수천 명의 아나뱁티스트들이 희생당했다.”[4] 이런 치명적인 위기 상황에서 많은 아나뱁티스트들이 모라비아와 그 너머 지역으로 피신했다. 1533년 무렵, 이 지역에서 야콥 후터(Jacob Hutter)의 영향 하에 “후터파”(Hutterites)로 알려진 아나뱁티스트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재화의 공동사용을 신앙생활의 중심으로 실천했다.

(2) 아나뱁티스트와 교회

아나뱁티즘의 역사는 이 운동의 지리적·문화적 다양성 및 각 그룹 내의 신학적·신앙적 복잡성을 보여준다. 따라서 아나뱁티즘의 신앙과 교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 운동 내부의 교회에 대한 생각과 실천을 중심으로 이들의 사상적 핵심을 살펴보자.

먼저, 아나뱁티스트들은 신약성경에 기록된 초대교회를 이상으로 설정하고, 이 교회의 회복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일차적으로, 아나뱁티스트들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한 국가와 교회의 통합(313년)을 교회의 변질과 타락의 근원으로 규정했다. 이런 통합 이후, 유아세례, 전쟁, 형식주의 등이 교회에 만연하여 초대교회의 순수성이 상실되었다는 것이 그들의 설명이다.[5] 이런 문제의식은 16세기 종교개혁이 진행되면서 당대의 주류 교회였던 로마가톨릭교회와 관주도형 종교개혁(Magisterial Reformation) 모두를 향한 통렬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그런 교황의 교회가 오류 위에 설립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교회의 기초가 오류 자체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교회가 참된 교회라고 인정할 수 없다.”[6] 동시에, 그들의 기준에서, 비텐베르크, 취리히, 제네바, 그리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 세워진 개신교회들도 규모와 범주의 차이만 있을 뿐, 국가교회로서 기존 가톨릭교회의 오류를 답습했을 뿐이다. 그래서 “아나뱁티즘은 이런 패턴과 완전히 결별했다.”[7]

이런 문제의식 하에, 아나뱁티스트들은 교회를 “신앙고백에 근거한 세례를 통해 자발적으로 신자들이 함께 모인 공동체”로 정의했다.[8] 이 정의는 아나뱁티스트 교회론의 핵심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무엇보다, 교회는 “신자들의 모임”이어야 한다. 이들이 믿는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는 “일치된 마음으로 한 하나님, 한 주님, 그리고 한 세례를 인정하는 사람들”로 구성된다. 또한, 교회는 이런 신앙고백의 토대 위에 세례 받은 사람들로 구성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런 고백을 전제하지 않은 유아세례는 인정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이 교회는 신자들이 철저하게 자발적인 결정에 따라 세례와 교회를 선택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유아세례와 특정 신앙(혹은 교회)을 법적으로 강제하는 국가교회체제도 용납할 수 없었다.

아나뱁티스트들은 “거룩한 존재들의 교회”를 추구했다. 비록, 하나님의 교회는 영과 진리에 속한 것이지만 기본적으로 거룩한 신자들로 구성되며, 그런 거룩함은 신자들의 개인적·공동체적 삶을 통해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표현·입증되어야 한다. 그런 신념에 따라, 이들은 교회의 참된 표지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1. 온전하고 순결한 교리
  2. 성례의 성경적 사용
  3. 말씀에 순종
  4. 진실되고 형제 같은 사랑
  5.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용감한 고백
  6. 그리스도의 말씀을 위한 억압과 환란[10]

이처럼, 이들은 교회에 대해 높은 영적·도덕적 기준을 설정하고, 출교를 포함한 엄격한 치리를 통해 자신들의 이상적 교회를 이 땅에서 구현하려했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모두 교회 내에서 죄인과 의인의 공존을 인정하며 가시적 교회의 불완전성을 정당화했다. 하지만 그런 신학과 관행이 아나뱁티스트들에게는 신학적 궤변으로 들릴 뿐이었다. 그들의 입장은 단호했다. “그러므로 불의한 사람과 죄인들, 창녀와 간음자, 싸움꾼, 술주정뱅이,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사람, 그리고 말과 행동으로 거짓말하는 사람 등으로 구성된 모임은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며, 그들은 결코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다.”[11]

이런 확신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했다. 그들은 개인적·교회적 차원에서 일체의 폭력을 반대했고, 국가적 차원의 폭력사용도 단호히 거부했다. 전쟁과 사형제도에 반대하며 양심적 병역거부를 실천했다. 물론, 이들 중에도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보다 긍정적으로 이해하며 적극적 참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12] 하지만 전통적으로 아나뱁티스트들은 검을 사용하는 국가의 공직자(특히, 군대와 경찰)가 되길 거부했다. 동시에, 이런 신념과 실천은 민족주의와 국가주의가 강화될수록 극심한 탄압과 박해를 감수해야 했다. 군대와 경찰로 정권을 유지하고 전쟁으로 국가적 영향력을 확대하거나 방어하는 시대에 이들이 주장하는 평화주의는 비현실적·시대착오적 광신주의요 반체제적 불온사상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이런 식의 신앙생활을 고수했다. 그들에게 고난과 순교는 제자도의 본질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재세례파에게 있어서 이 폭력적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완전이란 오로지 고난의 각오, 고난의 감수와 무저항의 순교를 통해서만 증거 될 수 있는 것이므로 관용과 인내야말로 참교회의 표식으로 통했던 것이다.”[13]

2. 21세기 아나뱁티즘

(1) 후터라이트(Hutterites)

후터라이트는 메노나이트, 아미쉬와 더불어 현존하는 또 하나의 아나뱁티스트 그룹이다. 이들은 함께 농사를 지으며 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있다. 이 공동체는 ‘형제들이 더불어 사는 장소’ 라는 의미로 부르더호프(Bruderhof)라고 불린다[14]. 이들은 성인세례와 신자의 세례, 무저항과 평화주의, 단순한 생활방식 등의 아나뱁티스트 신앙을 공유하지만, 공동체 생활과 재산 공유라는 생활방식 때문에 아미쉬․메노나이트와 구별된다.[15]

박해를 피해, 공동체생활을 시작했던 일군의 재세례파들이 1528년 아우스터리츠(Austerlitz)와 모라비아(Moravia)에서 첫 번째 부르더호프를 조직했고, 후에 야콥 후터(Jacob Hutter, 1500-36)가 이 그룹을 이끌었다. 후터가 화형을 당한 후, 그의 이름을 따라 ‘후터라이트’로 불리게 되었다. 이들은 종교적 자유를 찾아 모라비아에서 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러시아로 이주했다. 러시아에서 또 다시 박해를 받자, 천여 명의 사람들이 1874년부터 1879년 사이 미국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들 중 상당수가 남부 다코타(Dakota)에 세 개의 분리된 농업공동체를 건설했다. 슈미드로이트(Schmiedeleut), 다리우스로이트(Dariusleut), 레흐레로이트(Lehrerleut).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양심적 병역거부와 적국 언어인 독일어 사용, 전쟁채권 구매 거부 등의 이유로 또 한 차례 오해와 박해를 경험했다. 특히, 두 젊은이가 군대 수용소에서 학대와 고문으로 사망하자, 다수의 후터라이트가 종교의 자유를 찾아 캐나다로 이주했다. 그 결과, 현재 후터라이트의 2/3가 캐나다에 거주한다.

후터라이트 마을마다 공동체 중앙에 위치한 공동 식당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집들이 위치해 있고, 이 집들에서 여러 가족이 독립된 생활을 한다. 다른 건물들은 유치원, 학교, 세탁소, 그리고 여러 작업실과 산업시설을 위해 사용된다. 후터라이트는 사유재산을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1세기 교회처럼 물질을 공유하며 산다. 자동차, 라디오, 텔레비전, 잡지를 개인적으로 소유할 수 없으며, 오직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트럭과 스테이션왜건을 이용할 뿐이다. 이들의 삶은 매우 검소하다. 남자들은 검은 멜빵바지를 입고, 여자들은 물방울무늬의 머릿수건을 두르고 다채로운 색깔의 긴치마를 입는다. 구성원은 전체의 선을 위해 일한다. 모든 필요는 공동의 가게에서 제공되므로 아무도 월급을 받지 않는다. 후터라이트들은 일요일 아침과 저녁, 그리고 매일 저녁 식사 전 학교건물에 모여 예배를 드린다. 예배는 오스트리아 억양의 독일어로 진행되며, 찬송으로 시작되어 설교와 마침기도가 이어진다. 후터라이트들에게 독일어는 매우 중요하다. 한 공동체는 약 90-100명 정도로 구성된다. 120명-130명에 이르면 다음 공동체를 위한 장소를 물색하고, 자금을 저축하여 미래를 준비한다.[16]

후터라이트들은 자신의 아이들이 공동생활을 준비하고 교육시키는 일에 성공했다. 아이들 대부분은 8-9학년까지만 학교에 다니고, 여자는 대략 19-20세 남자는 20-26세에 세례를 받는다. 소녀는 22세 정도에, 남자는 조금 더 나이 들어 결혼한다. 산아제한은 금기사항이고, 경제적 어려움이 없으므로 출산율이 매우 높다. 여인들은 대체로 9명 이상의 자녀들을 낳는다. 하지만 이 공동체는 매우 가부장적이며, 여성들은 주요 직책이나 의사결정과정에서 배제된다. 한편, 이들은 이혼한 사람들을 공동체에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20세기 동안 북미에서 이혼한 후터라이트는 채 50명도 되지 않는다. 가족 및 친족 간의 유대가 매우 긴밀하며, 정신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도 거의 없다. 그 결과, 살인사건이 발생한 적도 없다. 존 A. 호스테들러(John A. Hostetler)에 따르면, “후터라이트는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세계 속에서 공동체로 살아가는 안정된 생활의 분명한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17]

(2) 네오-아나뱁티스트(Neo-Anabaptists)

스튜어트 머레이의 분류에 따르면, 현재 아나뱁티즘을 다음과 같은 4가지 형태로 존재한다.

첫 번째 그룹은 초기 아나뱁티스트들의 후예들인 메노나이트, 후터라이트, 그리고 아미시이다. 두 번째 그룹은, 이후에 시작된 다른 교단들이지만 아나뱁티즘에서 영감을 받은 이들로서 다양한 형제파 그룹들, 부르더호프운동, 그리고 일부 침례파이다. 세 번째 그룹은, 메노나이트와 형제파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말이암아 많은 나라에서 새로 생겨난 아나뱁티스트 교회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 번째 그룹은 새로운 아나뱁티스트들인데, 이들은 다른 기독교 전통들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자신들의 삶과 신앙의 형성과정에 아나뱁티즘의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한다.[18]

이 분류에서 네 번째 그룹이 바로 네오-아나뱁티즘에 해당한다. 이들은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반 미국 복음주의 내부에서 출현했다. 아나뱁티즘 전통의 신학자들, 특히 메노나이트에 속한 존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 1927-1997)와 로날드 사이더(Ronald James Sider, 1939- )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나, 각자의 교회전통 내에 머물면서 재세례파의 정신과 유산을 실천하고 있다. 무엇보다, 요더와 1972년 출판된 그의 저서 『예수의 정치학』(The Politics of Jesus)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현재, 스텐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 1940- ), 스캇 맥나이트(Scot McKnight, 1953- ), 낸시 머피(Nancy Murphy, 1951- ), 리처드 헤이스(Richard Hays, 1948- ), 크레이그 카터(Craig A. Carter), 제임스 맥클랜던(James McClendon, 1923-2000), 마이클 카트라이트(Michael Cartwright) 등이 이 운동을 이끌고 있다.[19]

이들은 제국주의적 정신에 대항하는 예언자적 입장을 고수하면서, 평화주의, 사회정의, 빈곤에 관심을 집중한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3년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결과, 신앙과 정치권력이 결합되고 교회의 본질이 훼손되었다고 판단한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미국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와 함께 자유민주주의와 소비자본주의의 정치경제학 모두에게 이중 충성을 바치고 있는데, 이것은 명백한 우상숭배다.[20] 따라서 이런 세상에서 신자들은 개인적인 삶뿐 아니라, 대안공동체로서 이에 능동적으로 저항해야 한다. 동시에, 그런 불복종 때문에 발생하는 세상의 공격과 비난 앞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방어하지 않고 보복하지 않고 그러나 적극적으로 용서하면서” 견뎌야 한다.[21] 이들에게 평화주의는 “기독교적 제자도의 근본적 징표이자, 복음의 핵심적인 윤리적 가르침”이기 때문이다.[22]

III. 한국의 아나뱁티즘

1. 메노나이트중앙위원회(Mennonite Central Committee, MCC)

한국과 아나뱁티즘의 만남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0월부터 시작되었다. UN이 최초의 MCC 직원의 한국 입국을 허락한 것이다. 메노나이트중앙위원회(Mennonite Central Committee, MCC)는 1920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설립된 이후, 세계 도처에서 다양한 구제활동을 전개해왔다.[23] 이제 전쟁으로 황폐화된 한국을 돕기로 결정하고, 국제적 승인도 받은 것이다. 1952년, MCC는 달라스 보랜을 한국에 파견했다. 그는 부산민간협회의 ‘봉사단체 연락사무관’으로 자신의 업무를 시작했다. 1953년에는 어니스트 래버와 데일 위버가 부산에서 봉사활동을 이어갔다. 특히, 그들은 대구에 MCC 한국대표부를 설립했고, 경산에서 농장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MCC가 대구를 자신의 사역지로 선택한 이유를 정성한은 메노나이트 직업학교의 초대 교장을 지낸 콜스(L. R. Kohls)의 글을 통해 다음과 같이 알려준다.

대구 지역이 우리 고아들에게 가장 좋은 지역으로 선택된 두 가지 이유기 있습니다. (1)대구는 북한에서 공산주의 압제를 피해 온 많은 전쟁피난민들의 중심지였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2)대구가 한국에서 가장 많은 도움이 필요한 지역들 중에 하나이지만, 그럼에도 대구는 수많은 외국 자원 봉사 단체들로부터 가장 외면당하는 지역 가운데 하나입니다.

콜스(L. R. Kohls)의 글 [24]

MCC는 1971년까지 20년간 74명의 메노나이트 봉사자를 한국에 파견했다. 그들은 대구와 경산뿐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지역과 거리를 불문하고 기꺼이 도움을 주었다. MCC의 한국사역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1)물자구제사역: 우유, 쌀, 의복, 침구, 음식을 화천, 인천, 수원, 경남 지역 등지에서 분배. (2)메노나이트직업학교(1953년 설립): 고아 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6년제 중고등과정으로, 철공, 목공, 인쇄, 농업 교육. (3)가족/어린이 지원 프로그램(1962년 시작): 가난으로 깨진 가정의 회복을 위해, 사업 자금, 생활비, 양식, 교육비, 의료진료와 주택건축비 제공. (4)전쟁미망인 재봉기술교육(1954): 대구지역의 어려운 처지에 놓인 미망인 30명에게 바느질을 교육하고 졸업생들의 재봉틀 구입 지원. (5)농촌지도(1960): 농민학원, 농업협동조합, 축산업 중심으로 농업 전환, 복음전파 등 일종의 재건 프로그램. (6)평화사역(1965): ‘동남아시아 평화 노동 캠프’를 개최한 후 한일화해위원회를 조직하여, 일본이 식민지 시대에 파괴한 수원제암리교회 예배당 복구를 위해 3만 불 모금. (7)기타: 대구와 부산에서 병원자문봉사, 지역개발봉사, 기독교 아동 위탁교육 진행.[25]

MCC는 1971년에 한국사역을 마감했다. 한국의 경제가 안정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반면, 과거의 한국처럼 전쟁의 상처가 깊은 베트남에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62년, 한국인을 대표로 하는 재단법인이 설립되었다. 그리고 1971년 3월 31일, MCC는 한국 사역을 공식적으로 마무리했다.[26]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20년간 한국에서 역동적으로 사역하면서 대단히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지만, MCC가 교회를 세우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메노나이트교회가 다른 개신교 교단이나 선교단체와 구별되는 중요한 특징이다. 조응태는 당시 메노나이트교회의 판단을 다음과 같이 전해준다.

메노나이트 교회는 선교와 구제-봉사사역을 구분하여 수행한다는 독특하고 철저한 원칙이 있는데, 초창기의 메노나이트 사역자들이 보기에는 한국 내에 이미 많은 교회들이 성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또 다른 교회를 세우는 것보다는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돕는 것이 메노나이트가 해야 할 일이라 판단하였다.

조응태 [27]

MCC가 한국에서 철수한 후에도 메노나이트와의 관계가 메노나이트 직업학교 동문 모임을 통해 지속되었다. 동시에, 한국에서도 메노나이트교회가 개척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꾸준히 제기되었다.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한 한국에게 더 이상 메노나이트의 경제적인 도움은 필요치 않았다. 하지만 빠르게 세속화되는 한국교회와 여전히 전쟁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한국사회는 “제자도 공동체 평화”를 추구하는 메노나이트교회의 영적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거부할 수 없는 시대의 요청이었다.

2. 춘천예수촌교회

MCC가 한국을 떠난 후에도 이 단체의 활동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 존재했고. 그들 중에는 메노나이트교회의 설립을 소망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소망은 오랫동안 성취되지 못했다. 그렇게 20여 년이 흐른 1996년 1월, 춘천에서 소수의 가정이 모여 예수촌교회를 설립했다. 이 땅에 세워진 최초의 아나뱁티스트교회다. 이 교회에 모인 사람들은 교회 설립 3년 전부터, 성경과 상관없는 종교로 퇴화하는 한국교회에 대해 고민하며, “참된 교회원리를 발견하기 위해” 토론과 공부를 이어갔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공통적으로 아나뱁티스트에 감동하였다.”[28]

“제자도와 공동체의 원리를 근거로 세상을 섬기는 평화와 화해의 공동체”를 추구하는 예수촌교회는 자신의 비전을 구체적으로 실험ㆍ실천해왔다. 먼저, 예수촌교회는 담임목사제가 아닌 4 가정의 복수리더십를 유지하고, 가정교회(고을)를 중심으로 교회를 운영한다. 이들은 교회 안에 고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고을이 모인 것이 교회라고 생각한다. 이런 구조와 정신 속에서, 은사중심의 평등하고 다양한 사역을 전개하고 있었다. V-School(기독교원안학교), 어글로우(여성중보사역), 금잔디 봉사(장애인 미술치료봉사), 부부학교(부부상담, 치유), KAC(한국아나뱁티스트센터), 시대분별모임, 새둥지(저소득 이혼 여성 쉼터)가 대표적인 예들이다.[29]

메노나이트교회로서의 특징은 이 교회의 예배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성령의 역동성과 공동체성을 추구하기에, 아이들을 포함하여 전 가족이 함께 예배에 참여하고, 설교 후에는 지체들이 설교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자유롭게 나눈다. 예배를 마칠 때도 목사의 축도 대신 모두가 함께 서로를 축복한다. 교회 내에서 안건을 처리할 때에는, 다양한 회의로 여론을 수렴하고 만장일치로 결정한다. 끝으로, 교회의 양적 성장을 추구하는 대신, 일정한 인원을 초과할 경우 지속적으로 교회분립을 추진한다. 그 결과. 2013년에 예수마음교회가 분립되었다. 그 외에도, 북미 메노나이트 교회와 교류하고, 한국아나뱁티스트센터(KAC)도 설립했다.[30]

3. 한국아나뱁티스센터 (Korea Anabaptist Center, KAC)

한국에서 16세기 아나뱁티스트운동의 소중한 유산을 계승ㆍ확산하길 윈했던 화천의 아바샬롬공동체와 춘천의 예수촌교회 교우들이 이런 비전을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공유하고 캐나다 메노나이트 교회와 협력한 결과, 2001년 한국아나뱁티스트센터(Korea Anabaptist Center)가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이 센터의 설립목표는 “성경에 근거한 아나뱁티스트 관점의 제자도, 평화, 공동체 삶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며 이를 위해 네트워크, 교육, 출판을 통해 개인, 단체. 교회를 섬기는 것”이다. ‘제자도, 평화, 공동체’가 이 센터의 설립가치다.

KAC의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사역은 아나뱁티스트 관련자료(1000권 이상)를 수집하고 대중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도서관/자료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동시에, 시대에 맞는 강연회와 세미나도 정기적으로 개최한다. 특히, 세계적인 석학을 초대하여 순회강연회도 진행했다. 스튜어트 머레이(2013)와 존 로스(2016) 초청강연이 대표적인 예다. 뿐만 아니라, MCC 국제문화 체험프로그램을 통해, 2002년부터 2017년까지 국내 청년 26명을 북미로 파송하고, 20여명의 북미 청년을 한국에 초청하여 봉사할 기회를 제공했다. 아나뱁티스트출판사(Korea Anabaptist Press)도 설립하여 15년간 총34권의 책과 1개의 DVD를 제작했다. 하지만 2017년부터 출판 업무를 대장간출판사(대표 배용하)로 이관하고 업무를 종료했다. 그 외에도, 자급자족을 위해 평화 커피숍과 평화 및 관계 중심의 어학원을 운영했고, 동북아시아 평화훈련 프로그램도 진행했다. 현재는 2016년 설립된 한국메노나이트교회연합회(Mennonite Church South Korea)와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 2001년부터 2011년까지 서울에서 사무실을 운영했으나, 2012년에 춘천으로 이전했다.

4. 한국평화교육훈련원 (Korea Peacebuilding Institute, KOPI)

한국평화교육훈련원(Korea Peacebuilding Institute, KOPI, 원장 이재영)은 2001년 KAC의 ‘평화교육부서’로 출발하여, 2012년 남양주 덕소로 사무소를 이전하고 독립했다. 치유와 화해의 정의를 강조하면서, 학교, 조직, 도시, 사법 영역에서 회복적 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06년에는 자체적으로 ‘동북아시아평화교육훈련원’(Northeast Asia Regional Institute)을 설립하고, “동북아시아 지역의 평화적인 구조와 문화를 형성”하기 위해 2009년부터 ‘동북아시아 청소년 국제평화캠프’를 진행하고 있다. 지금까지 동북아시아 지역을 비롯한 10개국의 대학(원)생, 교수, NGO 활동가, 교사, 종교인 등 250여 명에게 평화교육(peacebuilding)을 실시했다.

2014년에는 “한국사회에 평화로운 공동체 문화를 만들기 위해 회복적 정의의 적용에 대해 연구하고 실천하는 것”을 목적으로, ‘사단법인 한국회복적정의협회’를 설립했다. 이후, 회복적 정의 컨퍼런스와 아카데를 개최하고, 민간자격증을 발급하며. 부설로 연구소와 실천센터도 문을 열었다. 2015년에는 피스빌딩을 건축하고 사무실을 이전했으며, 피스빌딩 출판사와 ‘서클 커피 앤 베이커리’도 시작했다. 현재, 피스빌딩에는 20여 명이 살고 있다.[32]

5. 한국메노나이트교회연합 (Mennonite Church South Korea, MCSK)

2016년, 한국메노나이트교회연합(Mennonite Church South Korea, MCSK)가 설립되었다. MCSK의 탄생을 위한 여정은 2010년부터 시작되었다. 이 해에 배용하와 전남식 외 3인이 MC-Canada 총회를 방문했고, 이들을 중심으로 ‘한국아나뱁티스트펠로우십’(Korea Anabaptist Fellowship, KAF)이 2011년에 조직되었다. 2012년에는 MC-USA 총회에 참석하여, 교제의 지경을 캐나다와 미국으로 확장했다. 같은 해 11월, KAF는 내부의 결속과 학습을 목적으로 「한국아나뱁티스트저널」(Korea Anabaptist Journal)을 창간했다. 2021년 현재 22호까지 발간되었다.

이렇게 회원들 간의 교제를 심화시켜 가던 2015년, KAF는 그때까지 유지하던 교제의 수준을 넘어 교단으로서 교회연합체 구성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하기 시작했다. 6개 교회가 모여 4차례 진행된 회의를 통해 <제주신앙고백>을 작성하고 맴버십 기준을 세운 후, 각 교회의 참여여부를 물었다. 최종적으로, 춘천예수마음교회, 논산평화누림교회, 진해주빌리교회, 제주하늘가족교회가 신앙고백에 서명하고 ‘한국메노나이트교회연합’을 출범하기로 결정했다.

2016년 2월 20-21일, 제1회 MCSK 컨퍼런스가 제주에서 개최되었다. 이 모임에서 창립예배를 드림으로써 MCSK가 공식적으로 탄생했다. 그 결과, 2017년부터 Mennonite World Confernece(MWC)의 한국 대표가 KAF에서 MCSK로 변경되었다. 이후, 자체 목회자 훈련을 위한 교육을 시작했으며, 매년 교회를 돌아가며 총회도 개최했다. MCSK 배용하 대표가 세계총회에 꾸준히 참여하며 해외 교회들과의 유대 및 친교도 강화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KAC 및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와 꾸준히 협력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국내의 정치적 상황과 쟁점에 따라, 자신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천명하기도 했다. 2016년 11월, 국정농단 시국성명서를 발표한 것, 그리고 2020년 7월, “종교적 신앙에 따른 병역거부와 대체복무에 관한 입장문”을 체택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33]

IV. 한국교회 vs. 아나뱁티즘

다양한 영역의 학자들이 아나뱁티즘을 연구하여 논문을 썼다. 이들 대부분은 한국교회가 처한 내적 문제와 외적 위기를 진지하게 인지하면서, 각자의 전공영역에서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의 대안으로 아나뱁티즘을 제시했다. 이제 몇 가지 영역으로 구분하여 그들의 주장을 살펴보자.

1. 교회개혁의 모델

한신대학교 교회사 교수 김주한은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 2019년에 발표한 <2019년 주요 사회 현안에 대한 개신교인의 인식조사 보고서>를 통해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가 한국사회 종교들 가운데 최하위임을 지적한다. 동시에, “성장주의, 배타주의, 분열주의”가 한국개신교의 특징적인 현상이자, “개신교회의 사회적 공신력을 실추하게 만든 주요인”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진단 하에, 한국개신교회가 극복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가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회복”이라고 단언했다. 교회사역이 신뢰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34]

이런 맥락에서, 김주한은 신자유주의 광풍에 힘없이 무너지는 한국교회의 개혁과 회복을 위해 아나뱁티즘, 특히 기독교 공산체제의 대표적 모델인 후터파에 주목한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종교의 자유에 대한 염원, 진정한 기독교적 삶의 한 모델, 교회에 대한 새로운 개념규정 같은 후터파의 특징이 “경제세계화” 앞에서 본질에서 벗어난 교회가 자신의 실추된 사회적 신뢰도를 회복하는데 중요한 도움이 될 수 있다. 추락하는 한국교회가 개혁과 회복을 위해 아나뱁티즘에 주목해야 할 현실적인 이유다.

분명 후터파가 꿈꾸었던 이상들은 기성교회에 도전이었다. 그들의 공산체제(communal living)는 그 어떤 그룹도 달성해 보지 못했던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독특한 모델이었고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낯설게 보여 지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후터파가 제시한 비전들이 인간사회의 재형(reconstruction)을 위한 청사진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가 강조했던 “하나님 나라는 지금 여기 세상 한 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가르침을 충실하게 믿었고 즉시 실행해 옮겼던 그리스도의 충실한 제자들이었다. 경제세계화의 논리 앞에 국가도 교회도 모두 경영체계로 재편되고, 그 과정에서 교회 또한 사회적 공신력이 실추되고 있는 마당에 후터파가 주창했던 가치들은 분명 현실적 테제로써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김주한 [35]

2. 평화운동의 모델

아나뱁티스트들, 특히 메노나이트교회는 오랫동안 국가적·종교적 폭력에 의해 참혹한 피해를 입었다. 그것은 그들이 제자도와 평화를 신앙의 요체로 신실하게 실천한 결과였다. 그들은 이런 현실적·역사적 경험을 통해, 평화를 고백하고 실천하며 교육해왔다. 반면, 이념적 갈등에 의해 분단과 전쟁을 경험한 한국사회와 교회는 아나뱁티스트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다. 오히려 민족종교, 호국종교, 국가종교, 애국종교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며, 전쟁과 분단을 성경과 신학으로 정당화해온 것이다.

따라서 김경중의 우려처럼, “한국에서 아나뱁티스트 신학을 적용하는데 가장 어렵게 느끼는 부분은 아마도 비폭력과 평화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36] 이런 상황에서 고신대학교의 역사신학 교수 이상규와 한신대학교 김주한은 메노나이트교회의 평화전통을 대단히 높이 평가하면서, 한국교회의 중요한 교훈과 대안으로 제시한다.

아나뱁티스트 전통을 이은 메노나이트교회의 비폭력(non-violence), 반전 운동(anti war movement),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conscientious objection to the military service). 화해(reconciliation), 앙갚지 않음(un-retaliation) 등과 같은 평화주의 이상과 전통은 근본적으로 이들이 이해한 제자도 정신이며, 이는 그리스도를 본받음(imitatio Christi)이다. 전쟁을 준비하는 오늘의 현실에서 진한 감동을 주고 있다. 더욱이 이런 이념을 지키기 위해 신념의 희생자가 되기를 자처했다는 사실은 더 큰 감동을 주고 있다. 따지고 보면 메노나이트교회의 평화주의가 현대의 비폭력 평화주의, 혹은 반전 비전 등 절대적 평화주의(absoluter Pazifismus) 사상의 연원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상규 [37]

기독교평화운동의 효시는 아나뱁티스트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육강식의 지배논리가 팽배해 있는 현 세계질서와 핵무기와 각종 대랑살상무기들이 양산되어 인류의 생존뿐만 아니라 지구생태계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는 현실에서 아나뱁티스트들의 핵심가치인 비폭력 평화주의 노선은 평화를 갈망하는 모든 세력들에게 중요한 모델로 수용될 필요가 있다.

김주한 [38]

3. 선교의 모델

한국교회는 20세기 개신교 선교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다. 동시에, 21세기 세계선교를 주도하는 대표적인 교회이기도 하다. 하지만 선교는 한국교회의 모든 문제가 농축되어 있는 또 하나의 ‘고민거리’임에 틀림없다. 한국교회와 선교사ㆍ선교지가 운명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교마저 자본주의와 물량주의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무분별한 경쟁과 분열에 신음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처럼, 어려운 국내외 선교 상황에서 서울신대 선교학 교수 최형근은 아나뱁티스트운동을 중요한 대안과 해법으로 제안한다. 더 이상 국가적 특혜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아나뱁티스트들에게 겸손히 배워야 한다.

한국교회의 선교와 연관하여 제자도와 공동체를 통해 삶으로 복음을 살아내며 증언하려는 아나뱁티스트 운동이 주는 교훈은 매우 중요하다. 한국교회의 선교와 전도가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해 세상으로 보냄받은 선교사로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성공과 효율성을 담보하기 위해 다양한 자본주의적 자유시장 경제의 원리를 무비판적으로 도용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 이러한 한국 교회의 선교의 형태에 대한 도전을 우리는 아나뱁티스트 운동을 통해 받을 수 있다. 그들은 타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 어떠한 강제력이나 물리력, 막대한 경제력 혹은 정부의 공권력 등을 활용하지 않았다. 이들은 신자들의 교회로서 세상 속에서 신자 됨과 교회됨의 모습을 보여주므로 복음을 증거했다. 후기 기독교 왕국과 다원주의 사회에 살아가는 우리는 이제까지 교회가 누리던 모든 특혜와 권리를 상실하고 소수자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복음의 진리를 살아내며 기독교 신앙의 정성을 보여줄 수 있는 방식을 아나뱁티스트 전통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최형근 [39]

한편, 평화운동연구가 정성한은 한국전쟁 때 한국에 입국하여 헌신적으로 구제사역을 전개하면서도 끝까지 교회를 세우지 않았던 MCC의 사례를 매우 중요한 선교의 모델로 주목한다. 일차적으로, 그는 선교가 결국엔 교회설립과 교세확장으로 환원되고, 봉사와 개혁마저 교회 설립을 위한 보조수단으로 간주되며, 기존의 교회들을 무시하거나 경쟁하며 교회를 개척하는 현재의 선교풍토를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이런 현실에서 발견하는 MCC 역사는 가히 충격적이다. 선교마저 길을 잃은 상황에서 아나뱁티스트 선교정책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이유다. 선교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한국교회에 국내외를 막론하고 선교행위는 많으나 그 선교 행위에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제자도가 있는지, 선교의 과정이 평화를 주는 행위인지, 선교의 결과가 선교 대상자가 속한 여러 기초 공동체들을 세우는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 여전히 경쟁적으로 교파를 심거나 교회를 세우는 행위가 옳은지는, 굳이 세계 교회와 한국교회가 걸어온 역사적 발자취를 다시 연구해 보지 않더라도, 재세례의 한국 사역을 통해 교훈을 얻을 수 있다…그들[MCC]은 한국전쟁으로 황폐해진 이 땅에 들어와 가난하고 병든 사람과 고아와 과부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하고 가족 공동체와 마을 공동체를 회복시켜 평화의 삶을 살게 했다. 그들은 자신들보다 앞서 들어온 한국의 교회들을 존중했고, 한국교회들이 놓치고 있는 부분들을 묵묵히 감당해주었다. 결국, 그들은 한국교회를 섬겨 준 것이다. 그들에게서 우리는 교회의 또 다른 차원을 보게 된다.

정성한 [40]

4. 영성의 모델

김주한은 영성적 측면에서도 아나뱁트즘에 주목했다. 특히, 아나뱁티스트 영성을 “도전적인 제자도”(dissident discipleship) 영성으로 명명한 데이비드 옥스버그(David Augsburger)에게 주목했다. 옥스버그는 “참 자아를 발견하고, 참되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하나님을 대하듯이 이웃을 대하는 삶”을 삼차원적 영성이라고 설명하면서, 아나뱁티스트들을 이런 삼차원적 영성을 추구한 사람들로 규정했다.[41] “물량주의와 성장주의, 교회의 사사화와 극우반공주의로 무장한 전투적 근본주의로 사회적 공신력을 상실한 한국 개신교회의 현실”을 고려할 때, “아나뱁티스트들의 통합적인 영성신학은 개혁을 위한 중요한 자원”라는 것이 김주한의 결론이다.

아나뱁티스트들의 영성신학은 “공적 신학”과 연결된 많은 종류의 담론들을 제공한다. 아나뱁티스트들의 신학과 교리는 전통적인 기독교 가르침과 충돌하는 측면도 있지만 세상적인 가치와 타협하거나 거기에 매몰되지 않고 그들만의 독특한 신념을 고수함으로서 “기성 기독교세계의 위기”로. 그리고 “기존 세상질서의 위기”로 존재해 왔다. 그러나 하나님나라는 사적 영역이 아니라 공적인 것이기 때문에 아나뱁티스트들이 주장하고 실천해 온 제자도와 공동체 영성에 기초한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정의와 평등, 평화, 연대와 사랑은 참된 기독교 표지로서 주장되고 적용될 필요가 있다.

김주한 [42]

5. 기독교교육의 모델

21세기 한국교회를 위한 아나뱁티즘의 가치를 주목한 학자들 중에는 기독교교육학자들도 있다. 예를 들어, 침례신학대학교의 김난예는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가 추락한 현실을 개탄했다. 그가 인용한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의 <2018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의식조사>에 따르면, 한국교회에 대한 비개신교인의 이미지는 “이기적(68.8%), 물질중심적(68.5%), 권위주의적(58.9%)로 나타난 반면, 남을 잘 돌보고(14.3%), 약자 편에 서며(9.5%), 도덕적이고(8.3%), 교회 밖 세상과 잘 소통한다(8.3%)”는 것으로 드러났다.[43]

이런 조사 결과를 직시하면서, 김난예는 아나뱁티스트 공동체의 가치와 의미를 새롭게 조명한다. “철저하게 예수 따라 살기”를 강조하면서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의 구현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이 운동은 현재 한국교회 주류와 큰 차이가 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아나뱁티즘과 아나뱁티스트 공동체는 한국교회의 신뢰도 위기 극복을 위한 하나의 훌륭한 길잡이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44]

동시에, 김난예는 아나뱁티즘을 한국교회 일반, 특히 기독교교육의 대안적 모델로 제시할 뿐만 아니라, 이 모델을 한국교회의 교인과 목회자, 그리고 기독교교육자 들이 몸소 실천해야 한다고 강력히 촉구한다. 이런 실천을 한국교회의 생사가 달린 문제로 인식하기 때문에, 김난예의 결론은 단호하고 간절하다.

기독교교육은 말과 하나의 이론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예수 따라 사는 삶으로 모범을 보이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며, 그분을 따라 살아가는 교회공동체가 무엇인가를 머리와 삶으로 느낄 수 있도록 실천적이어야 한다. 또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겪어야 되는 어려움들을 넘어설 수 있는 철저한 예수 사랑을 경험하면서 종말론적 신앙으로 예수를 따라 살아가도록 기독교교육 지도자들과 목회자들이 모범을 보여야 한다. 목회자들과 기독교교육자들이 예수 따라 살기를 몸과 삶으로 보여주지 않는다면 한국교회의 신뢰회복은 어려울 것이라 여겨진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기독교인들이 다시 철저하게 예수 따라 살기의 삶을 살아가므로 세상의 신뢰를 회복하는 가운데 한국교회의 희망으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기대해본다.

김난예 [45]

6. 목회상담의 모델

목회상담학자 김용민은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의 주류에 편입된 결과, 본래의 순수성이나 예언자적 특성을 상실하고 사회의 존경 대신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고 개탄한다. 특히, 한국교회와 사회의 상관관계는 목회상담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쳐,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즉, 정부로부터 보조를 받는 경우, 국가권력이나 이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불가피하게 균형이나 본질을 상실한 상담으로 변질될 위험이 상존하는 것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목회상담이 외부적인 요인에 크게 휘둘리지 않고, 동시에 기독교의 본질을 건강하게 유지하면서 상담의 본래적 기능에 충실하려면, 아나뱁티즘의 정신과 유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용민이 제시하는 문제의 해법이다. 그는 (1)신자들의 교회로서 목회상담(자발성 강조, 하나님의 선수를 인정, 공동체 강조), (2)제자도로서 목회상담(선교적, 경제적, 평화적 목회상담), (3)정교분리로서 목회상담(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정부보조에서 자유로우며, 국가보다 하나님의 뜻을 우선하는 목회상담)을 아나뱁티즘에서 차용한 후, 다음과 같이 그 의미와 가치를 천명한다.

역사 속에서 아나뱁티스트는 하나의 분파로서 기독교의 주류에 들어오지 못했다. 그러나 분파로 존재하면서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했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 사회의 주류로서 지탄의 대상이 된 한국교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있다. 아나뱁티스트의 신앙과 실천에 근거한 목회상담은 현재 한국교회가 그대로 수용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정경유착의 형태로 드러난 한국교회가 좀 더 건강한 모습을 지니기 위해서는 아나뱁티스트의 신앙과 실천에 근거한 목회상담을 통해서 스스로를 점검하고 필요한 부분은 실천할 필요가 있다.

김용민 [46]

7. 코로나 시절의 대안

2020년부터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바이러스-19는 인류역사의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이다. 기근, 질병, 전쟁을 스스로 극복하면서 인간이 신의 반열에 올랐다는 유발 하라리(Yubal Harari)의 당찬 선언을 순식간에 무력화시키면서, 인류가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다.[47] 21세기에 이런 경험을 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 바이러스의 창궐은 교회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다. 교회가 전염병 앞에 무기력한 것은 14세기나 21세기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교회 현장예배가 중단되면서, 한국교회 영성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한국사회 내에서 개신교회의 위상도 ‘벌거벗은 임금님’에 불과했음이 여과 없이 폭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목회자와 신학자 들이 해법과 탈출구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침례신학대학교 역사신학 교수 김태식이 2021년에 발표한 논문, “코로나 팬데믹 이후의 신앙공동체 영성: 아나뱁티스트 신앙의 특성과 현대적 적용”도 그런 노력 중 하나다. 그런데 그는 현재 당면한 코로나팬더믹 상황과 한국교회의 뒤틀린 영성을 연결하고, 그 대안으로 아나뱁티즘은 제시한다. 아나뱁티즘에 대한 기존의 오해와 편견을 극복하고, 오히려 아나뱁티즘이 실천해온 이 제자도, 공동체, 사랑과 비저항을 한국교회가 진지하게 수용ㆍ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아나뱁티스트들은 유아세례거부, 병역거부, 극단적 평화주의자들로 규정하고 시대에 맞지 않는 신앙인들로 여겨져 왔다. 신학적인 차이가 각 교단마다 다를 수 있지만 오늘날 이들이 추구하는 핵심가치들은 배금사상이 지배하고 교권이 난무하고 자연환경을 파괴하면서까지 성장우선주의로 나아갔던 우리의 삶과 목회현장을 되볼아보게 하고 있다. 성경공부모임에 참여하기보다 주님이 걸어가신 길을 걷고(제자도), 지나친 경쟁의식으로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린 개교회 성장주의 보다 신앙공동체를 이루어 서로 돕고 격려하고(형제애), 환경을 파괴해서라도 나만의 유익을 위하던 자세에서 환경과 화해와 평화를 추구하는 이들의 신앙과 삶을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교단의 입장에 따라 신학은 다를 수 있으나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하는 이들의 삶이 코로나펜데믹 시대에 하나의 대안이 되길 기대해본다.

김태식 [48]

IV. 글을 마치며

이제 글을 마무리하면서, 지금까지 소개한 아나뱁티즘의 역사와 다양한 학자들의 평가를 토대로, 한국아나뱁티즘의 미래를 위해 몇 가지 제안을 드리고자 한다. 한국사회와 교회가 처한 현실을 고려할 때, 비록 타 교단과 교회에 비해 역사가 매우 짧음에도 불구하고, 아나뱁티즘이 이 시대 한반도에서 감당해야 할 책임과 역할이 결코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먼저, 아나뱁티스트들은 자신의 전통과 유산을 한국교회에 지속적으로 소개하고 널리 알려야 한다. 그동안 ‘준 국교’ 수준의 특권적인 지위를 향유하던 한국교회의 황금기는 이제 정말 끝났다. 종교다원적 사회와 세속화 시대에, 한국교회는 국가의 특혜 없이 타종교와 경쟁하고 무신론자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이것은 현재 한국교회에게 너무 낯선 환경, 당혹스런 경험이다. 반면, 역사 속에서 이런 처지를 오랫동안 처절하게 경험한 거의 유일한 개신교 전통이 바로 아나뱁티즘이다. 그들만이 이런 상황에 대한 역사적 경험과 생존방법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강도 만난 유대인’ 같은 한국교회에게 아나뱁티즘이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주어야 한다. 자신의 역사와 경험을 널리 공유함으로써 말이다.

둘째, 아나뱁티스트들은 자본과 폭력의 세상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으로 사는 법’을 몸소 보여주어야 한다. 21세기 한반도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매우 예외적인 경험이다. 한반도는 초강대국들 틈에서 민족이 분열된 상태로 존재하는 위험한 땅이다. 미국의 절대적인 영향력 하에서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공간이다. 아직도 전쟁의 상처와 이념적 갈등이 생생히 남아 있는 나라다. 이런 곳에서 성경적 가치를 추구하며 예수의 제자로 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성령보다 맘몬의 힘이 더 세고, 십자가 복음보다 반공이데올로기가 더 영향력 있는 종교에 물든 사람들에게 아나뱁티즘의 가르침은 ‘그림의 떡’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제야말로 그것이 몽상가의 헛된 꿈이 아니라, 하나님의 실현가능한 비전임을 공포와 불신에 사로잡힌 이 땅의 “도마들”에게 분명히 보여주어야 한다. 자신의 상처를 몸소 보여주신 “예수님”처럼 말이다.

셋째, 아나뱁티스트들은 타 교파ㆍ교회의 형제자매들과 끊임없이 대화와 친교를 시도해야 한다. 16세기의 기억은 주류 개신교회와 아나뱁티스트들 사이에 큰 상처와 편견을 남겼다. 부패한 가톨릭교회를 개혁하겠다고 분연히 일어섰던 형제자매들이 비본질적 혹은 부차적인 문제로 분열하고 말았다. 이후, 양자는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고 상대방을 악마화하며 500년을 살았다. 원한과 공포 속에 헤어진 형제 야곱과 에서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제 그 시절이 지났다. 세상과 시대도 완전히 바뀌었다. 16세기에 죽음까지 불사하며 싸웠던 문제들은 더 이상 치명적이지도 결정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종교 일반이 공멸할 새로운 위기에 봉착해 있다. 과거의 기억에 얽매여 등 돌리고 살 수 있는 한가한 상황이 아니다. 다시 만나 얼굴을 비비며 통곡하고 화해한 야곱과 에서처럼, 서로 다시 만나 대화하고 회해하며 새로운 미래를 개척해야 한다. 누구도 완전하지 않지만, 누구도 완벽한 죄인이 아니다. 이제, 이 만남과 대화의 손길을 ‘착하고 용감한’ 아나뱁티스트들이 먼저 내밀어야 하지 않을까?

끝으로, 아나뱁티스트들은 한국교회가 세상과 소통하고 세상에 유익한 종교임을 입증해야 한다. 오랫동안 아나뱁티즘은 박해를 피해 은둔과 도피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이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세상에서, 아나뱁티스트들의 역사적 유산과 현재의 생활방식은 단지 한국교회뿐 아니라, 한국사회를 위해서도 매우 유용하고 적절한 모범이 될 수 있다. 분단과 전쟁의 위협 속에서 메노나이트가 추구하는 평화운동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한국인 모두에게 중요한 지혜와 경험이 될 수 있다. 무자비한 자본과 이기적 욕망으로 인간성이 파괴되고 폭력적 갈등이 난무하는 한국사회에서 아나뱁티스트의 회복적 정의는 매우 유용하고 가치 있는 프로그램이다. 인터넷과 코로나로 인간관계가 더욱 파편화되고 비인간화되는 현실에서 아나뱁티즘의 공동체 문화는 대단히 매력적이고 독특한 대안이 될 것이다. 한국기독교가 ‘개독교’ 취급을 받는 현실에서, MCC의 한국사역을 현재적 상황에 슬기롭게 적용한다면, 아나뱁티즘은 소중한 역할을 탁월하게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2013년, 춘천의 한국아나뱁티스트센터를 취재했던 이영란은 「기독교사상」에 자신이 보고 들은 이야기를 담담하게 서술했다. 이제 그녀가 자신의 글을 마무리하면서 남긴 소망을 여기에 옮겨본다. 나의 마음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흐르는 것이 어디 물뿐이겠습니까. 자연도 흐르고 사람도 흐르고 세월도 흐릅니다. 기독교 역사 속의 아나뱁티스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춘천 소양강 흐르는 물살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곧 봄이 온 천지를 덮을 것입니다. 아나뱁티스트들이 꿈꾸고 모색하는 평화의 기운 또한 한반도를 가득 덮어주기를 바랍니다.

이영란 [49]

참고문헌

  1. 「슐라이트하임 신앙고백서」의 7가지 조항은 다음과 같다. (1)회개 및 개심을 경험하고 자기들의 죄가 그리스도에 의해 다 소멸되었다고 진실로 믿는 이들에게 세례를 베푼다. (2)일단 재세례파의 신앙을 받아들인 후, 세례까지 받은 이가 실수하거나 죄를 지었을 경우, 비록 부주의의 결과였다 하더라도 파문시킨다. (3)성찬식에 참여하고자 하는 이는 우선 세례를 받아야 한다. (4)세례 받은 이들은 사탄이 이 세상에 심어 놓은 악과 죄악으로부터 스스로 성별해야 한다. (5)교회의 목사는 바울이 명하였듯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좋은 평판을 듣는 인물이어야 한다. (6)교인들은 여하한 이유를 막론하고 무기를 사용할 수 없다. (7)교회 교인들은 누구도 맹세 할 수 없다.
  2. 스튜어트 머레이, 『이것이 아나뱁티스트다』, 강현아 옮김 (대전: 대장간, 2011), 206.
  3. 스튜어트 머레이, 『이것이 아나뱁티스트다』, 214.
  4. 스튜어트 머레이, 『이것이 아나뱁티스트다』, 221. 아나뱁티스트들이 당한 고난에 대해서는 티엘레만 반 브라이트, 『순교자의 거울」, 번역위원회역 (서울: 생명의서신, 2005)을 참조하시오.
  5. 김명배, “16세기 재세례파의 「쉴라이타임 신앙고백」에 나타난 교회와 국가의 관계와 기독교 윤리,”『현상과 인식』, Vol. 38(3) (September 2014), 177.
  6. Walter Klassen. ed., Anabaptism in Outline (Waterloo, Ont.: Herald Press, 1981), 110.
  7. Walter Klassen. ed., Anabaptism in Outline, 101.
  8. Walter Klassen. ed., Anabaptism in Outline, 101.
  9. Walter Klassen. ed., Anabaptism in Outline, 102.
  10. Walter Klassen. ed., Anabaptism in Outline, 116.
  11. Walter Klassen. ed., Anabaptism in Outline, 112.
  12. 대표적인 인물이 캐나다의 메노나이트 정치학자인 존 레데콥이다. 그의 주장에 대해선, 존 레데콥, 「기독교 정치학」, 배덕만 옮김(대전: 대장간, 2011)을 참조하시오.
  13. 김명배, “16세기 재세례파의 「쉴라이타임 신앙고백」에 나타난 교회와 국가의 관계와 기독교 윤리,”188.
  14. 존 A. 호스테들러, 『후터라이트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춘천: KAP, 2007), 11.
  15. 존 A. 호스테들러, 『후터라이트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30.
  16. 존 A. 호스테들러, 『후터라이트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39.
  17. 존 A. 호스테들러, 『후터라이트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89.
  18. 스튜어트 머레이, 『이것이 아나뱁티스트다』, 221.
  19. 제임스 D. 헌터,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4), 231.
  20. 제임스 D. 헌터,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236.
  21. 제임스 D. 헌터,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241
  22. 제임스 D. 헌터,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241
  23.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히 여기심을 이 땅의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하기 위하여 전 세계 아나뱁티스트 교회가 협력해서 만든 단체로서 인간의 기본적 필요를 채우기 위한 구제 사역과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국제기구다.” 정성한, “한국전쟁과 메노나이트 평화운동: 아나뱁티스트 한국교회사 서술을 위한 서론적 고찰,” 「한국교회사학회지」 제39집 (2014), 182-83.
  24. L. R. Kohls, Report on the Kyong San Vocational School for Orphan Boys, May 1955. 정성한, 한국전쟁과 메노나이트 평화운동,” 185에서 재인용.
  25. 정성한, 한국전쟁과 메노나이트 평화운동,” 186-95.
  26. 정성한, 한국전쟁과 메노나이트 평화운동,” 195-96.
  27. 조응태, “재세례파 형성 및 한국유입 과정과 신종교적 의의,” 「신종교연구」 제30집 (2014. 4), 17.
  28. 최형근, “한국 교회 갱신을 위한 한 모색으로서 아나뱁티스트 운동에 대한 고찰,” 「신학사상」 제161집 (2013 여름), 293.
  29. 최형근, “한국 교회 갱신을 위한 한 모색으로서 아나뱁티스트 운동에 대한 고찰,” 294.
  30. 최형근, “한국 교회 갱신을 위한 한 모색으로서 아나뱁티스트 운동에 대한 고찰,” 294-95.
  31. 김태식, ““코로나 팬데믹 이후의 신앙공동체 영성: 아나뱁티니스 신앙의 특성과 현대적 적용,” 「한국동서철학연구」 제100호 (2021. 6), 594.
  32. KOPI에 대한 정보는 http://kopi.or.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33. 이 내용은 배용하 목사가 2021년 11월 1일에 보내준 자료를 토대로 구성한 것이다.
  34. 김주한. “아나뱁티스트들의 영성신학과 실천” 『신학연구」 제75집 (2019), 53-4.
  35. 김주한, “기독교 공산(Communism)체제 모델 연구: 후터파 공동체를 중심으로” 「한국교회사학회지」 제44집(2016), 198-99.
  36. 김경중, “하나님 나라의 길을 걷는 사람들: 한국에서 아나뱁티스트” 「기독교사상」 (2012. 7), 80.
  37. 이상규, “메노나이트교회의 평화주의 전통,” 「한국교회사학회지」 제44집 (2016), 236.
  38. 김주한. “아나뱁티스트들의 영성신학과 실천,” 77.
  39. 최형근, “한국 교회 갱신을 위한 한 모색으로서 아나뱁티스트 운동에 대한 고찰,” 「신학사상」 제161집 (2013 여름), 292.
  40. 정성한, “한국전쟁과 메노나이트 평화운동: 아나뱁티스트 한국교회사 서술을 위한 서론적 고찰,” 「한국교회사학회지」 제37집 (2014), 203.
  41. 김주한, “아나뱁티스트들의 영성신학과 실천,” 66. 데이빗 옥스버거, 『외길영성』 생명의 말씀사, 2007.
  42. 김주한, “아나뱁티스트들의 영성신학과 실천,” 77-8.
  43. 김난예, “아나뱁티스트 공동체의 예수 따라 살기,” 「한국기독교신학논총」 제112집 (2019), 161.
  44. 김난예, “아나뱁티스트 공동체의 예수 따라 살기,” 187.
  45. 김난예, “아나뱁티스트 공동체의 예수 따라 살기,” 187-88.
  46. 김용민, “종교개혁과 목회상담: 아나뱁티스트의 신앙과 설천을 2중심으로,” 「한국기독교신학논총」 제107집 (2018), 335-36.
  47. 유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 (서울: 김영사, 2017).
  48. 김태식, “코로나 팬데믹 이후의 신앙공동체 영성: 아나뱁티니스 신앙의 특성과 현대적 적용,” 「한국동서철학연구」 제100호 (2021. 6), 595-96.
  49. 이영란, “〚변방에 선 사람들〛 아나뱁티스트의 전통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 「기독교사상」 (2013. 5), 139.

존 로스 좌담회

이 동영상은 2016년 1월 22일 (금) 오후 3:00~5:00에 열린 존 로스와의 좌담회입니다.

좌담회는 서울 서대문구 창천감리교회 부속 엘피스 카페에서 가졌습니다.
John Roth교수님은 인디아나 주 고센에 있는 Goshen College 에서 역사학을 가르치시며, 메노나이트 세계협의회 Mennonite World Conference 에서 Faith and Life Commission 위원장을 맡고 계십니다. 또한 고센 대학 내에 있는 Anabaptist Library 아나뱁티스트 도서관의 관장을 맡고 계십니다.

이 좌담회는 편한 대화 세팅아래 아나뱁티스트에 관심 있는 목회자들의 모임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존 로스 소개에 이어 참가자 소개의 시간을 갖고, 아나뱁티스트-메노나이트에 관한 일반적인 질문은 물론 목회와 관련된 내용을 질의응답하는 방식으로 진행하였습니다.

직접 보시고 함께 즐거운 순례의 여정을 걷기 원합니다.

KAC

 

루터란 – 아나뱁티스트 화해의 여정

배경

1980년 독일의 루터란 교회는 옥스버그 신앙고백 채택(Augsburg Confession, 1530년) 450주년을 기념하여 전세계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이를 초교파적으로 축하하기 위해 메노나이트 교회의 지도자들도 초청했다. 그런데 아나뱁티스트-메노나이트 신자들은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루터란을 비롯한 국가 교회로부터 수많은 탄압과 박해를 받은 장본인들이다. 그 때 루터란 교회의 경우 아나뱁티스트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그 탄압을 정당화하는 결정적인 문서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옥스버그 신앙고백(Augsburg Confession)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루터란이 메노나이트를 초청했다는 것은  정말 어처구니 없는 아닐 수 없었다. 아마도 루터란 교회는 메노나이트를 초청하면서 옥스버그 신앙고백 안에 아나뱁티스트를 이단으로 정죄한 죄목이 실려있다는 사실 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아나뱁티스트 신앙의 후예인 메노나이트 교회를 그런 자리에 초청할 수 있었겠는가? 어떻게 메노나이트가 자기 선조들을 정죄했던 문서를 기념하는 자리에 가서 축하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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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한 제자도의 실현과 평화 공동체 회복이 개혁의 정도(正道)

[선교] 철저한 제자도의 실현과 평화 공동체 회복이 개혁의 정도(正道)_들소리신문 2009-10-14

게시자: KAC Admin, 2009. 10. 20. 오후 10:24   [ 2009. 10. 20. 오후 10:27에 업데이트됨 ]

자신을 붙잡으려는 추격자가 강물에 빠지자 즉시 달려가 살려준 아나뱁티스트 더크 웰렘스.

       그러나 그는 추격자에게 붙잡혀 끝내 처형당했다.  ⓒ들소리신문
루터, 칼빈과 함께 개혁의 선상에 있었던 츠빙글리의
제자들이 주창했던 아나뱁티스트(재세례운동)

유아세례로 자동적 신자가 된 국가 `신자는 많지만 제자 없음’을 반성-제자도 강조
가톨릭·개혁교회들로부터 박해와 핍박으로 4천명 이상의 순교자들이 나오는 역사
신앙에 거룩한 삶 더하는 회복 중요…신앙 증표 만족 아닌 철저한 제자 삶 있어야  계속 읽기

교회 내 갈등, 성서적 해결원칙은 있는가?

초대교회가 가진 여러 가지 정체성 가운데 하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노력이었다. 초대교회의 구성원은 기존의 유대인이 지켜오던 율법이 아닌 예수를 통해 완성된 새로운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 오늘날의 한국 교회가 교회 내 갈등문제와 관련하여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예수는 교인들 사이의 분쟁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두 가지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계속 읽기

잃어버린 평화의 전통을 찾아서….

교회, 평화와 화해의 도구로 거듭나기를

YMCA 잡지<꽃들에게 희망을>에 실린글 – 이재영

 

지금처럼 무척이나 더웠던 여름으로 기억한다. 미국 버지니아 주의 여름이 끝나갈 무렵 우리는 조그마한 교실에 앉아 마지막 수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실제 우리 반에는 매우 흥미 있는 사람들로 가득차있었다. 팔레스타인이 고향이지만 자유롭지 못한 땅을 떠나 시리아로 이주해간 팔레스타인 청년, 자신의 땅에서 난민이 되어버린 필리핀 민다나오 섬의 아주머니, 두 딸을 둔 눈물이 많은 코소보의 엄마, 강한 엑센트로 자기의 다리에 난 총상을 보여주던 북아일랜드에서 온 아저씨, 케냐에서 연극을 통한 평화 교육 운동을 펼치고 있는 이름이 “바보“라는 사람, 인도북부의 지역에서 독립을 위해 애쓰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나갈랜드라는 나라에서 온 친구 아쿰…. 계속 읽기

교회 내 갈등, 성서적 해결원칙은 있는가?

초대교회가 가진 여러 가지 정체성 가운데 하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노력이었다. 초대교회의 구성원은 기존의 유대인이 지켜오던 율법이 아닌 예수를 통해 완성된 새로운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 오늘날의 한국 교회가 교회 내 갈등문제와 관련하여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예수는 교인들 사이의 분쟁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두 가지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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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엔티아

이상규(고신대학교 교수, 역사신학)

인류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전쟁이다. 전쟁은 인간에 의해 자행될 수 있는 가장 큰 폭력이며, 파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이룩한 문명이나 도시, 자연의 파괴일뿐 만 아니라 인간성 자체의 파괴이기도 하다. 오늘의 세계는 지구상의 전 인류를 파고기하고도 남을 만큼의 충분한 양의 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고, 핵무기의 파괴력은 고전적 의미의 전쟁 개념을 무의미하게 한다. 이제 문제는 공존(共存)이냐 무존(無存)이냐의 문제일 뿐이다 호모 호미니 루프스(Homo homimi Lupus), 곧 “인간은 인간에게 이리이다”는 라틴어 경구는 전쟁사에서 얻은 체험적 경구일 것이다.  계속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