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뱁티스트와 제자도

김복기 (캐나다 메노나이트 교회, 선교사)


초기 교회의 역사에 따르면 스데반에게 가해진 박해 때문에 흩어진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다. 특별히 페니키아와 키프로스와 안디옥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말씀을 전하면서 믿는 사람들이 생겨났다(행11:19). 바나바와 사울이 안디옥에 일 년 동안 머물면서 많은 사람을 가르친 결과 많은 신도가 생겨났고, 거기에서 처음으로 예수를 믿는 신도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행11:26). 신도들은 어려울 때 힘닿는 대로 서로를 도우며 살았다.

2천 년이 넘는 교회의 역사에는 수많은 이정표가 존재한다. 교회에 대한 역사를 언급할 때마다 등장하는 마태복음 16장의 베드로의 고백은 현재 신약성서 순서상 에클레시아에 대한 첫 기록으로 교회의 정체성을 언급할 때마다 등장한다. 실제로 예수께서 직접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여야하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온전한 표지가 되어야 한다. 이 마태복음 16장의 말씀에 뒤이어 마태복음 18장에서 그리스도는 교회의 표지이자 하나님 나라의 통치 원리로서 섬김, 돌봄, 사랑, 용서의 방식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다(마태복음 18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겠다고 약속하셨을 때, 제자들은 그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우선은 성육신으로 오신 것과 메시아로 오신 분이 갑자기 자신들을 떠나면서 약속하신 성령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부족했고, 그 실체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가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기능해야 하는지 그 뜻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사도들이 십자가 사건으로 모두 흩어졌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하면서부터였다. 무엇보다도 예수께서 살아계실 때 약속하신 성령을 몸소 체험하면서(사도행전 2장) 교회의 실체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제대로 깨닫기 시작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고,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면서부터였다. 우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1차로 약속하신 성령을 직접 제자들에게 부어주시는 장면(요 20:22)은 죽음의 공포로 인해 도망가 숨어버렸던 제자들에게는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각자가 그리던 인간적인 차원의 만남과 모임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로는 불가능한 새로운 성령의 공동체와 부활을 경험한 생명의 공동체를 맛보게 된 모임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는 새 세상, 새 교회, 새 공동체의 탄생함을 알리는 신호탄이자 창조적 선언으로 자리한다. 흩어졌던 제자들이 부활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다시 모였고 역사에서 처음으로 예수가 약속한 성령의 공동체가 태동하였다.

결국, 인간적인 종말을 고했던 사도들의 공동체는 가룟인 유다 대신, 맛디아를 뽑음으로써 보수되었고, 이어서 경험한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이 오순절 성령 강림을 체험한 사람들은 이전에 없던 새로운 영(정신)에 의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성령의 공동체적 체험과 사도들의 열정적인 가르침으로써 믿는 자들의 수가 늘어났고, 이전에 없던 새로운 유형의 공동체가 생겨났다. 사도행전 2장의 기록에 따르면 신도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였고,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

초기 교회를 연구한 교회사가들은 이 사도행전 2장의 사건을 그리스도 교회의 태동으로 이해하였고, 이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으로 인해 형성된 공동체를 교회의 원형으로 이해하였다. 당시 성령을 경험한 사람들이 즉시로 실천하기 시작한 신도들의 공동생활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사도행전 2:44-47)

여기에서 믿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을 의미하며, 수년 후에 비로소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사도행전 11장과 그 이전의 기록에 따르면 사람들은 이들을 제자들이라고 불렀다(행11:26, 9:1,10,19,25,26.28,36,38). 사도행전에 기록된 제자라는 용어는 크게 사도행전 전반부인 1:10,12 및 2:6의 기록과 한참 뒤인 9장 이후의 기록을 나뉘어서 생각해야 한다. 그 이유는 전반부의 제자는 주로 열두 사도를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던 용어로서 9장 이전까지는 사도라는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9장 이후부터 사도와 제자들의 구분이 생겨났고, 열두 제자들은 사도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신자, 제자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렸다.

이러한 분기점으로서 사도행전 11장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가져다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전 사도들과는 뭔가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것이 바로 성경이 사용하기 시작한 ‘제자’라는 말을 통해 그 특성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든, 믿는 사람들이라 부르든 이들이 가진 어떤 특징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 삶의 방식으로서의 ‘제자도’이다.

이 논문은 아나뱁티스트 아카데미의 한 부분으로 아나뱁티스트와 제자도를 설명하기 위해 준비되었다. 16세기 아나뱁티스트 운동이 발견한 아주 중요한 핵심가치 중 하나가 제자도인데, 이 운동이 드러내는 제자도의 핵심이 무엇인지 설명하려는 목적이 있다. 그러나 원래의 제자 됨, 즉 제자도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 가르침, 죽음 그리고 부활과 연관되어 있으므로 아나뱁티스트 운동의 제자도가 1세기 제자도의 원형에 비추어 볼 때 그 양상이 특별하지는 않다. 그러기에 이 논문은 아나뱁티스트와 제자도라는 제목을 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서의 가르침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에 근거하여 제자도를 설명할 것이다. 또한 아나뱁티스트 운동의 핵심 가치로 자리하는 제자도라고 하면서 다른 교단이 이해하는 제자도와는 뭔가 다른 특별한 것으로 설명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여 이 글은 우선 1. 제자도란 무엇인가? 라는 제목아래 제자도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개괄하고 2. 제자도를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이분법적 제자도에 대해 설명한 뒤 3. 16세기 아나뱁티스트들이 견지했던 제자도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는 방식을 취할 것이다.

우선 1. 제자도란 무엇인가라는 첫 번째 단락에서는 제자도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성경의 기록 중에 첫 번째 제자들로 선택된 열 두 제자들의 삶을 살펴보고, 사도들과 제자의 차이에 대해 살펴보게 될 것이다. 또한 용어상 제자라는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의미상 사도들을 지칭하는 제자들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제자들에 대한 미묘한 차이를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한다. 아울러 초기교회와 사도시대를 넘어선 기록, 즉 신약성서의 기록 이후부터 현재까지 기독교가 이해하고 있는 제자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기독교 잡지, 논문, 책에 실린 제자도 관련 제목을 통해 제자도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돕고자 한다.

2. 제자도에 대한 이분법적 이해라는 두 번째 단락에서는 제자도를 설명할 때 자주 혼동되기도 하고, 애매하게 설명되는 제자도의 두 유형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여기에서는 김경진 교수가 연구한 “유랑제자”와 “정착제자”라는 용어를 통해 역사 속에 존재하는 제자들의 두 유형을 간략하게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3. 아나뱁티스트와 제자도라는 세 번째 단락에서는 소위 급진적 개혁운동 혹은 근원적 개혁으로 불리는 아나뱁티스트들이 이해하였던 제자도에 대해 살펴보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이 글은 학문적인 이론을 다시 살펴보려는 의도보다는 그동안 삶과 유리되어 있던 그리스도의 제자도, 즉 일상 속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결국 제자도의 핵심임을 드러내고자 함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현장 속에필요한 것이 제자도 임을 강조하기 위한 작은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이 글이 매일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의 자기 정체성에 명확한 이해를 돕는 작은 선물이 되기를 희망한다.

1. 제자도란 무엇인가?

제자도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기독교 역사 내내 끊임이 없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제자도(discipleship)라는 단어의 어근인 제자(disciple)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 사용하는 제자라는 단어는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배우는 학생으로서의 제자와는 뭔가 다른 독특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일반적인 교육기관인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 더 나아가 대학교에서조차도 학생이라는 말은 쓰지만 제자라는 말은 잘 쓰지 않는다. 가끔 선생님과 학생, 교수와 학생의 특수한 관계 혹은 돈독한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스승과 제자라는 말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그들의 관계를 ‘제자도’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더 나아가 현재 존재하는 여러 종교에서도 이러한 교사와 학생,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존재할지 모르지만, 이들의 관계를 두고 제자도라는 표현을 쓰거나 ‘이것이 바로 제자도다’라는 식으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용법과 맥락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제자도라는 용어에 그리스도교에서 사용하는 어떤 특정한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제자도”에는 기독교 역사나 교회가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어떤 가치나 정신이 깃들어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제자들이란 어떤 사람들이며, 과연 제자도란 무엇인가?

우선 제자 및 제자도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제자들로 선택된 열두 제자들의 삶을 살펴보고, 사도들과 제자의 차이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용어상 제자라는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의미상 사도들을 지칭하며 그 무엇으로 대체할 수 없는 예수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이었던 열두 제자(사도)들과, 그 후 이들의 가르침을 받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또 다른 제자들에 대한 미묘한 의미 차이를 나누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울러 초기 교회와 사도 시대를 넘어선 기록, 즉 신약성서의 기록 이후부터 현재까지 기독교가 이해하고 있는 제자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기독교 잡지, 논문, 책에 실린 제자도 관련 제목을 살펴봄으로써 제자도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그리스도교에서 사용하는 제자는 아주 특이한 개념이다. 그리스도교에서 우선 제자라고 하면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불러 세우신 열두 명의 제자를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복음서의 기록에 따르면 이 열두 제자들은 스스로 제자가 되겠다고 나선 사람이 아니라, 선생님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선택되고, 지명되고,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자 그 부름에 응답한 사람들을 말한다. 스스로 제자가 되겠다고 나선 사람이라기보다는 예수의 부르심이 선행되었고,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듣고 그를 따라다니겠다고 결정한 사람들을 뜻한다. 이들 주변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부자 청년과 같이 스스로 예수를 따르겠다고 한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모두가 제자가 될 수 없었던 것을 보면, 이 열두 제자들의 위치와 지위는 독보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위치와 지위는 부르심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시몬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 빌립을 부르심 (요한복음 1장), 열두 사람을 택하여 사도라 부르심(눅 6:13-16), 네 제자를 부르심(마4:18-22, 막1:16-20, 눅5:8-11), 마태를 부르심(마 9:9-13, 막2:13-17, 눅5:27-32), 열두 제자를 보내심(마 10:5-42, 막 8:7-13, 눅 9:1-6) 등의 기록을 통해 동역자로서 이들의 역할이 잘 드러나 있다.

무엇보다도 열두 제자들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따라 배우는 사람들임을 잘 알 수 있다. 특별히 마태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두 번째 강화로서 등장하는 마태복음 10장의 기록은 이러한 제자들의 특성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그 마태복음 10장에 기록된 구체적인 지침은 다음과 같다.

이방 사람의 길로 가지 말 것, 사마리아 사람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 것, 길 잃은 양 떼인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갈 것, 선포의 내용은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앓는 사람을 고쳐 주며, 죽은 사람을 살리며,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낼 것, 저저 받았으니, 거저 줄 것,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 전대에 금화도 은화도 동전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 것, 여행용 자루도, 속옷 두 벌도, 신도, 지팡이도, 지니지 말 것, 아무 고을이나 아무 마을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서, 그 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 있을 것, 그 집에 들어갈 때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할 것,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않거나 너희의 말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 버릴 것,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할 것, 사람들을 조심할 것, 법정에 넘겨지고, 회당에서 매질을 당하고, 또 그리스도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나가서, 그들과 이방 사람 앞에서 증언할 것, 사람들이 너희를 관가에 넘겨줄 때에, 너희가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그때에 지시를 받을 것이니 어떻게 말할까, 또는 무엇을 말할까, 하고 걱정하지 말 것,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서 미움을 받더라도 끝까지 견뎌 구원을 얻을 것, 이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고을로 피할 것,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 것, 몸은 죽일지라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이를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도 몸도 둘 다 지옥에 던져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할 것,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거나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지 말 것,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를 것.

마태복음 10장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처음 부름을 받은 열두 제자들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특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1) 예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

2)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받고, 온갖 질병과 온갖 허약함을 고치는 사람

3) 구체적인 그리스도의 지침을 받은 사람들이다.

마태복음 10장의 지침은 모든 그리스도인들 즉 모든 제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사도라고 부름을 받은 열두 제자들에게만 해당하는 사항으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엄격한 의미에서 그들만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직접적으로 선택받은 제자들이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름을 받은 사도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할 때, 우리는 이 열두 사람으로 그 범위를 축소해서 생각해야 할지 아니면, 훗날에 언급된 폭넓은 의미의 제자들을 의미하는지 따져보고, 그들에게만 주어진 제자도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만약 성서의 기록이 이 열두 제자를 두고 제자도를 이야기한다면, 사도성으로 그 의미를 대치해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제자라고 할 때, 열두 사람에게 주어진 사도성과 제자됨에 머무를 수 없는 이유는 그 외의 제자들이 존재하였고, 특별히 사도행전 이후 열두 제자들의 가르침을 통해 또 다른 제자들 즉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부른 사람들이 여러 곳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2) 열두 제자들 외의 다른 제자들

성경을 읽다 보면 열두 사도로 칭함을 받은 제자들 외에 또 다른 제자들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다른 제자들에 대한 설명은 사도행전 9장 이후부터 등장하는데, 소위 말해 사도들이 전한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의미한다(행13:52; 14:20,21, 22,28; 15:10; 16:1; 18:27; 19:1,9,30; 20:1,2,30, 21:4,5,16).

소위 말해 이들은 사도들의 복음을 전해 들음으로써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따르기로 한 사람들로서 앞서 말한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 외에 또 다른 부류의 제자들로 불렸다. 이들은 사도행전 11장에서 최초로 그리스도인들이라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 이후로부터 신도, 신자, 믿는 이들로 표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주변 사람들이 조롱조로 부른 말이었지만, 예수쟁이가 됨으로써 예수처럼 사는 사람들 그리스도(Christ)의 사람들(ian)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서가 제자들이라고 부를 때 거기에는 열두 제자들 외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또 다른 부류의 제자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이나 서신서보다 나중에 기록된 것으로 여겨지는 복음서에도 열두 제자 외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들 못지않게 잘 섬기고 복음을 전파했던 예들이 많이 있다. 비록 복음서는 이들에게 제자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예수의 공적인 사역을 든든히 지원한 또 다른 제자들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이 보여준 제자도는 열두 제자들처럼 말씀과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지는 않지만, 일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갔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자명하다. 즉 이들이 보여주는 제자도의 특성은 사도들과 구분되는 기능적 차원과 그리스도인의 성품이라는 차원으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다. 우선 교회의 리더로 부름을 받은 일곱 명의 또 다를 섬김이들 (사도행전 6장), 서신서의 집사, 장로, 감독들의 자격조건과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의 성품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이 글에서 그들에 대한 구체적인 집사의 자격, 장로나 감독의 자격은 생략하기로 한다.

3) 사도 시대 이후 현재까지 기독교가 이해하는 제자도

위에서 우리는 열두 제자들에게 해당되는 내용과 그 외의 다른 제자들에게 해당되는 제자도가 있음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성서의 기록을 근간으로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제자도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역사의 흐름에 따라 기독교에 대한 오해, 뒤틀려진 교회의 모습뿐만 아니라, 제자도에 대한 이해 또한 뒤틀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 천 년의 역사 속에서 자리하게 된 기독교의 제자도란 과연 무엇일까 질문할 필요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제자들인 사도들이 죽고 난 후, 사도들의 제자들이었던 초대교회 교부들의 시대에 이미 기독교에 대한 오해와 제자들에 대한 오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오해는 기독교 공인이라는 크리스텐덤(Christendom 기독교제국) 기간에 더욱 가속화되었고, 처음 조롱조로 자리했던 그리스도인이 자부심과 영예의 타이틀이 될 정도로 왜곡되고 변질되었다. 이러한 변질을 초기교회 역사가인 알렌 크라이더는 『회심의 변질』로 정리하였고, 윌리엄 에스텝[1]이라든가, 프랭클린 리텔[2], 도날드 던바[3], 존 하워드 요더 등 신자들의 교회나 자유교회 전통에 속한 많은 교회사가들은 복음의 변질로 설명하기도 했다.

이들의 교회론과 제자도에 대한 설명을 일일이 살펴보는 일은 의미가 있지만, 이 글에서는 현재까지 기독교 잡지나, 논문에 발표된 많은 제목들을 살펴보는 것으로 그 흐름을 잡는 정도로 논의를 제한하고자 한다. 2020년 현재, 영문 데이터베이스인 EBSCO를 이용하여 영어 단어 discipleship을 검색한 결과 이에 대한 논문이 총 1,238개가 검색되었다. 그 검색한 내용을 분류해 보면, 제자도인 discipleship은 다양한 주제와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제자도가 얼마나 중요하며 그 분야가 얼마나 광범위하고 다양한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직업에 있어서의 제자도 Vocational discipleship, 복음주의와 제자도 Evangelism and discipleship, 감정과 제자도 Emotional health and discipleship, 성령이 이끄는 제자도 Spirit-driven discipleship, 자연보호 제자도 Creation care discipleship, 예전과 제자도 liturgy and discipleship, 진짜 제자도 Authentic discipleship, 소명과 제자도 Call and discipleship, 가장 신실한 제자도 The most sincere form of discipleship, 선교를 부양하는 제자도 Mission-shaped discipleship, 선교와 제자도 Mission and discipleship, 하나님과 동행으로써의 제자도 Discipleship as living with God, 리더십으로써의 제자도 Discipleship as leadership, 갈등 상황에서의 제자도 Discipleship in the midst of conflict, 제자도의 비용 The cost of discipleship, 제자도의 과정 The process of discipleship, 급진적 제자도 Radical discipleship, 공동체와 제자도 Community and discipleship, 미셔널 제자도 Missional discipleship, 부활 후의 제자도 Discipleship after resurrection, 창조적 제자도 Creative discipleship, 성육신적 제자도 Incarnational discipleship, 내러티브 제자도 Narrative discipleship, 제자도의 정치학 The Politics of discipleship, 제자도와 나이듦 Discipleship and aging, 신실한 제자도 Faithful discipleship, 가족의 제자도 The family discipleship, 21세기 제자도 The 21st Century discipleship, 포스트모던 제자도 Post-modern discipleship, 십자가와 제자도 The cross and discipleship, 제자도와 영성 Discipleship and spirituality, 우정과 제자도 Friendship and discipleship, 제자도와 목회 Discipleship and ministry, 일상의 제자도 Daily discipleship, 디지털 제자도 Digital discipleship, 제자도의 부담 Burden of discipleship, 제자도로서의 자녀양육 Parenting as discipleship

이상의 목록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 하나는 제자도란 어떤 특정한 프로그램이나 특정한 사람들만이 갖고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삶의 전 영역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다양한 주제들과 연관되어 있는 제자도란 과연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것만이 절대적인 제자도라고 제시할 수 있는 특별한 개념을 도출해내려는 노력보다는 과연 이 모든 논문들이 표현해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제자도라는 단어에 갇혀 있기 보다는, 과연 앞서 설명한 제자도의 원래 그림으로써 존재하는 스승의 가르침, 그리고 그 길을 따르는 제자라는 원의미를 올바로 잡아줄 절대적인 개념의 스승, 선생님의 모습을 설명하는 것이 더 절실하다. 이 말은 그리스도교에만 존재하는 제자도는 결국 유일한 길, 진리, 생명으로 칭해지는 살아계신 주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라는 선생님의 삶과 가르침을 끊임없이 언급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즉 제자나 제자도에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승, 선생님의 존재와 그분의 삶과 가르침과 죽음과 부활에 방점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제자 됨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인 개념일 뿐이며, 이는 오로지 절대적인 개념의 선생님, 스승론에서 모든 것이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제자도를 언급할 때는 제자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방법론의 차원이나 인식론의 차원보다는 생명의 근원이시고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조명하는 존재론적인 차원이 먼저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제자도란 선생님의 길을 따르기 위해 그리스도론과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애초부터 뭔가를 가르치기보다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존재로 이 세상에 오셔서, 자신의 삶을 따르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한마디 외침, 즉 “나를 따르라! Follow me!”라는 말씀에 모든 것이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모든 가르침이나, 행동이나, 신학이나, 그 무엇을 이야기한다고 할지라도 기독교의 핵심은 제자도이고 그 제자도는 결국 “예수 따름”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2. 두 종류의 제자도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제자도가 “예수 따름”이라면 예수의 제자들은 어떤 방식으로 예수를 따라야 할까? 한편으로 제자가 되려면 예수 외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모든 가치를 예수께 두어야 한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모든 현재의 삶을 뒤로 하고 무작정 집을 떠나야만 하는 것인가? 앞서 설명한 마태복음 10장의 열두 제자처럼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만이 제자의 길인가? 만약 그러한 방식만이 제자의 길이라면 지금 수백만 수천만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일상의 삶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라는 두 가지 상반된 삶의 방식에서 갈팡질팡, 우왕좌왕하거나, 좌고우면할 수밖에 없다. 이는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이 고민하는 바요, 삶 속에서 갈등으로 경험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정말로 어느 정도까지 그리스도를 따라야 제대로 제자가 되는 것일까?

이는 현재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고자 매일 묵상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두고 끊임없이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특별히 말씀을 설교하는 설교자들이나, 신학자들의 논점을 따라가다 보면 삶을 전적으로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따라나서든지, 아니면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가는 속세의 그리스도인으로 늘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든지 양자택일의 문제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는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도에 대해 설명할 때 자주 범하는 오류 중 하나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야 한다는 설명이 한 편에 있고, 일상을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기는 어려우므로 제자도는 일반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책임과 삶의 길이 아니라, 특별히 믿음 좋은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그 무엇이 또 다른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형국이다. 실제로 많은 논문이나 설교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성서의 가르침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도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어느 때는 이 쪽편을 강조하고, 어느 때는 저 쪽편을 강조하여 설명하다가, 결론은 청중들이 그냥 알아서 선택하도록 얼버무리고 마는 경향을 보여왔다.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성서의 가르침도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더더욱 아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초기 기독교에 등장한 두 종류의 제자도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장신대학교의 김경진 교수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던 사람들을 크게 두 종류로 분류하였는데, 열두 제자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여행하고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일에 모든 일을 집중했던 제자들을 위한 제자도가 한편에 있고, 그 외 일상생활을 영위하면서 삶의 전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했던 제자도가 또 다른 한편에 있다고 설명하였다. 그는 전자를 순례자의 성격을 띤 Itinerant disciple로, 후자를 직업을 갖고 한 장소에 오래 살면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소임을 다하는 sedentary disciple로 설명하였다. Itinerant disciple은 순례제자, 순회제자, 혹은 유랑제자로 번역할 수 있다면 sedentary disciple은 일상의 제자, 정착제자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약 성서 특별히 복음서가 이 두 종류의 제자들을 어떻게 규정하는지 살펴보자.

1) Itinerant disciple / 유랑제자

유랑제자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에 함께 먹고 함께 사역했던 제자들을 말한다. 특별히 이들은 주님의 부름과 선택을 따라 제자로 부름을 받았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전도 여행을 준비하고, 돕고, 직접 동참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하나님 나라의 강화로 잘 알려진 마태복음 10장에 그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이들은 “사명의 완수를 위하여 가정과 재산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들로서 (막 3:21, 31-35; 눅 9:58), 하나님 나라와 복음의 선포를 위하여 가진 바 모든 재산과 가정 그리고 직업을 포기하고 문자적으로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동안 동고동락한 사람들이다. 이처럼 스승을 따르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는 태도는 매우 독특하고 이례적인 삶의 모습으로써 이들은 스승-제자라는 특별한 관계에 삶의 모든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로 이해된다.” 따라서 이들 유랑제자들은 예수님과 같은 운명을 택한 사람들로 이해되며 처음에는 열두 제자로 불리다가 후에 열두 사도로서 사도라는 특성상 역사적으로 반복될 수 없는 형태의 제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이 유랑제자들의 특성을 따르도록 요구되거나 특별한 열심을 강요받곤 한다. 이는 성서가 가르치는 삶의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의 삶을 주로 기록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사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분명 자신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여김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유랑제자의 삶을 그대로 살 수 없다. 그러기에 이 첫 번째 종류의 제자도는 믿음의 공동체가 유랑제자로 부르지 않는 한, 일반적인 신자들에게 요청할 수 있는 제자도가 될 수는 없다. 물론 헌신과 열심이라는 차원에서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두 주인을 섬기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주로 섬기며 따르겠다는 마음의 결심이나 결단의 차원에서는 이해되지만, 실제적인 삶의 방식으로서 첫 번째 제자도는 “선교사” “순회설교자” 혹은 고교회와 같은 제도 교회의 직제상 “수도사”나 “신부” “수녀”등의 구별된 직제를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제자도라고 할 수 있다.

2) Sedentary disciple / 정착제자

위의 유랑제자와 다른 종류의 제자로서 정착제자가 있다. 이들은 유랑제자인 사도들처럼 문자적으로 주님을 따르거나 모든 재산과 가정과 직업을 포기하지는 않으나, 자신이 처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 주님의 말씀과 그 가르침을 따라 제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복음서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순례하던 제자들이 있는 반면, 이들을 공궤하고 섬기던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들을 정착제자라고 할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갈릴리 여인들을 들 수 있다.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막달라 마리아 등의 갈릴리 여인들은 다른 남성 제자들과 함께 주님의 전도 여행에 동참한 여제자들이었으나, 자신들의 소유를 전부 포기하거나 3년 내내 예수를 따라다니지는 않았다. 대신에 자신들의 살던 지역에 예수와 제자들이 방문하면 자신들의 집에 그들을 받아들였고 예수님과 제자들의 일행을 섬겼다. 복음서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지는 않지만, 예수와 그 제자 일행이 어떻게 전도여행을 3년 이상 긴 세월 동안 지속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단서를 얻게 된다.

이러한 여제자들의 지속적인 헌신, 봉사, 희생, 물질적인 도움이 없이 전도여행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부분적으로 이 여인들은 예수의 여행에 잠깐 참여하기는 하였지만, 주님을 지속적으로 따라다녔다는 증거는 성서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아 이들은 유랑제자라기보다는 정착제자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우리가 잘 아는 누가복음 10장의 마리아와 마르다에 대한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의 일행을 영접하는 제자들이 여러 마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할 때, 어느 마을에 들어가거든 한집에 유숙하라는 가르침이 있는데, 이들을 정착제자들의 그룹이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이 외에도 김경진 교수는 여리고의 삭개오라든가, 아리마대 요셉을 정착제자의 예로 들었다.

이처럼 정착제자들은 비록 자신이 가진 모든 소유를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나그네가 된 (눅9:58; 9:3; 10:4) 예수님과 그 제자들 일행을 포함하여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하여 기꺼이 자신들의 재물을 사용하였다(눅 19:8; 8:3; 10:38; 23:52-53). 정착제자들은 실제로 재산을 수중에 소유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그 재산의 소유권은 포기한 것과 다름없이 살았다.

김경진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유랑제자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역할에 국한하여 반복될 수 없는 단회적인 인물로 제한하였는데, 이는 잘못된 이해이며 위에서 간단하게 설명하였듯이 역사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순회설교자, 선교사 혹은 고교회와 같은 제도 교회의 직제상 수도사, 신부, 수녀 등 자신을 삶을 온전히 하나님 나라에 드리기로 작정한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제자도로 이해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이 두 종류의 제자도는 기독교 역사에 뚜렷이 드러나는 제자도의 유형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이 두 종류의 제자를 한 사람에게 동시에 요구할 수는 없으며, 성경에서 기능하는 것처럼 상호보완의 제자도로 이해하면 큰 무리 없이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한 편만이 옳은 것으로 설명하는 것은 제자도에 대한 온전한 이해라고 볼 수 없다.

3. 아나뱁티스트와 제자도

1) 아나뱁티스트에 대한 이해

아나뱁티스트 운동은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과 그 맥락을 같이하며 시작되었다. 종교개혁 기념일이 1517년 10월 31일이라면, 아나뱁티스트 기념일은 1525년 1월 21일이다. 종교개혁 기념일이 루터의 95개 논제를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게시한 날을 기념한 것이라면, 아나뱁티스트 기념일은 스위스 취리히 시의회의 유아세례 반대가 불법임을 판결한 데 대해 몇 명의 사람들이 펠릭스 만츠의 집에 모여 성인 세례를 시행한 것을 기념한 날이다.

이렇게 아나뱁티스트 운동은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적 흐름을 배경으로 스위스에서 시작이 되었다. 초기 교회 때,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불린 것처럼, 16세기 종교개혁 당시에 관행이었던 유아세례 대신에 신앙고백을 근거로 성인세례를 시도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붙여진 이름이 아나뱁티스트였다. 비록 겉으로 드러난 운동의 시작은 유아세례를 거부하는 모습이었지만, 실제로 더 중요한 것은 성경적 교회의 회복이었다.

아나뱁티스트들은 종종 제3의 종교개혁가들이라고 소개되는데, 이는 동시대의 종교개혁이 온전한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뒷걸음 칠 때, 성경의 가르침을 온전히 시행함으로써 종교개혁을 완성하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나뱁티스트들이 누구인가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매일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따라 살고자 애쓴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 “따름”을 가장 소중히 여겼던 이들은 초기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자신들의 삶을 직접 연결시켜, 사도행전 5장 29절의 말씀과 산상수훈을 실천하고자 애썼다. 그렇게 그리스도 따름을 실천하기 위해 그들은 먼저 말씀을 옳게 해석하고, 해석한 말씀에 제대로 반응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들은 사람의 말을 듣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좋아했으며(행5:29), 일상생활 속에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따르며,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범을 통해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를 이루고자 애썼다. 박해 중에서도 그리스도의 평화를 실천하며 살고자 애쓴 평화의 사람들로 기억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500년을 지내오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아나뱁티스트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신앙의 핵심은 제자도, 평화, 공동체로 요약할 수 있다. 무엇보다 아나뱁티스트들은 기독교를 이해할 때, 가장 먼저 “제자도”를 언급한다. 여기에서 제자도는 우리에게 익숙한 제자 훈련이나, 어떤 프로그램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제자들이 모인 곳을 교회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아나뱁티스트들은 교회를 형제 됨과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신앙공동체이자 가족으로 이해한다. 교회를 이루기 위해 구성원은 우선 그리스도께 자신을 헌신하는 것은 물론 공동체인 그리스도의 몸에 기꺼이 헌신하고자 애쓴다. 그리고 그 헌신의 방법은 항상 세상의 원리가 아닌 그리스도의 원리로서 평화의 하나님과 맞닿아 있다. 제자도를 말로만 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원수 사랑을 말로만 외치는 것이 아니라, 무저항과 사랑의 윤리 (ethic of love and nonresistance)를 실천하고자 애써왔다. 그래서 아나뱁티스트들에게 주어진 별명 중 하나가 “산상수훈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어찌 보면 이상주의자들이었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성서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는 기독교실존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아나뱁티스트들은 그리스도를 매일의 삶 속에서 따르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2) 한국의 아나뱁티스트 운동

한국의 아나뱁티스트 역사는 1952년 한국전쟁의 난민들을 돕기 위해 들어온 메노나이트 중앙위원회 (Mennonite Central Committee –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교육, 개발, 구제를 담당하는 메노나이트 구호기관)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메노나이트 구호기관이었던 MCC는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약 20년간 전쟁고아들과 난민들에게 물자를 공급하였고, 전쟁미망인들을 대상으로 재봉기술교육,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메노나이트 직업중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한국전쟁직후 복음의 핵심인 고아와 과부를 도우라는 말씀에 반응하여 구호활동을 전개하였다. MCC가 한국에 발을 디디면서 펼친 첫 활동은 전쟁 피난민을 대상으로 가장 시급한 물자 구제사업이다. MCC는 집을 잃고 먹을 것조차 없었던 전쟁난민들에게 필요한 물자를 제공하였고,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위해 메노나이트 직업훈련학교를 세우고, 가족/어린이 지원프로그램을 만들고, 전쟁미망인들을 위한 재봉기술 교육의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이러한 활동 외에도 병원 자문봉사, 지역개발봉사, 기독교 어린이 위탁 훈련교육 등 대구와 부산지역을 중심으로 다양한 구제, 교육, 지역개발, 사업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빠른 경제개발과 더불어 MCC 사역은 더 많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나라로 옮겨 가면서 사역을 마감하기에 이르렀다. 1971년, 20년 동안 시행했던 메노나이트 직업훈련학교의 마지막 수업이 진행되었고, 당시 한창 전쟁의 피해로 씨름하던 베트남 등 더 많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나라로 사역을 옮기게 되었다.

MCC 사역 이후, 메노나이트 직업훈련학교 졸업생을 중심으로 메노나이트 정신을 이어가려는 노력이 있었다. 구호사역으로서의 목적은 달성하였으나, 선교사역과 구호사역을 분리하여 시행하는 메노나이트 교회의 전통에 따라 아나뱁티스트 운동은 이렇다 할 교회운동으로 정착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990년대에 직업훈련 학교 동문을 비롯하여 메노나이트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기독교인들이 생겨났고, 캐나다 메노나이트 교회와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공식적인 교류는 1996년 캐나다 메노나이트 교회로부터 선교사가 파송되면서 재개되었다. 이러한 관계속에서 한국 메노나이트 교회에 대한 관심이 싹트게 되었고, 현재 캐나다와 미국 메노나이트 교회는 물론 세계 메노나이트 교회 협의회 Mennonite World Conference와 형제애를 나누고 있다. 현재 한국 아나뱁티스트와 전 세계의 메노나이트 교회는 가능한 여러 형태를 통해 형제애를 나누고 있다. 무엇보다도 성서가 말하는 교회회복을 꿈꾸며, 제자도, 평화, 공동체의 핵심가치를 실천하는 자생적인 아나뱁티스트 운동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고 있다.

비록 한국에서의 활동이 구호활동을 중심으로 펼쳐졌지만, 성서의 관점에서 보자면 세계 도처의 어려움과 돌봄이라는 필요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3) 아나뱁티스트 제자도

위에서 설명한 열두 제자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명령(마태복음 10장)과 기타 복음서의 내용을 살펴볼 때, 우리가 알고 있는 제자도와 성경이 알려주는 제자도는 사뭇 다름을 알 수 있다. 역설적이지만 제자도discipleship란 무엇인가? 를 정의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 중에 무엇이 제자도가 아닌가를 설명함으로써 제자도를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다음의 설명은 그 몇 가지 예이다.

  1. 제자도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2. 제자도는 교회성장학의 어떤 분과가 아니다.
  3. 제자도는 학생에 관한 무엇이 아니다.

이를 좀 더 상세하게 부연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제자도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우선 제자도는 어떤 특정한 교회의 프로그램이나, 학교에서 전문적으로 양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위해 학교를 개설하지 않고 삶의 자리를 내어 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제자도는 교회에서 막대한 예산과 뜨거운 열정과 몇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만들어 내면 되는 그 어떤 프로그램이 아니다. 그러므로 제자학교, 제자훈련프로그램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2. 제자도는 교회성장학의 어떤 분과가 아니다.
특정한 교회에서 교회 성장을 위한 방식으로 제자를 양성하기 위해 어떤 분과를 마련하여 제자들을 배출한 적이 있다. 제자 훈련 과정으로서 인기를 구가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것처럼 제자도는 훈련 프로그램도 교회성장을 위한 도구로는 더더욱 사용되어서도 안 되고 그럴 수도 없다. 교회 성장은 성령께서 일하시는 결과물이지, 그 자체로 목적이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만큼 현재 교회는 제자도에 대한 오해를 하고 있거나, 진정한 의미의 제자가 결여된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제자도는 학생에 관한 무엇이 아니다.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제자도는 학생에 관한 무엇이 아니라, 제자로서 선생님의 길을 따르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과연 선생의 길은 무엇인가 질문할 수밖에 없으며, 그 선생님의 모습에 따라 제자도가 결정되는 것이 당연하다.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유일무이한 선생님, 주인, 교사가 누구이며 그 가르침의 본령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간디가 그리스도인들을 두고 한 말로 인해 뼈아픈 상처를 안고 있다. “나는 예수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닮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기독교인이 예수와 같이 행했다면 저는 기독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I like your Christ. I do not like your Christians. They are so unlike your Christ.”

간디의 지적처럼 우리가 말로 “예수는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아주 쉽다. 그러나 삶으로 “예수는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렇다면 과연 제자도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 제자도는 매우 실제적인 모습으로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표현되어야 한다.
  • 그러므로 제자도는 매일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어야 한다.
  • 또한 그 모습은 어떤 프로그램이나 도구가 아니라, 또 누군가에 의해 통제되거나 조정되는 모습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본받는 모습이 자발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이러한 내용은 16세기에 1세기 교회의 모습을 다시 복원하고자 노력했던 아나뱁티스트의 삶에 잘 드러나 있는데, 무엇보다 아나뱁티스트가 말하는 제자도는 아주 단순하며, 성경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다지 낯설지 않을 것이다. 사실 16세기 아나뱁티스트들이 모진 박해를 받은 이유는 가톨릭이나 개신교 정부가 복음을 말한다하면서도 복음과는 너무 멀리 떨어진 당국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단순히 예수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라 살고자 하는 모습을 고집스럽게 반복한 것일 뿐이라서, 뭔가 기발하고 특별한 내용이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적잖이 실망스러운 모습으로 비치곤 한다. 이들의 제자도는 이론적인 정교함보다는 삶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습으로 자리하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조금 특이한 점이 있다면 아나뱁티스트 신학에서 제자도는 항상 십자가, 고난과 함께 이야기된다는 점이다. 이는 16세기에 아나뱁티스트들이 제자들로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아나뱁티스트들이 주장했던 제자도의 모습이 어떠한지 잠시 살펴보자.

한스 뎅크 (1500-1527)

한스 뎅크는 최초로 남부 독일의 아나뱁티스트 운동을 이끈 아주 매력적인 지도자 중 한사람이다. 그의 신비롭고 인간적인 성향은 루터의 가르침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그런 까닭에 그는 뉘른베르크에 있는 유명한 성 제발트 학교 교장으로 있는 동안에 ‘오직 믿음으로’를 주창했던 루터의 가르침을 신랄하게 비판하여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는 1526년 5월 아우스크부르크로 가서 후브마이어와 협력했고 프로테스탄트 당국에 의해 추방되어 스크라스부르에서 잠시 머무는 동안에는 보름스와 아우크스부르크 지역의 아나뱁티스트 지도자로 활동했다. 보름스에서 그는 구약의 예언서를 완역하는 일을 도왔다. 1527년 11월 전염병으로 사망하였다. 뎅크는 당시 혹독하고 증오스러울 만큼 맹렬한 논쟁에 휩쓸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저술은 영혼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특별히 한스 뎅크는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의 말씀에 복종해야 함을 Gelassenheit로 설명하였는데, 겔라센하이트는 그리스도의 권위에 온전히 항복함, 순종함, 복종함을 뜻하는 아나뱁티스트 신학의 핵심 사안이자 제자도의 정수이기도 하다. 그는 항상 “자신이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걸어가야만 한다.”고 제자도의 핵심을 설명하였다. 또한 “매일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는 결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아나뱁티스트로서 제자도를 가장 명쾌하게 설명한 내용이기도 하다.

조르그 바그너 (1527)

아나뱁티스트 리더 중 한 사람이었던 조르그 바그너는 아우스분트 찬송집에 다음과 같은 가사를 썼다.

누구든지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세상의 모욕과 고난이라는 수모를 겪어야 하며, 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네.

이것만이 보좌로 나아가는 길,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길.

그리스도의 종들은 죽기까지 그를 따르며

그들의 몸을 십자가 위의 삶과 죽음에 내어주어야 하리.

금이 정련되듯이 그리스도의 종들도 발의 시험을 견뎌야 하리.

모든 것을 포기하되 십자가는 선택해야 하며,

십자가를 붙들며 가정, 자녀, 아내 등 다른 모든 것을 버려야 하리.

이익을 포기하고 고통을 잊는 종들에게 생명이 주어지리.

이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 제자도의 내용은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로 요약할 수 있다.

마이클 잣틀러 (1490-1527)

스위스 형제단의 중요한 지도자이자 전도사였던 마이클 잣틀러는 1526년에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다. 그는 1527년 슐라이트하임에서 열린 아나뱁티스트 비밀 회합을 주관했고, 아나뱁티스트 역사 상 최초의 고백서로 알려진 슐라이트하임 고백서를 입안했다. 이 고백서는 주로 제자도, 새로운 공동체의 생활과 질서에 대한 질문을 다루고 있다.

이 회합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회의에 참여했던 다른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로텐부르크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의 재판과 사형은 아나뱁티스트 순교자들 중 가장 유명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높은 학식과 겸손한 비폭력 그리스도인이었다. 그에 관한 많은 기록이 있지만, 조르그 바그너처럼 그가 쓴 찬송가 가사가 아우스분트 찬송집에 실려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진정한 가르침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실 때,

그리스도께서 무리를 불러 모으실 때,

그리고 인내심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예수께서 우리에게 너희 참된 제자들은 매일의 삶을 점검하고 주의하라고 하셨네.

나보다, 나의 말보다 세상의 것을 더 사랑하면 내게 합당치 않으리.

…….

나의 말을 따르면 세상은 너희를 박해하고, 욕하고, 죽이게 될 것인데,

너희를 위해 상이 준비되어 있으니 기뻐하라!

누가 그리스도를 따를 것인가?

한스 후트 (1485-1527)

한스 후트는 남부 유럽의 유능한 아나뱁티스트 전도사로 다른 지도자들 전체가 인도한 사람들 수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회심시켰다. 그는 오스트리아와 모라비아에 존재했던 모든 아나뱁티스트 그룹을 시작한 사람이었다. 무역업을 경영하는 제본업자이자 도서판매상이었던 후트는 여행을 하면서 1520년대의 종교적 격동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1526년 한스 뎅크에게 세례를 받은 후, 아우크스부르크로 갔다. 그 후 18개월 동안 설득력 있는 순회 전도사로 활동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이끌었으며, 많은 재능 있는 리더들을 아나뱁티스트 운동으로 이끌었다. 1527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며, 감옥의 화재로 목숨을 잃었다. 그는 로마서 8장 17절을 근간으로 “누구든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진정으로 알기 원한다면,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자신에게도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해야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려면 그와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한다.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뜻”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레온하르트 시머 (1500-1528)

초기 아나뱁티스트 리더이자 평화주의자로 그의 글 역시 초기 아나뱁티스트 찬송가인 아우스분트에 남겨져 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경험하신 것과 똑 같은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선생님보다 제자가 더 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신 것은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신 것으로 우리도 그의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 그는 죄가 없으시고 그 입에 간사한 말이 없으신 분이시다. 그럼에도 그는 육체적인 질고를 짊어지셨다. 우리가 죄를 지어서 받게 되는 고통으로부터 자유하려면 스스로 준비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고난 그 자체가 우리를 죄에서 자유롭게 만들지 못한다.”고 하면서 제자도와 그리스도의 고난을 분리시키지 않았다.

한스 스라퍼 (???-1528)

가톨릭 사제였다가 아나뱁티스트가 된 한스 스라퍼는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침을 따르며 받게 될 고난을 준비해야 한다. 그럴 때 그리스도께서 하늘 아버지와 천사들 앞에서 그들을 모른다 하지 않으실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 하는 자는 나를 따라야만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들도 있어야 한다. 나를 따르는 자는 아버지께서 기억하실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는 자는 자신을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 간단히 말해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다. 이는 세상이 변한다 해도 결코 변치 않을 진리다.”라는 글을 남겼다.

제이콥 후터 (1500-1536)

모라비아 지역에서 활동했던 아나뱁티스트 리더로서 유무상통의 공동체인 후터라이트를 시작하였다. 모자를 만들어 파는 사람으로서 조지 블라우락의 뒤를 이어 티롤 지방의 아나뱁티스트들을 위한 목사가 되었다. 그는 박해가 한창이던 16세기에 모라비아가 아주 평화로운 지역이라는 소식을 듣고 티롤 지역의 아나뱁티스트 그룹과 연합하였다. 그에게 제자도란 성서의 가르침을 따라 그대로 살아가는 모습으로 이해되었고, 특별히 사도행전 2장의 가르침을 따라 기독교 공동체를 시작하였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독교 공동체들 중 하나로 알려진 후터라이트 공동체는 그의 이름을 따라 후터라이트가 되었다.

메노 시몬스 (1496-1561)

메노 시몬스는 16세기 네덜란드에 살았던 가장 중요한 아나뱁티스트 지도자였다. 그를 따랐던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따라 메노나이트라 부르게 되었다. 그는 아나뱁티스트 운동을 시작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2세대 아나뱁티스트 운동을 통합하고, 조직하고, 영적인 지침을 마련하였다.

1524년 그는 사제로 서품을 받았고, 곧 바로 몇 교구를 담당하였다. 네덜란드의 목회초기부터 화체설의 기적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된 것은 그다지 놀랄만한 일이 못되었는데 이는 주의 만찬에 대한 상징적인 관점을 변호하는 운동이 몇 년 동안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입장에 대해 성경의 확증을 찾은 후, 성경의 권위를 따를 것인지 아니면 교회의 전통을 따를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몇 년 뒤, 그는 세례를 다시 받았다는 이유로 아나뱁티스트들을 처형하면서 점화된 세례에 대한 관점을 바라봄에 있어 비슷한 위기를 겪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1531년, 그는 아나뱁티스트 입장이 맞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아나뱁티스트 운동에 가담하지 않았다. 아마도 당시에 이 운동이 점점 더 세상의 종말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가기 시작했고, 점차로 폭력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마침내 가톨릭교회를 떠난 것은 1536년에나 이르러서였다. 그는 비록 소행의 실수가 있기는 하지만 결국 자신들의 신념을 따라 고난과 죽음까지 받아들인 아나뱁티스트들의 용기를 따라 가톨릭을 떠나야 했다고 말하였다. 그는 세례를 받자마자 이내 네덜란드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아나뱁티스트의 중요한 리더가 되었다.

그는 뮨스터로부터 영광을 기대하다가 절망하게 된 여러 상처받은 심령들과 잘못 인도받은 아나뱁티스트들을 상대로 훈련받은 공동체를 이루도록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의 목에는 현상금이 걸려 항상 숨어 다녀야 했지만, 그는 말과 글로서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훈계하고, 설득하였다.

프로테스탄트들과 가톨릭에 의해 동일한 박해를 받으면서 그는 결국 1554년 홀스타인의 귀족의 영지에 은신처를 마련할 수 있었다. 말년에 그는 자신의 첫사랑이자 위대한 사랑인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글을 저술하고 출간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메노 시몬스는 위대한 학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저술들은 자신이 소유했던 믿음에 관해 분명하고 강한 어조로 기록되어 있다. 후브마이어와 마펙이 보다 훌륭한 신학자였지만 점도 없고 흠도 없는 교회를 위해 자신의 수고를 아끼지 않는 점에 있어서는 그 누구도 메노를 능가하지 못했다.

메노 시몬스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발자취를 따르며, 회개하고 위로부터 다시 태어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다. 이는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을 갖고, 그가 걸었던 길을 걸으며,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라야 한다. 누구든지 그보다 아버지, 어머니, 자녀, 혹은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합당치 않으며 그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1539년에 쓴 책 Foundation에서 그는 “나는 내 주께 공식적으로 고백합니다. 나는 그와 분리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만약 당신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았다면, 성령 안에서 믿음, 삶, 예배 등에 있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가 되지 못했다면, 여러분의 불쌍한 영혼들은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성경이 말하는 대로 가르치고 고백하는 것과 다른 모든 것은 당신을 속이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가 구원을 얻으려면 좁지만 올바른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 어떤 황제나, 왕이나, 제후나, 공작이나, 기사나, 귀족이나, 의사나, 목사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남자나, 여자나, 예외는 없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걸으셨던 길을 똑같이 걸어야 합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성령을 갖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대로 살지 않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함으로써 제자도는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대로 사는 삶으로 정의하였다.

또한 1540년에 제자도를 주제로 그가 지은 찬송이 있는데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이 세상에서 잠시 잔치를 누리기보다는.

바로의 창고에 있는 모든 것을 갖기 보다는.

나는 차라리 슬픈 상처를 선택하리라.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 고난을 선택하리라.

바로의 왕국은 영원하지 않으나,

그리스도의 왕국은 확실하고 영원하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팔로 자녀를 감싸 안으시며,

말씀으로 비판받는 성도들을 위로하시며,

신실한 자들을 보호하신다.

우리를 자유케 하시고

죄를 사하시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원수로부터 멸시를 받으셨으니

이제 원하면 당신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으리!

만약 당신이 불로 연단을 받는다면, 생명의 좁은 길로 들어가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며,

그가 하신 말씀을 굳게 붙들라.

만약 네가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으면,

사람들 앞에서 나의 말을 굳게 붙들면,

기쁨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다!

이상에서와 같이 아나뱁티스트 제자도는 그리스도를 따름과 십자가 및 고난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들에게 있어서 제자도는 보이지 않는 믿음을 보이도록 삶으로 드러내는 것이었고, 그러기 위해서 사랑과 복종(Gelassenheit)을 통해 그리스도를 매일 삶 속에서 따르는 삶을 살았다. ( 아놀드 스나이더, pp88-89)

4. 나가는 말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16세기에 아나뱁티스트 운동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운동과 아주 다른 점을 보인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제자도”라고 할 수 있다. 아나뱁티스트는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당연히 그의 길을 따라야 한다고 보았다. 그들은 제자도는 모든 영역에 걸쳐 요구되는 항목으로 이해하였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태어난 신자들이라면 하나님 나라의 기준을 따라 살아야 할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요청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성역이나 성속의 구분이 필요하다기 보다는 사회, 경제, 윤리적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의 모습은 당연히 서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들에게 교회의 경제정의 및 사회정의는 당연한 제자들의 삶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에도 아나뱁티스트들이 사회 운동에 관심이 많은 것은 그들이 사회운동을 일으켜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신앙과 삶이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드러난 모습일 뿐이다.

아나뱁티스트들에게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동,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활동 등은 모두 제자도와 연결되며 결혼 생활에 있어서도 제자도는 예외가 아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모든 것은 남녀 구분 없이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모두에게 요청되는 총체적인, 전인적인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보았다. (아놀드 스나이더, p232)

제자도에 있어서도 성령께서 남녀를 동일하게 부르셨으므로 동일하게 제자도를 요청하신다고 믿었다. 성령께서 부르실 때, 남자 여자 따로 구분해서 부르지 않으신다고 믿었다. Discipleship/Nachfolge (following after)는 결국 누군가의 뒤를 따르는 것 (335)이며 필그람 마르펙이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것처럼 사는 사람들이다.

이상의 내용으로 보아 “예수 따름”으로 요약 가능한 아나뱁티스트의 제자도는 결국 Christlikeness (예수처럼 되기)에 다름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처럼 되는 삶이어야 한다. 이것이 아나뱁티스트 제자도가 말하는 제자도다.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자라나는 것이 제자도다.

역사에 있어서 가정은 없다지만, 글을 마치면서 간디가 아나뱁티스트를 만났더라면 어떻게 말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해 나름의 상상력으로 답을 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만약 간디가 아나뱁티스트를 만났더라면…….., 아나뱁티스트들의 삶을 바라보며 뭐라고 했을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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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Donald F. Durnbaugh, The Believers’ Church: The History and Character of Radical Protestantism, Macmillan,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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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코넬리우스 J. 딕, 김복기 옮김, 아나뱁티스트 역사, 대장간, 2013.
  7. 도널드 던바, 최정인 옮김, 신자들의 교회, 대장간,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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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W. Madison Grace II, True Discipleship: Radical Voices from the Swiss Brethren to Dietrich Bonhoeffer to Today, Southwestern Journal of Theology, Vol. 53, Spring 2011. 135-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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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Kyoung-Jin Kim, Stewardship and Almsgiving in Luke’s Theology, Sheffield Academic Press, 1998.
  12. Franklin H. Littell, The Discipline of Discipleship in the Free Church Tradition, The Mennonite Quarterly Review 35:111-119 Ap 1961.
  13. J. Danney Weaver, Discipleship Redefined: Four Sixteenth Century Anabaptists. The Mennonite Quarterly Review 54:255-279, October, 1980.
  14. Harold S. Bender, Walking in the Resurrection: the Anabaptist Doctrine of Regeneration and Discipleship. The Mennonite Quarterly Review 35:96-110 Apil 1961.
  15. Harold S. Bender, The Anabaptist Theology of Discipleship, The Mennonite Quarterly Review 24:25-32. January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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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C. Norman Kraus, Discipleship and Grace? Brethren Life and Thought

1차 대담 :20년을 돌아보며 새로운 20년을 내다보기

KAC 20주년을 기념하면서 전/현직 KAC 이사장과 스탭들이 모여 2차례의 좌담회를 가졌다. 첫번째는 2021년 10월 2일 (토) 오후 9시에 KAC의 과거를 돌아보는 회고의 시간이었고 두 번 미래를 내다보는 시간으로 11월 6일 (토) 21:00시에 온라인으로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참석자는 권세리, 김경중, 김복기, 남상욱, 문선주, 안동규, 이재영, 팀 프로즈 (가나다 순)이었다. 한국과 캐나다를 연결해야 하기 때문에 적절한 시간은 한국시간으로 토요일 오후 9시 (캐나다는 토요일 오전 8시)밖에 없었다. 하지만 토요일 밤 12시가 다 되도록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다. 화상이지만 오랜 만에 만나 반가웠고 과거를 돌아보며 추억에 잠겼으며 미래를 내다보며 새로운 모색으로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하였다.


KAC 1차 대담

  • 주제: KAC 20년을 돌아보며
  • 일시: 2021년 10월 2일 (토) 21:00시
  • 참석자: 권세리, 김경중, 김복기, 남상욱, 문선주, 안동규, 팀 프로즈 (가나다 순)

1차 대담자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이 사전에 주어졌고 각 발언을 통하여 KAC의 역사를 돌아 보고자 하였다.

  1. 나는 언제(기간) KAC에 참여하였으며 맡은 역할은 무엇인가?
  2. 나에게 KAC는 어떤 존재인가?
  3. KAC의 사역 중 가장 중요한 순간은 무엇이었나?
  4. KAC와 관련 아쉬운 점은?
  5. 사역 중에서 가장 기억나는 사람은?
  6. 가장 힘들었던 기억은?
  7. 제자도 평화 공동체와 관련해서 KAC의 기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사회 안동규: 늦은 시간에 모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체 대화 진행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첫 질문은 자신이 언제 KAC에 연결되어 참여했고, 무슨 일을 하였는가를 6하 원칙 (5W 1H)으로 이야기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말씀을 나누면서 KAC는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 가장 중요한 순간이 언제였는가, 아쉬운 점은 무엇이며, 기억나는 사람, 힘들었던 일은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대화가 진전되면 좀더 중요한 주제로 우리가 추구했던 핵심가치로서 제자도, 평화, 공동체에 과연 우리는 어떤 기여를 했을까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다음 대담에서 미래에 관한 이야기, 즉 현재 우리의 한계는 무엇이고, 앞으로의 방향설정과 네트워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이야기하면 좋겠습니다.

저부터 먼저하지요. 저희 예수촌교회는 1993년에 목요성경공부 모임을 하면서 대략 3년 동안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그때 여기 계신 복기 형제도 참여했었는데, 3년 동안 공부하는 과정에서 “아! 이제는 우리가 교회를 해도 되겠구나!”하는 생각에 1996년 1월 7일 날예수촌 교회 첫 예배를 저희 집에서 드렸습니다. 교회사를 중심으로 역사에 대한 공부도 하고, 교회란 무엇인가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초대교회가 원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공부를 하면서 역사적으로 초대교회에 가장 근접한 어떤 정신을 갖고 있는 아나뱁티스트 운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저희들이 교회를 시작하면서, CMBC (Canadian Mennonite Bible College) [CMBC 는 이후 CMU (Canadian Mennonite University)로 확대되며 교명이 바뀌었다, 편집자 주] 와 연결고리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예수촌교회에서 서서히 사람들을 초청하기 시작했지요. 이 즈음 이윤식 형제님이 캐나다 위니펙의 CMBC에서 2년 간 머물다 오셨고, 미국과 캐나다 메노나이트 교회에서 이따금 씩 사람들이 와서 설교하고 돕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1996년에 제가 캐나다 밴쿠버로 연구년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메노나이트 교회 컨퍼런스에 참여하면서 점점 메노나이트 애나뱁티스트의 실체를 보게 되었습니다. 당시, “어? 이 운동에는 굉장히 크고 다른 의미가 있구나!”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런 경험과 더불어 한국으로 돌아와서 교회를 섬기는 중에 메노나이트 친구들의 방문 횟수가 늘어나며 교제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제가 메노나이트 교회의 초대도 받고 교제를 하는 중에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질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질문에 저희는 한국에는 교회가 많으니, 한국 교회를 위해 뭔가 Resource센터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했는데, 아마도 스탠리 그린(Stanley Green)이 저에게 제안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영국 런던의 메노나이트 센터와 일본 도쿄의 아나뱁티스트 센터를 방문하면 좀 아이디어가 생길 것 같다는 제안을 받았고, 런던 메노나이트 센터를 방문했습니다. 그 때 스튜어트 머레이가 센터장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알렌 크라이더 드곳을 박사가 떠난 지, 1,2년 후였던 거 같습니다.

그때 굉장히 고무적으로 다가온 것은 런던 아나뱁티스트 센터는 그렇게 큰 조직이 아니었지만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는 모습을 보며 한국에서도 이 정도 센터는 가능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도쿄 아나뱁티스트 센터를 방문한 다음에는 우리도 이러한 센터는 운영할 수 있겠다는 자신이 좀 생겼습니다. 도쿄센터는 좀 더 규모가 작아서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저희가 한국에서 KAC(한국 아나뱁티스트 센터)를 시작하면 어떻겠느냐 제안하였고, 저희가 아나뱁티스트에 대해 잘 알지 못하니, 누군가를 보내달라고 하면서 KAC가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한국 아나뱁티스트 센터가 생겨나기까지의 배경설명이구요 순수하게 제 기억을 소환하여 한 이야기임을 밝힙니다. 이렇게 KAC를 시작하기 전에 KAC 역사에 처음 등장한 인물이 팀(Tim Forese) 선교사님이고, 이러한 배경으로 경중 형제님도 관여하고, 그 이후 총무 일을 맡으면서 일이 펼쳐져 20년의 역사를 걸어오게 되었다고 봅니다. KAC 시작 점에 “이곳 한국에 왜 KAC가 생겼느냐?”라는 질문이 있었는데, 이에 대한 반응으로써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이나 그룹이 아나뱁티스트 센터나 메노나이트 관련 자료들이 필요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돕기 위해 아나뱁티스트 정신을 한국사회에 소개하는 것이 좋겠고, 이를 위해 한국에 아나뱁티스트 센터를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고 한 것이지요. 그렇게 예수촌 교회와 팀-경중-재영로 연결되어 KAC가 시작되었습니다.

간략한 배경 설명에 이어 이제부터는 자기가 KAC에 어떻게 연결되고 어떤 일에 관여했는지 나누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야기의 순서는 팀 선교사님이 먼저하고, 경중 형제님이 이어서 진행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두 분의 이야기가 끝나면 그다음에 복기 형제님과 현 총무인 선주 자매님이 이어가 주시면 총무 라인으로 연결되어 이야기 진행이 쉬워질 것 같습니다. 총무 라인의 이야기에 이어 18년동안 이사장을 맡은 저와 두번째 이사장으로 수고하신 남상욱 형제님이 이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제 마이크를 팀에게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팀 프로즈 (Tim Forese): (한국 이름은 표대문이다, 편집자 주): KAC가 생겨나게 된 배경을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르는 것도 알게 되어 감사한 마음입니다. 한국에 오기 전엔 우리 가족은 남미에서 브라질에서 그리고 파나마에서 선교 활동을 오래 했습니다. 도전도 많이 받았고 특히 선교에 대해서 그리고 아나뱁티스트에 대해서 생각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96년부터 우리 가족은 다시 한번 선교사로서 파송받기를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때는 남미 언어를 배웠기 때문에 아마 하나님께서 당연히 우리를 남미로 파송하시겠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에 대한 생각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선교부와 얘기를 하면서 아나뱁티스트 운동(Anabaptism)과 선교라는 두 가지 활동을 모두 원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야기를 하면서 한국 얘기가 나왔고 드디어 98년에 8월 8일, 김포공항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대한민국에 도착하는 공항에서부터 일을 마치고 다시 공항에서 캐나다로 돌아가는 순간, 그러니까 공항에서 공항까지 우리 김경중 형제님이 함께 해주었습니다. 지금도 참, 감사합니다. 우리가 처음 메노나이트 선교에 대해 이야기했을 처음에는 아나뱁티스트센터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습니다. 주로 아나뱁티스트 연구소 ARI (Anabaptist Research Institute)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Anabaptist Research Institute를 생각해본 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아나뱁티스트 연구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몰랐고, 한국에 도착한 1998년부터 2000년까지 한국말을 배우면서 처음에는 경중 형제님과 그리고 얼마 뒤 캐나다에서 공부를 마치고 온 재영 형제님 하고 ARI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자료센터로서 KAC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지요. 아나뱁티스트 센터의 목표는 무엇이며 어떤 일을 해야하는 지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렇게 한국말을 배우는 동안 많은 손님들이 찾아 왔습니다. 예를 들어서 MVS (메노나이트직업중고등학교) 졸업생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메노나이트 사람이 한국에 왔다고 하니 궁금증과 호기심이 있는 그런 손님들이 우리가 와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대화와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KAC라는 이름을 정하게 되었고, KAC 목적, 구조를 조금씩 조금씩 만들어 나갔습니다. 초창기에는 재정, 스탭, 장소, 활동 등이 별로 없었지요. 그리고 2001년에 “죄송합니다. (웃음) 경중 형제님, 그 양치기였던 분 이름, 그 분 원래 이름은 뭐지요?” 이근호 씨가 자원봉사자로써 같이 일하셨고, 황성주 박사님이 빌려주신 사무실에서 처음 KAC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2001년 11월 2일 센터 시작예배 (Opening Service)를 서울 유니언교회에서 드렸습니다. 처음부터 안동규 형제님과 제가 둘이 공동대표로 시작했고, 2001년에서 2004년까지 대한민국에서 계속해서 일하였고, 2004년 2월부터 2005년 12월까지는 캐나다에서 계속해서 KAC 활동을 지원하였습니다. 그렇게 KAC에서 일하다가 2006년부터 캐나다 메노나이트 교회(Mennonite Church Canada)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 김경중: 옛날 이야기를 하니까 다시 기억이 조금씩 살아나는 것 같아요. 너무 감사합니다. 저는 1997년도에 CMBC를 마치고 8월 말에 귀국을 했는데 화천으로 바로 들어갔습니다. 화천에 저희 부모님 계신 곳으로 들어갔는데 거기에 크리스하고 로라(Chris and Laura Mullet Koop)가 있더군요. 예수촌교회로 치면 초대 선교사님이신 거였죠. 크리스와 로라하고는 학교를 1년을 같이 다녔는데, 이 친구들이 2년을 약속하고 한국에 와서 살고 있을 때 만나게 된 셈입니다. 두 번째 해에 화천에서 저하고 다시 만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1998년에는 크리스, 로라와 교제를 많이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안동규 형제님 친구분이 사장님으로 계신 회사에서 일을 하였는데, 그게 제가 갈 길은 아니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회사를 나올 즈음에 크리스, 로라가 제게 이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우리가 다시 캐나다로 돌아가게 되면 후임자가 필요한데 지금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마침 그 때, 대만에 쉘던 스와스키(Sheldon Swasky)라는 분이 방문 중이셨는데 조금 전 안동규 형제님 말씀해 주신 아나뱁티스트 자료센터의 필요성에 대해 얘기해 주셨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일꾼이 필요한데 “다음 오실 분은 이것을 위해서 준비된 사람이 와서 일을 하면 좋겠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크리스와 로라가 자기 같은 선교사들이 한국으로 오면 한국에서도 누군가가 같이 참여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의견을 주었습니다. 사실 처음으로 크리스, 로라가 아바샬롬공동체에서 그런 제안을 했는데, 사실 그 땐 아무 것도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 없는 상황에서 그냥 비전만 공유한 상태였습니다. 그렇게 선교사가 오면 그분을 돕는 일에 개인적으로 초대를 받았는데, 그 후 대략 1년이 지났던 것 같습니다. 팀이 한국에 98년도에 오셨으니까, 아마도 97년도에 제가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와서 아바에서 그런 비전을 보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당시 직업이 없는 상태에서 처음에 “한국에서 뭘 해야 되나?” 고민하고 있을 때, 『Confession of Faith in Mennonite Perspective』 라는 메노나이트 신앙 고백 책을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안동규 형제님도 우리가 그 책 번역하면 좋겠다고 제안을 해주셨습니다. 산 속에 있으니까 시간도 있고 해서 번역을 해야겠다 생각하면서 책에 기록되어 있는 주석들을 촘촘히 살펴보았는데, ‘아, 이 책을 번역하는 일은 정말 의미 있는 일이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거기서 소명을 좀 얻었던 것 같아요. 내가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되나 앞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할까 고민하던 중에 이런 일이라면 가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이러한 일과 KAC 비전이 중첩이 되면서 개인적인 소명으로 다가와 이 일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크리스, 로라가 캐나다로 돌아가고 팀과 캐런 가족들이 들어오면서 한 번의 변화가 있었지만, 저는 여전히 회사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편으로 회사생활 하지만 동시에 교회를 잘 섬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학교에서 공부하였을 때도 그랬지만 졸업하고 나서도 배움이 이어지면서 메노나이트가 굉장히 신선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개인적인 배움과 경험이 계속해서 이어지기를 바랬고, 실제로 팀과 여러 사람과 교제를 하면서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1,2년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KAC 비전은 논의되었지만 구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습니다. 대략 2001년도에 들어서면서부터 구체적인 논의로 연결되었던 것 같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그 무렵 안동규 형제님하고 광나루에서도 회의를 한 번 한 게 기억납니다. 가평에서도 회의를 하고 가나안 농군학교에서도 회의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준비모임이 한 대여섯 번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중 2001년도에 911테러가 발생했죠. 그러면서 이제 그때는 우리가 언제 시작할 것 인가하는 계획이 다 섰었던 상태인데, 타이밍이 굉장히 적절한 시기라고 판단되어 2001년 11월 2일에 창립 예배 드렸습니다. 창립예배에서 “911테러가 일어난 이 시점에 있어서 한국교회는 어떻게 반응을 해야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었습니다. 그래서 KAC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얘기를 하던 기억이 납니다. 앞서 팀 형제님이 말씀을 해주셨지만 사전 작업을 꽤 오랫동안 깊이 한 것이 KAC 시작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MVS 졸업생들하고 네트워킹하는 게 사전작업으로써 굉장히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촌교회에서도 도움이 있었지만 MVS 졸업생들과 관련된 분들, 최형제 아버님, (소천하신) 이형곤 장로님 등 여러분께서 저희가 KAC 시작한다는 얘기를 들으시고, 적극적인 후원자로 참여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윤식 목사님, 차성도 형제님 등 여러분이 초대 이사로 참여해 주셨습니다.

⏺ 안동규: 말씀을 들으면서 기억나는 것은, 제가 쉘던 스와츠키를 많이 의존을 했더랬습니다. 쉘던이 대만에 있었고, 자주 한국에 오셨는데, 굉장히 인품이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지금 생각하기에도, 제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고 나서 나의 말을 깊이 경청한 다음에 한참을 웃곤 했습니다. 사실 저는 Dreamer 성향이 강하잖아요. 비전을 따라 일을 벌이고 때로는 나 몰라라 하는 스타일인데, 비전에 대해 이야기 하니까 맞다고 하면서 구체적으로 런던 아나뱁티스트 센터 얘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시작은 할 수 있지만 끝까지 감당을 못하니 누군가가 필요하다 싶어서 경중 형제와 팀과 함께 일을 시작하게 된 셈이지요. 그런 면에서 쉘던의 영향력도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이 도와줬고 이제 KAC를 시작하면서 한국 사람과 외국 사람이 함께 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경중 형제님과 팀 선교사님이 실제 파트너가 되어 일을 시작하게 된 것 같습니다. 여하튼 경중 형제님께서 계속 이야기를 이어주시면 좋겠습니다.

⏺ 김경중: 그렇게 준비하던 중, 이재영 형제가 저보다 2년 늦게 CMBC를 졸업하고 귀국 했습니다. 재영 형제와는 CMBC에서 함께 공부한 사이로 관계가 참 좋았습니다. 학교에서 있을 때부터 맺어진 관계가 한국으로 이어져, KAC를 시작한다니까 바로 동참하였습니다. 그래서 재영 형제하고도 논의를 많이 했는데 특히 기억나는 것은 KAC 사역의 핵심가치와 주된 사역의 주제가 무엇이며, 사명 선언 (Mission Statement)를 위해 함께 고민할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비전성명서를 만드는데 팀이 그 전체적인 틀 작업을 해주셨고 함께 의사소통을 하면서 제자도, 평화, 공동체를 핵심가치로 잡게 되었습니다. 제자도, 평화, 공동체라는 순서는 참 중요한데 우리가 평화를 일부러 가운데에 넣었지요. 이 평화를 중심에 놓아햐 하는 이유는 우리 상황, 한국교회, 정치적 맥락에서 굉장히 큰 이슈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도, 평화, 공동체라는 그 일련의 주제를 우리가 약간 끌어서 평화를 센터에 놓고 시작하자라고 가나안농군학교 마당에서 팀하고 저하고 재영 형제하고 이야기했던 게 기억납니다. 그리고 재영 형제는 EMU (Eastern Mennonite University)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한국에서 온라인으로도 수업을 들으면서 평화 석사학을 마쳤습니다. 특별히 재영 형제는 실천적 평화운동에 굉장한 관심을 보였고 초반부터 평화교육(peace education)에 대해서 큰 역할을 감당해주었습니다. 저는 초반에는 제 소명에 대해 잘 몰랐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소명이 무엇인지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는데, 아마 저의 인격과 그런 신앙 성장을 위해서 KAC에 보내주시지 않았나하는 생각을 합니다.

평화와 더불어 제자도에 대해 말하고 싶은데요, 솔직히 저는 제자도와 하나님 나라에 꽂혔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전에는 몰랐었는데 제자도라는 주제가 저한테 굉장히 크게 와 닿았고 제자도가 결국 공동체로 연결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도, 평화, 공동체 이 세 개의 핵심가치를 어떻게 이루어 낼 것인가 질문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물론 그 바탕은 하나님 나라이지만, 그 기초 작업을 할 때는 팀이 틀 작업을 하도록 알려주었습니다. 사실 팀의 기여가 크고 저와 재영 형제는 주로 번역을 하면서 도왔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팀의 기여가 없었다면 초창기 KAC의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봅니다. 팀의 그 헌신과 사람들과 관계하는 방식, 사랑이 가득한 마음 그런 것들은 정말 아직까지도 감사하고 존경스럽습니다. 그래서 KAC는 일단은 사람이 주축이 되어서 그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움직였던 그런 기관이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이 일을 시작할 수 있던 것이기도 하고요. 당시 집에서 데스크탑 컴퓨터를 하나씩 가져오고, CRT 모니터를 놓고 보니 사무실이 꽉 차더라고요. (웃음) 자리가 없어 고민할 때, 황성주 박사님의 이롬생식 건물 뒤에 ‘탈북시민연대’와 사무실을 함께 쓰기도 했습니다. 처음에 탈북시민연대가 쓰고 있는 공간 건너편, 소파 옆에 좁은 구석공간이 있었어요. 그 때 책상 두 개를 마주 보고서, 데스크탑하고 스캐너 넣고 작업을 했더랬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가 제일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웃음) 공간적으로 서로 매우 가깝게 지내면서 돈으로부터 자유로웠고, 재정적으로 궁핍했지만 자유를 많이 누렸던 것 같습니다.

⏺ 안동규: 제가 질문을 짧게 드리고 대답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KAC초창기에 대해 말씀해 주셨는데, 이제 KAC가 확장되는 상황에 대해 설명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여러 형제도 들어오고 사람들이 막 늘어나는 그 과정을 경중 형제님이 소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 김경중: 창립 예배를 드리자마자 그 다음 주부터 자리잡고 일한 곳이 조금 전에 말씀드린 탈북시민연대 사무실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몇 개월 지나서 너무 좁으니까 안되겠다 싶었는지 탈북시민연대가 이사를 제안했습니다. 우리 때문에 좁아서 그랬는지 어쨌든 우리가 탈북시민연대를 따라 같이 이사를 갔습니다. 영창빌딩인가? 이름은 잘 생각이 안나지만, 탈북시민연대와 사무실을 같이 쓰다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가 나오게 됐습니다. 탈북시민연대가 저희한테 굉장히 호의를 베풀었는데 무슨 내부 사정이 있었는지 상황이 우리가 나올 수 밖에 없게 되어 호산나넷이라는 회사에 들어가서 또 셋방살이를 습니다. 그렇게 이사를 한번, 두 번, 세 번 하는 동안 2002년 아니타 스트라이커(Anita Stricher)라는 캐나다 자매가 MCC SALTer 프로그램으로 들어왔습니다. 본격적으로 IVEPer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물론 IVEPer는 팀이 KAC 시작전부터 보냈지만 SALTer 를 받게 된 것은 아니타부터였습니다. 그 다음에 세릴이 왔습니다. 2002년도에 세릴은 캐나다 학생 프로그램으로 왔다가, 이어 캐나다 선교부 소속으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 팀: 세릴 자매님은 처음에 CMU 실습 학생(practicum student)로서 왔고 그 나중에는 캐나다에서 선교사로서 오게 됐습니다.

⏺ 김경중: 호산나네트하고 방을 같이 쓰다가 얼마 되지 않아 안동민 형제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안동민 형님 소개로 이제 KAC에 세릴, 아니타, 팀도 있고 그러니까 우리의 강점으로 영어로 뭔가를 해보자는 생각에 영어학원에 대한 비전을 키우게 되었습니다. 특히 지영 형제가 영어학원에 대한 비전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럼 우리가 영어 학원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고 우리만의 독자적인 사무실에 대한 논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안동민 형제님께서 인터그램 회사 1층하고 지하 공간을 임대해주셨는데 아주 큰 은혜로 다가왔습니다. 거기서 얼마기간 머물렀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거기서부터 커넥서스 (Connexus) 학원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커넥서스란 말은 영어권에서 많이 보는 말인데 커넥션이라는 좋은 말과 연관이 있습니다. 셰릴 어머니께서 제안해주셨던 거 같습니다. 그 때 창의적인 프로그램들을 만들었고 특히 엄마와 아이가 같이 와서 배우는 영어 프로그램도 했었던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세릴하고 재영 형제가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KAC 관계의 끈이 점점 폭이 넓어졌고 교회 분들을 중심으로 해서 MVS 졸업하신 분들과도 관계의 폭이 넓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공간도 더 여유가 있어지고 살림규모도 조금씩 커졌는데 그림입니다. 여전히 재정은 큰 문제로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안동민 형제님 회사 공간에서 일을 하다가 강남역 근처로 이사를 가게 됐어요. 커넥서스 학원을 경영하고자 대대적인 투자가 있었고, 투자자로서의 안동민 형제님, 임미성 자매님, 그리고 이재영 형제의 부모님이 공동투자자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KAC 사무실이 생겨났고 그제서야 사무실 같은 사무실을 꾸려나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다가 한 번 더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커넥서스 투자자간에 갈등이 발생했고 결국 한 번 이사를 하고나서 1년 있다가 춘천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2004년에 커넥서스를 시작했고 그렇게 강남역과 역삼역 시대를 거쳤는데 대략 6년의 세월을 그렇게 보냈던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두 번째 장소에서 지출이 너무 많아서 감당할 수가 없게 되어 여러 장소를 알아보다가 갈 수 있는 공간이 없자 KAC는 자료와 교육, 아나뱁티스트 관점에서의 교육과 모임을 담당하고, 재영 형제가 담당하던 평화교육은 기독교인을 넘어서 대상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범주를 넘어 활동할 수 있도록 KAC로부터 분리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는 오히려 그게 더 큰 효과를 본 거 같습니다. 그래서 KAC는 춘천으로 나머지는 커넥서스와 KOPI (Korea Peacebuilding Institute, 한국평화교육훈련원)가 덕소 시대를 맞게 되었습니다. 이제 커넥서스와 KOPI 얘기는 재형 형제가 이어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 안동규: 다음 이재영 형제님 차례입니다. 마이크 넘기겠습니다. (이재영 형제는 2차 대담때 20주년을 되돌아 보는 시간을 따로 가졌는데 전체적인 흐름을 고려하여 1차 대담 때로 옮겨와 편집하였다, 편집자 주)

⏺ 이재영: 저는 사실 전혀 제가 이런 쪽에 참여하게 될지는 생각을 못 했습니다. 제가 KAC에 같이 참여하게 됐던 계기는 군대 제대 후 메노나이트 학교가 있는데 한번 가보면 어떠겠냐 하시는 아버님의 권유로 화천의 이윤식 목사님 그리고 예수촌교회를 만나게 되면서 부터였습니다. 사실 저는 제가 어디로 가는지 잘 몰랐어요. 그냥 한국을 벗어나 새로운 나라, 새로운 세상을 좀 봐야 될 때가 아닌가? 이런 생각이 더 컸습니다. 그렇게 캐나다 CMBC에 가게 되는데 그 당시 김복기 형제님이 공항에서 픽업하는 것부터 해서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 다음에 김경중 전 총무님 이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그 때는 학교에 적응하는 것 부터 큰 문제였는데, 참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그때 공부하면서 메노나이트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신앙이나 철학, 활동을 많이 봤는데 MCC (Mennonite Central Committee) [메노나이트 중앙위원회, 세계적인 평화운동 및 구호 단제, 편집자 주]가 되게 매력적으로 느껴졌어요. 신학 이런 거 보다는 뭔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교회가 이렇게 구체적 활동을 할 수 있구나 그리고 아버님이 하셨던 가나안농군학교하고도 많은 공통점도 느껴졌고 그래서 관심이 많아졌던 거 같고요. 학교를 졸업 후 되게 많은 생각을 하고 한국에 왔는데 막상 와보니 할 게 없더라고요. 그냥 다른 세상에 있었구나하고 있었는데, 그때 김 총무님 그리고 팀 선교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분들 만날 때 제가 관심 있는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비전에 대한 나눔을 할 때 기뻤던 것 같아요. 아! 이런 거 하면 좋겠다 이런 생각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공부를 계속 하고 싶었는데 비자발급이 안 되면서 유학 길이 막혀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KAC가 생긴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리고 활동할 수 있는 그런 단체가 우리나라도 있으면 좋겠다 이런 입장이였기 때문에 KAC에 쉽게 참여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하나 기억나는 에피소드는 그때 여러 곳을 다니면서 회의를 많이 했는데 특히 테크노마트 지하 식당에서 많이 만났던 기억이 있어요. 그때 팀 선교사님 항상 밥을 사 주시고 그랬는데, 굉장히 맛있게 먹었던 기억, 그러다가 열띤 논의도 하고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KAC가 생기면서 어떤 영역을 서로 맡으면 좋겠느냐 이런 논의를 했는데, 아무튼 두 분이 크게 뭐랄까 그림을 어떻게 딱 그리자 이런 건 없었어요. 근데 저보고 뭐 할 거냐 물어보셔서 저는 뭐 평화 그쪽을 하고 싶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이거 되게 막연하더라고요. 그리고 뭐라고 직함을 불러야 될까? 평화 사역자? 평화교육 코디네이터? 아무튼 이렇게 이름을 붙여 가지고 제자도 평화, 공동체 라고 하는 KAC 주제에 대해서 영역을 나누게 되었죠.

그런데 제가 KAC 초반에 EMU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생겨서 학업과 일을 병행하는 상황이 됐고요. 그 상황에서 유은하 자매님이 저희를 찾아 왔었습니다. 제가 같이 공부했던 친구들 중에 걸프전 때 크리스찬 피스메이커 팀으로 갔던 친구들이 있는데, 이 친구들의 이야기를 계속 메일로 받아 그걸 번역해서 KAC 홈페이지에 올리고 있었습니다. 이걸 보고 유은하 자매가 찾아와서 이런 사역에 자기가 참여하고 싶다, KAC가 자신의 파송단체로 역할을 해 달라, 맡아달라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이게 저희들 내부적으로는 되게 큰 도전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 기억이 나는데 저는 아무래도 한국 사람이다 보니까 이렇게 의지가 있으면 가야 되지 않겠나 이런 입장이었고, 김경중 전 총무님은 약간 조심스러우면서도 그래도 참 자매가 그게 참 대단하다 우리가 어떻게 도울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팀 선교사님은 제 기억에 끝까지 찬성하지는 않으셨던 것 같아요. 팀 선교사님이 우려했던 것은 이 현장에 뛰어나가는 사람은 빙산의 일각처럼 돕는 공동체가 있어야 되는데 지금 이 자매 같은 경우 우리가 잘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이런 공동체가 없는데 혼자 이렇게 평화 활동가로 뛰어나가는 것은 어렵다, 지금은 할 수 있으나 이 형태의 시스템은 사실 건강한 것이 아니다는 것 이었요. 교회가 파송을 하는 그런 평화운동이 돼야 이게 지속 가능 할 수 있다 그런 얘기를 계속하셨었어요. 그래도 결국 저희는 본인이 원하니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건 별로 없지만 우리가 그럼 파송 단체가 되겠다 결정하게 됩니다. 저희가 재정을 지원해 줄 수 없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책 몇 권 다시 보내면서 같이 기도하고 사역을 위해서 우리가 애써보겠다 이렇게 했지요. 그림입니다. 그런데 유 자매님이 거기 현장에 혼자 남게 되었고 전쟁은 터졌고 이러면서 정말 그 긴박한 상황이 있었어요. 그때 위성 전화로 저희 사무실로 전화를 계속 보내 왔는데 어찌 보면 한국 사람으로서는 전쟁 당시 바그다드에 있는 유일한 사람 되다 보니까 저희가 그 올린 기도 제목이나 자매님 소식 같은 걸 올리면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언론사에서도 KAC 를 많이 궁금해하고 여러 가지로 KAC가 평화사역 쪽에서 알려지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그 이후로 은하 자매 개인의 삶은 상당히 쉽지 않았고 그리고 최근까지 트라우마로 힘들어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팀 선교사님 말씀하셨던 그게 다시 많이 생각이 났어요. 우리가 어떤 활동가를 만들 수는 있지만 그걸 지속하게 하는 시스템은 못 만들어 놓은 상태에서 개인이 감당해야 될 일이 되게 큰 거구나. 같이 하는 구조를 만들지 않고는 뛰어난 활동가들 몇 명이 하는 활동은 지속 가능할 수 없겠다. 이런 것을 배웠던 거 같아요.

평화 교육을 쭉 하다가 앞서 이야기한 커넥서스를 시작했습니다. 커넥서스를 통해서 재정자립이나 지속 가능성을 가지면 좋겠다는 얘기를 많이 했었습니다. 저희가 시작을 강남에서 하려고 한 건 아니지만 어떻게 강남에 자리를 잡게 됐는데, 그 당시 안동규 이사장님의 역할이 컸죠. 뒤에서 네트워크을 통해 없는 장소도 만들어 주고 하셨지요. 하지만 저희가 유지하기 위한 비용이 컸습니다. 그래 가지고 학원을 운영하면서 저도 그때는 밤에 거의 뭐 12시 돼서 가고 맨날 그랬는데도 사업과 사역 두 가지를 병행하는 게 쉬운 게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나중에 결혼도 하게 되면 저는 어디로 옮겨야 될까 한 2년 가까이 고민을 했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아이러니하게 다시 처음 근처로 옮기게 되었는데 옮기자마자 또 1년 만에 재정적으로 어려워지게 되었지요. 저희는 춘천으로 이사가자는 얘기가 나왔을때 춘천을 가려고 하니까 이건 정말 어려운 결정이더라구요. 그래서 두 개로 나눠지게 됐고 저희는 덕소로 가게 되는데, 그 때 가 2011년이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2011년이 되게 뭐가 많았던 해예요. 제가 NALPI (Northeast Asia Regional Peacebuilding Institute)를 시작한 것도 그 해 여름이었고 동북아 평화 훈련원이 만들어져서 국제 프로그램이 시작된 것도 그 해 여름 이였고, 회복적 생활교육이라고 하는 책을 번역출판 한 것도 2011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 말에 덕소로 옮기면서 저희 큰 애 롬이 태어났으니, 그 2011년에 굉장히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 많은 일을 어떻게 그 한 해에 다 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희는 그렇게 옮겨왔지만 사실 부담도 많았어요. 저희가 아무리 생각해도 춘천 가서는 평화 사역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 같아 덕소로 왔는데, 오다 보니까 저희 부모님한테도 많은 재정 부담을 주게 되었지요. 또 같이 온 형제자매들이 있다 보니 어떻게든 집을 마련해야돼서 같이 지내야 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저희가 혼자일 때는 이동이 쉬웠는데 가족이 생기고 나니 쉽진 않았어요. 그리고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뭔가 단체를 만들어 놓고 활동을 해야 되는구나 그냥 혼자 뛰어다니는 것은 안 되겠다는 생각이 있었기에 어찌 됐든 같이 먹고 자면서 해보자 이래서 결과적으로 덕소에 이제 공동체 아니 공동 숙소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아이러니 한 점은 저는 김경중 형제님 공동체 얘기할 때 저는 사실 공동체는 굉장히 싫었거든요. 저렇게까지 같이 살면서 저렇게 귀찮게 하나? 이렇게 사역을 잘 하면 좋지 않나? 이런 생각이 있었는데… 제가 셋 중에서 제일 공동체를 하기 싫었던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어떻게 하다 같이 모여 살게 되는 일이 됐구나 해서 그것도 많이 배웠던 것 같아요. 지금도 여전히 몇 형제자매들하고 같이 살고 있지만 저는 사실 비전 자체가 공동체는 아니었고 지금 마음도 그래요. 하지만 평화 사역을 하기 위해서는 탄탄한 공동체를 만들어야 된다, 어떤 소속되어 있는 무엇이 필요하다라고 하는 게 늘 강해서 지금까지 같이 사는 피스빌딩을 해왔던 거 같아요.

아시다시피 회복적 정의가 2011년 이후부터, 학교 쪽의 그 변화의 필요와 맞물려가지고 많은 요구를 받게 되었어요. 그래서 많은 곳을 다니면서 강의도 했고, 자료도 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도 많이 함께 활동을 하고 싶어 해서 저희가 2014년 10일에 한국평화교육훈련원 (Korea Peacebuilding Institute, KOPI)란 이름으로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2014년에 회복적정의협회를 만들었는데, 회복적정의 교육 받는 분들이 회원으로 가입하면서 지금은 500명이 넘는 분들이 협회 회원으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 분들이 모여서 학교나 사법이나 마을 이런 곳에서 회복적 정의를 어떻게 잘 펼쳐낼까? 하는 고민들을 같이 하는 그룹이 서서히 생겨났어요. 저는 제 책에도 쓸 때 도 그랬지만 한국의 회복적 정의 운동의 뿌리는 KAC와 같은 이런 기독교단체에 있다고 계속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목소리는 점점 줄어드는 거 같긴 해요, 저는 모 기관 (mother organization)이라고 계속 얘기는 하지만, 그런 부분에 대해서 건너 뛰고 있는 자료들이 많이 나오더라고요. 회복적 정의 운동 자체도 초기에 캐나다의 소수 메노나이트 분들의 헌신과 지원이 없었으면 있을 수 없는 운동이었던 것처럼, 한국에서도 그런 흐름에서 KAC가 기여하는 바가 굉장히 크다고 생각 합니다. 그러면서 제가 회복적정의운동이나 이런 갈등전환운동으로 먼저 뛰어든 게 아니고 KAC라고 하는 단체 안에서 제 역할을 했던 게 그래도 많이 성장하는데 밑거름이 많이 됐던 것 같고요. 지금은 많이 바빠졌지만 그 때는 부르는 데도 없어서 맨날 모여가지고 이런 저런 여러 구상을 했던 시기 그리고 비전을 많이 나눴던 시기. 그 시기가 어찌보면 씨를 뿌리고 깊이 고민할 수 있었던 그런 귀한 시간이었던 거 같아요. 그 때는 가진 것도 되게 없어서 고민도 있었지만 가장 순수한 고민이 깊었던, 성장했던 시기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마지막으로 아버님이 작년에 소천하셨는데 아버님한테 참 고마움을 많이 느꼈습니다. 아버님이 메노나이트를 연결해주지 않았다면 제 인생이 지금 이렇게 와있지는 않을 것 같거든요. 모두가 다 어떤 우연과 필연의 역사였지만 아버님에게로 부터 그냥 떠도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구현해내는 것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 제안을 받은 것 그리고 좋은 분들을 만났던 것, 이런 것이 참 큰 은혜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여기까지 말씀 드리겠습니다.

⏺ 안동규: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를 살펴보자면, 2011년부터 덕소와 춘천으로 서로 분립하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된 셈이로군요. 굳이 요즈음 시대를 구분하는 방식으로 나눠보자면 춘천-덕소의 분립은 버전3 정도 되는 거 같네요. KAC 창립을 버전 1이라고 하면, 해매고 커지는 커넥서스 이후부터 버전2라 할 수 있고. 버전3에서 분리된 시대를 맞게 되었다고 봐도 괜찮겠습니다 굳이 초기 교회의 운동에 비유하자면, KAC는 원류로서 정통 예루살렘교회처럼 축소 지향적으로 진행되고 있고, KOPI는 새로이 둥지를 튼 안디옥에서 복음이 막 번져나가듯이 진행되는 것 같습니다. 여하튼 많은 사람이 KAC를 방문하였고,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 같습니다. 이렇게 진행되는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분립 후 재영 형제님은 또 다시 외롭게 뛰었지만 덕소에서 회복적 정의의 꽃을 피우게 되어 서로에게 축복이 된 것 같습니다. 몇 년 전, 초대 총무를 맡았던 경중 형제님이 캐나다로 떠나게 되면서 4.0 시대를 맞은 것 같은데, 4.0으로 넘어가기 전까지 경중 형제님께서 춘천 시대를 좀 압축적으,로 설명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런 다음 캐나다 메노나이트 교회에서 보냄을 받은 김복기 박숙경 부부가 선교사로 오고 김복기 형제님이 총무를 맡다가 현 문선주 자매로 이어지는 과정을 두 분이 설명해주시면 좋겠습니다.

⏺ 김경중: KAC가 춘천으로 이사한 것은 2011년 말로 기억합니다. 이사를 하게 된 이유는 KAC 비전이 춘천 예수촌 교회에서부터 시작됐기 때문인 것과 KAC가 협력 교회와 가까이 있는 것이 맞겠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실제로 다른 곳은 갈 데가 없었습니다. 사무실 공간을 놓고서 전국을 다 물색해 봤는데 결론은 춘천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기대한 것처럼 춘천에 오면서 교인들의 굉장한 지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KAC 총무로서 개인적으로 많이 외로웠었거든요? 왜냐하면 KAC가 덕소와 춘천으로 분리되면서 스탭들로부터 분리되어 있었고, 사실 형제,자매들과 헤어지는 것이 제게는 제일 힘들게 다가왔기 때문이었습니다. 혼자서 이사하고 다시 리모델링하고…… 굉장히 외로운 싸움을 했던 것 같습니다. 춘천에서 정착하던 초반 1~2년에 예수촌 교회 지체들이 참 많이 도와줬습니다. 큰 힘이 됐고. 그냥 이제 물리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으니까 교회 사역 중심으로 자리를 마련하며 제가 주역을 담당하면서 2015년까지 활동하였거든요. 제가 2015년 여름까지 있었는데, 생각보다 과도기가 길어졌던 것 같습니다. 지금 돌아보니, 덕소와 춘천으로 헤어진 뒤에 뭔가를 다시 시작을 해야한다는 압박감을 많이 받았던 반면, 덕소와의 관계는 지속되었으니, 에너지가 분산되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덕소에서 뭐가 필요하면 우리가 돕기도 하고, 우리가 도움을 요청하면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KAC 사역을 이어서 받을 때, 마침 MCC 동북아 사무실이 춘천으로 옮겨오면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희가 MCC 얘기는 안 했는데 사실은 MCC가 동반자로서 옆에서 KAC를 많이 도왔습니다. 사실 MCC 동북아사무실이 춘천으로 이전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지요. 교회, 구호기관, 선교단체가 서로 협력하라고…….

⏺ 안동규: 예, 귀한 경험을 나누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KAC, 예수촌교회, 예수마음교회는 역사를 참 많이 공유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예수촌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하면서 2011년 대략 100명쯤 되었습니다. 교인 숫자가 100명이 넘어가니 서로를 잘 알기 쉽지 않았습니다. 한때 제가 우스갯소리로 예수촌 교회 출석 교인이 100명 넘으면 닭갈비집에서 한턱 내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정말 그렇게 되었습니다. 100명이 넘으면서 1년 동안 분립을 이야기하였고, 1년 후 자발적으로 5가정이 나왔습니다. 그때가 2013년 3월 17일인데, 김경중 형제 가족과 더불어 5가족이 저희 집에서 예배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마음교회로 분립하자마자 숫자가 늘어 저희 집에서 모이는 것이 감당이 안돼서 KAC 사무실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MCC 동북아사무실 대표로 오게된 크리스 라이스와 가평의 동북아평화모임에서 만나 동북아 사무실 장소를 어디로 결정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당시 MCC 동북아 지부는 북경에 있었고 장소를 옮기기로 결정했던 때였습니다. 그때 크리스 라이스를 춘천 집으로 초청하여 하루를 보내면서 MCC 동북아 사무실이 춘천에 와야 할 이유를 설명하였습니다. 춘천에는 아나뱁티스트 센터가 있고, 예수촌교회와 예수마음교회가 있고, 함께 협력해야할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2014년부터 KAC, MCC, 예수마음교회가 현재 사무실 공간에서 함께 협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부터는 2013년에 한국으로 와서 KAC 사역을 도왔던 복기 형제님이 조금 자세하게 KAC의 일을 설명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김복기: 먼저 KAC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왔는지 한 분 한 분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어찌하다 보니까 캐나다에서 메노나이트 목회를 하게 되었는데, 어려움도 있고 프로그램도 쉽지 않고 해서 교회 개척도 했다가 정리하기도 하고 하는 그런 와중에 있었습니다. KAC는 처음부터 그 멀리서 소통하면서 믿음의 형제들인 재영, 경중, 팀 형제님들과 교류해 왔더랬습니다. 직접 만나기보다는 이메일을 주고받으면서 협력했고, 이따금씩 만나면서 KAC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계속 소식을 들어왔던 것 같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캐나다에서 목회하면서 사람들이 메노나이트가 뭐냐 아나뱁티스트가 뭐냐 반복적인 질문을 했을 때, 브로셔를 만들어서 메노나이트-아나뱁티스트를 소개했던 기억이 납니다. 대략 2002년이었는데 브로셔를 만들어서 KAC에 보냈던 그런 기억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런 일들로 인해서 멀리서 일은 했지만, 한번도 만나지 못한 몇몇 사람들에게 저는 사이버 복기로 알려지기도 했더랬습니다. KAC와 사이버 공간에서 자주 연락하여 얻게 된 별명이었습니다. 2006년에 제가 KAC를 처음 방문을 했을 때에 셰릴 자매님을 처음 만남으로써 사이버 복기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게 강남에 있었던 그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저런 추억들마다 굉장히 좋은 인상으로 기억되어 있고 아! 하나님께서 이렇게 사람들을 모아서 일을 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경중 형제님은 메노나이트 신앙고백서를 번역을 해주셨는데, 그 전에 저는 [From the Anabaptist Seed 재세례신앙의 씨앗으로부터]라라는 책을 저자인 아놀드 슈나이더 교수님으로부터 받아들고 책을 번역하였습니다. 당시는 출판사도 없어서 그냥 프린트해서 공부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세릴 자매님이 디자인도 하고 해서 KAC에서 출판한 기억이 납니다. 어쨌든 저는 런던에서 목회하고 있다가 조금 쉬면서 작은 그룹(house church)으로 모이고 있었는데, 그때 팀 형제님이 MC 캐나다 witness director로서 저에게 전화를 하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데, 아마도 제가 [Introduction to the Mennonite History 아나뱁티스트 역사] 책을 번역하고 있었을 때였던 거 같아요. 팀 형제님께서 전화를 하셔서 한국에 어윈 목사님 부부가 캐나다로 돌아오시면서 그 다음 사역자들이 가야되는데 아직 지원자가 없다 하면서 저에게 한국에서의 사역을 제안하셨습니다. 그 때, 둘째인 다니엘이 11학년이었고 그래서 다니엘에게 물어보았더니 자기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가라고 하여 한 해 동안 인터뷰를 하고, 한국 입국 서류 작업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와 아내가 2013년 7월부터 MC Canada Witness international worker로 수락이 돼서 일을 하고 캐나다에서 이렇게 여기저기 방문을 하면서 훈련도 받고 그러고 난 다음에 2013년 9월 12일에 한국에 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KAC는 춘천 시대를 이미 시작했고 예수마음교회가 6개월 정도 됐을 때 저희가 춘천에 도착했습니다. 사실 저희는 의심의 여지 없이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교회로 가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마음교회 일원이 되어 한 3-4년 정도 예수마음교회 지체로 지냈습니다. 2013년부터 서울에 있는 은혜와 평화 교회에 한 달에 한 번씩 방문하였고, 덕소로 옮기고 난 다음에도 1-2년 교제를 이어갔습니다. 설교도 하고 교제도 하러 매 달 마지막 주에 이렇게 서울을 다녀왔습니다. 이 기간, 경중 형제님은 많은 손님을 호스트하기 위해 하우스 프로젝트를 진행하였습니다. 현재 KAC공간에 가벽 공사를 하기 위해 함께 줄자를 맞대면서 공간을 어떻게 나눌 건지 어디에 어떻게 사무실을 앉힐 것인지 계획하던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2014년에 아마 KAC와 예수마음교회와 MCC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런 후에 경중 형제님이 건강에 대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2015년 10월쯤에 캐나다로 떠나신 것 같습니다. 경중 형제님의 빈자리가 워낙 커서 그러면 누가 그 역할을 감당할 것인가 여러 차례 회의를 했던 거 같습니다. 저는 MC 캐나다에서 왔기 때문에 총무 자리는 맞지 않았음에도 인턴 개념으로 그러면 다음 총무님 오시기 전까지 총무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2015년 9월부터 2018년 2월까지 부족한대로 총무직을 맡았던 것 같습니다. 결국 2년 한 4~5개월 정도 총무직을 맡으면서 다음 리더십으로서 우먼 리더십이 좀 필요하다 라고해서 그 문선주 자매님을 초빙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문선주 자매님은 원주의 영강쉐마학교에서 채플린으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메노나이트 목사로 안수를 받고 얼마 되지 않아 KAC 총무님으로 오시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해서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2018년 3월부터 일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저는 경중 형제님 떠나시고 난 다음에 총무로서 무엇을 해야 될 건가 깊이 고민하였습니다. 저의 MC 캐나다 선교부에 속해 있기 때문에 애초에 받은 자료개발, 교회개척(church planting), 네트워킹에 관심이 많습니다. 사실 2017년부터 서울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이유는 은혜와 평화 교회가 덕소로 가게 되면서 서울에 메노나이트 교회가 없어서 교회를 개척할 목적으로 메노나이트 서울모임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서울에 메노나이트 교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더불어 북스터디 그룹에도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마음교회에 인사를 드리고 서울에 있는 교회를 개척하면서 지금까지 왔습니다.

어쨌든 저의 역할은 중간자 역할인데 그 중요한 것 중에 한 가지가 그 경중 형제님 떠나시고 난 다음에 KAP를 통해 책 출간하는 일이 었습니다. 2014년부터 경중 형제님이 KAP 책 밀린 게 너무 많으니까 책 출판을 하는 걸 저한테 맡겼습니다. 그때부터 『갈등전환』을 필두로 정의와 평화 시리즈를 막 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대장간에서 대략 20권 정도 나왔는데, 제가 4권부터 출간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책 출판은 재정이 필요한 분야라서 출판 사역을 계속 해야 될 건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하였습니다. 2017년 즈음 당시 행정을 맡았던 황수진 자매님과 안동규 이사장님과 함께 출판 사역을 두고 분별의 시간을 가졌는데, 책 출판에 계속 투자할 수는 없을 것 같다고 하여 2017년 여름에 출판사를 접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KAP 한국 아나뱁티스트 출판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남은 책을 어떻게 해야 될 건가 고민하던 중 아나뱁티스트 책을, 교제하고 있었던 대장간으로 옮기는 게 낫겠다 해서 그런 역할을 제가 했던 거 같고요. 그 다음에 이제 저의 역할은 다음 총무님을 모시는 거에 대해서 이사님들 이사회에서 이야기하면서 문선주 자매님이 초청돼서 지금까지 일을 하시는데 그거는 이제 문선주 자매님이 받아주시면 되겠습니다.

⏺ 안동규: 예, 감사하고요. KAC가 parachurch로 있었지만 교회 역할도 컸던 것 같아요. 예수촌교회, 예수마음교회, 은혜와 평화 교회 등 교회는 결국 사람인데 KAC와 예수촌 교회를 도우셨던 어윈과 메리안 윈즈 목사님 부부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어윈과 메리안 부부의 역할은 공식적으로는 V-school의 교장 선생님이셨지만 그보다 교회의 멘토이자 어른으로서, 저를 포함하여 예수촌 공동체의 리더였던 차성도 형제나 남상욱 형제 등 예수촌교회의 리더들에게 롤 모델이 되어주셨다고 봅니다. 그래서 항상 믿음의 아버지, 어머니 같은 느낌을 갖게 하신 분이셨습니다. 여러 가지로 경중 형제에게도 멘토가 되셨기에 그 분들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KAP도 확 커지면서 복기 형제님이 책 출간을 잘 감당해주셔서 고마웠습니다. 자 이제 셰릴 자매님께 마이크를 넘기겠습니다. KAC를 통해 많은 외국 분이 오셨는데 독특한 모델이 되어 주셨습니다. 결국은 지금 한국에 살고 계신데, 그간 대단한 역할을 하셔서 우리의 열매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저는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어느 날 제게 안동규 형제님, 사자성어로 화불수냉이 뭔지 아시나요? 라는 문자가 왔습니다. 화불수냉. 처음 듣는 사자성어라 잘 모른다고 하니, 화요일은 불고기 먹고, 수요일은 냉면 먹는 거라고 답을 해주어서 깜짝 놀랐더랬습니다(웃음). 사자성어로 한국 사람에게 농담을 건넬 정도로 한국에 적응을 잘 한 자매님께서 이제부터 본인의 삶 가운데 KAC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본인의 역할은 무엇이었으며, 최근의 근황까지 소개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셰릴 (권세리라는 한국명을 가지고 있다, 편집자 주): 오랜만에 봬서 반갑습니다. 저는 지금 서울에서 살고 있고요. 요즘은 아이들이랑 시간을 보내고 있고 계속 영어 교육하면서 평화교육, 평화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팬데믹 때문에 새로운 일을 꾸미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 KAC에 오게 된 이유는 CMU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실습(Practicum)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해외 실습을 한번 해보고 싶어서였습니다. 2001년부터 학교와 이야기를 시작했고 적당한 곳을 못 찾아서 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는 대학 과정을 다 마무리 한 다음에 해보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때에 KAC에서 초청을 받았어요. 그때는 CMU하고 Mennonite Church Canada하고 같이 할 수 있는 그 프로그램 만들자고 했습니다. 그때 CMU practicum은 그냥 해외로 가는 건 아니고 캐나다 메노나이트 교회의 선교사가 있는 지역으로 가야 했습니다. 그렇게 캐나다 메노나이트 교회와 저의 학교인 CMU가 같이 협력해서 공동 파송하는 것인데 제가 알기로는 제가 이 제도로 처음 나왔던 국제 인턴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CMU practicum이면서 동시에 캐나다 메노나이트 교회의 인턴 역할로 처음 1년을 보낼 계획이었습니다. 첫 한 해는 권 장로님 댁에서 홈스테이를 하게 되었는데 그 분들이 저에게 아주 큰 역할을 했던 것 같습니다. KAC 일과 그 가족에서 머문 것 때문에 한국에서 아주 좋은 경험했던 것 같습니다. 1년 안에 언어를 많이 배우기 시작했고, 기간을 1년 더 연장해서 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MC캐나다에서 인턴이라고 생각했던 게 2년으로 늘어서 계속 할 수 있게 된 셈인데, 제가 처음에 왔을 2002년 9월 7일에 왔을 때는 SALTer 외에 다른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와 팀, 재영, 경중 형제님이 같이 일할 때였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어떤 일을 해야할지 몰라서 여러 가지 영어교육과 평화교육을 기획하였습니다. 그 때 Peace village라는 프로그램 통해서 영어 가르치는 것과 평화교육을 시작했고. 1년 정도 하다가 2003년부터 아니타가 왔을 때 프로그램을 확대하여 아니타와 함께 교육 커리큘럼을 짜서 영어와 평화교육 쪽으로 일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2년째 홈스테이는 부천의 어떤 장로님 가족과 함께 했는데 한우리교회랑 연결되어 있던 가족이었습니다. 다음 3년째부터는 홈스테이가 아닌 여러 형제 자매들이 같이 살 수 있는 상황이 좀 자주 있었습니다. 2004년 봄에 커넥서스를 시작하면서 저의 교육역할이 더 커졌습니다. 특히 영어교육이랑 커리큘럼 개발하는 일을 많이 하기 시작했습니다.

⏺ 안동규: 커넥서스 이름을 세릴 어머니께서 지었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 셰릴: 네, 맞아요. 그 때 부모님이 한국을 방문하셨는데 재영 형제님이 어학원 이름에 대해 물어보신 거 같은데 엄마가 갑자기 생각하여 제안하셨던 것 같아요. 그 때 커넥서스 설립하는 것부터 그 다음에 그 프로그램 개발하고 학생관리하는 등 많은 것에 관여하셨습니다. 평화교육이랑 영어교육을 어떻게 하면 같이 할 수 있을까 고민하였고 우리가 일반 영어를 배우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서 평화교육 입장이나 평화 교육 환경을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고민은 2008년까지 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2005년부터 저의 역할은 Mennonite Church Canada fulltime witness worker로 바뀌었습니다. 3년은 인턴십으로 보냈고 다음에 fulltime witness worker로 일한 셈이지요. 그러면서 어윈과 메리안 윈스가 오셨는데, 제가 2002년 여름에 MC캐나다 오리엔테이션에 참석 했었을 때 그분 들을 처음 만났어요. 그 분들이 저보다 먼저 한국에 오셨고 그 다음에 가을에 제가 왔습니다. 그 후 2008년에 저는 교육에 관심이 더 많아지면서 Eastern Mennonite 대학교에서 평화 및 교육관련 석사 프로그램을 이수하기로 했고, 석사과정 후에는 캐나다에서 살다가 2016년에 다시 한국에 왔습니다.

⏺ 안동규: 아주 사진 보듯 과거를 잘 설명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자, 모든 사람의 이야기를 드다보니 KAC 역사가 자연스럽게 다 연결이 되는 거 같아 아주 좋습니다. 제가 알고 있던 기억, 경중 형제님의 기억, 그리고 여러 형제님들의 기억을 묶으니까 전체 흐름이 잘 잡혀가는 것 같습니다. 팀, 경중, 복기 형제를 거쳐 최근 문선주 자매가 총무가 되어 활동 중에 있는데, 문선주 자매님께서는 어떻게 KAC와 연결되었고 어떻게 총무가 되었는지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 문선주: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옴니버스라고 하는 문학 장르가 생각이 났습니다. 짧은 단편 이야기마다 어떤 공통된 주제와 사람들이 연결되어 이야기가 흐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1993년도에 성경공부를 하셨다는 말씀을 들을 때 저는 IVF 간사로 있으면서 이사님들이 그런 모임을 하신다는 이야기와, 그후 예수촌교회를 시작하신다는 소식을 계속 들을 수 있었습니다. 1996년과 1997년도에 크리스와 로라가 한국에 왔을 때, 안동규 형제님이 IVF 간사로 있는 저에게 크리스와 로라가 교수님 댁에서 살 예정인데, 방을 하나 줄 테니까 거기서 이 친구들하고 같이 살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크리스와 로라가 메노나이트로서 온 선교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 설명을 들은 것처럼 메노나이트 안에서의 구체적인 위치는 잘 몰랐지만 일단 저와 룸메이트로 지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들이랑 아미쉬 카드 게임, 우노 등 카드게임을 하면서 메노나이트들은 참 재밌고, 사람들이 되게 착하구나하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당시 제가 20대 중반이었기에 제 머릿속에는 메노나이트가 그다지 깊게 각인 되어 있지는 않았습니다. 한참 잊어버리고 살다가 IVF 간사로 활동하는 동안 말씀을 전하는 게 재밌고 목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 신학교를 가려고 준비했는데 임신이 되어 꿈을 포기하고 아이를 키우는데 전념을 했습니다. 남편이 목회를 하고 저는 사모로 교회에서 보내면서 사모의 역할이 너무 제한돼 있어 답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도 은사를 주셨는데 너무 제한을 받는다는 억울한 마음이 들어서 선교사가 돼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적어도 선교사는 남편과 아내가 동등하게 일을 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거든요. 선교사가 돼야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어를 배워 유학을 가는 길이 열리겠지 하며 생각하고 있을 무렵 이윤식 목사님이 남귀식 간사님을 통해서 씨알의 집이라고 하는 유학생들 돌보는 프로그램에 초대를 해주셨습니다. 유학 준비를 하려는데 한 달 만에 갑자기 그 토플 시험이 ibt로 바뀌어 걱정이 꽤 많았어요. 하지만 토플 점수가 잘 나와 유학을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때 잘 모르지만 유학을 떠나게 되었고, 나름대로 꽤 어렵게 유학생활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이 배운 것은 메노나이트들에게는 뭔가 다른 것이 있고, 한국교회에는 평화와는 굉장히 거리가 먼 뭔가가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영어를 잘 하지 못해서 한국에 대한 글을 썼는데 교수님들께서 한국을 잘 모르시니까 저에게 좋은 점수를 주신 것 같습니다. 이런 계기로 공부에 대한 자신감도 가지고 졸업하고 나서는 제가 달라스 쪽에 있는 신학대학의 박사과정을 이수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비자 문제가 꼬여 한국에 돌아왔는데 굉장히 급하게 돌아오는 바람에 아무 것도 준비하지 못하고 다시 쉽지 않은 한국에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저희가 귀국한지 일주일 만에 취직이 되었는데 그곳이 영강쉐마기독학교였습니다. 영강쉐마기독학교에서 한 1년 정도 영어를 가르쳤는데 담임목사님께서 제가 교목을 하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어요. 아시다시피 저는 메노나이트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돌아왔기 때문에 한국에서 목사 안수를 받기 힘들었습니다. 메노나이트 교회가 별로 없는 한국에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를 때, 미국에 있는 컨퍼런스와 연결하여 한국에 있는 카프(KAF, korean anabpatist fellowship)와 상호책임 하에 목사 안수 과정을 밟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카프랑 연결이 됐고, 카프 리더들이 함께 안수과정을 도와주었고, 저는 2015년도에 메노나이트 여성목사로 안수를 받았습니다. 저의 사례가 한국에서 메노나이트 목사안수를 처음 시행하는 것이라 뉴스앤조이에서 취재하여 인터넷 신문에도 올라갔는데 저는 당시 그것이 얼마나 큰 역사적 의미가 있는지 잘 느끼진 못했던 거 같습니다. 어쨌든 저는 한국 최초 여성 메노나이트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목사 안수를 받고 교목으로 있은지 한 4년 정도 되었을 때, 김복기 형제님이 저한테 전화를 주셨어요. KAC에 총무로 초청하고자 한다는 전화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자격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메노나이트를 떠나 있던 시간이 5년이나 지났고 아나뱁티스트 센터의 총무는 신학적인 지식도 풍성하고 풍부해야 되고, 다양한 네트워크와 역량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들이 부담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총무 초청에 응할 수 있었던 것은 일반 교회에서 보냈던 5년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배웠던 것과는 계속 반대되는 교회의 운영방침,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 등이 기존 교회 속에서 견디기에는 한계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KAC에 대한 소망과 소명보다는 현실도피적인 생각이 조금 더 컸던 거 같아요. 그리고 제가 그 셰마 교목으로 있을 때 총무로 수고하시던 김경중 형제의 모습을 볼 때 너무 외롭게 보였기 때문에 내가 그 자리를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했더랬거든요.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결국 제가 있었던 한국교회가 너무 힘들다는 생각 때문에 결정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2018년 3월부터 KAC 총무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힘들게 다가온 것은 KAC에 일이 없어 많은 것을 새로 기획해야 했던 것, 저에게 맡겨 진 숙제로 문선주가 잘 할 수 있는 방식으로 KAC를 새롭게 다시 시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너무 막막했습니다. 안 그래도 이 KAC 총무의 자리에 대해 자신감이 없는 상태였는데 새로운 일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어떤 부담이 계속 어려움으로 자리했던 것 같습니다. 첫 1년은 무엇을 해야 되는지 많이 헷갈렸습니다. 더구나 제가 지금 메노나이트 교회를 매주 출석하고 않고 저희 남편이 장로교회 목사로 있어서 제가 교회도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느낌이라 쉽지 않았습니다. 우선 저는 정체성의 문제로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정말 KAC에 적합한 사람인가에 대한 정체성의 문제, 교회에 대한 정체성 문제, 그리고 그때 마침 시작된 메노나이트교회 연합회(Mennonite Church South Korea)와 KAC와의 관계설정 등을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메노나이트 교회하고도 관계가 많이 아프게 다가왔고, KAC 일을 잘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관심을 둔 곳이 ‘평화를 얘기하는 네트워크’였습니다. 2018년도 초반에는 서울에 자주 가서 평화에 대해서 이야기하시는 분들을 자주 만나면서 네트워크를 넓혀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에 매년 1월에 있는 아나뱁티스트 컨퍼런스, 가을에 있었던 병역거부 세미나 등이 도전으로 다가왔습니다. 특히 스위스에서 오신 부르노와 하이디가 한국에 오셔서 평화세미나를 여셨는데, 그때는 모든 것이 처음으로 생소하고 어렵게 느껴졌던 것 가습니다.

여하튼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에, 이제는 아나뱁티스트가 어떤 일을 해야되는 건지 배우면서 2019년을 보냈습니다. 2019년도에는 사라 쉥크 총장님도 오셨고 그 다음에 시스터케어 세미나를 한국에서 개최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특히 사라 쉥크 총장님이 오셔서 여러 장소에서 통역하는 일을 하면서 총무로서 자리매김을 하게 되는구나 생각하던 차에 2020년도에 코로나를 맞게 되었습니다. 코로나가 찾아오자 모든 모임이 갑자기 다 없어져 이제 뭔가 그림을 그릴만 하다 생각했는데 기회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다행히도 청어람에서 아나뱁티스트 아카데미를 열었고, 그게 플랫폼이 되어서 아나뱁티스트 아카데미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제가 50대가 넘어서 새로운 일을 하다보니 긴장도나 스트레스가 조금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젊은 시절보다 배우는 속도도 느리지만 2020년도부터는 많은 것을 새로 배우고 있습니다. 특히 줌으로 아카데미를 열었을 때, 아나뱁티스트 강사님 다섯분이 매일 강의마다 들어오셔서 서로 협력해서 질의응답에 응해주셨는데, 당시 강의를 들었던 분들이 하나 같이 서로 협력하여 팀을 이루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실 저는 교사에 대한 꿈이 있고 외국인들에 대한 관심도 많이 있습니다. 그림입니다. 그래서 2018년부터 강원대학교에 있는 유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주는 사역을 시작을 했습니다. ISF(international students fellowship)와 연결하여 사역을 같이 시작했는데 이 사역은 저에게 굉장히 잘 맞았고 저는 많은 에너지를 얻고 있습니다. 이 모임도 코로나 때문에 주춤했는데 줌을 통해서 지금까지 진행하며 에너지를 계속 주고받고 있습니다. 이것이 KAC가 해야되는 중요한 사역이다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지만 제가 에너지를 받는 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현재는 리본 모임, 독서 모임을 진행하고 있고, 가을 컨퍼런스와 아나뱁티스트 아카데미 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한림대 갈등전환센터에서 회복적 정의 운동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아직 이 부분을 어떻게 KAC사역과 접목시켜야 하는가는 숙제입니다.

⏺ 안동규: 이전에 옴니버스 얘기를 하셨는데, 그 제게 기억나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문선주 자매가 크리스 로라하고 저희 집에서 룸메이트 할 때 저는 AMBS (Anabaptist Mennonite Biblical Seminary)에 있었는데 그 앞 집에는 김성한 형제가 살았고, 건너편에는 남귀식 형제 가족이, 그리고 또 조금 옆에는 이윤식 형제 가족이 살았습니다. 제가 AMBS 생활을 마무리할 즈음 차성도 형제가 와서 미국에서도 예수촌 교회 비슷한 분위기가 형성된 적이 있습니다. 오전에는 미국 메노나이트 교회에 출석하고 오후에는 한국인들이 모여 예배를 드렸지요. 그런데 2021년 현재 그 사람들이 춘천에서 KAC와 MCC로 엮여서 아나뱁티스트 일을 함께 감당하는 것을 보니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주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고 하나님은 자라게 하신다는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아나뱁티스트 역사를 보면 박해가 심해서 사실 자신들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이 이끄셔서 지금까지 역사가 이어지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는 아나뱁티스트 관련 일들은 어느 누가 계획해서 지금까지 온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제 총무님들의 이야기에 이어, 현재 이사장으로 계신 남상욱 형제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좋겠습니다. 저는 초대 이사장으로서 KAC를 founding하고 building하였지만 남상욱 형제님은 부드럽고 디테일하게 KAC를 잘 섬기시는 것 같습니다. 특별히 남상욱 형제님은 KAF (Korean Anabaptist Fellowship)대표도 맡고 계시므로 KAC, KAF, MCSK (Menonnite Church South Korea)관계를 비롯하여 한국 메노나이트 전체 그림, 교회 관계 등에 대해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남상욱: 먼저 이렇게 얘기를 듣다 보니까 오래된 그 앨범을 넘기는 듯한 그런 감회에 젖게 됩니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생각고 머리에 떠오르고 장소도 기억이 나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다들, KAC 20년을 기억하며 아름다운 교제와 축복의 시간을 보내는 느낌입니다. 또 한 가지 감사한 거는 KAC 덕분에 저의 신앙이 많이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촌 교회에서도 저희 부부가 오랫동안 리더 역할을 감당했는데 KAC로 인해 예수촌 교회가 엄청난 혜택을 봤구나 하는 느낌을 새로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정말 예수촌 교회를 대신해서 KAC, 여기 계신 분들에게 정말 큰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KAF가 태동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KAC에 오래된 그 뿌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KAC를 빼고는 한국에 아나뱁티스트 운동을 얘기할 수 없고 또 그 시작이 안동규 형제님의 비전과 그리고 그 열정으로 부터 시작됐다는 것에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안동규 형제님하고 저는 1998년부터 예수촌교회를 섬겼는데, 그당시 저는 KAC에는 별로 관심을 두진 않았습니다. KAC는 서울에 있는 단체고, 당시 안동규 형제와 차성도 형제가 잘하고 계시구나라고 생각만 했지, 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무슨 행사가 있을 때면 교회 리더들과 함께 참여했는데 오늘 이야기를 듣다보니 유니온 교회에서 드린 1주년 기념 예배에 참석했던 기억이 납니다. 몸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으나 마음은 KAC가 잘 성장해 갔으면 좋겠다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매년 창립예배 때마다 모임에 참석했었는데, 제가 본격적으로 KAC에 참여하게 된 것은 2011년 춘천시대 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KAC가 춘천에 온다니까 많이 도와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촌 교회의 많은 지체들이 도왔고 그 중에 저도 포함되어 있었죠. 이사를 도와주면 이사를 시켜준다더라 며 농담도 했었습니다 (웃음). 그때부터 이사로 활동을 하며 재정 상황, 활동 상황 등을 가까이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카프라고 하는 ‘코리아 아나뱁티스트 펠로우십’에도 김경중 형제님하고 계속 같이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김경중 형제님이 캐나다로 간 이후 2018년 가을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나는데 안동규 형제님이 차기 이사장 직을 맡아 달라고 전화를 하셨습니다. 고민에 빠졌죠. 내가 할 만한 사람인가 내가 해야 하는가 그래서 교회의 여러 사람들에게 기도 요청과 함께 분별할 때 도움을 좀 달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다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마도 나에게 예수촌교회 다음의 부르심이 여기일수도 있겠다는 생각. 때마침 예수촌 교회 리더십 이양이 있었고 자연스럽게 KAC에 힘을 쏟을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KAC에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있지만 그 어려움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보자는 생각이 들어서 이사장직을 수락하고 2018년 11월부터 현재까지 두 번째 임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카프와 MCSK에 대해서 간략히 말씀드리자면, 먼저 카프는 두 가지 흐름에 의해서 생긴 것 같습니다. 먼저 KAC의 흐름이 있었고 또한 대전의 침신대학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자리했던 아나뱁티스트 운동 흐름이 있었습니다. LA에 계신 허현 목사님을 비롯하여 침례교신학대학교 출신 목회자 그룹이 아나뱁티스트 운동에 오랫동안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런 분들이 KAC와 연결되어 교제하다가 2010년 10월 춘천에서 KAF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게 됩니다. 그래서 한국에 아나뱁티스트 관련해서 중요한 두 도시를 꼽으라고 한다면 대전하고 춘천을 지명할 수 있겠습니다. 카프는 이러한 배경에서 연대와 교제를 목적으로 생겨난 모임입니다. 처음 카프는 Korea Anabaptist Fellowship로 불렀고 교회와 개인들이 모여서 아나뱁티스트 운동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친목을 도모하고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KAF 저널을 발행하는 등 많은 일들을 하였지요. 그러다가 이제 목사 안수관련 이야기가 나오면서 좀 더 깊은 논의가 있게 되는데요. 아나뱁티스트 교회가 튼튼히 세워지려면 카프라는 단체로 안 된다 교회 연합회가 있어야 되겠다 그렇게 해서 배용하, 한준호, 김성우 형제님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셔서 MCSK (Menonnite Church South Korea) 한국 메노나이트 교회연합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KAF는 아나뱁티스트 정신에 관심이 있는 개인들의 친교 모임이라면, MCSK는 교회연합회로 교단적 성격이 있습니다. 카프가 마당이라면 MCSK는 마당안의 건물로, 카프가 아나뱁티스트의 외연을 넓히는 것이라면 MCSK는 교회로 공고히 모이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적인 측면을 이야기하다보니 KAC가 정말 큰 역할을 했던 것 같습니다.

⏺ 안동규: 이제 마무리를 해야 할 시간입니다. 다음 모임에서는 미래지향적인 얘기를 할 계획입니다. 얼마 전에 리본 모임에서 알란 클라이더의 마지막 책인 ‘인내의 발효’(The Patient Ferment of the Early Church)라는 책을 살펴보았는데요, 그 책의 키워드가 ‘인내’입니다. 초대교회에는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엄청난 인내가 발효되었는데 개신교의 조급증이 기독교를 망가뜨리는 그런 과정이 나타나 있습니다. 어쨌든 이제 KAC의 입장에서 보면 이 20년이 조급하지 않았었던 건 분명하고, 어쩌면 우리도 인내의 세월을 보내오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물론 우리의 인내는 그냥 주어진 여건에 순응하면서 주님의 뜻을 기다리는 그런 인내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희 KAC의 20주년 키워드가 인내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KAC의 경중 형제님도 그렇고 많은 분들이 각자의 고민들을 꾹 참고 인내하셨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20주년을 기념하지만, 앞으로 30주년이 된다면 좀 더 쓸 수 있는 뭔가가 마련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전에 맞이하게 될 2025년은 아나뱁티스트 500주년입니다. 앞으로 3~4년만 있으면 2025년 1월 21일이 아나뱁티스트 500주년인데 우리도 뭔가 준비를 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여하튼 오늘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마무리 기도로 모임을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