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성경에 기록된 많은 전쟁을 어떻게 이해 할것인가?

구약성경의 전쟁이야기에 대한 성경적 평화주의적 견해

Mennonite Central Committee, By Linda Gehman Peachey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생각할 때 흔히 동산에서 기도하시거나 양 때를 인도하는 또는 어린 아이들을 축복해 주시는 장면 등을 연상하곤 한다.

예수님이 칼을 들거나 기마 전차를 탄 모습은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실제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원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삶을 사신 것을 받아들인다. 또한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기 위해 폭력 사용을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에도 동의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을 향한 예수의 가르침이 과연 폭력사용과 전쟁 참여를 거부하는 것 까지로 해석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은 “구약 성경에서의 전쟁 이야기를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전쟁을 일으키게 하고 서로를 죽이게 한 사건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따금씩 폭력과 전쟁을 허용하신다는 말이 아닌가? 이에 대한 답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러나 기독교 평화주의자들이 확신하는 중요한 관점들을 알아보는 것은 도움이 된다.

구약성경에는 실제로 전쟁 역사가 상당부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모든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전 우주적인 관심과 평화를 향한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실제로 성경은 인간을 포함한 지구상의 모든 피조물에 대한 창조 이야기로 시작된다. 다른 나라를 강제로 통치했던 제국주의의 극치를 이룬 바빌론이나 이집트 시대 이야기와는 직접적이고도 근본적인 대조를 이룬다. 창세기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지배하는 방식으로서가 아닌 모든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통치에 우리가 어떻게 협력해야 하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이스라엘 역사의 초대 영웅들은 폭력을 사용했던 왕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타국에서 언제라도 위험에 처할 수 있었던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했던 평범한 남자와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땅이나 안전에 대해서도 하나님을 신뢰했으며 이 따금씩 갈등이 생길 때면 비폭력적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사람들이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Abraham)과 조카 롯(Lot)이 기르던 가축들이 증가하자 같은 땅에서 공존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을 때 두 사람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서로로부터 떨어지고자 했다. 이삭(Isaac)이 블레셋 사람들(Philistines) 과 함께 살면서 불어나는 가축 때와 식수 때문에 갈등이 생겼을 때 이삭은 타 지역으로의 이동을 택했고 그 곳에서 새로운 우물을 팠다. 하나님께서는 그로 인해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확신의 말씀을 주셨다. 또한 야곱(Jacob)이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돌아가서 형 에서(Esau)를 만났을 때에도 힘의 우월을 과시하기 보다는 겸손하고도 회개하는 마음으로 형에게 나아갔다. 야곱 자신이 형 에서(Esau) 에게 복종함으로써 이스라엘은 그 땅을 얻을 수 있었고 평화롭게 살 수 있었다.

밀라드 린드 (Millard Lind)의 책 “하나님은 용사이다! (Yahweh is a warrior)”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이러한 성경 이야기가 모두 이스라엘의 군사력이 최고조에 달했던 다윗 왕의 통치시절에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롯의 이야기는 롯의 후손들인 모압 사람들 을 죽인 제국을 대한 평화적 갈등해결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삭과 블레셋 사람들과의 갈등이나, 야곱(Jacob)과 형 에서(Esau) 의 관계 역시 다윗이 블레셋과 에돔 사람들(에서의 후손)과 벌였던 많은 전쟁의 교훈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구약성경의 이야기들은 사람들이 이웃과의 관계를 폭력이 아닌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더욱 일치하는 효과적이고도 진실된 방법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의 룻기(Ruth)와 요나서(Jonah)에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전 우주적인 관심이 한층 더 강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룻기 이야기는 모압 사람들과 같이 멸시 받는 이방인들도 여호와를 진정으로 경배했을 때 다윗 왕의 계보에 들어 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요나 이야기 또한 증오했던 아시리아의 압제자들도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좌우(左右)도 제대로 구분 못하는 니느웨의 아이들까지도 돌보셨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마지막으로 구약 성경의 이사야 2장과 미가서 4장에는 모든 나라들이 주의 장막으로 흐르고 하나님의 지시와 심판을 듣는다는 참으로 놀라운 소식이 기록되어 있다. “그가 많은 민족 중에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을 판결 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 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물론 이러한 안녕(well-being)에 대한 강조는 구약 성경 전반에 걸쳐 히브리어 단어인 “샬롬(Shalom)”으로 표현된다. 이스라엘의 소망은 샬롬이라는 “peace(평화)”보다 훨씬 더 풍부하고 넓은 개념의 안녕(well-being), 완전함(a sense of wholeness), 만족(contentment), 안전(safety)을 구하는 단어이다. 그러나 우리가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거룩한 전쟁(holy war)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과연 지금까지 언급한 평화 주제와는 어떠한 관련이 있고 또 일치하는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밀라드 린드의 해석이 또 다시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 린드는 과거 이스라엘의 전통적 전쟁이 주는 의미는 왕의 통치와 군사력 개발 유지에 의존하는 경향을 비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이스라엘의 왕권과 군사력을 당시의 주위 나라들과 비교하여 본다면 아주 분명히 알 수 있다.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은 모든 문화, 종교, 경제 제도가 도시 국가를 통치하는 왕권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왕이 신으로부터 폭력사용을 허락 받았다는 것을 믿었으며 왕은 또한 이것을 항상 전술적인 군대를 통하여 실천하곤 했다. 이 땅에서의 왕은 신을 대신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전쟁에서 왕의 명령에 충성을 맹세했고 기꺼이 몸을 바쳐 싸우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핵심 지도자는 백성들의 통치자로서가 아닌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법을 전해 준 모세와 같은 선지자이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왕의 전쟁에 참여하여 싸우기 보다는 하나님의 법을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충성을 다해야 했던 것이다. 더욱이 국가의 안전은 군대를 양성하거나 다른 나라의 군대와 연합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과 개입(介入)을 바람으로써 자신들의 안전을 기대해야만 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자기 백성을 출애굽 시켰던 것처럼 자신들을 압제하는 사람들로부터 구해내실 것이라는 기대하는 믿음을 가져야만 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싸워야 했을 때는 전문적인 군대로서가 아닌 모세, 드보라, 기드온 사무엘 등과 같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인도하는 자발적이고도 일시적으로 모인 지원자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이스라엘은 종종 적을 패배시키는 하나님의 기적과도 같은 도움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에서는 (왕권이 부여된 초기에) 정치, 경제, 군사적 권력을 행사하는 것에 대해 격렬한 저항이 했었다. 왜냐하면 야훼만이 그들의 왕이고 인도자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통치와 보호 아래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요구한 왕의 통치가 받아들여진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의 충성과 순종이 변치 않고 또한 선지자들이 제시한 하나님의 규율이 지켜지기 위해 사람들은 새로운 모델의 변형된 왕정(王政)이 실현되기를 기대하였다. 예를 들면 신명기 17장에는 왕이 통치할 때 스스로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지침이 나타나 있다. 우선 왕은 공동체 생활을 순종하고 공동체 내에서 선택된 사람이어야 했으며 그렇게 선택 받은 사람으로서의 자질은 정직해야 하며,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취하면 안되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기꺼이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어야 했다.

그 밖에도 왕실 군대나 경제력을 이용한 전형적인 물건 획득 행위를 비판하는 명령도 나타나 있다. 왕은 또한 말이나 전문 군대를 획득하면 안 되었다. 자기 백성을 다른 군대와 바꾸는 조건으로 노예로 팔아 넘기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다. 셋째로 왕은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이 돌아서지 않도록 자신을 위해 많은 아내를 거느리거나 그러한 결혼을 용인하기 위한 외국 군대와의 연합에 의존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마지막으로 왕은 스스로를 위한 부를 축적해서도 안 되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이르러서 그 땅을 얻어 거할 때에 만일 우리도 우리 주위의 열국 같이 우리 위에 왕을 세우리라는 뜻이 나거든 15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면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으로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16 왕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말을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17 아내를 많이 두어서 그 마음이 미혹되지 말 것이며 은 금을 자기를 위하여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신 17:14-17)

밀라드 린드가 말했던 것처럼 “가나안 땅의 왕들에게는 자신을 섬기고 싸움터에서도 충실했던 자신들의 종에게 보상 할 수 있도록 흔히들 부와 재산을 축적하는 관습이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왕은 이러한 지침에 따라 행동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선지자들은 왕이 상비군을 개발 유지하며 외국군대와의 연합에 의지하는 것에 대하여 아주 가혹하게 꾸짖었다. 그러므로 비록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싸우게 하신 일도 있었지만 그들의 군대에 의존하는 것에 대한 계속되는 비판도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특별히 주위의 다른 나라들과 비교되는 이스라엘의 신학과 실천의 증거이다.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이러한 전쟁 역사를 쉽게 읽고 또 현대에 있어서도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합법적이라고 생각하는 의견이 지배적인 것 같다. 그러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자면 사람들은 이웃 나라들의 전통군대와 그들의 지혜를 본받기 보다는 먼저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 평화주의자의 두 번째 관점은 성경은 처음부터 끝가지 같은 방식으로 읽고 또 이해할 수 있는 그러한 평범한 책이 아니다는 것이다. 오히려 성경 전체를 통하여 다양한 이해와 말씀 전체를 읽는 동안 생각의 발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대부분의 그리스도 인들은 성경자료의 많은 부분들, 예를 들면 구약에서의 식생활 습관과 철저한 규약; 부모를 저주하거나 간음 또는 사람을 죽인 위험한 소를 계속 살려 두는 것 등에 대해 죽어 마땅하다고 하는 모세의 율법 등에 관해서는 이러한 관점에 대해서는 타당하다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과 초대교회에서도 구약에서 실천된 몇몇 사례들, 일부다처제, 안식일에 대한 지나친 율법적 준수 등은 거부되었다. 예수께서는 특별히 산상수훈 (마태복음 5장)을 통하여 살인, 간음, 이혼, 맹세, 원수에게 복수하는 것 등에 대한 율법의 가르침을 깊이 이해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대로 율법을 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사회를 위한 진정한 목적을 새롭게 확립하고 완성시키기 위해 오셨다.

예수님께는 비록 전쟁 불참에 대한 분명한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당신의 제자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는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것은 비단 가까운 친구만이 아닌 당시의 여자들처럼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포함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또한 부유한 유대인이나 종종 자신들을 압제하고 핍박했던 로마의 이방인들까지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행동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햇빛과 비를 모든 사람들에게 내리는 것처럼 우리 또한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사회의 구석 구석에 있는 소외된 사람들,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해야만 한다.

초대교회에서는 이러한 가르침을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은 처음 3세기 동안 군대에서 복무를 하거나 군대의 축하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순교자의 거울에 (The Martyrs’ Mirror)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3세기 초기에 군대의 승리를 자축하는 행사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해서 많은 핍박을 받았고 이것은 제국을 경멸하는 행위로 간주되어 고소 당했었다. 그 당시 Marinus, Maximilian, Marcellus 같은 사람들은 군복무 참여를 거부하였기에 처형된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심지어 콘스탄틴이 황제가 된 이후인 4세기에도 Martin of Tours 는 말하기를 “나는 그리스도의 군사입니다. 그러므로 전쟁에서 싸움은 합당치 않습니다”라고 선언하였다. Martin 은 겁쟁이로 고소 당했고 적과의 전투시 최전방에 아무런 무장 없이 서게 되었다. 그러나 적군(야만족들)은 다음 날 싸우지 않고 항복하였기 때문에 그는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 오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초대교회의 순교자들 Tertullian, Origin, Justine 이 작성한 고백문 들을 통해 일관성 있게 들어 났다. AD 200 년 경에 기록된 사도들의 전통(Apostolic Tradition)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살인을 엄격히 금했으며 이를 위해 명령 받은 군인이나 집정관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한다면 살인 명령을 거부하든지 아니면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포기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으로서 군인이 되고자 한다면 차라리 교회를 떠나는 것이 낫다고 충고했다. “왜냐하면 그러한 행동은 하나님을 경멸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성경적 평화주의자들이 더욱 확신하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성경 전체에 대한 해석이 온전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이해되지 않는 몇몇 문제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드러내신 예수님을 통해서 바라보아야 한다.

이러한 믿음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의 가르침과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함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누구시며 완전한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지에 관해 모범을 보이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과연 우리들로부터 무엇을 원하시는 가에 알기 위해 예수께서 보여주신 실례와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이러한 확신은 또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입장을 확실히 받아들이게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셨다면 스스로가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취한 행동은 그야말로 끔찍한 잘못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폭력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권위를 외치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에 진실되게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했던 사람들을 오히려 부끄럽게 하였다.
십자가는 예수께서 하나님을 영원히 신뢰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선택했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러한 십자가와 부활의 방법으로 하나님은 악의 세력을 끊으셨다. 사탄은 가장 처참한 일을 저질렀지만 최후의 승자는 되지 못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와 사망보다도 훨씬 더 강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폭력이 아닌 “사랑”을 주장할 수 있고 그리스도만이 하늘과 땅의 주인 되심을 고백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구약에 나타난 전쟁역사에 대한 질문은 그 자체가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렇지만 기독교 평화주의자들은 몇 가지 사실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다. 우선 구약 성경 자체도 군사력에 의존하는 사람들에 대한 강한 비판을 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 아래 살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둘째는 구약 성경에서의 실천되었던 부분들을 재해석하는 운동이 예수님과 초대 교회 안에서도 일어났다는 점이다. 셋째로 예수님은 하나님과 전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가장 완벽히 드러나신 분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은 우리가 성경의 모든 나머지 부분들을 이해할 수 있게 도와 주는 렌즈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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