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와 폭력, 비폭력

CrossWalk 모임
2002년 10월 21일

정리 이재영 간사 (KAC)

“기독교인으로써 폭력을 어떻게 이해하고 대응하여야 하는가?”라는 참으로 어렵고도 중요한 문제에 기독교인은 늘 고민하여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악이라고 규정된 세력을 제압하기 위한 소위 “정당한 무력사용”에는 관대해지게 되었다. 이제는 다른 종교나 집단에 대한 폭력의 사용이 교회 안에서도 특별한 논의 없이 당연히 받아들여지고 있다. 과연, 이러한 현실에 400년 이상 평화주의 전통을 지켜온 메노나이트를 비롯한 아나뱁티스트들의 신앙과 삶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메노나이트(Mennonite)의 평화에 대한 이해

초기 재세례신앙운동을 시작한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화해의 의미뿐만 아니라, 원수를 포함한 모든 인간과 화해하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16세기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더 근본적 개혁을 요구했던 메노나이트는, 참혹한 박해와 첨예한 대립 속에서도 이러한 제자도적 삶의 모습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들은 교회(church)와 국가(state)권력의 분리를 주장했고, 폭력을 통한 자기방어를 반대하고, 군사적 힘에 의존하지 않는 무방어(defenselessness)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그들의 믿음과 신념은 20세기 양대 세계전쟁 속에서 양심에 의한 병역거부(conscientious objection)와 무저항(nonresistance)정신으로 이어지게 된다. 한편, 현대 메노나이트의 평화운동은 신앙적 자원의 기초가 되는 성경의 평화적 관점에서의 새로운 이해와 사회적 정의문제(justice issues)에 관한 관심을 높임으로써 평화활동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화해(reconciliation)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의 중심이라는 신학적 이해에 기초하여, “화평케하는” 활동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선언하는 모든 이에게 확대되어야 할 소명이라고 강조되고 있다(마 5:9). 이러한 ‘부르심’에 부응하기 위해 1975년 생겨난 것이 메노나이트 화해 봉사부 (Mennonite Conciliation Service, 이하 MCS)이다.

MCS는 미국 메노나이트 중앙 위원회 (Mennonite Central Committee, 이하 MCC)의 평화담당 부서로 생겨났고, 갈등분쟁 대처와 예방에 관한 프로그램과 폭력과 파괴행위를 줄여나가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MCS와 더불어, MCC의 범죄와 사법정의 (Crime and Justice)부서는 피해자와 가해자사이의 화해를 유도해내는, 특화된 중재의 형태인 피해자 가해자 화해 프로그램 (Victim Offender Reconciliation Program) 탄생에 기여 하기도 하였다.

기독교와 폭력사용

기독교적 관점에서 폭력을 연구하여 책을 쓴 프랑스의 법철학자이자 행동하는 기독교인인 자크 엘룰 (Jacques Ellul)은 그의 저서 “폭력 – 기독교적 반성과 희망”에서 오늘날 잘못되어 가고 있는 기독교인들의 폭력에 대한 이해에 대하여 경고의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하고 있다. 그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은 “한편으로 폭력사용에 대한 모든 정당화를 공격하는 일이요, 다른 한편으로 폭력사용의 기독교적 정당화를 제공하는 것을 거절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통찰 속에는 절대 폭력을 정당화 해주지 않기 떄문이다.

교회의 의무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억압자를 폭력으로 대항하거나, 선택에 여지가 없어 폭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억눌린 자에게 복종하고 참의하고 권고하는 것이 아니다. 크리스천은 억압자와 억눌린 자 사이의 중재자로써 봉사해야 한다. 억눌린 자를 위해 하나님께로 기름부음 받은 대변인이다. 신에 의해 망각된 자들의 중보자이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해 행한 역할이다.

폭력이 발생했다고 하면 크리스천은 항상 비난을 받지 않으면 않된다. 왜냐하면, 폭력이 발생했다는 것은 항상 크리스천들이 가난한 자들, 눌린 자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가난한 자들의 이유를 변호해 주지 아니하고, 정의를 위하여 끊임없이 싸우지 아니한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폭력과 비폭력 – 기독교 윤리학 연구시리즈”을 쓴 맹용길 교수는 인류 역사속에 몇 안 되는 비폭력적 저항의 성공의 예, 특히 Martin Luther King Jr.의 경우를 분석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를 형성하는 방법이 시대에 잘못된 제도나 관습, 문화에 대한 비폭력적 저항이었음을 제시한다.

비폭력적 저항

비폭력적 저항(Nonviolent Resistance)은 저항하는 방법으로서 삶의 문제에 대하여 수동적으로 쳐다보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용기와 인내를 가지고 악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며 저항하는 방법이다. Martin Luther King Jr.는 비폭력 저항을 기독교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그는 비폭력 저항을 사회변화(social change)를 일으키는 입장에서 제3의 길로서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King에게 있어 비폭력은 삶의 방법(way of life)이 되는 것이고, 기독교적 삶의 방법인 것이다.

예) King의 비폭력 저항의 성격

1) 비폭력적 저항은 회피나 수동적 방법이 아니고, 악에 대하여 항거하고 저항하는 능동적 방법이다. 따라서, 비폭력적 저항은 물리적으로 수동적이며 영적으로 강력하게 능동적이다.

2) 비폭력적 저항은 악행자를 이기려고 하거나 부끄럽게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가 되고자 하고 그 악행자로 하여금 이해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비협동(non-cooperation)이나 boycott이 방법이 되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3) 저항은 하되 결코 그 악의 세력에 직접적인 공격이 아닌, 부정의 한 의식이나 문화를 바꾸는데 초점을 맞춘다. King은 흑백의 갈등보다 정의와 불의에 더 초점을 두었다.

4) 비폭력 저항의 방법은 복수가 아닌 고난(suffering)을 기꺼이 받아 들이는 것이다. 정의와 자유를 위해 피를 흘려야 한다면 흘릴 수 밖에 없는 것을 의미한다.

5) 비폭력은 물리적 폭력뿐 아니라 내적이고 영적인 폭력도 피하는 것이다. 비폭력은 사랑으로 만들어진 무기이다.

6) 비폭력적 저항의 저변에는 우주가 정의의 편에 있다는, 진리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확신이 있다. 이는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이라는 비판도 받지만 비폭력 저항이 힘들고 많은 훈련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King의 방법은 1)경험적 대안 2)기독교적 사랑 3)그리스도의 정신과 간디의 방법에 영향을 받음. 흑백분리(segregation)에 대항하여 부당한 체제와 전통의 전복이 아니라 통합(integration)을 목적으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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