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대담 :20년을 돌아보며 새로운 20년을 내다보기

KAC 20주년을 기념하면서 전/현직 KAC 이사장과 스탭들이 모여 2차례의 좌담회를 가졌다. 첫번째는 2021년 10월 2일 (토) 오후 9시에 KAC의 과거를 돌아보는 회고의 시간이었고 두 번 미래를 내다보는 시간으로 11월 6일 (토) 21:00시에 온라인으로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참석자는 권세리, 김경중, 김복기, 남상욱, 문선주, 안동규, 이재영, 팀 프로즈 (가나다 순)이었다. 한국과 캐나다를 연결해야 하기 때문에 적절한 시간은 한국시간으로 토요일 오후 9시 (캐나다는 토요일 오전 8시)밖에 없었다. 하지만 토요일 밤 12시가 다 되도록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다. 화상이지만 오랜 만에 만나 반가웠고 과거를 돌아보며 추억에 잠겼으며 미래를 내다보며 새로운 모색으로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하였다.


KAC 1차 대담

  • 주제: KAC 20년을 돌아보며
  • 일시: 2021년 10월 2일 (토) 21:00시
  • 참석자: 권세리, 김경중, 김복기, 남상욱, 문선주, 안동규, 팀 프로즈 (가나다 순)

1차 대담자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이 사전에 주어졌고 각 발언을 통하여 KAC의 역사를 돌아 보고자 하였다.

  1. 나는 언제(기간) KAC에 참여하였으며 맡은 역할은 무엇인가?
  2. 나에게 KAC는 어떤 존재인가?
  3. KAC의 사역 중 가장 중요한 순간은 무엇이었나?
  4. KAC와 관련 아쉬운 점은?
  5. 사역 중에서 가장 기억나는 사람은?
  6. 가장 힘들었던 기억은?
  7. 제자도 평화 공동체와 관련해서 KAC의 기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사회 안동규: 늦은 시간에 모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체 대화 진행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첫 질문은 자신이 언제 KAC에 연결되어 참여했고, 무슨 일을 하였는가를 6하 원칙 (5W 1H)으로 이야기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말씀을 나누면서 KAC는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 가장 중요한 순간이 언제였는가, 아쉬운 점은 무엇이며, 기억나는 사람, 힘들었던 일은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대화가 진전되면 좀더 중요한 주제로 우리가 추구했던 핵심가치로서 제자도, 평화, 공동체에 과연 우리는 어떤 기여를 했을까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다음 대담에서 미래에 관한 이야기, 즉 현재 우리의 한계는 무엇이고, 앞으로의 방향설정과 네트워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이야기하면 좋겠습니다.

저부터 먼저하지요. 저희 예수촌교회는 1993년에 목요성경공부 모임을 하면서 대략 3년 동안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그때 여기 계신 복기 형제도 참여했었는데, 3년 동안 공부하는 과정에서 “아! 이제는 우리가 교회를 해도 되겠구나!”하는 생각에 1996년 1월 7일 날예수촌 교회 첫 예배를 저희 집에서 드렸습니다. 교회사를 중심으로 역사에 대한 공부도 하고, 교회란 무엇인가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초대교회가 원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공부를 하면서 역사적으로 초대교회에 가장 근접한 어떤 정신을 갖고 있는 아나뱁티스트 운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저희들이 교회를 시작하면서, CMBC (Canadian Mennonite Bible College) [CMBC 는 이후 CMU (Canadian Mennonite University)로 확대되며 교명이 바뀌었다, 편집자 주] 와 연결고리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예수촌교회에서 서서히 사람들을 초청하기 시작했지요. 이 즈음 이윤식 형제님이 캐나다 위니펙의 CMBC에서 2년 간 머물다 오셨고, 미국과 캐나다 메노나이트 교회에서 이따금 씩 사람들이 와서 설교하고 돕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1996년에 제가 캐나다 밴쿠버로 연구년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메노나이트 교회 컨퍼런스에 참여하면서 점점 메노나이트 애나뱁티스트의 실체를 보게 되었습니다. 당시, “어? 이 운동에는 굉장히 크고 다른 의미가 있구나!”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런 경험과 더불어 한국으로 돌아와서 교회를 섬기는 중에 메노나이트 친구들의 방문 횟수가 늘어나며 교제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제가 메노나이트 교회의 초대도 받고 교제를 하는 중에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질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질문에 저희는 한국에는 교회가 많으니, 한국 교회를 위해 뭔가 Resource센터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했는데, 아마도 스탠리 그린(Stanley Green)이 저에게 제안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영국 런던의 메노나이트 센터와 일본 도쿄의 아나뱁티스트 센터를 방문하면 좀 아이디어가 생길 것 같다는 제안을 받았고, 런던 메노나이트 센터를 방문했습니다. 그 때 스튜어트 머레이가 센터장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알렌 크라이더 드곳을 박사가 떠난 지, 1,2년 후였던 거 같습니다.

그때 굉장히 고무적으로 다가온 것은 런던 아나뱁티스트 센터는 그렇게 큰 조직이 아니었지만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는 모습을 보며 한국에서도 이 정도 센터는 가능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도쿄 아나뱁티스트 센터를 방문한 다음에는 우리도 이러한 센터는 운영할 수 있겠다는 자신이 좀 생겼습니다. 도쿄센터는 좀 더 규모가 작아서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저희가 한국에서 KAC(한국 아나뱁티스트 센터)를 시작하면 어떻겠느냐 제안하였고, 저희가 아나뱁티스트에 대해 잘 알지 못하니, 누군가를 보내달라고 하면서 KAC가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한국 아나뱁티스트 센터가 생겨나기까지의 배경설명이구요 순수하게 제 기억을 소환하여 한 이야기임을 밝힙니다. 이렇게 KAC를 시작하기 전에 KAC 역사에 처음 등장한 인물이 팀(Tim Forese) 선교사님이고, 이러한 배경으로 경중 형제님도 관여하고, 그 이후 총무 일을 맡으면서 일이 펼쳐져 20년의 역사를 걸어오게 되었다고 봅니다. KAC 시작 점에 “이곳 한국에 왜 KAC가 생겼느냐?”라는 질문이 있었는데, 이에 대한 반응으로써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이나 그룹이 아나뱁티스트 센터나 메노나이트 관련 자료들이 필요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돕기 위해 아나뱁티스트 정신을 한국사회에 소개하는 것이 좋겠고, 이를 위해 한국에 아나뱁티스트 센터를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고 한 것이지요. 그렇게 예수촌 교회와 팀-경중-재영로 연결되어 KAC가 시작되었습니다.

간략한 배경 설명에 이어 이제부터는 자기가 KAC에 어떻게 연결되고 어떤 일에 관여했는지 나누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야기의 순서는 팀 선교사님이 먼저하고, 경중 형제님이 이어서 진행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두 분의 이야기가 끝나면 그다음에 복기 형제님과 현 총무인 선주 자매님이 이어가 주시면 총무 라인으로 연결되어 이야기 진행이 쉬워질 것 같습니다. 총무 라인의 이야기에 이어 18년동안 이사장을 맡은 저와 두번째 이사장으로 수고하신 남상욱 형제님이 이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제 마이크를 팀에게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팀 프로즈 (Tim Forese): (한국 이름은 표대문이다, 편집자 주): KAC가 생겨나게 된 배경을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르는 것도 알게 되어 감사한 마음입니다. 한국에 오기 전엔 우리 가족은 남미에서 브라질에서 그리고 파나마에서 선교 활동을 오래 했습니다. 도전도 많이 받았고 특히 선교에 대해서 그리고 아나뱁티스트에 대해서 생각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96년부터 우리 가족은 다시 한번 선교사로서 파송받기를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때는 남미 언어를 배웠기 때문에 아마 하나님께서 당연히 우리를 남미로 파송하시겠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에 대한 생각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선교부와 얘기를 하면서 아나뱁티스트 운동(Anabaptism)과 선교라는 두 가지 활동을 모두 원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야기를 하면서 한국 얘기가 나왔고 드디어 98년에 8월 8일, 김포공항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대한민국에 도착하는 공항에서부터 일을 마치고 다시 공항에서 캐나다로 돌아가는 순간, 그러니까 공항에서 공항까지 우리 김경중 형제님이 함께 해주었습니다. 지금도 참, 감사합니다. 우리가 처음 메노나이트 선교에 대해 이야기했을 처음에는 아나뱁티스트센터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습니다. 주로 아나뱁티스트 연구소 ARI (Anabaptist Research Institute)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Anabaptist Research Institute를 생각해본 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아나뱁티스트 연구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몰랐고, 한국에 도착한 1998년부터 2000년까지 한국말을 배우면서 처음에는 경중 형제님과 그리고 얼마 뒤 캐나다에서 공부를 마치고 온 재영 형제님 하고 ARI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자료센터로서 KAC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지요. 아나뱁티스트 센터의 목표는 무엇이며 어떤 일을 해야하는 지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렇게 한국말을 배우는 동안 많은 손님들이 찾아 왔습니다. 예를 들어서 MVS (메노나이트직업중고등학교) 졸업생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메노나이트 사람이 한국에 왔다고 하니 궁금증과 호기심이 있는 그런 손님들이 우리가 와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대화와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KAC라는 이름을 정하게 되었고, KAC 목적, 구조를 조금씩 조금씩 만들어 나갔습니다. 초창기에는 재정, 스탭, 장소, 활동 등이 별로 없었지요. 그리고 2001년에 “죄송합니다. (웃음) 경중 형제님, 그 양치기였던 분 이름, 그 분 원래 이름은 뭐지요?” 이근호 씨가 자원봉사자로써 같이 일하셨고, 황성주 박사님이 빌려주신 사무실에서 처음 KAC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2001년 11월 2일 센터 시작예배 (Opening Service)를 서울 유니언교회에서 드렸습니다. 처음부터 안동규 형제님과 제가 둘이 공동대표로 시작했고, 2001년에서 2004년까지 대한민국에서 계속해서 일하였고, 2004년 2월부터 2005년 12월까지는 캐나다에서 계속해서 KAC 활동을 지원하였습니다. 그렇게 KAC에서 일하다가 2006년부터 캐나다 메노나이트 교회(Mennonite Church Canada)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 김경중: 옛날 이야기를 하니까 다시 기억이 조금씩 살아나는 것 같아요. 너무 감사합니다. 저는 1997년도에 CMBC를 마치고 8월 말에 귀국을 했는데 화천으로 바로 들어갔습니다. 화천에 저희 부모님 계신 곳으로 들어갔는데 거기에 크리스하고 로라(Chris and Laura Mullet Koop)가 있더군요. 예수촌교회로 치면 초대 선교사님이신 거였죠. 크리스와 로라하고는 학교를 1년을 같이 다녔는데, 이 친구들이 2년을 약속하고 한국에 와서 살고 있을 때 만나게 된 셈입니다. 두 번째 해에 화천에서 저하고 다시 만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1998년에는 크리스, 로라와 교제를 많이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안동규 형제님 친구분이 사장님으로 계신 회사에서 일을 하였는데, 그게 제가 갈 길은 아니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회사를 나올 즈음에 크리스, 로라가 제게 이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우리가 다시 캐나다로 돌아가게 되면 후임자가 필요한데 지금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마침 그 때, 대만에 쉘던 스와스키(Sheldon Swasky)라는 분이 방문 중이셨는데 조금 전 안동규 형제님 말씀해 주신 아나뱁티스트 자료센터의 필요성에 대해 얘기해 주셨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일꾼이 필요한데 “다음 오실 분은 이것을 위해서 준비된 사람이 와서 일을 하면 좋겠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크리스와 로라가 자기 같은 선교사들이 한국으로 오면 한국에서도 누군가가 같이 참여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의견을 주었습니다. 사실 처음으로 크리스, 로라가 아바샬롬공동체에서 그런 제안을 했는데, 사실 그 땐 아무 것도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 없는 상황에서 그냥 비전만 공유한 상태였습니다. 그렇게 선교사가 오면 그분을 돕는 일에 개인적으로 초대를 받았는데, 그 후 대략 1년이 지났던 것 같습니다. 팀이 한국에 98년도에 오셨으니까, 아마도 97년도에 제가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와서 아바에서 그런 비전을 보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당시 직업이 없는 상태에서 처음에 “한국에서 뭘 해야 되나?” 고민하고 있을 때, 『Confession of Faith in Mennonite Perspective』 라는 메노나이트 신앙 고백 책을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안동규 형제님도 우리가 그 책 번역하면 좋겠다고 제안을 해주셨습니다. 산 속에 있으니까 시간도 있고 해서 번역을 해야겠다 생각하면서 책에 기록되어 있는 주석들을 촘촘히 살펴보았는데, ‘아, 이 책을 번역하는 일은 정말 의미 있는 일이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거기서 소명을 좀 얻었던 것 같아요. 내가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되나 앞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할까 고민하던 중에 이런 일이라면 가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이러한 일과 KAC 비전이 중첩이 되면서 개인적인 소명으로 다가와 이 일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크리스, 로라가 캐나다로 돌아가고 팀과 캐런 가족들이 들어오면서 한 번의 변화가 있었지만, 저는 여전히 회사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편으로 회사생활 하지만 동시에 교회를 잘 섬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학교에서 공부하였을 때도 그랬지만 졸업하고 나서도 배움이 이어지면서 메노나이트가 굉장히 신선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개인적인 배움과 경험이 계속해서 이어지기를 바랬고, 실제로 팀과 여러 사람과 교제를 하면서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1,2년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KAC 비전은 논의되었지만 구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습니다. 대략 2001년도에 들어서면서부터 구체적인 논의로 연결되었던 것 같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그 무렵 안동규 형제님하고 광나루에서도 회의를 한 번 한 게 기억납니다. 가평에서도 회의를 하고 가나안 농군학교에서도 회의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준비모임이 한 대여섯 번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중 2001년도에 911테러가 발생했죠. 그러면서 이제 그때는 우리가 언제 시작할 것 인가하는 계획이 다 섰었던 상태인데, 타이밍이 굉장히 적절한 시기라고 판단되어 2001년 11월 2일에 창립 예배 드렸습니다. 창립예배에서 “911테러가 일어난 이 시점에 있어서 한국교회는 어떻게 반응을 해야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었습니다. 그래서 KAC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얘기를 하던 기억이 납니다. 앞서 팀 형제님이 말씀을 해주셨지만 사전 작업을 꽤 오랫동안 깊이 한 것이 KAC 시작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MVS 졸업생들하고 네트워킹하는 게 사전작업으로써 굉장히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촌교회에서도 도움이 있었지만 MVS 졸업생들과 관련된 분들, 최형제 아버님, (소천하신) 이형곤 장로님 등 여러분께서 저희가 KAC 시작한다는 얘기를 들으시고, 적극적인 후원자로 참여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윤식 목사님, 차성도 형제님 등 여러분이 초대 이사로 참여해 주셨습니다.

⏺ 안동규: 말씀을 들으면서 기억나는 것은, 제가 쉘던 스와츠키를 많이 의존을 했더랬습니다. 쉘던이 대만에 있었고, 자주 한국에 오셨는데, 굉장히 인품이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지금 생각하기에도, 제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고 나서 나의 말을 깊이 경청한 다음에 한참을 웃곤 했습니다. 사실 저는 Dreamer 성향이 강하잖아요. 비전을 따라 일을 벌이고 때로는 나 몰라라 하는 스타일인데, 비전에 대해 이야기 하니까 맞다고 하면서 구체적으로 런던 아나뱁티스트 센터 얘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시작은 할 수 있지만 끝까지 감당을 못하니 누군가가 필요하다 싶어서 경중 형제와 팀과 함께 일을 시작하게 된 셈이지요. 그런 면에서 쉘던의 영향력도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이 도와줬고 이제 KAC를 시작하면서 한국 사람과 외국 사람이 함께 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경중 형제님과 팀 선교사님이 실제 파트너가 되어 일을 시작하게 된 것 같습니다. 여하튼 경중 형제님께서 계속 이야기를 이어주시면 좋겠습니다.

⏺ 김경중: 그렇게 준비하던 중, 이재영 형제가 저보다 2년 늦게 CMBC를 졸업하고 귀국 했습니다. 재영 형제와는 CMBC에서 함께 공부한 사이로 관계가 참 좋았습니다. 학교에서 있을 때부터 맺어진 관계가 한국으로 이어져, KAC를 시작한다니까 바로 동참하였습니다. 그래서 재영 형제하고도 논의를 많이 했는데 특히 기억나는 것은 KAC 사역의 핵심가치와 주된 사역의 주제가 무엇이며, 사명 선언 (Mission Statement)를 위해 함께 고민할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비전성명서를 만드는데 팀이 그 전체적인 틀 작업을 해주셨고 함께 의사소통을 하면서 제자도, 평화, 공동체를 핵심가치로 잡게 되었습니다. 제자도, 평화, 공동체라는 순서는 참 중요한데 우리가 평화를 일부러 가운데에 넣었지요. 이 평화를 중심에 놓아햐 하는 이유는 우리 상황, 한국교회, 정치적 맥락에서 굉장히 큰 이슈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도, 평화, 공동체라는 그 일련의 주제를 우리가 약간 끌어서 평화를 센터에 놓고 시작하자라고 가나안농군학교 마당에서 팀하고 저하고 재영 형제하고 이야기했던 게 기억납니다. 그리고 재영 형제는 EMU (Eastern Mennonite University)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한국에서 온라인으로도 수업을 들으면서 평화 석사학을 마쳤습니다. 특별히 재영 형제는 실천적 평화운동에 굉장한 관심을 보였고 초반부터 평화교육(peace education)에 대해서 큰 역할을 감당해주었습니다. 저는 초반에는 제 소명에 대해 잘 몰랐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소명이 무엇인지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는데, 아마 저의 인격과 그런 신앙 성장을 위해서 KAC에 보내주시지 않았나하는 생각을 합니다.

평화와 더불어 제자도에 대해 말하고 싶은데요, 솔직히 저는 제자도와 하나님 나라에 꽂혔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전에는 몰랐었는데 제자도라는 주제가 저한테 굉장히 크게 와 닿았고 제자도가 결국 공동체로 연결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도, 평화, 공동체 이 세 개의 핵심가치를 어떻게 이루어 낼 것인가 질문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물론 그 바탕은 하나님 나라이지만, 그 기초 작업을 할 때는 팀이 틀 작업을 하도록 알려주었습니다. 사실 팀의 기여가 크고 저와 재영 형제는 주로 번역을 하면서 도왔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팀의 기여가 없었다면 초창기 KAC의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봅니다. 팀의 그 헌신과 사람들과 관계하는 방식, 사랑이 가득한 마음 그런 것들은 정말 아직까지도 감사하고 존경스럽습니다. 그래서 KAC는 일단은 사람이 주축이 되어서 그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움직였던 그런 기관이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이 일을 시작할 수 있던 것이기도 하고요. 당시 집에서 데스크탑 컴퓨터를 하나씩 가져오고, CRT 모니터를 놓고 보니 사무실이 꽉 차더라고요. (웃음) 자리가 없어 고민할 때, 황성주 박사님의 이롬생식 건물 뒤에 ‘탈북시민연대’와 사무실을 함께 쓰기도 했습니다. 처음에 탈북시민연대가 쓰고 있는 공간 건너편, 소파 옆에 좁은 구석공간이 있었어요. 그 때 책상 두 개를 마주 보고서, 데스크탑하고 스캐너 넣고 작업을 했더랬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가 제일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웃음) 공간적으로 서로 매우 가깝게 지내면서 돈으로부터 자유로웠고, 재정적으로 궁핍했지만 자유를 많이 누렸던 것 같습니다.

⏺ 안동규: 제가 질문을 짧게 드리고 대답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KAC초창기에 대해 말씀해 주셨는데, 이제 KAC가 확장되는 상황에 대해 설명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여러 형제도 들어오고 사람들이 막 늘어나는 그 과정을 경중 형제님이 소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 김경중: 창립 예배를 드리자마자 그 다음 주부터 자리잡고 일한 곳이 조금 전에 말씀드린 탈북시민연대 사무실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몇 개월 지나서 너무 좁으니까 안되겠다 싶었는지 탈북시민연대가 이사를 제안했습니다. 우리 때문에 좁아서 그랬는지 어쨌든 우리가 탈북시민연대를 따라 같이 이사를 갔습니다. 영창빌딩인가? 이름은 잘 생각이 안나지만, 탈북시민연대와 사무실을 같이 쓰다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가 나오게 됐습니다. 탈북시민연대가 저희한테 굉장히 호의를 베풀었는데 무슨 내부 사정이 있었는지 상황이 우리가 나올 수 밖에 없게 되어 호산나넷이라는 회사에 들어가서 또 셋방살이를 습니다. 그렇게 이사를 한번, 두 번, 세 번 하는 동안 2002년 아니타 스트라이커(Anita Stricher)라는 캐나다 자매가 MCC SALTer 프로그램으로 들어왔습니다. 본격적으로 IVEPer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물론 IVEPer는 팀이 KAC 시작전부터 보냈지만 SALTer 를 받게 된 것은 아니타부터였습니다. 그 다음에 세릴이 왔습니다. 2002년도에 세릴은 캐나다 학생 프로그램으로 왔다가, 이어 캐나다 선교부 소속으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 팀: 세릴 자매님은 처음에 CMU 실습 학생(practicum student)로서 왔고 그 나중에는 캐나다에서 선교사로서 오게 됐습니다.

⏺ 김경중: 호산나네트하고 방을 같이 쓰다가 얼마 되지 않아 안동민 형제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안동민 형님 소개로 이제 KAC에 세릴, 아니타, 팀도 있고 그러니까 우리의 강점으로 영어로 뭔가를 해보자는 생각에 영어학원에 대한 비전을 키우게 되었습니다. 특히 지영 형제가 영어학원에 대한 비전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럼 우리가 영어 학원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고 우리만의 독자적인 사무실에 대한 논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안동민 형제님께서 인터그램 회사 1층하고 지하 공간을 임대해주셨는데 아주 큰 은혜로 다가왔습니다. 거기서 얼마기간 머물렀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거기서부터 커넥서스 (Connexus) 학원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커넥서스란 말은 영어권에서 많이 보는 말인데 커넥션이라는 좋은 말과 연관이 있습니다. 셰릴 어머니께서 제안해주셨던 거 같습니다. 그 때 창의적인 프로그램들을 만들었고 특히 엄마와 아이가 같이 와서 배우는 영어 프로그램도 했었던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세릴하고 재영 형제가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KAC 관계의 끈이 점점 폭이 넓어졌고 교회 분들을 중심으로 해서 MVS 졸업하신 분들과도 관계의 폭이 넓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공간도 더 여유가 있어지고 살림규모도 조금씩 커졌는데 그림입니다. 여전히 재정은 큰 문제로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안동민 형제님 회사 공간에서 일을 하다가 강남역 근처로 이사를 가게 됐어요. 커넥서스 학원을 경영하고자 대대적인 투자가 있었고, 투자자로서의 안동민 형제님, 임미성 자매님, 그리고 이재영 형제의 부모님이 공동투자자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KAC 사무실이 생겨났고 그제서야 사무실 같은 사무실을 꾸려나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다가 한 번 더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커넥서스 투자자간에 갈등이 발생했고 결국 한 번 이사를 하고나서 1년 있다가 춘천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2004년에 커넥서스를 시작했고 그렇게 강남역과 역삼역 시대를 거쳤는데 대략 6년의 세월을 그렇게 보냈던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두 번째 장소에서 지출이 너무 많아서 감당할 수가 없게 되어 여러 장소를 알아보다가 갈 수 있는 공간이 없자 KAC는 자료와 교육, 아나뱁티스트 관점에서의 교육과 모임을 담당하고, 재영 형제가 담당하던 평화교육은 기독교인을 넘어서 대상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범주를 넘어 활동할 수 있도록 KAC로부터 분리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는 오히려 그게 더 큰 효과를 본 거 같습니다. 그래서 KAC는 춘천으로 나머지는 커넥서스와 KOPI (Korea Peacebuilding Institute, 한국평화교육훈련원)가 덕소 시대를 맞게 되었습니다. 이제 커넥서스와 KOPI 얘기는 재형 형제가 이어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 안동규: 다음 이재영 형제님 차례입니다. 마이크 넘기겠습니다. (이재영 형제는 2차 대담때 20주년을 되돌아 보는 시간을 따로 가졌는데 전체적인 흐름을 고려하여 1차 대담 때로 옮겨와 편집하였다, 편집자 주)

⏺ 이재영: 저는 사실 전혀 제가 이런 쪽에 참여하게 될지는 생각을 못 했습니다. 제가 KAC에 같이 참여하게 됐던 계기는 군대 제대 후 메노나이트 학교가 있는데 한번 가보면 어떠겠냐 하시는 아버님의 권유로 화천의 이윤식 목사님 그리고 예수촌교회를 만나게 되면서 부터였습니다. 사실 저는 제가 어디로 가는지 잘 몰랐어요. 그냥 한국을 벗어나 새로운 나라, 새로운 세상을 좀 봐야 될 때가 아닌가? 이런 생각이 더 컸습니다. 그렇게 캐나다 CMBC에 가게 되는데 그 당시 김복기 형제님이 공항에서 픽업하는 것부터 해서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 다음에 김경중 전 총무님 이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그 때는 학교에 적응하는 것 부터 큰 문제였는데, 참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그때 공부하면서 메노나이트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신앙이나 철학, 활동을 많이 봤는데 MCC (Mennonite Central Committee) [메노나이트 중앙위원회, 세계적인 평화운동 및 구호 단제, 편집자 주]가 되게 매력적으로 느껴졌어요. 신학 이런 거 보다는 뭔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교회가 이렇게 구체적 활동을 할 수 있구나 그리고 아버님이 하셨던 가나안농군학교하고도 많은 공통점도 느껴졌고 그래서 관심이 많아졌던 거 같고요. 학교를 졸업 후 되게 많은 생각을 하고 한국에 왔는데 막상 와보니 할 게 없더라고요. 그냥 다른 세상에 있었구나하고 있었는데, 그때 김 총무님 그리고 팀 선교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분들 만날 때 제가 관심 있는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비전에 대한 나눔을 할 때 기뻤던 것 같아요. 아! 이런 거 하면 좋겠다 이런 생각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공부를 계속 하고 싶었는데 비자발급이 안 되면서 유학 길이 막혀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KAC가 생긴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리고 활동할 수 있는 그런 단체가 우리나라도 있으면 좋겠다 이런 입장이였기 때문에 KAC에 쉽게 참여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하나 기억나는 에피소드는 그때 여러 곳을 다니면서 회의를 많이 했는데 특히 테크노마트 지하 식당에서 많이 만났던 기억이 있어요. 그때 팀 선교사님 항상 밥을 사 주시고 그랬는데, 굉장히 맛있게 먹었던 기억, 그러다가 열띤 논의도 하고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KAC가 생기면서 어떤 영역을 서로 맡으면 좋겠느냐 이런 논의를 했는데, 아무튼 두 분이 크게 뭐랄까 그림을 어떻게 딱 그리자 이런 건 없었어요. 근데 저보고 뭐 할 거냐 물어보셔서 저는 뭐 평화 그쪽을 하고 싶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이거 되게 막연하더라고요. 그리고 뭐라고 직함을 불러야 될까? 평화 사역자? 평화교육 코디네이터? 아무튼 이렇게 이름을 붙여 가지고 제자도 평화, 공동체 라고 하는 KAC 주제에 대해서 영역을 나누게 되었죠.

그런데 제가 KAC 초반에 EMU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생겨서 학업과 일을 병행하는 상황이 됐고요. 그 상황에서 유은하 자매님이 저희를 찾아 왔었습니다. 제가 같이 공부했던 친구들 중에 걸프전 때 크리스찬 피스메이커 팀으로 갔던 친구들이 있는데, 이 친구들의 이야기를 계속 메일로 받아 그걸 번역해서 KAC 홈페이지에 올리고 있었습니다. 이걸 보고 유은하 자매가 찾아와서 이런 사역에 자기가 참여하고 싶다, KAC가 자신의 파송단체로 역할을 해 달라, 맡아달라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이게 저희들 내부적으로는 되게 큰 도전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 기억이 나는데 저는 아무래도 한국 사람이다 보니까 이렇게 의지가 있으면 가야 되지 않겠나 이런 입장이었고, 김경중 전 총무님은 약간 조심스러우면서도 그래도 참 자매가 그게 참 대단하다 우리가 어떻게 도울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팀 선교사님은 제 기억에 끝까지 찬성하지는 않으셨던 것 같아요. 팀 선교사님이 우려했던 것은 이 현장에 뛰어나가는 사람은 빙산의 일각처럼 돕는 공동체가 있어야 되는데 지금 이 자매 같은 경우 우리가 잘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이런 공동체가 없는데 혼자 이렇게 평화 활동가로 뛰어나가는 것은 어렵다, 지금은 할 수 있으나 이 형태의 시스템은 사실 건강한 것이 아니다는 것 이었요. 교회가 파송을 하는 그런 평화운동이 돼야 이게 지속 가능 할 수 있다 그런 얘기를 계속하셨었어요. 그래도 결국 저희는 본인이 원하니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건 별로 없지만 우리가 그럼 파송 단체가 되겠다 결정하게 됩니다. 저희가 재정을 지원해 줄 수 없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책 몇 권 다시 보내면서 같이 기도하고 사역을 위해서 우리가 애써보겠다 이렇게 했지요. 그림입니다. 그런데 유 자매님이 거기 현장에 혼자 남게 되었고 전쟁은 터졌고 이러면서 정말 그 긴박한 상황이 있었어요. 그때 위성 전화로 저희 사무실로 전화를 계속 보내 왔는데 어찌 보면 한국 사람으로서는 전쟁 당시 바그다드에 있는 유일한 사람 되다 보니까 저희가 그 올린 기도 제목이나 자매님 소식 같은 걸 올리면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언론사에서도 KAC 를 많이 궁금해하고 여러 가지로 KAC가 평화사역 쪽에서 알려지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그 이후로 은하 자매 개인의 삶은 상당히 쉽지 않았고 그리고 최근까지 트라우마로 힘들어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팀 선교사님 말씀하셨던 그게 다시 많이 생각이 났어요. 우리가 어떤 활동가를 만들 수는 있지만 그걸 지속하게 하는 시스템은 못 만들어 놓은 상태에서 개인이 감당해야 될 일이 되게 큰 거구나. 같이 하는 구조를 만들지 않고는 뛰어난 활동가들 몇 명이 하는 활동은 지속 가능할 수 없겠다. 이런 것을 배웠던 거 같아요.

평화 교육을 쭉 하다가 앞서 이야기한 커넥서스를 시작했습니다. 커넥서스를 통해서 재정자립이나 지속 가능성을 가지면 좋겠다는 얘기를 많이 했었습니다. 저희가 시작을 강남에서 하려고 한 건 아니지만 어떻게 강남에 자리를 잡게 됐는데, 그 당시 안동규 이사장님의 역할이 컸죠. 뒤에서 네트워크을 통해 없는 장소도 만들어 주고 하셨지요. 하지만 저희가 유지하기 위한 비용이 컸습니다. 그래 가지고 학원을 운영하면서 저도 그때는 밤에 거의 뭐 12시 돼서 가고 맨날 그랬는데도 사업과 사역 두 가지를 병행하는 게 쉬운 게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나중에 결혼도 하게 되면 저는 어디로 옮겨야 될까 한 2년 가까이 고민을 했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아이러니하게 다시 처음 근처로 옮기게 되었는데 옮기자마자 또 1년 만에 재정적으로 어려워지게 되었지요. 저희는 춘천으로 이사가자는 얘기가 나왔을때 춘천을 가려고 하니까 이건 정말 어려운 결정이더라구요. 그래서 두 개로 나눠지게 됐고 저희는 덕소로 가게 되는데, 그 때 가 2011년이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2011년이 되게 뭐가 많았던 해예요. 제가 NALPI (Northeast Asia Regional Peacebuilding Institute)를 시작한 것도 그 해 여름이었고 동북아 평화 훈련원이 만들어져서 국제 프로그램이 시작된 것도 그 해 여름 이였고, 회복적 생활교육이라고 하는 책을 번역출판 한 것도 2011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 말에 덕소로 옮기면서 저희 큰 애 롬이 태어났으니, 그 2011년에 굉장히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 많은 일을 어떻게 그 한 해에 다 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희는 그렇게 옮겨왔지만 사실 부담도 많았어요. 저희가 아무리 생각해도 춘천 가서는 평화 사역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 같아 덕소로 왔는데, 오다 보니까 저희 부모님한테도 많은 재정 부담을 주게 되었지요. 또 같이 온 형제자매들이 있다 보니 어떻게든 집을 마련해야돼서 같이 지내야 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저희가 혼자일 때는 이동이 쉬웠는데 가족이 생기고 나니 쉽진 않았어요. 그리고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뭔가 단체를 만들어 놓고 활동을 해야 되는구나 그냥 혼자 뛰어다니는 것은 안 되겠다는 생각이 있었기에 어찌 됐든 같이 먹고 자면서 해보자 이래서 결과적으로 덕소에 이제 공동체 아니 공동 숙소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아이러니 한 점은 저는 김경중 형제님 공동체 얘기할 때 저는 사실 공동체는 굉장히 싫었거든요. 저렇게까지 같이 살면서 저렇게 귀찮게 하나? 이렇게 사역을 잘 하면 좋지 않나? 이런 생각이 있었는데… 제가 셋 중에서 제일 공동체를 하기 싫었던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어떻게 하다 같이 모여 살게 되는 일이 됐구나 해서 그것도 많이 배웠던 것 같아요. 지금도 여전히 몇 형제자매들하고 같이 살고 있지만 저는 사실 비전 자체가 공동체는 아니었고 지금 마음도 그래요. 하지만 평화 사역을 하기 위해서는 탄탄한 공동체를 만들어야 된다, 어떤 소속되어 있는 무엇이 필요하다라고 하는 게 늘 강해서 지금까지 같이 사는 피스빌딩을 해왔던 거 같아요.

아시다시피 회복적 정의가 2011년 이후부터, 학교 쪽의 그 변화의 필요와 맞물려가지고 많은 요구를 받게 되었어요. 그래서 많은 곳을 다니면서 강의도 했고, 자료도 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도 많이 함께 활동을 하고 싶어 해서 저희가 2014년 10일에 한국평화교육훈련원 (Korea Peacebuilding Institute, KOPI)란 이름으로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2014년에 회복적정의협회를 만들었는데, 회복적정의 교육 받는 분들이 회원으로 가입하면서 지금은 500명이 넘는 분들이 협회 회원으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 분들이 모여서 학교나 사법이나 마을 이런 곳에서 회복적 정의를 어떻게 잘 펼쳐낼까? 하는 고민들을 같이 하는 그룹이 서서히 생겨났어요. 저는 제 책에도 쓸 때 도 그랬지만 한국의 회복적 정의 운동의 뿌리는 KAC와 같은 이런 기독교단체에 있다고 계속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목소리는 점점 줄어드는 거 같긴 해요, 저는 모 기관 (mother organization)이라고 계속 얘기는 하지만, 그런 부분에 대해서 건너 뛰고 있는 자료들이 많이 나오더라고요. 회복적 정의 운동 자체도 초기에 캐나다의 소수 메노나이트 분들의 헌신과 지원이 없었으면 있을 수 없는 운동이었던 것처럼, 한국에서도 그런 흐름에서 KAC가 기여하는 바가 굉장히 크다고 생각 합니다. 그러면서 제가 회복적정의운동이나 이런 갈등전환운동으로 먼저 뛰어든 게 아니고 KAC라고 하는 단체 안에서 제 역할을 했던 게 그래도 많이 성장하는데 밑거름이 많이 됐던 것 같고요. 지금은 많이 바빠졌지만 그 때는 부르는 데도 없어서 맨날 모여가지고 이런 저런 여러 구상을 했던 시기 그리고 비전을 많이 나눴던 시기. 그 시기가 어찌보면 씨를 뿌리고 깊이 고민할 수 있었던 그런 귀한 시간이었던 거 같아요. 그 때는 가진 것도 되게 없어서 고민도 있었지만 가장 순수한 고민이 깊었던, 성장했던 시기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마지막으로 아버님이 작년에 소천하셨는데 아버님한테 참 고마움을 많이 느꼈습니다. 아버님이 메노나이트를 연결해주지 않았다면 제 인생이 지금 이렇게 와있지는 않을 것 같거든요. 모두가 다 어떤 우연과 필연의 역사였지만 아버님에게로 부터 그냥 떠도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구현해내는 것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 제안을 받은 것 그리고 좋은 분들을 만났던 것, 이런 것이 참 큰 은혜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여기까지 말씀 드리겠습니다.

⏺ 안동규: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를 살펴보자면, 2011년부터 덕소와 춘천으로 서로 분립하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된 셈이로군요. 굳이 요즈음 시대를 구분하는 방식으로 나눠보자면 춘천-덕소의 분립은 버전3 정도 되는 거 같네요. KAC 창립을 버전 1이라고 하면, 해매고 커지는 커넥서스 이후부터 버전2라 할 수 있고. 버전3에서 분리된 시대를 맞게 되었다고 봐도 괜찮겠습니다 굳이 초기 교회의 운동에 비유하자면, KAC는 원류로서 정통 예루살렘교회처럼 축소 지향적으로 진행되고 있고, KOPI는 새로이 둥지를 튼 안디옥에서 복음이 막 번져나가듯이 진행되는 것 같습니다. 여하튼 많은 사람이 KAC를 방문하였고,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 같습니다. 이렇게 진행되는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분립 후 재영 형제님은 또 다시 외롭게 뛰었지만 덕소에서 회복적 정의의 꽃을 피우게 되어 서로에게 축복이 된 것 같습니다. 몇 년 전, 초대 총무를 맡았던 경중 형제님이 캐나다로 떠나게 되면서 4.0 시대를 맞은 것 같은데, 4.0으로 넘어가기 전까지 경중 형제님께서 춘천 시대를 좀 압축적으,로 설명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런 다음 캐나다 메노나이트 교회에서 보냄을 받은 김복기 박숙경 부부가 선교사로 오고 김복기 형제님이 총무를 맡다가 현 문선주 자매로 이어지는 과정을 두 분이 설명해주시면 좋겠습니다.

⏺ 김경중: KAC가 춘천으로 이사한 것은 2011년 말로 기억합니다. 이사를 하게 된 이유는 KAC 비전이 춘천 예수촌 교회에서부터 시작됐기 때문인 것과 KAC가 협력 교회와 가까이 있는 것이 맞겠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실제로 다른 곳은 갈 데가 없었습니다. 사무실 공간을 놓고서 전국을 다 물색해 봤는데 결론은 춘천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기대한 것처럼 춘천에 오면서 교인들의 굉장한 지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KAC 총무로서 개인적으로 많이 외로웠었거든요? 왜냐하면 KAC가 덕소와 춘천으로 분리되면서 스탭들로부터 분리되어 있었고, 사실 형제,자매들과 헤어지는 것이 제게는 제일 힘들게 다가왔기 때문이었습니다. 혼자서 이사하고 다시 리모델링하고…… 굉장히 외로운 싸움을 했던 것 같습니다. 춘천에서 정착하던 초반 1~2년에 예수촌 교회 지체들이 참 많이 도와줬습니다. 큰 힘이 됐고. 그냥 이제 물리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으니까 교회 사역 중심으로 자리를 마련하며 제가 주역을 담당하면서 2015년까지 활동하였거든요. 제가 2015년 여름까지 있었는데, 생각보다 과도기가 길어졌던 것 같습니다. 지금 돌아보니, 덕소와 춘천으로 헤어진 뒤에 뭔가를 다시 시작을 해야한다는 압박감을 많이 받았던 반면, 덕소와의 관계는 지속되었으니, 에너지가 분산되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덕소에서 뭐가 필요하면 우리가 돕기도 하고, 우리가 도움을 요청하면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KAC 사역을 이어서 받을 때, 마침 MCC 동북아 사무실이 춘천으로 옮겨오면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희가 MCC 얘기는 안 했는데 사실은 MCC가 동반자로서 옆에서 KAC를 많이 도왔습니다. 사실 MCC 동북아사무실이 춘천으로 이전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지요. 교회, 구호기관, 선교단체가 서로 협력하라고…….

⏺ 안동규: 예, 귀한 경험을 나누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KAC, 예수촌교회, 예수마음교회는 역사를 참 많이 공유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예수촌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하면서 2011년 대략 100명쯤 되었습니다. 교인 숫자가 100명이 넘어가니 서로를 잘 알기 쉽지 않았습니다. 한때 제가 우스갯소리로 예수촌 교회 출석 교인이 100명 넘으면 닭갈비집에서 한턱 내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정말 그렇게 되었습니다. 100명이 넘으면서 1년 동안 분립을 이야기하였고, 1년 후 자발적으로 5가정이 나왔습니다. 그때가 2013년 3월 17일인데, 김경중 형제 가족과 더불어 5가족이 저희 집에서 예배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마음교회로 분립하자마자 숫자가 늘어 저희 집에서 모이는 것이 감당이 안돼서 KAC 사무실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MCC 동북아사무실 대표로 오게된 크리스 라이스와 가평의 동북아평화모임에서 만나 동북아 사무실 장소를 어디로 결정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당시 MCC 동북아 지부는 북경에 있었고 장소를 옮기기로 결정했던 때였습니다. 그때 크리스 라이스를 춘천 집으로 초청하여 하루를 보내면서 MCC 동북아 사무실이 춘천에 와야 할 이유를 설명하였습니다. 춘천에는 아나뱁티스트 센터가 있고, 예수촌교회와 예수마음교회가 있고, 함께 협력해야할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2014년부터 KAC, MCC, 예수마음교회가 현재 사무실 공간에서 함께 협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부터는 2013년에 한국으로 와서 KAC 사역을 도왔던 복기 형제님이 조금 자세하게 KAC의 일을 설명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김복기: 먼저 KAC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왔는지 한 분 한 분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어찌하다 보니까 캐나다에서 메노나이트 목회를 하게 되었는데, 어려움도 있고 프로그램도 쉽지 않고 해서 교회 개척도 했다가 정리하기도 하고 하는 그런 와중에 있었습니다. KAC는 처음부터 그 멀리서 소통하면서 믿음의 형제들인 재영, 경중, 팀 형제님들과 교류해 왔더랬습니다. 직접 만나기보다는 이메일을 주고받으면서 협력했고, 이따금씩 만나면서 KAC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계속 소식을 들어왔던 것 같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캐나다에서 목회하면서 사람들이 메노나이트가 뭐냐 아나뱁티스트가 뭐냐 반복적인 질문을 했을 때, 브로셔를 만들어서 메노나이트-아나뱁티스트를 소개했던 기억이 납니다. 대략 2002년이었는데 브로셔를 만들어서 KAC에 보냈던 그런 기억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런 일들로 인해서 멀리서 일은 했지만, 한번도 만나지 못한 몇몇 사람들에게 저는 사이버 복기로 알려지기도 했더랬습니다. KAC와 사이버 공간에서 자주 연락하여 얻게 된 별명이었습니다. 2006년에 제가 KAC를 처음 방문을 했을 때에 셰릴 자매님을 처음 만남으로써 사이버 복기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게 강남에 있었던 그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저런 추억들마다 굉장히 좋은 인상으로 기억되어 있고 아! 하나님께서 이렇게 사람들을 모아서 일을 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경중 형제님은 메노나이트 신앙고백서를 번역을 해주셨는데, 그 전에 저는 [From the Anabaptist Seed 재세례신앙의 씨앗으로부터]라라는 책을 저자인 아놀드 슈나이더 교수님으로부터 받아들고 책을 번역하였습니다. 당시는 출판사도 없어서 그냥 프린트해서 공부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세릴 자매님이 디자인도 하고 해서 KAC에서 출판한 기억이 납니다. 어쨌든 저는 런던에서 목회하고 있다가 조금 쉬면서 작은 그룹(house church)으로 모이고 있었는데, 그때 팀 형제님이 MC 캐나다 witness director로서 저에게 전화를 하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데, 아마도 제가 [Introduction to the Mennonite History 아나뱁티스트 역사] 책을 번역하고 있었을 때였던 거 같아요. 팀 형제님께서 전화를 하셔서 한국에 어윈 목사님 부부가 캐나다로 돌아오시면서 그 다음 사역자들이 가야되는데 아직 지원자가 없다 하면서 저에게 한국에서의 사역을 제안하셨습니다. 그 때, 둘째인 다니엘이 11학년이었고 그래서 다니엘에게 물어보았더니 자기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가라고 하여 한 해 동안 인터뷰를 하고, 한국 입국 서류 작업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와 아내가 2013년 7월부터 MC Canada Witness international worker로 수락이 돼서 일을 하고 캐나다에서 이렇게 여기저기 방문을 하면서 훈련도 받고 그러고 난 다음에 2013년 9월 12일에 한국에 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KAC는 춘천 시대를 이미 시작했고 예수마음교회가 6개월 정도 됐을 때 저희가 춘천에 도착했습니다. 사실 저희는 의심의 여지 없이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교회로 가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마음교회 일원이 되어 한 3-4년 정도 예수마음교회 지체로 지냈습니다. 2013년부터 서울에 있는 은혜와 평화 교회에 한 달에 한 번씩 방문하였고, 덕소로 옮기고 난 다음에도 1-2년 교제를 이어갔습니다. 설교도 하고 교제도 하러 매 달 마지막 주에 이렇게 서울을 다녀왔습니다. 이 기간, 경중 형제님은 많은 손님을 호스트하기 위해 하우스 프로젝트를 진행하였습니다. 현재 KAC공간에 가벽 공사를 하기 위해 함께 줄자를 맞대면서 공간을 어떻게 나눌 건지 어디에 어떻게 사무실을 앉힐 것인지 계획하던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2014년에 아마 KAC와 예수마음교회와 MCC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런 후에 경중 형제님이 건강에 대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2015년 10월쯤에 캐나다로 떠나신 것 같습니다. 경중 형제님의 빈자리가 워낙 커서 그러면 누가 그 역할을 감당할 것인가 여러 차례 회의를 했던 거 같습니다. 저는 MC 캐나다에서 왔기 때문에 총무 자리는 맞지 않았음에도 인턴 개념으로 그러면 다음 총무님 오시기 전까지 총무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2015년 9월부터 2018년 2월까지 부족한대로 총무직을 맡았던 것 같습니다. 결국 2년 한 4~5개월 정도 총무직을 맡으면서 다음 리더십으로서 우먼 리더십이 좀 필요하다 라고해서 그 문선주 자매님을 초빙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문선주 자매님은 원주의 영강쉐마학교에서 채플린으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메노나이트 목사로 안수를 받고 얼마 되지 않아 KAC 총무님으로 오시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해서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2018년 3월부터 일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저는 경중 형제님 떠나시고 난 다음에 총무로서 무엇을 해야 될 건가 깊이 고민하였습니다. 저의 MC 캐나다 선교부에 속해 있기 때문에 애초에 받은 자료개발, 교회개척(church planting), 네트워킹에 관심이 많습니다. 사실 2017년부터 서울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이유는 은혜와 평화 교회가 덕소로 가게 되면서 서울에 메노나이트 교회가 없어서 교회를 개척할 목적으로 메노나이트 서울모임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서울에 메노나이트 교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더불어 북스터디 그룹에도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마음교회에 인사를 드리고 서울에 있는 교회를 개척하면서 지금까지 왔습니다.

어쨌든 저의 역할은 중간자 역할인데 그 중요한 것 중에 한 가지가 그 경중 형제님 떠나시고 난 다음에 KAP를 통해 책 출간하는 일이 었습니다. 2014년부터 경중 형제님이 KAP 책 밀린 게 너무 많으니까 책 출판을 하는 걸 저한테 맡겼습니다. 그때부터 『갈등전환』을 필두로 정의와 평화 시리즈를 막 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대장간에서 대략 20권 정도 나왔는데, 제가 4권부터 출간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책 출판은 재정이 필요한 분야라서 출판 사역을 계속 해야 될 건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하였습니다. 2017년 즈음 당시 행정을 맡았던 황수진 자매님과 안동규 이사장님과 함께 출판 사역을 두고 분별의 시간을 가졌는데, 책 출판에 계속 투자할 수는 없을 것 같다고 하여 2017년 여름에 출판사를 접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KAP 한국 아나뱁티스트 출판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남은 책을 어떻게 해야 될 건가 고민하던 중 아나뱁티스트 책을, 교제하고 있었던 대장간으로 옮기는 게 낫겠다 해서 그런 역할을 제가 했던 거 같고요. 그 다음에 이제 저의 역할은 다음 총무님을 모시는 거에 대해서 이사님들 이사회에서 이야기하면서 문선주 자매님이 초청돼서 지금까지 일을 하시는데 그거는 이제 문선주 자매님이 받아주시면 되겠습니다.

⏺ 안동규: 예, 감사하고요. KAC가 parachurch로 있었지만 교회 역할도 컸던 것 같아요. 예수촌교회, 예수마음교회, 은혜와 평화 교회 등 교회는 결국 사람인데 KAC와 예수촌 교회를 도우셨던 어윈과 메리안 윈즈 목사님 부부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어윈과 메리안 부부의 역할은 공식적으로는 V-school의 교장 선생님이셨지만 그보다 교회의 멘토이자 어른으로서, 저를 포함하여 예수촌 공동체의 리더였던 차성도 형제나 남상욱 형제 등 예수촌교회의 리더들에게 롤 모델이 되어주셨다고 봅니다. 그래서 항상 믿음의 아버지, 어머니 같은 느낌을 갖게 하신 분이셨습니다. 여러 가지로 경중 형제에게도 멘토가 되셨기에 그 분들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KAP도 확 커지면서 복기 형제님이 책 출간을 잘 감당해주셔서 고마웠습니다. 자 이제 셰릴 자매님께 마이크를 넘기겠습니다. KAC를 통해 많은 외국 분이 오셨는데 독특한 모델이 되어 주셨습니다. 결국은 지금 한국에 살고 계신데, 그간 대단한 역할을 하셔서 우리의 열매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저는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어느 날 제게 안동규 형제님, 사자성어로 화불수냉이 뭔지 아시나요? 라는 문자가 왔습니다. 화불수냉. 처음 듣는 사자성어라 잘 모른다고 하니, 화요일은 불고기 먹고, 수요일은 냉면 먹는 거라고 답을 해주어서 깜짝 놀랐더랬습니다(웃음). 사자성어로 한국 사람에게 농담을 건넬 정도로 한국에 적응을 잘 한 자매님께서 이제부터 본인의 삶 가운데 KAC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본인의 역할은 무엇이었으며, 최근의 근황까지 소개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셰릴 (권세리라는 한국명을 가지고 있다, 편집자 주): 오랜만에 봬서 반갑습니다. 저는 지금 서울에서 살고 있고요. 요즘은 아이들이랑 시간을 보내고 있고 계속 영어 교육하면서 평화교육, 평화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팬데믹 때문에 새로운 일을 꾸미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 KAC에 오게 된 이유는 CMU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실습(Practicum)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해외 실습을 한번 해보고 싶어서였습니다. 2001년부터 학교와 이야기를 시작했고 적당한 곳을 못 찾아서 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는 대학 과정을 다 마무리 한 다음에 해보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때에 KAC에서 초청을 받았어요. 그때는 CMU하고 Mennonite Church Canada하고 같이 할 수 있는 그 프로그램 만들자고 했습니다. 그때 CMU practicum은 그냥 해외로 가는 건 아니고 캐나다 메노나이트 교회의 선교사가 있는 지역으로 가야 했습니다. 그렇게 캐나다 메노나이트 교회와 저의 학교인 CMU가 같이 협력해서 공동 파송하는 것인데 제가 알기로는 제가 이 제도로 처음 나왔던 국제 인턴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CMU practicum이면서 동시에 캐나다 메노나이트 교회의 인턴 역할로 처음 1년을 보낼 계획이었습니다. 첫 한 해는 권 장로님 댁에서 홈스테이를 하게 되었는데 그 분들이 저에게 아주 큰 역할을 했던 것 같습니다. KAC 일과 그 가족에서 머문 것 때문에 한국에서 아주 좋은 경험했던 것 같습니다. 1년 안에 언어를 많이 배우기 시작했고, 기간을 1년 더 연장해서 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MC캐나다에서 인턴이라고 생각했던 게 2년으로 늘어서 계속 할 수 있게 된 셈인데, 제가 처음에 왔을 2002년 9월 7일에 왔을 때는 SALTer 외에 다른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와 팀, 재영, 경중 형제님이 같이 일할 때였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어떤 일을 해야할지 몰라서 여러 가지 영어교육과 평화교육을 기획하였습니다. 그 때 Peace village라는 프로그램 통해서 영어 가르치는 것과 평화교육을 시작했고. 1년 정도 하다가 2003년부터 아니타가 왔을 때 프로그램을 확대하여 아니타와 함께 교육 커리큘럼을 짜서 영어와 평화교육 쪽으로 일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2년째 홈스테이는 부천의 어떤 장로님 가족과 함께 했는데 한우리교회랑 연결되어 있던 가족이었습니다. 다음 3년째부터는 홈스테이가 아닌 여러 형제 자매들이 같이 살 수 있는 상황이 좀 자주 있었습니다. 2004년 봄에 커넥서스를 시작하면서 저의 교육역할이 더 커졌습니다. 특히 영어교육이랑 커리큘럼 개발하는 일을 많이 하기 시작했습니다.

⏺ 안동규: 커넥서스 이름을 세릴 어머니께서 지었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 셰릴: 네, 맞아요. 그 때 부모님이 한국을 방문하셨는데 재영 형제님이 어학원 이름에 대해 물어보신 거 같은데 엄마가 갑자기 생각하여 제안하셨던 것 같아요. 그 때 커넥서스 설립하는 것부터 그 다음에 그 프로그램 개발하고 학생관리하는 등 많은 것에 관여하셨습니다. 평화교육이랑 영어교육을 어떻게 하면 같이 할 수 있을까 고민하였고 우리가 일반 영어를 배우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서 평화교육 입장이나 평화 교육 환경을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고민은 2008년까지 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2005년부터 저의 역할은 Mennonite Church Canada fulltime witness worker로 바뀌었습니다. 3년은 인턴십으로 보냈고 다음에 fulltime witness worker로 일한 셈이지요. 그러면서 어윈과 메리안 윈스가 오셨는데, 제가 2002년 여름에 MC캐나다 오리엔테이션에 참석 했었을 때 그분 들을 처음 만났어요. 그 분들이 저보다 먼저 한국에 오셨고 그 다음에 가을에 제가 왔습니다. 그 후 2008년에 저는 교육에 관심이 더 많아지면서 Eastern Mennonite 대학교에서 평화 및 교육관련 석사 프로그램을 이수하기로 했고, 석사과정 후에는 캐나다에서 살다가 2016년에 다시 한국에 왔습니다.

⏺ 안동규: 아주 사진 보듯 과거를 잘 설명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자, 모든 사람의 이야기를 드다보니 KAC 역사가 자연스럽게 다 연결이 되는 거 같아 아주 좋습니다. 제가 알고 있던 기억, 경중 형제님의 기억, 그리고 여러 형제님들의 기억을 묶으니까 전체 흐름이 잘 잡혀가는 것 같습니다. 팀, 경중, 복기 형제를 거쳐 최근 문선주 자매가 총무가 되어 활동 중에 있는데, 문선주 자매님께서는 어떻게 KAC와 연결되었고 어떻게 총무가 되었는지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 문선주: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옴니버스라고 하는 문학 장르가 생각이 났습니다. 짧은 단편 이야기마다 어떤 공통된 주제와 사람들이 연결되어 이야기가 흐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1993년도에 성경공부를 하셨다는 말씀을 들을 때 저는 IVF 간사로 있으면서 이사님들이 그런 모임을 하신다는 이야기와, 그후 예수촌교회를 시작하신다는 소식을 계속 들을 수 있었습니다. 1996년과 1997년도에 크리스와 로라가 한국에 왔을 때, 안동규 형제님이 IVF 간사로 있는 저에게 크리스와 로라가 교수님 댁에서 살 예정인데, 방을 하나 줄 테니까 거기서 이 친구들하고 같이 살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크리스와 로라가 메노나이트로서 온 선교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 설명을 들은 것처럼 메노나이트 안에서의 구체적인 위치는 잘 몰랐지만 일단 저와 룸메이트로 지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들이랑 아미쉬 카드 게임, 우노 등 카드게임을 하면서 메노나이트들은 참 재밌고, 사람들이 되게 착하구나하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당시 제가 20대 중반이었기에 제 머릿속에는 메노나이트가 그다지 깊게 각인 되어 있지는 않았습니다. 한참 잊어버리고 살다가 IVF 간사로 활동하는 동안 말씀을 전하는 게 재밌고 목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 신학교를 가려고 준비했는데 임신이 되어 꿈을 포기하고 아이를 키우는데 전념을 했습니다. 남편이 목회를 하고 저는 사모로 교회에서 보내면서 사모의 역할이 너무 제한돼 있어 답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도 은사를 주셨는데 너무 제한을 받는다는 억울한 마음이 들어서 선교사가 돼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적어도 선교사는 남편과 아내가 동등하게 일을 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거든요. 선교사가 돼야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어를 배워 유학을 가는 길이 열리겠지 하며 생각하고 있을 무렵 이윤식 목사님이 남귀식 간사님을 통해서 씨알의 집이라고 하는 유학생들 돌보는 프로그램에 초대를 해주셨습니다. 유학 준비를 하려는데 한 달 만에 갑자기 그 토플 시험이 ibt로 바뀌어 걱정이 꽤 많았어요. 하지만 토플 점수가 잘 나와 유학을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때 잘 모르지만 유학을 떠나게 되었고, 나름대로 꽤 어렵게 유학생활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이 배운 것은 메노나이트들에게는 뭔가 다른 것이 있고, 한국교회에는 평화와는 굉장히 거리가 먼 뭔가가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영어를 잘 하지 못해서 한국에 대한 글을 썼는데 교수님들께서 한국을 잘 모르시니까 저에게 좋은 점수를 주신 것 같습니다. 이런 계기로 공부에 대한 자신감도 가지고 졸업하고 나서는 제가 달라스 쪽에 있는 신학대학의 박사과정을 이수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비자 문제가 꼬여 한국에 돌아왔는데 굉장히 급하게 돌아오는 바람에 아무 것도 준비하지 못하고 다시 쉽지 않은 한국에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저희가 귀국한지 일주일 만에 취직이 되었는데 그곳이 영강쉐마기독학교였습니다. 영강쉐마기독학교에서 한 1년 정도 영어를 가르쳤는데 담임목사님께서 제가 교목을 하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어요. 아시다시피 저는 메노나이트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돌아왔기 때문에 한국에서 목사 안수를 받기 힘들었습니다. 메노나이트 교회가 별로 없는 한국에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를 때, 미국에 있는 컨퍼런스와 연결하여 한국에 있는 카프(KAF, korean anabpatist fellowship)와 상호책임 하에 목사 안수 과정을 밟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카프랑 연결이 됐고, 카프 리더들이 함께 안수과정을 도와주었고, 저는 2015년도에 메노나이트 여성목사로 안수를 받았습니다. 저의 사례가 한국에서 메노나이트 목사안수를 처음 시행하는 것이라 뉴스앤조이에서 취재하여 인터넷 신문에도 올라갔는데 저는 당시 그것이 얼마나 큰 역사적 의미가 있는지 잘 느끼진 못했던 거 같습니다. 어쨌든 저는 한국 최초 여성 메노나이트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목사 안수를 받고 교목으로 있은지 한 4년 정도 되었을 때, 김복기 형제님이 저한테 전화를 주셨어요. KAC에 총무로 초청하고자 한다는 전화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자격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메노나이트를 떠나 있던 시간이 5년이나 지났고 아나뱁티스트 센터의 총무는 신학적인 지식도 풍성하고 풍부해야 되고, 다양한 네트워크와 역량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들이 부담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총무 초청에 응할 수 있었던 것은 일반 교회에서 보냈던 5년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배웠던 것과는 계속 반대되는 교회의 운영방침,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 등이 기존 교회 속에서 견디기에는 한계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KAC에 대한 소망과 소명보다는 현실도피적인 생각이 조금 더 컸던 거 같아요. 그리고 제가 그 셰마 교목으로 있을 때 총무로 수고하시던 김경중 형제의 모습을 볼 때 너무 외롭게 보였기 때문에 내가 그 자리를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했더랬거든요.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결국 제가 있었던 한국교회가 너무 힘들다는 생각 때문에 결정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2018년 3월부터 KAC 총무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힘들게 다가온 것은 KAC에 일이 없어 많은 것을 새로 기획해야 했던 것, 저에게 맡겨 진 숙제로 문선주가 잘 할 수 있는 방식으로 KAC를 새롭게 다시 시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너무 막막했습니다. 안 그래도 이 KAC 총무의 자리에 대해 자신감이 없는 상태였는데 새로운 일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어떤 부담이 계속 어려움으로 자리했던 것 같습니다. 첫 1년은 무엇을 해야 되는지 많이 헷갈렸습니다. 더구나 제가 지금 메노나이트 교회를 매주 출석하고 않고 저희 남편이 장로교회 목사로 있어서 제가 교회도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느낌이라 쉽지 않았습니다. 우선 저는 정체성의 문제로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정말 KAC에 적합한 사람인가에 대한 정체성의 문제, 교회에 대한 정체성 문제, 그리고 그때 마침 시작된 메노나이트교회 연합회(Mennonite Church South Korea)와 KAC와의 관계설정 등을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메노나이트 교회하고도 관계가 많이 아프게 다가왔고, KAC 일을 잘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관심을 둔 곳이 ‘평화를 얘기하는 네트워크’였습니다. 2018년도 초반에는 서울에 자주 가서 평화에 대해서 이야기하시는 분들을 자주 만나면서 네트워크를 넓혀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에 매년 1월에 있는 아나뱁티스트 컨퍼런스, 가을에 있었던 병역거부 세미나 등이 도전으로 다가왔습니다. 특히 스위스에서 오신 부르노와 하이디가 한국에 오셔서 평화세미나를 여셨는데, 그때는 모든 것이 처음으로 생소하고 어렵게 느껴졌던 것 가습니다.

여하튼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에, 이제는 아나뱁티스트가 어떤 일을 해야되는 건지 배우면서 2019년을 보냈습니다. 2019년도에는 사라 쉥크 총장님도 오셨고 그 다음에 시스터케어 세미나를 한국에서 개최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특히 사라 쉥크 총장님이 오셔서 여러 장소에서 통역하는 일을 하면서 총무로서 자리매김을 하게 되는구나 생각하던 차에 2020년도에 코로나를 맞게 되었습니다. 코로나가 찾아오자 모든 모임이 갑자기 다 없어져 이제 뭔가 그림을 그릴만 하다 생각했는데 기회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다행히도 청어람에서 아나뱁티스트 아카데미를 열었고, 그게 플랫폼이 되어서 아나뱁티스트 아카데미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제가 50대가 넘어서 새로운 일을 하다보니 긴장도나 스트레스가 조금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젊은 시절보다 배우는 속도도 느리지만 2020년도부터는 많은 것을 새로 배우고 있습니다. 특히 줌으로 아카데미를 열었을 때, 아나뱁티스트 강사님 다섯분이 매일 강의마다 들어오셔서 서로 협력해서 질의응답에 응해주셨는데, 당시 강의를 들었던 분들이 하나 같이 서로 협력하여 팀을 이루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실 저는 교사에 대한 꿈이 있고 외국인들에 대한 관심도 많이 있습니다. 그림입니다. 그래서 2018년부터 강원대학교에 있는 유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주는 사역을 시작을 했습니다. ISF(international students fellowship)와 연결하여 사역을 같이 시작했는데 이 사역은 저에게 굉장히 잘 맞았고 저는 많은 에너지를 얻고 있습니다. 이 모임도 코로나 때문에 주춤했는데 줌을 통해서 지금까지 진행하며 에너지를 계속 주고받고 있습니다. 이것이 KAC가 해야되는 중요한 사역이다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지만 제가 에너지를 받는 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현재는 리본 모임, 독서 모임을 진행하고 있고, 가을 컨퍼런스와 아나뱁티스트 아카데미 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한림대 갈등전환센터에서 회복적 정의 운동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아직 이 부분을 어떻게 KAC사역과 접목시켜야 하는가는 숙제입니다.

⏺ 안동규: 이전에 옴니버스 얘기를 하셨는데, 그 제게 기억나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문선주 자매가 크리스 로라하고 저희 집에서 룸메이트 할 때 저는 AMBS (Anabaptist Mennonite Biblical Seminary)에 있었는데 그 앞 집에는 김성한 형제가 살았고, 건너편에는 남귀식 형제 가족이, 그리고 또 조금 옆에는 이윤식 형제 가족이 살았습니다. 제가 AMBS 생활을 마무리할 즈음 차성도 형제가 와서 미국에서도 예수촌 교회 비슷한 분위기가 형성된 적이 있습니다. 오전에는 미국 메노나이트 교회에 출석하고 오후에는 한국인들이 모여 예배를 드렸지요. 그런데 2021년 현재 그 사람들이 춘천에서 KAC와 MCC로 엮여서 아나뱁티스트 일을 함께 감당하는 것을 보니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주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고 하나님은 자라게 하신다는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아나뱁티스트 역사를 보면 박해가 심해서 사실 자신들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이 이끄셔서 지금까지 역사가 이어지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는 아나뱁티스트 관련 일들은 어느 누가 계획해서 지금까지 온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제 총무님들의 이야기에 이어, 현재 이사장으로 계신 남상욱 형제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좋겠습니다. 저는 초대 이사장으로서 KAC를 founding하고 building하였지만 남상욱 형제님은 부드럽고 디테일하게 KAC를 잘 섬기시는 것 같습니다. 특별히 남상욱 형제님은 KAF (Korean Anabaptist Fellowship)대표도 맡고 계시므로 KAC, KAF, MCSK (Menonnite Church South Korea)관계를 비롯하여 한국 메노나이트 전체 그림, 교회 관계 등에 대해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남상욱: 먼저 이렇게 얘기를 듣다 보니까 오래된 그 앨범을 넘기는 듯한 그런 감회에 젖게 됩니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생각고 머리에 떠오르고 장소도 기억이 나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다들, KAC 20년을 기억하며 아름다운 교제와 축복의 시간을 보내는 느낌입니다. 또 한 가지 감사한 거는 KAC 덕분에 저의 신앙이 많이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촌 교회에서도 저희 부부가 오랫동안 리더 역할을 감당했는데 KAC로 인해 예수촌 교회가 엄청난 혜택을 봤구나 하는 느낌을 새로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정말 예수촌 교회를 대신해서 KAC, 여기 계신 분들에게 정말 큰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KAF가 태동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KAC에 오래된 그 뿌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KAC를 빼고는 한국에 아나뱁티스트 운동을 얘기할 수 없고 또 그 시작이 안동규 형제님의 비전과 그리고 그 열정으로 부터 시작됐다는 것에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안동규 형제님하고 저는 1998년부터 예수촌교회를 섬겼는데, 그당시 저는 KAC에는 별로 관심을 두진 않았습니다. KAC는 서울에 있는 단체고, 당시 안동규 형제와 차성도 형제가 잘하고 계시구나라고 생각만 했지, 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무슨 행사가 있을 때면 교회 리더들과 함께 참여했는데 오늘 이야기를 듣다보니 유니온 교회에서 드린 1주년 기념 예배에 참석했던 기억이 납니다. 몸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으나 마음은 KAC가 잘 성장해 갔으면 좋겠다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매년 창립예배 때마다 모임에 참석했었는데, 제가 본격적으로 KAC에 참여하게 된 것은 2011년 춘천시대 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KAC가 춘천에 온다니까 많이 도와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촌 교회의 많은 지체들이 도왔고 그 중에 저도 포함되어 있었죠. 이사를 도와주면 이사를 시켜준다더라 며 농담도 했었습니다 (웃음). 그때부터 이사로 활동을 하며 재정 상황, 활동 상황 등을 가까이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카프라고 하는 ‘코리아 아나뱁티스트 펠로우십’에도 김경중 형제님하고 계속 같이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김경중 형제님이 캐나다로 간 이후 2018년 가을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나는데 안동규 형제님이 차기 이사장 직을 맡아 달라고 전화를 하셨습니다. 고민에 빠졌죠. 내가 할 만한 사람인가 내가 해야 하는가 그래서 교회의 여러 사람들에게 기도 요청과 함께 분별할 때 도움을 좀 달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다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마도 나에게 예수촌교회 다음의 부르심이 여기일수도 있겠다는 생각. 때마침 예수촌 교회 리더십 이양이 있었고 자연스럽게 KAC에 힘을 쏟을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KAC에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있지만 그 어려움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보자는 생각이 들어서 이사장직을 수락하고 2018년 11월부터 현재까지 두 번째 임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카프와 MCSK에 대해서 간략히 말씀드리자면, 먼저 카프는 두 가지 흐름에 의해서 생긴 것 같습니다. 먼저 KAC의 흐름이 있었고 또한 대전의 침신대학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자리했던 아나뱁티스트 운동 흐름이 있었습니다. LA에 계신 허현 목사님을 비롯하여 침례교신학대학교 출신 목회자 그룹이 아나뱁티스트 운동에 오랫동안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런 분들이 KAC와 연결되어 교제하다가 2010년 10월 춘천에서 KAF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게 됩니다. 그래서 한국에 아나뱁티스트 관련해서 중요한 두 도시를 꼽으라고 한다면 대전하고 춘천을 지명할 수 있겠습니다. 카프는 이러한 배경에서 연대와 교제를 목적으로 생겨난 모임입니다. 처음 카프는 Korea Anabaptist Fellowship로 불렀고 교회와 개인들이 모여서 아나뱁티스트 운동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친목을 도모하고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KAF 저널을 발행하는 등 많은 일들을 하였지요. 그러다가 이제 목사 안수관련 이야기가 나오면서 좀 더 깊은 논의가 있게 되는데요. 아나뱁티스트 교회가 튼튼히 세워지려면 카프라는 단체로 안 된다 교회 연합회가 있어야 되겠다 그렇게 해서 배용하, 한준호, 김성우 형제님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셔서 MCSK (Menonnite Church South Korea) 한국 메노나이트 교회연합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KAF는 아나뱁티스트 정신에 관심이 있는 개인들의 친교 모임이라면, MCSK는 교회연합회로 교단적 성격이 있습니다. 카프가 마당이라면 MCSK는 마당안의 건물로, 카프가 아나뱁티스트의 외연을 넓히는 것이라면 MCSK는 교회로 공고히 모이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적인 측면을 이야기하다보니 KAC가 정말 큰 역할을 했던 것 같습니다.

⏺ 안동규: 이제 마무리를 해야 할 시간입니다. 다음 모임에서는 미래지향적인 얘기를 할 계획입니다. 얼마 전에 리본 모임에서 알란 클라이더의 마지막 책인 ‘인내의 발효’(The Patient Ferment of the Early Church)라는 책을 살펴보았는데요, 그 책의 키워드가 ‘인내’입니다. 초대교회에는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엄청난 인내가 발효되었는데 개신교의 조급증이 기독교를 망가뜨리는 그런 과정이 나타나 있습니다. 어쨌든 이제 KAC의 입장에서 보면 이 20년이 조급하지 않았었던 건 분명하고, 어쩌면 우리도 인내의 세월을 보내오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물론 우리의 인내는 그냥 주어진 여건에 순응하면서 주님의 뜻을 기다리는 그런 인내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희 KAC의 20주년 키워드가 인내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KAC의 경중 형제님도 그렇고 많은 분들이 각자의 고민들을 꾹 참고 인내하셨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20주년을 기념하지만, 앞으로 30주년이 된다면 좀 더 쓸 수 있는 뭔가가 마련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전에 맞이하게 될 2025년은 아나뱁티스트 500주년입니다. 앞으로 3~4년만 있으면 2025년 1월 21일이 아나뱁티스트 500주년인데 우리도 뭔가 준비를 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여하튼 오늘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마무리 기도로 모임을 마치겠습니다.

KAC 창립 20주년을 맞이하며

한국아나뱁티스트센터 (Korea Anabaptist Center)가 올해로서 창립 20년이 되었다. 2001년 11월 2일 창립 예배를 드린 일이 어제 같은데 이제 20주년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KAC를 지켜 주시고 보살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큰 감사를 드린다. 굽이굽이 여러 고비를 맞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해주셔서 그 어려움을 넘어 설 수 있었다. 정말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초기부터 지금까지 KAC 의 탄생과 성장을 돕고 기도로 응원한 북미의 메노나이트 선교부에게 감사를 드린다. 무엇보다도 처음 KAC의 초석을 놓은 팀 프로즈 선교사님, 김경중 총무님, 이재영 형제님, 김복기 2대 총무님, 그리고 현재 문선주 총무님께 깊은 고마움을 전한다. 이 분들의 헌신과 열정, 창의성과 인내심이 없었다면 오늘의 KAC는 없었을 것이다. 아울러 초대 이사장을 맡아서 수고해 주신 안동규 이사장님과 많은 이사님들, 초기 자문위원님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를 전한다. 그분들의 지혜와 경륜, 기도와 조언이 이처럼 KAC를 성장시킨 것이다. 또한 여러 북미에서 이 땅에 와서 KAC를 섬겨주신 여러 선교사님 부부, 커넥서스 (connexus) 선생님들, SALTER들께도 감사를 드린다. KAC의 지경을 넓히고 무엇보다도 그분들을 통해서 살아있는 믿음을 볼 수 있어서 이다. 그리고 KAC 스탭으로 섬겨 주셨던 많은 분들 과 IVEPer들에게도 감사를 보낸다. 열악한 재정과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이 KAC를 지켜 주셨다.

20년 동안 KAC가 뿌린 아나뱁티즘의 씨앗이 여러 곳에서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어 흐뭇하다. 제자도, 공동체, 평화를 기치로 한 KAC의 아나뱁티스트 운동이 직간접으로 한국평화훈련원 (Korea Peacebuilding institute, KOPI), KAF (Korean Anabaptist Fellowship), MCSK (Mennonite Church South Korea)의 탄생을 도왔다. KAC를 거쳐간 많은 사람들이 아나뱁티스트 운동에 관련하여 활동하고 있으며 점점 더 많은 기독교인들이 아나뱁티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은 지난 20년을 감사함으로 돌아보고 앞으로 올 새로운 20년을 소망으로 내다볼 때이다.

20년 후에도 더 큰 감사의 기도를 하나님께 올려 드리기를 소원하며 이 책을 읽는 모든 분들께 평화의 인사를 전한다.

남상욱 (KAC 2대 이사장, 예수촌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