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뱁티즘과 한국교회: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배덕만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교회사)


I. 글을 시작하며

코로나바이러스-19의 창궐과 함께 세상은 더 이상 예전과 동일하지 않게 되었다. 과학기술의 발달이 절정에 달하면서, 지리적·시간적 한계가 상당 부분 극복되고 물리적 환경에 대한 인간의 통제가 무한히 확장된 것 같던 바로 그 시점에, 코로나바이러스-19가 인간의 성취와 능력을 한순간에 조롱거리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런 재난은 교회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다. 현장 예배가 중단되고 성도의 교제가 단절되면서, 또한 지역교회들이 집단감염의 주범으로 떠오르면서 이미 추락한 한국교회의 사회적 평판은 바닥까지 떨어지는 것 같다. 텅 빈 예배당과 그리스도인에 대한 세상의 조롱은 이 시대 교회의 자화상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나뱁티즘에 대한 교계·학계의 관심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16세기 이래 주류 교회들에 의해 이단ㆍ광신도로 정죄되었기 때문에, 아나뱁티스트들은 오랫동안 세상을 등지고 살아야 했다. 무엇보다, 보수적인 장로교회가 압도적으로 우세한 한국에서 아나뱁티즘은 그동안 기피대상이었고, 지금도 편견과 오해의 그늘에서 충분히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아나뱁티즘이 한국사회와 교회 내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입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규모와 세력은 여전히 작고 소박하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과 삶의 방식은 조용히 그러나 뚜렷하게 한국교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제자도, 공동체, 평화는 어느덧 한국교회에서 익숙한 개념이 되었고, 이 가치들에 주목하고 실천하려는 그리스도인들의 수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앞으로도 지속될 전망이다.

이런 고민과 문제의식을 배경으로, 이 글은 아나뱁티즘의 역사와 신념을 간략히 정리하고, 한국적인 상황을 소개할 것이다. 특히, 타 교단에 속해 있지만,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의 유용한 대안으로 아나뱁티즘에 주목하는 학자들의 주장을 검토하면서, 아나뱁티즘에 대한 동시대 그리스도인들의 기대와 아나뱁티스트들이 감당해야 할 과제를 함께 살펴볼 것이다. 이로써, 지난 역사를 성찰하고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는 이 땅의 아나뱁티스트들에게 작은 응원과 도움이 되길 소망한다.

II. 교회사 속의 아나뱁티즘

1. 16세기 종교개혁과 아나뱁티즘

(1) 역사

중세 말 유럽은 근원적인 변화에 직면했다. 민족주의와 중상주의가 발흥하면서, 유럽의 정치와 경제에 지각 변동이 일어난 것이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와 인쇄술의 발전으로 인간에 대한 새로운 지식과 이해가 확산되면서 지식의 대중화가 빠르게 진척되었다. 이 과정에서, 문제의 핵심인 교황제와 봉건제를 개혁하려는 종교개혁과 농민전쟁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흔히, “급진적 종교개혁”으로 알려진 아나뱁티즘(혹은 재세례파운동)은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출현했다.

1525년 1월 21일, 스위스 취리히에서 조지 블라우록(George Blaurock)이 콘라드 그레벨(Conrad Grebel)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자신의 믿음을 성찰한 후 유아세례를 부정하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다시 세례 받은 것이다. 이후, 이 운동은 취리히 외곽으로, 즉 동쪽으로 상트 갈렌과 아펜첼, 서쪽으로 바젤과 베른, 북쪽으로 할라우, 샤프하우젠, 발츠후트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1527년 1월 펠릭스 만츠(Felix Manz)가 수장을 당하는 등 가혹한 박해를 겪었지만, 같은 해 2월 스위스와 독일 국경에 위치한 슐라이트하임(Schleitheim)에서 아나뱁티스트 지도자들이 회합을 갖고 「슐라이트하임 신앙고백서」를 발표했다. 이것은 자신들의 신념을 7개 조항으로 정리한 것[1]으로서, 그들은 이렇게 박해 속에서 내적 결속을 강화해나갔다.

스위스의 뒤를 이어, 독일 남부와 오스트리아에서도 아나뱁티스트 공동체가 출현했다. 이곳에선 스위스 형제단의 영향과 함께 독일 농민전쟁을 이끈 토마스 뮌처(Thomas Muntzer)의 영향이 지대했다. 한스 후트(Hans Hut)와 멜키오르 링크(Melchior Rinck)는 뮌처의 영향 하에 사회정의, 신비주의 영성, 역사적 종말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한편, 한스 뎅크(Hans Denck)는 사회개혁에 대한 관심은 부족했지만 신비주의적 성향은 공유했다. 스튜어트 머레이(Stuart Murray)에 따르면, 이 지역에서 4개의 하부 그룹이 탄생했다. “하나는 후트의 종말론적 비전을 따랐고, 두 번째 그룹은 뎅크의 신비주의적 영성을 받아들였고, 세 번째 그룹은 후트와 뎅크의 강조점을 혼합했으며, 그리고 네 번째 그룹은 분리주의자적 비전을 심화하였다.”[2]

독일 북부와 네덜란드에선 멜키오르 호프만(Melchior Hofmann)의 주도 하에 1530년대 초반부터 아나뱁티스트들이 급증했다. 호프만은 새 예루살렘이 스트라스부르크에 도래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후, “신비주의적, 계시적, 혁명적, 그리고 (정도는 덜 하지만) 성서주의적 요소들을 종합”한 “멜키오르파 아나뱁티즘”이 이 지역에서 유행했다. 호프만의 영향은 네덜란드로 이어졌다. 그 결과, 얀 마티스(Jan Mattys)와 얀 반 라이덴(Jan van Leiden)이 뮌스터를 새 예루살렘으로 선포하고 지방 군대와 전쟁을 벌였다. 뮌스터 시민들의 대량학살로 막을 내린 이 사건은 “초기 아나뱁티스트 역사 속에 가장 큰 재앙”[3]이었다. 하지만 이후 메노 시몬스(Menno Simons)를 중심으로 메노나이트라는 평화주의적 재세례파운동이 출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끝으로, 스위스, 독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로 확장된 아나뱁티즘은 예외 없이 혹독한 박해를 겪었다.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순교를 당했고, 일반 교인들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사실, 16세기에 수천 명의 아나뱁티스트들이 희생당했다.”[4] 이런 치명적인 위기 상황에서 많은 아나뱁티스트들이 모라비아와 그 너머 지역으로 피신했다. 1533년 무렵, 이 지역에서 야콥 후터(Jacob Hutter)의 영향 하에 “후터파”(Hutterites)로 알려진 아나뱁티스트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재화의 공동사용을 신앙생활의 중심으로 실천했다.

(2) 아나뱁티스트와 교회

아나뱁티즘의 역사는 이 운동의 지리적·문화적 다양성 및 각 그룹 내의 신학적·신앙적 복잡성을 보여준다. 따라서 아나뱁티즘의 신앙과 교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 운동 내부의 교회에 대한 생각과 실천을 중심으로 이들의 사상적 핵심을 살펴보자.

먼저, 아나뱁티스트들은 신약성경에 기록된 초대교회를 이상으로 설정하고, 이 교회의 회복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일차적으로, 아나뱁티스트들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한 국가와 교회의 통합(313년)을 교회의 변질과 타락의 근원으로 규정했다. 이런 통합 이후, 유아세례, 전쟁, 형식주의 등이 교회에 만연하여 초대교회의 순수성이 상실되었다는 것이 그들의 설명이다.[5] 이런 문제의식은 16세기 종교개혁이 진행되면서 당대의 주류 교회였던 로마가톨릭교회와 관주도형 종교개혁(Magisterial Reformation) 모두를 향한 통렬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그런 교황의 교회가 오류 위에 설립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교회의 기초가 오류 자체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교회가 참된 교회라고 인정할 수 없다.”[6] 동시에, 그들의 기준에서, 비텐베르크, 취리히, 제네바, 그리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 세워진 개신교회들도 규모와 범주의 차이만 있을 뿐, 국가교회로서 기존 가톨릭교회의 오류를 답습했을 뿐이다. 그래서 “아나뱁티즘은 이런 패턴과 완전히 결별했다.”[7]

이런 문제의식 하에, 아나뱁티스트들은 교회를 “신앙고백에 근거한 세례를 통해 자발적으로 신자들이 함께 모인 공동체”로 정의했다.[8] 이 정의는 아나뱁티스트 교회론의 핵심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무엇보다, 교회는 “신자들의 모임”이어야 한다. 이들이 믿는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는 “일치된 마음으로 한 하나님, 한 주님, 그리고 한 세례를 인정하는 사람들”로 구성된다. 또한, 교회는 이런 신앙고백의 토대 위에 세례 받은 사람들로 구성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런 고백을 전제하지 않은 유아세례는 인정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이 교회는 신자들이 철저하게 자발적인 결정에 따라 세례와 교회를 선택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유아세례와 특정 신앙(혹은 교회)을 법적으로 강제하는 국가교회체제도 용납할 수 없었다.

아나뱁티스트들은 “거룩한 존재들의 교회”를 추구했다. 비록, 하나님의 교회는 영과 진리에 속한 것이지만 기본적으로 거룩한 신자들로 구성되며, 그런 거룩함은 신자들의 개인적·공동체적 삶을 통해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표현·입증되어야 한다. 그런 신념에 따라, 이들은 교회의 참된 표지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1. 온전하고 순결한 교리
  2. 성례의 성경적 사용
  3. 말씀에 순종
  4. 진실되고 형제 같은 사랑
  5.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용감한 고백
  6. 그리스도의 말씀을 위한 억압과 환란[10]

이처럼, 이들은 교회에 대해 높은 영적·도덕적 기준을 설정하고, 출교를 포함한 엄격한 치리를 통해 자신들의 이상적 교회를 이 땅에서 구현하려했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모두 교회 내에서 죄인과 의인의 공존을 인정하며 가시적 교회의 불완전성을 정당화했다. 하지만 그런 신학과 관행이 아나뱁티스트들에게는 신학적 궤변으로 들릴 뿐이었다. 그들의 입장은 단호했다. “그러므로 불의한 사람과 죄인들, 창녀와 간음자, 싸움꾼, 술주정뱅이,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사람, 그리고 말과 행동으로 거짓말하는 사람 등으로 구성된 모임은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며, 그들은 결코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다.”[11]

이런 확신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했다. 그들은 개인적·교회적 차원에서 일체의 폭력을 반대했고, 국가적 차원의 폭력사용도 단호히 거부했다. 전쟁과 사형제도에 반대하며 양심적 병역거부를 실천했다. 물론, 이들 중에도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보다 긍정적으로 이해하며 적극적 참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12] 하지만 전통적으로 아나뱁티스트들은 검을 사용하는 국가의 공직자(특히, 군대와 경찰)가 되길 거부했다. 동시에, 이런 신념과 실천은 민족주의와 국가주의가 강화될수록 극심한 탄압과 박해를 감수해야 했다. 군대와 경찰로 정권을 유지하고 전쟁으로 국가적 영향력을 확대하거나 방어하는 시대에 이들이 주장하는 평화주의는 비현실적·시대착오적 광신주의요 반체제적 불온사상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이런 식의 신앙생활을 고수했다. 그들에게 고난과 순교는 제자도의 본질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재세례파에게 있어서 이 폭력적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완전이란 오로지 고난의 각오, 고난의 감수와 무저항의 순교를 통해서만 증거 될 수 있는 것이므로 관용과 인내야말로 참교회의 표식으로 통했던 것이다.”[13]

2. 21세기 아나뱁티즘

(1) 후터라이트(Hutterites)

후터라이트는 메노나이트, 아미쉬와 더불어 현존하는 또 하나의 아나뱁티스트 그룹이다. 이들은 함께 농사를 지으며 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있다. 이 공동체는 ‘형제들이 더불어 사는 장소’ 라는 의미로 부르더호프(Bruderhof)라고 불린다[14]. 이들은 성인세례와 신자의 세례, 무저항과 평화주의, 단순한 생활방식 등의 아나뱁티스트 신앙을 공유하지만, 공동체 생활과 재산 공유라는 생활방식 때문에 아미쉬․메노나이트와 구별된다.[15]

박해를 피해, 공동체생활을 시작했던 일군의 재세례파들이 1528년 아우스터리츠(Austerlitz)와 모라비아(Moravia)에서 첫 번째 부르더호프를 조직했고, 후에 야콥 후터(Jacob Hutter, 1500-36)가 이 그룹을 이끌었다. 후터가 화형을 당한 후, 그의 이름을 따라 ‘후터라이트’로 불리게 되었다. 이들은 종교적 자유를 찾아 모라비아에서 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러시아로 이주했다. 러시아에서 또 다시 박해를 받자, 천여 명의 사람들이 1874년부터 1879년 사이 미국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들 중 상당수가 남부 다코타(Dakota)에 세 개의 분리된 농업공동체를 건설했다. 슈미드로이트(Schmiedeleut), 다리우스로이트(Dariusleut), 레흐레로이트(Lehrerleut).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양심적 병역거부와 적국 언어인 독일어 사용, 전쟁채권 구매 거부 등의 이유로 또 한 차례 오해와 박해를 경험했다. 특히, 두 젊은이가 군대 수용소에서 학대와 고문으로 사망하자, 다수의 후터라이트가 종교의 자유를 찾아 캐나다로 이주했다. 그 결과, 현재 후터라이트의 2/3가 캐나다에 거주한다.

후터라이트 마을마다 공동체 중앙에 위치한 공동 식당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집들이 위치해 있고, 이 집들에서 여러 가족이 독립된 생활을 한다. 다른 건물들은 유치원, 학교, 세탁소, 그리고 여러 작업실과 산업시설을 위해 사용된다. 후터라이트는 사유재산을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1세기 교회처럼 물질을 공유하며 산다. 자동차, 라디오, 텔레비전, 잡지를 개인적으로 소유할 수 없으며, 오직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트럭과 스테이션왜건을 이용할 뿐이다. 이들의 삶은 매우 검소하다. 남자들은 검은 멜빵바지를 입고, 여자들은 물방울무늬의 머릿수건을 두르고 다채로운 색깔의 긴치마를 입는다. 구성원은 전체의 선을 위해 일한다. 모든 필요는 공동의 가게에서 제공되므로 아무도 월급을 받지 않는다. 후터라이트들은 일요일 아침과 저녁, 그리고 매일 저녁 식사 전 학교건물에 모여 예배를 드린다. 예배는 오스트리아 억양의 독일어로 진행되며, 찬송으로 시작되어 설교와 마침기도가 이어진다. 후터라이트들에게 독일어는 매우 중요하다. 한 공동체는 약 90-100명 정도로 구성된다. 120명-130명에 이르면 다음 공동체를 위한 장소를 물색하고, 자금을 저축하여 미래를 준비한다.[16]

후터라이트들은 자신의 아이들이 공동생활을 준비하고 교육시키는 일에 성공했다. 아이들 대부분은 8-9학년까지만 학교에 다니고, 여자는 대략 19-20세 남자는 20-26세에 세례를 받는다. 소녀는 22세 정도에, 남자는 조금 더 나이 들어 결혼한다. 산아제한은 금기사항이고, 경제적 어려움이 없으므로 출산율이 매우 높다. 여인들은 대체로 9명 이상의 자녀들을 낳는다. 하지만 이 공동체는 매우 가부장적이며, 여성들은 주요 직책이나 의사결정과정에서 배제된다. 한편, 이들은 이혼한 사람들을 공동체에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20세기 동안 북미에서 이혼한 후터라이트는 채 50명도 되지 않는다. 가족 및 친족 간의 유대가 매우 긴밀하며, 정신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도 거의 없다. 그 결과, 살인사건이 발생한 적도 없다. 존 A. 호스테들러(John A. Hostetler)에 따르면, “후터라이트는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세계 속에서 공동체로 살아가는 안정된 생활의 분명한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17]

(2) 네오-아나뱁티스트(Neo-Anabaptists)

스튜어트 머레이의 분류에 따르면, 현재 아나뱁티즘을 다음과 같은 4가지 형태로 존재한다.

첫 번째 그룹은 초기 아나뱁티스트들의 후예들인 메노나이트, 후터라이트, 그리고 아미시이다. 두 번째 그룹은, 이후에 시작된 다른 교단들이지만 아나뱁티즘에서 영감을 받은 이들로서 다양한 형제파 그룹들, 부르더호프운동, 그리고 일부 침례파이다. 세 번째 그룹은, 메노나이트와 형제파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말이암아 많은 나라에서 새로 생겨난 아나뱁티스트 교회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 번째 그룹은 새로운 아나뱁티스트들인데, 이들은 다른 기독교 전통들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자신들의 삶과 신앙의 형성과정에 아나뱁티즘의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한다.[18]

이 분류에서 네 번째 그룹이 바로 네오-아나뱁티즘에 해당한다. 이들은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반 미국 복음주의 내부에서 출현했다. 아나뱁티즘 전통의 신학자들, 특히 메노나이트에 속한 존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 1927-1997)와 로날드 사이더(Ronald James Sider, 1939- )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나, 각자의 교회전통 내에 머물면서 재세례파의 정신과 유산을 실천하고 있다. 무엇보다, 요더와 1972년 출판된 그의 저서 『예수의 정치학』(The Politics of Jesus)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현재, 스텐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 1940- ), 스캇 맥나이트(Scot McKnight, 1953- ), 낸시 머피(Nancy Murphy, 1951- ), 리처드 헤이스(Richard Hays, 1948- ), 크레이그 카터(Craig A. Carter), 제임스 맥클랜던(James McClendon, 1923-2000), 마이클 카트라이트(Michael Cartwright) 등이 이 운동을 이끌고 있다.[19]

이들은 제국주의적 정신에 대항하는 예언자적 입장을 고수하면서, 평화주의, 사회정의, 빈곤에 관심을 집중한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3년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결과, 신앙과 정치권력이 결합되고 교회의 본질이 훼손되었다고 판단한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미국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와 함께 자유민주주의와 소비자본주의의 정치경제학 모두에게 이중 충성을 바치고 있는데, 이것은 명백한 우상숭배다.[20] 따라서 이런 세상에서 신자들은 개인적인 삶뿐 아니라, 대안공동체로서 이에 능동적으로 저항해야 한다. 동시에, 그런 불복종 때문에 발생하는 세상의 공격과 비난 앞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방어하지 않고 보복하지 않고 그러나 적극적으로 용서하면서” 견뎌야 한다.[21] 이들에게 평화주의는 “기독교적 제자도의 근본적 징표이자, 복음의 핵심적인 윤리적 가르침”이기 때문이다.[22]

III. 한국의 아나뱁티즘

1. 메노나이트중앙위원회(Mennonite Central Committee, MCC)

한국과 아나뱁티즘의 만남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0월부터 시작되었다. UN이 최초의 MCC 직원의 한국 입국을 허락한 것이다. 메노나이트중앙위원회(Mennonite Central Committee, MCC)는 1920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설립된 이후, 세계 도처에서 다양한 구제활동을 전개해왔다.[23] 이제 전쟁으로 황폐화된 한국을 돕기로 결정하고, 국제적 승인도 받은 것이다. 1952년, MCC는 달라스 보랜을 한국에 파견했다. 그는 부산민간협회의 ‘봉사단체 연락사무관’으로 자신의 업무를 시작했다. 1953년에는 어니스트 래버와 데일 위버가 부산에서 봉사활동을 이어갔다. 특히, 그들은 대구에 MCC 한국대표부를 설립했고, 경산에서 농장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MCC가 대구를 자신의 사역지로 선택한 이유를 정성한은 메노나이트 직업학교의 초대 교장을 지낸 콜스(L. R. Kohls)의 글을 통해 다음과 같이 알려준다.

대구 지역이 우리 고아들에게 가장 좋은 지역으로 선택된 두 가지 이유기 있습니다. (1)대구는 북한에서 공산주의 압제를 피해 온 많은 전쟁피난민들의 중심지였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2)대구가 한국에서 가장 많은 도움이 필요한 지역들 중에 하나이지만, 그럼에도 대구는 수많은 외국 자원 봉사 단체들로부터 가장 외면당하는 지역 가운데 하나입니다.

콜스(L. R. Kohls)의 글 [24]

MCC는 1971년까지 20년간 74명의 메노나이트 봉사자를 한국에 파견했다. 그들은 대구와 경산뿐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지역과 거리를 불문하고 기꺼이 도움을 주었다. MCC의 한국사역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1)물자구제사역: 우유, 쌀, 의복, 침구, 음식을 화천, 인천, 수원, 경남 지역 등지에서 분배. (2)메노나이트직업학교(1953년 설립): 고아 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6년제 중고등과정으로, 철공, 목공, 인쇄, 농업 교육. (3)가족/어린이 지원 프로그램(1962년 시작): 가난으로 깨진 가정의 회복을 위해, 사업 자금, 생활비, 양식, 교육비, 의료진료와 주택건축비 제공. (4)전쟁미망인 재봉기술교육(1954): 대구지역의 어려운 처지에 놓인 미망인 30명에게 바느질을 교육하고 졸업생들의 재봉틀 구입 지원. (5)농촌지도(1960): 농민학원, 농업협동조합, 축산업 중심으로 농업 전환, 복음전파 등 일종의 재건 프로그램. (6)평화사역(1965): ‘동남아시아 평화 노동 캠프’를 개최한 후 한일화해위원회를 조직하여, 일본이 식민지 시대에 파괴한 수원제암리교회 예배당 복구를 위해 3만 불 모금. (7)기타: 대구와 부산에서 병원자문봉사, 지역개발봉사, 기독교 아동 위탁교육 진행.[25]

MCC는 1971년에 한국사역을 마감했다. 한국의 경제가 안정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반면, 과거의 한국처럼 전쟁의 상처가 깊은 베트남에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62년, 한국인을 대표로 하는 재단법인이 설립되었다. 그리고 1971년 3월 31일, MCC는 한국 사역을 공식적으로 마무리했다.[26]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20년간 한국에서 역동적으로 사역하면서 대단히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지만, MCC가 교회를 세우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메노나이트교회가 다른 개신교 교단이나 선교단체와 구별되는 중요한 특징이다. 조응태는 당시 메노나이트교회의 판단을 다음과 같이 전해준다.

메노나이트 교회는 선교와 구제-봉사사역을 구분하여 수행한다는 독특하고 철저한 원칙이 있는데, 초창기의 메노나이트 사역자들이 보기에는 한국 내에 이미 많은 교회들이 성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또 다른 교회를 세우는 것보다는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돕는 것이 메노나이트가 해야 할 일이라 판단하였다.

조응태 [27]

MCC가 한국에서 철수한 후에도 메노나이트와의 관계가 메노나이트 직업학교 동문 모임을 통해 지속되었다. 동시에, 한국에서도 메노나이트교회가 개척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꾸준히 제기되었다.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한 한국에게 더 이상 메노나이트의 경제적인 도움은 필요치 않았다. 하지만 빠르게 세속화되는 한국교회와 여전히 전쟁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한국사회는 “제자도 공동체 평화”를 추구하는 메노나이트교회의 영적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거부할 수 없는 시대의 요청이었다.

2. 춘천예수촌교회

MCC가 한국을 떠난 후에도 이 단체의 활동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 존재했고. 그들 중에는 메노나이트교회의 설립을 소망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소망은 오랫동안 성취되지 못했다. 그렇게 20여 년이 흐른 1996년 1월, 춘천에서 소수의 가정이 모여 예수촌교회를 설립했다. 이 땅에 세워진 최초의 아나뱁티스트교회다. 이 교회에 모인 사람들은 교회 설립 3년 전부터, 성경과 상관없는 종교로 퇴화하는 한국교회에 대해 고민하며, “참된 교회원리를 발견하기 위해” 토론과 공부를 이어갔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공통적으로 아나뱁티스트에 감동하였다.”[28]

“제자도와 공동체의 원리를 근거로 세상을 섬기는 평화와 화해의 공동체”를 추구하는 예수촌교회는 자신의 비전을 구체적으로 실험ㆍ실천해왔다. 먼저, 예수촌교회는 담임목사제가 아닌 4 가정의 복수리더십를 유지하고, 가정교회(고을)를 중심으로 교회를 운영한다. 이들은 교회 안에 고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고을이 모인 것이 교회라고 생각한다. 이런 구조와 정신 속에서, 은사중심의 평등하고 다양한 사역을 전개하고 있었다. V-School(기독교원안학교), 어글로우(여성중보사역), 금잔디 봉사(장애인 미술치료봉사), 부부학교(부부상담, 치유), KAC(한국아나뱁티스트센터), 시대분별모임, 새둥지(저소득 이혼 여성 쉼터)가 대표적인 예들이다.[29]

메노나이트교회로서의 특징은 이 교회의 예배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성령의 역동성과 공동체성을 추구하기에, 아이들을 포함하여 전 가족이 함께 예배에 참여하고, 설교 후에는 지체들이 설교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자유롭게 나눈다. 예배를 마칠 때도 목사의 축도 대신 모두가 함께 서로를 축복한다. 교회 내에서 안건을 처리할 때에는, 다양한 회의로 여론을 수렴하고 만장일치로 결정한다. 끝으로, 교회의 양적 성장을 추구하는 대신, 일정한 인원을 초과할 경우 지속적으로 교회분립을 추진한다. 그 결과. 2013년에 예수마음교회가 분립되었다. 그 외에도, 북미 메노나이트 교회와 교류하고, 한국아나뱁티스트센터(KAC)도 설립했다.[30]

3. 한국아나뱁티스센터 (Korea Anabaptist Center, KAC)

한국에서 16세기 아나뱁티스트운동의 소중한 유산을 계승ㆍ확산하길 윈했던 화천의 아바샬롬공동체와 춘천의 예수촌교회 교우들이 이런 비전을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공유하고 캐나다 메노나이트 교회와 협력한 결과, 2001년 한국아나뱁티스트센터(Korea Anabaptist Center)가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이 센터의 설립목표는 “성경에 근거한 아나뱁티스트 관점의 제자도, 평화, 공동체 삶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며 이를 위해 네트워크, 교육, 출판을 통해 개인, 단체. 교회를 섬기는 것”이다. ‘제자도, 평화, 공동체’가 이 센터의 설립가치다.

KAC의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사역은 아나뱁티스트 관련자료(1000권 이상)를 수집하고 대중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도서관/자료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동시에, 시대에 맞는 강연회와 세미나도 정기적으로 개최한다. 특히, 세계적인 석학을 초대하여 순회강연회도 진행했다. 스튜어트 머레이(2013)와 존 로스(2016) 초청강연이 대표적인 예다. 뿐만 아니라, MCC 국제문화 체험프로그램을 통해, 2002년부터 2017년까지 국내 청년 26명을 북미로 파송하고, 20여명의 북미 청년을 한국에 초청하여 봉사할 기회를 제공했다. 아나뱁티스트출판사(Korea Anabaptist Press)도 설립하여 15년간 총34권의 책과 1개의 DVD를 제작했다. 하지만 2017년부터 출판 업무를 대장간출판사(대표 배용하)로 이관하고 업무를 종료했다. 그 외에도, 자급자족을 위해 평화 커피숍과 평화 및 관계 중심의 어학원을 운영했고, 동북아시아 평화훈련 프로그램도 진행했다. 현재는 2016년 설립된 한국메노나이트교회연합회(Mennonite Church South Korea)와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 2001년부터 2011년까지 서울에서 사무실을 운영했으나, 2012년에 춘천으로 이전했다.

4. 한국평화교육훈련원 (Korea Peacebuilding Institute, KOPI)

한국평화교육훈련원(Korea Peacebuilding Institute, KOPI, 원장 이재영)은 2001년 KAC의 ‘평화교육부서’로 출발하여, 2012년 남양주 덕소로 사무소를 이전하고 독립했다. 치유와 화해의 정의를 강조하면서, 학교, 조직, 도시, 사법 영역에서 회복적 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06년에는 자체적으로 ‘동북아시아평화교육훈련원’(Northeast Asia Regional Institute)을 설립하고, “동북아시아 지역의 평화적인 구조와 문화를 형성”하기 위해 2009년부터 ‘동북아시아 청소년 국제평화캠프’를 진행하고 있다. 지금까지 동북아시아 지역을 비롯한 10개국의 대학(원)생, 교수, NGO 활동가, 교사, 종교인 등 250여 명에게 평화교육(peacebuilding)을 실시했다.

2014년에는 “한국사회에 평화로운 공동체 문화를 만들기 위해 회복적 정의의 적용에 대해 연구하고 실천하는 것”을 목적으로, ‘사단법인 한국회복적정의협회’를 설립했다. 이후, 회복적 정의 컨퍼런스와 아카데를 개최하고, 민간자격증을 발급하며. 부설로 연구소와 실천센터도 문을 열었다. 2015년에는 피스빌딩을 건축하고 사무실을 이전했으며, 피스빌딩 출판사와 ‘서클 커피 앤 베이커리’도 시작했다. 현재, 피스빌딩에는 20여 명이 살고 있다.[32]

5. 한국메노나이트교회연합 (Mennonite Church South Korea, MCSK)

2016년, 한국메노나이트교회연합(Mennonite Church South Korea, MCSK)가 설립되었다. MCSK의 탄생을 위한 여정은 2010년부터 시작되었다. 이 해에 배용하와 전남식 외 3인이 MC-Canada 총회를 방문했고, 이들을 중심으로 ‘한국아나뱁티스트펠로우십’(Korea Anabaptist Fellowship, KAF)이 2011년에 조직되었다. 2012년에는 MC-USA 총회에 참석하여, 교제의 지경을 캐나다와 미국으로 확장했다. 같은 해 11월, KAF는 내부의 결속과 학습을 목적으로 「한국아나뱁티스트저널」(Korea Anabaptist Journal)을 창간했다. 2021년 현재 22호까지 발간되었다.

이렇게 회원들 간의 교제를 심화시켜 가던 2015년, KAF는 그때까지 유지하던 교제의 수준을 넘어 교단으로서 교회연합체 구성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하기 시작했다. 6개 교회가 모여 4차례 진행된 회의를 통해 <제주신앙고백>을 작성하고 맴버십 기준을 세운 후, 각 교회의 참여여부를 물었다. 최종적으로, 춘천예수마음교회, 논산평화누림교회, 진해주빌리교회, 제주하늘가족교회가 신앙고백에 서명하고 ‘한국메노나이트교회연합’을 출범하기로 결정했다.

2016년 2월 20-21일, 제1회 MCSK 컨퍼런스가 제주에서 개최되었다. 이 모임에서 창립예배를 드림으로써 MCSK가 공식적으로 탄생했다. 그 결과, 2017년부터 Mennonite World Confernece(MWC)의 한국 대표가 KAF에서 MCSK로 변경되었다. 이후, 자체 목회자 훈련을 위한 교육을 시작했으며, 매년 교회를 돌아가며 총회도 개최했다. MCSK 배용하 대표가 세계총회에 꾸준히 참여하며 해외 교회들과의 유대 및 친교도 강화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KAC 및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와 꾸준히 협력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국내의 정치적 상황과 쟁점에 따라, 자신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천명하기도 했다. 2016년 11월, 국정농단 시국성명서를 발표한 것, 그리고 2020년 7월, “종교적 신앙에 따른 병역거부와 대체복무에 관한 입장문”을 체택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33]

IV. 한국교회 vs. 아나뱁티즘

다양한 영역의 학자들이 아나뱁티즘을 연구하여 논문을 썼다. 이들 대부분은 한국교회가 처한 내적 문제와 외적 위기를 진지하게 인지하면서, 각자의 전공영역에서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의 대안으로 아나뱁티즘을 제시했다. 이제 몇 가지 영역으로 구분하여 그들의 주장을 살펴보자.

1. 교회개혁의 모델

한신대학교 교회사 교수 김주한은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 2019년에 발표한 <2019년 주요 사회 현안에 대한 개신교인의 인식조사 보고서>를 통해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가 한국사회 종교들 가운데 최하위임을 지적한다. 동시에, “성장주의, 배타주의, 분열주의”가 한국개신교의 특징적인 현상이자, “개신교회의 사회적 공신력을 실추하게 만든 주요인”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진단 하에, 한국개신교회가 극복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가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회복”이라고 단언했다. 교회사역이 신뢰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34]

이런 맥락에서, 김주한은 신자유주의 광풍에 힘없이 무너지는 한국교회의 개혁과 회복을 위해 아나뱁티즘, 특히 기독교 공산체제의 대표적 모델인 후터파에 주목한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종교의 자유에 대한 염원, 진정한 기독교적 삶의 한 모델, 교회에 대한 새로운 개념규정 같은 후터파의 특징이 “경제세계화” 앞에서 본질에서 벗어난 교회가 자신의 실추된 사회적 신뢰도를 회복하는데 중요한 도움이 될 수 있다. 추락하는 한국교회가 개혁과 회복을 위해 아나뱁티즘에 주목해야 할 현실적인 이유다.

분명 후터파가 꿈꾸었던 이상들은 기성교회에 도전이었다. 그들의 공산체제(communal living)는 그 어떤 그룹도 달성해 보지 못했던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독특한 모델이었고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낯설게 보여 지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후터파가 제시한 비전들이 인간사회의 재형(reconstruction)을 위한 청사진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가 강조했던 “하나님 나라는 지금 여기 세상 한 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가르침을 충실하게 믿었고 즉시 실행해 옮겼던 그리스도의 충실한 제자들이었다. 경제세계화의 논리 앞에 국가도 교회도 모두 경영체계로 재편되고, 그 과정에서 교회 또한 사회적 공신력이 실추되고 있는 마당에 후터파가 주창했던 가치들은 분명 현실적 테제로써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김주한 [35]

2. 평화운동의 모델

아나뱁티스트들, 특히 메노나이트교회는 오랫동안 국가적·종교적 폭력에 의해 참혹한 피해를 입었다. 그것은 그들이 제자도와 평화를 신앙의 요체로 신실하게 실천한 결과였다. 그들은 이런 현실적·역사적 경험을 통해, 평화를 고백하고 실천하며 교육해왔다. 반면, 이념적 갈등에 의해 분단과 전쟁을 경험한 한국사회와 교회는 아나뱁티스트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다. 오히려 민족종교, 호국종교, 국가종교, 애국종교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며, 전쟁과 분단을 성경과 신학으로 정당화해온 것이다.

따라서 김경중의 우려처럼, “한국에서 아나뱁티스트 신학을 적용하는데 가장 어렵게 느끼는 부분은 아마도 비폭력과 평화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36] 이런 상황에서 고신대학교의 역사신학 교수 이상규와 한신대학교 김주한은 메노나이트교회의 평화전통을 대단히 높이 평가하면서, 한국교회의 중요한 교훈과 대안으로 제시한다.

아나뱁티스트 전통을 이은 메노나이트교회의 비폭력(non-violence), 반전 운동(anti war movement),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conscientious objection to the military service). 화해(reconciliation), 앙갚지 않음(un-retaliation) 등과 같은 평화주의 이상과 전통은 근본적으로 이들이 이해한 제자도 정신이며, 이는 그리스도를 본받음(imitatio Christi)이다. 전쟁을 준비하는 오늘의 현실에서 진한 감동을 주고 있다. 더욱이 이런 이념을 지키기 위해 신념의 희생자가 되기를 자처했다는 사실은 더 큰 감동을 주고 있다. 따지고 보면 메노나이트교회의 평화주의가 현대의 비폭력 평화주의, 혹은 반전 비전 등 절대적 평화주의(absoluter Pazifismus) 사상의 연원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상규 [37]

기독교평화운동의 효시는 아나뱁티스트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육강식의 지배논리가 팽배해 있는 현 세계질서와 핵무기와 각종 대랑살상무기들이 양산되어 인류의 생존뿐만 아니라 지구생태계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는 현실에서 아나뱁티스트들의 핵심가치인 비폭력 평화주의 노선은 평화를 갈망하는 모든 세력들에게 중요한 모델로 수용될 필요가 있다.

김주한 [38]

3. 선교의 모델

한국교회는 20세기 개신교 선교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다. 동시에, 21세기 세계선교를 주도하는 대표적인 교회이기도 하다. 하지만 선교는 한국교회의 모든 문제가 농축되어 있는 또 하나의 ‘고민거리’임에 틀림없다. 한국교회와 선교사ㆍ선교지가 운명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교마저 자본주의와 물량주의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무분별한 경쟁과 분열에 신음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처럼, 어려운 국내외 선교 상황에서 서울신대 선교학 교수 최형근은 아나뱁티스트운동을 중요한 대안과 해법으로 제안한다. 더 이상 국가적 특혜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아나뱁티스트들에게 겸손히 배워야 한다.

한국교회의 선교와 연관하여 제자도와 공동체를 통해 삶으로 복음을 살아내며 증언하려는 아나뱁티스트 운동이 주는 교훈은 매우 중요하다. 한국교회의 선교와 전도가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해 세상으로 보냄받은 선교사로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성공과 효율성을 담보하기 위해 다양한 자본주의적 자유시장 경제의 원리를 무비판적으로 도용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 이러한 한국 교회의 선교의 형태에 대한 도전을 우리는 아나뱁티스트 운동을 통해 받을 수 있다. 그들은 타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 어떠한 강제력이나 물리력, 막대한 경제력 혹은 정부의 공권력 등을 활용하지 않았다. 이들은 신자들의 교회로서 세상 속에서 신자 됨과 교회됨의 모습을 보여주므로 복음을 증거했다. 후기 기독교 왕국과 다원주의 사회에 살아가는 우리는 이제까지 교회가 누리던 모든 특혜와 권리를 상실하고 소수자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복음의 진리를 살아내며 기독교 신앙의 정성을 보여줄 수 있는 방식을 아나뱁티스트 전통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최형근 [39]

한편, 평화운동연구가 정성한은 한국전쟁 때 한국에 입국하여 헌신적으로 구제사역을 전개하면서도 끝까지 교회를 세우지 않았던 MCC의 사례를 매우 중요한 선교의 모델로 주목한다. 일차적으로, 그는 선교가 결국엔 교회설립과 교세확장으로 환원되고, 봉사와 개혁마저 교회 설립을 위한 보조수단으로 간주되며, 기존의 교회들을 무시하거나 경쟁하며 교회를 개척하는 현재의 선교풍토를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이런 현실에서 발견하는 MCC 역사는 가히 충격적이다. 선교마저 길을 잃은 상황에서 아나뱁티스트 선교정책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이유다. 선교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한국교회에 국내외를 막론하고 선교행위는 많으나 그 선교 행위에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제자도가 있는지, 선교의 과정이 평화를 주는 행위인지, 선교의 결과가 선교 대상자가 속한 여러 기초 공동체들을 세우는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 여전히 경쟁적으로 교파를 심거나 교회를 세우는 행위가 옳은지는, 굳이 세계 교회와 한국교회가 걸어온 역사적 발자취를 다시 연구해 보지 않더라도, 재세례의 한국 사역을 통해 교훈을 얻을 수 있다…그들[MCC]은 한국전쟁으로 황폐해진 이 땅에 들어와 가난하고 병든 사람과 고아와 과부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하고 가족 공동체와 마을 공동체를 회복시켜 평화의 삶을 살게 했다. 그들은 자신들보다 앞서 들어온 한국의 교회들을 존중했고, 한국교회들이 놓치고 있는 부분들을 묵묵히 감당해주었다. 결국, 그들은 한국교회를 섬겨 준 것이다. 그들에게서 우리는 교회의 또 다른 차원을 보게 된다.

정성한 [40]

4. 영성의 모델

김주한은 영성적 측면에서도 아나뱁트즘에 주목했다. 특히, 아나뱁티스트 영성을 “도전적인 제자도”(dissident discipleship) 영성으로 명명한 데이비드 옥스버그(David Augsburger)에게 주목했다. 옥스버그는 “참 자아를 발견하고, 참되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하나님을 대하듯이 이웃을 대하는 삶”을 삼차원적 영성이라고 설명하면서, 아나뱁티스트들을 이런 삼차원적 영성을 추구한 사람들로 규정했다.[41] “물량주의와 성장주의, 교회의 사사화와 극우반공주의로 무장한 전투적 근본주의로 사회적 공신력을 상실한 한국 개신교회의 현실”을 고려할 때, “아나뱁티스트들의 통합적인 영성신학은 개혁을 위한 중요한 자원”라는 것이 김주한의 결론이다.

아나뱁티스트들의 영성신학은 “공적 신학”과 연결된 많은 종류의 담론들을 제공한다. 아나뱁티스트들의 신학과 교리는 전통적인 기독교 가르침과 충돌하는 측면도 있지만 세상적인 가치와 타협하거나 거기에 매몰되지 않고 그들만의 독특한 신념을 고수함으로서 “기성 기독교세계의 위기”로. 그리고 “기존 세상질서의 위기”로 존재해 왔다. 그러나 하나님나라는 사적 영역이 아니라 공적인 것이기 때문에 아나뱁티스트들이 주장하고 실천해 온 제자도와 공동체 영성에 기초한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정의와 평등, 평화, 연대와 사랑은 참된 기독교 표지로서 주장되고 적용될 필요가 있다.

김주한 [42]

5. 기독교교육의 모델

21세기 한국교회를 위한 아나뱁티즘의 가치를 주목한 학자들 중에는 기독교교육학자들도 있다. 예를 들어, 침례신학대학교의 김난예는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가 추락한 현실을 개탄했다. 그가 인용한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의 <2018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의식조사>에 따르면, 한국교회에 대한 비개신교인의 이미지는 “이기적(68.8%), 물질중심적(68.5%), 권위주의적(58.9%)로 나타난 반면, 남을 잘 돌보고(14.3%), 약자 편에 서며(9.5%), 도덕적이고(8.3%), 교회 밖 세상과 잘 소통한다(8.3%)”는 것으로 드러났다.[43]

이런 조사 결과를 직시하면서, 김난예는 아나뱁티스트 공동체의 가치와 의미를 새롭게 조명한다. “철저하게 예수 따라 살기”를 강조하면서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의 구현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이 운동은 현재 한국교회 주류와 큰 차이가 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아나뱁티즘과 아나뱁티스트 공동체는 한국교회의 신뢰도 위기 극복을 위한 하나의 훌륭한 길잡이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44]

동시에, 김난예는 아나뱁티즘을 한국교회 일반, 특히 기독교교육의 대안적 모델로 제시할 뿐만 아니라, 이 모델을 한국교회의 교인과 목회자, 그리고 기독교교육자 들이 몸소 실천해야 한다고 강력히 촉구한다. 이런 실천을 한국교회의 생사가 달린 문제로 인식하기 때문에, 김난예의 결론은 단호하고 간절하다.

기독교교육은 말과 하나의 이론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예수 따라 사는 삶으로 모범을 보이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며, 그분을 따라 살아가는 교회공동체가 무엇인가를 머리와 삶으로 느낄 수 있도록 실천적이어야 한다. 또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겪어야 되는 어려움들을 넘어설 수 있는 철저한 예수 사랑을 경험하면서 종말론적 신앙으로 예수를 따라 살아가도록 기독교교육 지도자들과 목회자들이 모범을 보여야 한다. 목회자들과 기독교교육자들이 예수 따라 살기를 몸과 삶으로 보여주지 않는다면 한국교회의 신뢰회복은 어려울 것이라 여겨진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기독교인들이 다시 철저하게 예수 따라 살기의 삶을 살아가므로 세상의 신뢰를 회복하는 가운데 한국교회의 희망으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기대해본다.

김난예 [45]

6. 목회상담의 모델

목회상담학자 김용민은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의 주류에 편입된 결과, 본래의 순수성이나 예언자적 특성을 상실하고 사회의 존경 대신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고 개탄한다. 특히, 한국교회와 사회의 상관관계는 목회상담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쳐,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즉, 정부로부터 보조를 받는 경우, 국가권력이나 이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불가피하게 균형이나 본질을 상실한 상담으로 변질될 위험이 상존하는 것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목회상담이 외부적인 요인에 크게 휘둘리지 않고, 동시에 기독교의 본질을 건강하게 유지하면서 상담의 본래적 기능에 충실하려면, 아나뱁티즘의 정신과 유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용민이 제시하는 문제의 해법이다. 그는 (1)신자들의 교회로서 목회상담(자발성 강조, 하나님의 선수를 인정, 공동체 강조), (2)제자도로서 목회상담(선교적, 경제적, 평화적 목회상담), (3)정교분리로서 목회상담(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정부보조에서 자유로우며, 국가보다 하나님의 뜻을 우선하는 목회상담)을 아나뱁티즘에서 차용한 후, 다음과 같이 그 의미와 가치를 천명한다.

역사 속에서 아나뱁티스트는 하나의 분파로서 기독교의 주류에 들어오지 못했다. 그러나 분파로 존재하면서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했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 사회의 주류로서 지탄의 대상이 된 한국교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있다. 아나뱁티스트의 신앙과 실천에 근거한 목회상담은 현재 한국교회가 그대로 수용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정경유착의 형태로 드러난 한국교회가 좀 더 건강한 모습을 지니기 위해서는 아나뱁티스트의 신앙과 실천에 근거한 목회상담을 통해서 스스로를 점검하고 필요한 부분은 실천할 필요가 있다.

김용민 [46]

7. 코로나 시절의 대안

2020년부터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바이러스-19는 인류역사의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이다. 기근, 질병, 전쟁을 스스로 극복하면서 인간이 신의 반열에 올랐다는 유발 하라리(Yubal Harari)의 당찬 선언을 순식간에 무력화시키면서, 인류가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다.[47] 21세기에 이런 경험을 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 바이러스의 창궐은 교회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다. 교회가 전염병 앞에 무기력한 것은 14세기나 21세기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교회 현장예배가 중단되면서, 한국교회 영성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한국사회 내에서 개신교회의 위상도 ‘벌거벗은 임금님’에 불과했음이 여과 없이 폭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목회자와 신학자 들이 해법과 탈출구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침례신학대학교 역사신학 교수 김태식이 2021년에 발표한 논문, “코로나 팬데믹 이후의 신앙공동체 영성: 아나뱁티스트 신앙의 특성과 현대적 적용”도 그런 노력 중 하나다. 그런데 그는 현재 당면한 코로나팬더믹 상황과 한국교회의 뒤틀린 영성을 연결하고, 그 대안으로 아나뱁티즘은 제시한다. 아나뱁티즘에 대한 기존의 오해와 편견을 극복하고, 오히려 아나뱁티즘이 실천해온 이 제자도, 공동체, 사랑과 비저항을 한국교회가 진지하게 수용ㆍ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아나뱁티스트들은 유아세례거부, 병역거부, 극단적 평화주의자들로 규정하고 시대에 맞지 않는 신앙인들로 여겨져 왔다. 신학적인 차이가 각 교단마다 다를 수 있지만 오늘날 이들이 추구하는 핵심가치들은 배금사상이 지배하고 교권이 난무하고 자연환경을 파괴하면서까지 성장우선주의로 나아갔던 우리의 삶과 목회현장을 되볼아보게 하고 있다. 성경공부모임에 참여하기보다 주님이 걸어가신 길을 걷고(제자도), 지나친 경쟁의식으로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린 개교회 성장주의 보다 신앙공동체를 이루어 서로 돕고 격려하고(형제애), 환경을 파괴해서라도 나만의 유익을 위하던 자세에서 환경과 화해와 평화를 추구하는 이들의 신앙과 삶을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교단의 입장에 따라 신학은 다를 수 있으나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하는 이들의 삶이 코로나펜데믹 시대에 하나의 대안이 되길 기대해본다.

김태식 [48]

IV. 글을 마치며

이제 글을 마무리하면서, 지금까지 소개한 아나뱁티즘의 역사와 다양한 학자들의 평가를 토대로, 한국아나뱁티즘의 미래를 위해 몇 가지 제안을 드리고자 한다. 한국사회와 교회가 처한 현실을 고려할 때, 비록 타 교단과 교회에 비해 역사가 매우 짧음에도 불구하고, 아나뱁티즘이 이 시대 한반도에서 감당해야 할 책임과 역할이 결코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먼저, 아나뱁티스트들은 자신의 전통과 유산을 한국교회에 지속적으로 소개하고 널리 알려야 한다. 그동안 ‘준 국교’ 수준의 특권적인 지위를 향유하던 한국교회의 황금기는 이제 정말 끝났다. 종교다원적 사회와 세속화 시대에, 한국교회는 국가의 특혜 없이 타종교와 경쟁하고 무신론자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이것은 현재 한국교회에게 너무 낯선 환경, 당혹스런 경험이다. 반면, 역사 속에서 이런 처지를 오랫동안 처절하게 경험한 거의 유일한 개신교 전통이 바로 아나뱁티즘이다. 그들만이 이런 상황에 대한 역사적 경험과 생존방법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강도 만난 유대인’ 같은 한국교회에게 아나뱁티즘이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주어야 한다. 자신의 역사와 경험을 널리 공유함으로써 말이다.

둘째, 아나뱁티스트들은 자본과 폭력의 세상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으로 사는 법’을 몸소 보여주어야 한다. 21세기 한반도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매우 예외적인 경험이다. 한반도는 초강대국들 틈에서 민족이 분열된 상태로 존재하는 위험한 땅이다. 미국의 절대적인 영향력 하에서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공간이다. 아직도 전쟁의 상처와 이념적 갈등이 생생히 남아 있는 나라다. 이런 곳에서 성경적 가치를 추구하며 예수의 제자로 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성령보다 맘몬의 힘이 더 세고, 십자가 복음보다 반공이데올로기가 더 영향력 있는 종교에 물든 사람들에게 아나뱁티즘의 가르침은 ‘그림의 떡’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제야말로 그것이 몽상가의 헛된 꿈이 아니라, 하나님의 실현가능한 비전임을 공포와 불신에 사로잡힌 이 땅의 “도마들”에게 분명히 보여주어야 한다. 자신의 상처를 몸소 보여주신 “예수님”처럼 말이다.

셋째, 아나뱁티스트들은 타 교파ㆍ교회의 형제자매들과 끊임없이 대화와 친교를 시도해야 한다. 16세기의 기억은 주류 개신교회와 아나뱁티스트들 사이에 큰 상처와 편견을 남겼다. 부패한 가톨릭교회를 개혁하겠다고 분연히 일어섰던 형제자매들이 비본질적 혹은 부차적인 문제로 분열하고 말았다. 이후, 양자는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고 상대방을 악마화하며 500년을 살았다. 원한과 공포 속에 헤어진 형제 야곱과 에서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제 그 시절이 지났다. 세상과 시대도 완전히 바뀌었다. 16세기에 죽음까지 불사하며 싸웠던 문제들은 더 이상 치명적이지도 결정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종교 일반이 공멸할 새로운 위기에 봉착해 있다. 과거의 기억에 얽매여 등 돌리고 살 수 있는 한가한 상황이 아니다. 다시 만나 얼굴을 비비며 통곡하고 화해한 야곱과 에서처럼, 서로 다시 만나 대화하고 회해하며 새로운 미래를 개척해야 한다. 누구도 완전하지 않지만, 누구도 완벽한 죄인이 아니다. 이제, 이 만남과 대화의 손길을 ‘착하고 용감한’ 아나뱁티스트들이 먼저 내밀어야 하지 않을까?

끝으로, 아나뱁티스트들은 한국교회가 세상과 소통하고 세상에 유익한 종교임을 입증해야 한다. 오랫동안 아나뱁티즘은 박해를 피해 은둔과 도피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이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세상에서, 아나뱁티스트들의 역사적 유산과 현재의 생활방식은 단지 한국교회뿐 아니라, 한국사회를 위해서도 매우 유용하고 적절한 모범이 될 수 있다. 분단과 전쟁의 위협 속에서 메노나이트가 추구하는 평화운동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한국인 모두에게 중요한 지혜와 경험이 될 수 있다. 무자비한 자본과 이기적 욕망으로 인간성이 파괴되고 폭력적 갈등이 난무하는 한국사회에서 아나뱁티스트의 회복적 정의는 매우 유용하고 가치 있는 프로그램이다. 인터넷과 코로나로 인간관계가 더욱 파편화되고 비인간화되는 현실에서 아나뱁티즘의 공동체 문화는 대단히 매력적이고 독특한 대안이 될 것이다. 한국기독교가 ‘개독교’ 취급을 받는 현실에서, MCC의 한국사역을 현재적 상황에 슬기롭게 적용한다면, 아나뱁티즘은 소중한 역할을 탁월하게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2013년, 춘천의 한국아나뱁티스트센터를 취재했던 이영란은 「기독교사상」에 자신이 보고 들은 이야기를 담담하게 서술했다. 이제 그녀가 자신의 글을 마무리하면서 남긴 소망을 여기에 옮겨본다. 나의 마음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흐르는 것이 어디 물뿐이겠습니까. 자연도 흐르고 사람도 흐르고 세월도 흐릅니다. 기독교 역사 속의 아나뱁티스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춘천 소양강 흐르는 물살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곧 봄이 온 천지를 덮을 것입니다. 아나뱁티스트들이 꿈꾸고 모색하는 평화의 기운 또한 한반도를 가득 덮어주기를 바랍니다.

이영란 [49]

참고문헌

  1. 「슐라이트하임 신앙고백서」의 7가지 조항은 다음과 같다. (1)회개 및 개심을 경험하고 자기들의 죄가 그리스도에 의해 다 소멸되었다고 진실로 믿는 이들에게 세례를 베푼다. (2)일단 재세례파의 신앙을 받아들인 후, 세례까지 받은 이가 실수하거나 죄를 지었을 경우, 비록 부주의의 결과였다 하더라도 파문시킨다. (3)성찬식에 참여하고자 하는 이는 우선 세례를 받아야 한다. (4)세례 받은 이들은 사탄이 이 세상에 심어 놓은 악과 죄악으로부터 스스로 성별해야 한다. (5)교회의 목사는 바울이 명하였듯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좋은 평판을 듣는 인물이어야 한다. (6)교인들은 여하한 이유를 막론하고 무기를 사용할 수 없다. (7)교회 교인들은 누구도 맹세 할 수 없다.
  2. 스튜어트 머레이, 『이것이 아나뱁티스트다』, 강현아 옮김 (대전: 대장간, 2011), 206.
  3. 스튜어트 머레이, 『이것이 아나뱁티스트다』, 214.
  4. 스튜어트 머레이, 『이것이 아나뱁티스트다』, 221. 아나뱁티스트들이 당한 고난에 대해서는 티엘레만 반 브라이트, 『순교자의 거울」, 번역위원회역 (서울: 생명의서신, 2005)을 참조하시오.
  5. 김명배, “16세기 재세례파의 「쉴라이타임 신앙고백」에 나타난 교회와 국가의 관계와 기독교 윤리,”『현상과 인식』, Vol. 38(3) (September 2014), 177.
  6. Walter Klassen. ed., Anabaptism in Outline (Waterloo, Ont.: Herald Press, 1981), 110.
  7. Walter Klassen. ed., Anabaptism in Outline, 101.
  8. Walter Klassen. ed., Anabaptism in Outline, 101.
  9. Walter Klassen. ed., Anabaptism in Outline, 102.
  10. Walter Klassen. ed., Anabaptism in Outline, 116.
  11. Walter Klassen. ed., Anabaptism in Outline, 112.
  12. 대표적인 인물이 캐나다의 메노나이트 정치학자인 존 레데콥이다. 그의 주장에 대해선, 존 레데콥, 「기독교 정치학」, 배덕만 옮김(대전: 대장간, 2011)을 참조하시오.
  13. 김명배, “16세기 재세례파의 「쉴라이타임 신앙고백」에 나타난 교회와 국가의 관계와 기독교 윤리,”188.
  14. 존 A. 호스테들러, 『후터라이트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춘천: KAP, 2007), 11.
  15. 존 A. 호스테들러, 『후터라이트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30.
  16. 존 A. 호스테들러, 『후터라이트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39.
  17. 존 A. 호스테들러, 『후터라이트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89.
  18. 스튜어트 머레이, 『이것이 아나뱁티스트다』, 221.
  19. 제임스 D. 헌터,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4), 231.
  20. 제임스 D. 헌터,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236.
  21. 제임스 D. 헌터,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241
  22. 제임스 D. 헌터,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241
  23.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히 여기심을 이 땅의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하기 위하여 전 세계 아나뱁티스트 교회가 협력해서 만든 단체로서 인간의 기본적 필요를 채우기 위한 구제 사역과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국제기구다.” 정성한, “한국전쟁과 메노나이트 평화운동: 아나뱁티스트 한국교회사 서술을 위한 서론적 고찰,” 「한국교회사학회지」 제39집 (2014), 182-83.
  24. L. R. Kohls, Report on the Kyong San Vocational School for Orphan Boys, May 1955. 정성한, 한국전쟁과 메노나이트 평화운동,” 185에서 재인용.
  25. 정성한, 한국전쟁과 메노나이트 평화운동,” 186-95.
  26. 정성한, 한국전쟁과 메노나이트 평화운동,” 195-96.
  27. 조응태, “재세례파 형성 및 한국유입 과정과 신종교적 의의,” 「신종교연구」 제30집 (2014. 4), 17.
  28. 최형근, “한국 교회 갱신을 위한 한 모색으로서 아나뱁티스트 운동에 대한 고찰,” 「신학사상」 제161집 (2013 여름), 293.
  29. 최형근, “한국 교회 갱신을 위한 한 모색으로서 아나뱁티스트 운동에 대한 고찰,” 294.
  30. 최형근, “한국 교회 갱신을 위한 한 모색으로서 아나뱁티스트 운동에 대한 고찰,” 294-95.
  31. 김태식, ““코로나 팬데믹 이후의 신앙공동체 영성: 아나뱁티니스 신앙의 특성과 현대적 적용,” 「한국동서철학연구」 제100호 (2021. 6), 594.
  32. KOPI에 대한 정보는 http://kopi.or.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33. 이 내용은 배용하 목사가 2021년 11월 1일에 보내준 자료를 토대로 구성한 것이다.
  34. 김주한. “아나뱁티스트들의 영성신학과 실천” 『신학연구」 제75집 (2019), 53-4.
  35. 김주한, “기독교 공산(Communism)체제 모델 연구: 후터파 공동체를 중심으로” 「한국교회사학회지」 제44집(2016), 198-99.
  36. 김경중, “하나님 나라의 길을 걷는 사람들: 한국에서 아나뱁티스트” 「기독교사상」 (2012. 7), 80.
  37. 이상규, “메노나이트교회의 평화주의 전통,” 「한국교회사학회지」 제44집 (2016), 236.
  38. 김주한. “아나뱁티스트들의 영성신학과 실천,” 77.
  39. 최형근, “한국 교회 갱신을 위한 한 모색으로서 아나뱁티스트 운동에 대한 고찰,” 「신학사상」 제161집 (2013 여름), 292.
  40. 정성한, “한국전쟁과 메노나이트 평화운동: 아나뱁티스트 한국교회사 서술을 위한 서론적 고찰,” 「한국교회사학회지」 제37집 (2014), 203.
  41. 김주한, “아나뱁티스트들의 영성신학과 실천,” 66. 데이빗 옥스버거, 『외길영성』 생명의 말씀사, 2007.
  42. 김주한, “아나뱁티스트들의 영성신학과 실천,” 77-8.
  43. 김난예, “아나뱁티스트 공동체의 예수 따라 살기,” 「한국기독교신학논총」 제112집 (2019), 161.
  44. 김난예, “아나뱁티스트 공동체의 예수 따라 살기,” 187.
  45. 김난예, “아나뱁티스트 공동체의 예수 따라 살기,” 187-88.
  46. 김용민, “종교개혁과 목회상담: 아나뱁티스트의 신앙과 설천을 2중심으로,” 「한국기독교신학논총」 제107집 (2018), 335-36.
  47. 유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 (서울: 김영사, 2017).
  48. 김태식, “코로나 팬데믹 이후의 신앙공동체 영성: 아나뱁티니스 신앙의 특성과 현대적 적용,” 「한국동서철학연구」 제100호 (2021. 6), 595-96.
  49. 이영란, “〚변방에 선 사람들〛 아나뱁티스트의 전통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 「기독교사상」 (2013. 5), 139.

KAC 창립 20주년을 맞이하며

한국아나뱁티스트센터 (Korea Anabaptist Center)가 올해로서 창립 20년이 되었다. 2001년 11월 2일 창립 예배를 드린 일이 어제 같은데 이제 20주년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KAC를 지켜 주시고 보살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큰 감사를 드린다. 굽이굽이 여러 고비를 맞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해주셔서 그 어려움을 넘어 설 수 있었다. 정말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초기부터 지금까지 KAC 의 탄생과 성장을 돕고 기도로 응원한 북미의 메노나이트 선교부에게 감사를 드린다. 무엇보다도 처음 KAC의 초석을 놓은 팀 프로즈 선교사님, 김경중 총무님, 이재영 형제님, 김복기 2대 총무님, 그리고 현재 문선주 총무님께 깊은 고마움을 전한다. 이 분들의 헌신과 열정, 창의성과 인내심이 없었다면 오늘의 KAC는 없었을 것이다. 아울러 초대 이사장을 맡아서 수고해 주신 안동규 이사장님과 많은 이사님들, 초기 자문위원님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를 전한다. 그분들의 지혜와 경륜, 기도와 조언이 이처럼 KAC를 성장시킨 것이다. 또한 여러 북미에서 이 땅에 와서 KAC를 섬겨주신 여러 선교사님 부부, 커넥서스 (connexus) 선생님들, SALTER들께도 감사를 드린다. KAC의 지경을 넓히고 무엇보다도 그분들을 통해서 살아있는 믿음을 볼 수 있어서 이다. 그리고 KAC 스탭으로 섬겨 주셨던 많은 분들 과 IVEPer들에게도 감사를 보낸다. 열악한 재정과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이 KAC를 지켜 주셨다.

20년 동안 KAC가 뿌린 아나뱁티즘의 씨앗이 여러 곳에서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어 흐뭇하다. 제자도, 공동체, 평화를 기치로 한 KAC의 아나뱁티스트 운동이 직간접으로 한국평화훈련원 (Korea Peacebuilding institute, KOPI), KAF (Korean Anabaptist Fellowship), MCSK (Mennonite Church South Korea)의 탄생을 도왔다. KAC를 거쳐간 많은 사람들이 아나뱁티스트 운동에 관련하여 활동하고 있으며 점점 더 많은 기독교인들이 아나뱁티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은 지난 20년을 감사함으로 돌아보고 앞으로 올 새로운 20년을 소망으로 내다볼 때이다.

20년 후에도 더 큰 감사의 기도를 하나님께 올려 드리기를 소원하며 이 책을 읽는 모든 분들께 평화의 인사를 전한다.

남상욱 (KAC 2대 이사장, 예수촌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