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리본독서모임 안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사람끼리의 접촉을 두려워하게 만들며, 차라리 격리와 단절과 회피라는 새로운 수단으로 생존하게끔하는 시절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사람끼리 모여야 살 수 있다는 말을 KAC에서 드리고자 합니다.

오랫만에 리본독서모임을 갖습니다.
강사는 ‘샬롬가정교육문화원’과 ‘하늘샘-좋은 나무 공동체’ 대표이신 <설은주 목사님>께서 오십니다.
함께 읽을 책은 아더 기쉬(Arthur G. Gish) (1939-2010)가 쓴 <예수 공동체, 삶으로의 초대>입니다.
설은주 목사님께서 번역하셨습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 책은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서술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공동체, 즉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탐구하고자 한다. 철저한 교회론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교회가 취하여야 할 하나의 구체적인 모습은 교회는 예수의 공동체이어야 한다.’라고 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피해야 사는 험난한 시절에, 사람과 더불어 공동체로 살아야 한다는 역설적인 선지자의 음성을 들어보시지 않을실런지요?

주제: 공동체로서의 교회
강사: 설은주 목사
시간: 2020.2.25(화요일) 오후 7시
장소: 한국아나뱁티스트센터 (춘천시 춘천로34, 3층)2020년 2월 리본독서모임 안내001

11월 리본모임 보고

11월 리본모임을 끝으로 2019년 리본독서모임을 마무리했습니다.

2019년 마지막 강사님으로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의 김형원교수님께서 오셔서 10여 년 고민하신 주제인 소명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한국교회가 오해하고 있는 ‘소명’에 대한 교정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고, 나이를 초월한 우리를 일상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소명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강의를 들으며 받아적은 내용을 올려봅니다. 본 강의와 다른 내용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즐독하세요!b_8afUd018svc11qxsxut49y5u_sp0ezp소명, 그 거룩한 일상

 

김형원 교수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하나의 교회 담임목사)

 

 

소명이라는 주제는 10여 년 전부터 관심을 가진 주제였습니다.

교회에서 소명스쿨이라는 과정을 6-8주 진행했습니다. 2017년에 성서한국에서 3일간 이 주제로 전체 강의를 했었습니다. 그것에 살을 붙인 것이 이 책 <소명, 그 거룩한 일상>이며, 10여 년의 고민의 과정이 고스란히 담긴 책입니다.

 

소명은 교회에서 아주 익숙한 주제입니다. 청년들에게도 귀에 익숙한 주제입니다. 보통 vision이라는 말과 함께 말입니다.

저는 신학을 하면서 목사님이나 강사님들이 말씀하신 소명이 성경에서 말하는 내용과 ‘맞나’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소명이라는 말은, 제가 신학에서 시작한 사람이면 캘빈이나 루터로부터 시작했겠지만 목회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삶과 연관된 말로 이해가 됩니다.

 

한국교회에서 소명, 비전은 거창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청년집회에서 다니엘이나 요셉은 항상 소환되는 인물입니다. 바울이 소환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전임사역자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반면, 다니엘과 요셉은 전임사역자도 아니고 세상적인 관점에서 봐도 지위가 나라에서 서열 2, 3위로 높이 올라간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이나 베드로는 청년집회가 아니라 선교한국에서 소환되는 사람입니다. ^ ^)

한국에서 ‘다니엘’은 정말 바쁩니다. 다니엘 기도회, 다니엘 학습 등. 둘 다 잘못된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별명이 ‘꿈꾸는 자’입니다. 맞습니까?

재미있는 것은 꿈이 꾸고 싶다고 꾸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꿈은 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꿔지는 것입니다. 요셉은 어떤 꿈을 꾸고 싶다고 해서 꿈을 꾼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꿈을 꾸었던 것입니다. 요셉의 의도와 전혀 관계가 없었습니다.

 

17살의 요셉에게 꿈을 물었다면 부모님과 함께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라헬의 늦게 낳은 자식이였기에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전혀 예기지 못 하게 팔려가고 감옥에 갇히고 꿈을 해석하다가 총리까지 되었는데 요셉은 한번도 자신이 총리가 되어야지라고 꿈꿀 수 있는 사람이 아니였습니다.

 

청년집회에서 요셉을 소환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형제를 보고, 베냐민을 보고 요셉은 통곡을 하지 않습니까? 그게 요셉의 정확한 정서입니다. 요셉은 비전이나 소명과 관계가 없는 사람입니다.

삶을 살다보니깐 기근이 들고 형제와 부모님을 모시고 와서야 자신의 굴곡진 인생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내 고향은 저기인데 내가 여기 왜 이러고 있지?’라고 고민했을 것입니다.

형제들을 만난 요셉은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는 소심한 복수였습니다. 둘째는 소망이었는데, 베냐민과 아버지를 볼 수 있다는 소망이었습니다. 그 때에 비로소 내 삶이 꼬여서 이렇게 흘러온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오스 기니스가 ‘소명’에서 우리의 삶이 살아질 때는 잘 모르고, 돌아볼 때야 퍼즐이 풀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며 살아왔는지는 정말로 중요합니다. 뒤돌아 보았을 때,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요셉은 절대로 자신의 꿈을 위해 애쓰고 노력한 사람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 하신 것을 요셉을 고백합니다. 요셉이 마치 자기가 한 것처럼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신성모독입니다. 한국교회가 청년을 기만하면 안 됩니다.

 

그렇다고 요셉의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요셉의 성품, 신실함은 우리가 배워야 할 큰 장점입니다. 언제 그 성실함을 볼 수 있습니까? 바로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입니다.

사실 유혹이 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집안의 실세는 보디발이 아니라 아내였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유혹 속에서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할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도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형들이 자신을 팔고, 노예신세로 하루 아침에 전락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을 했는가? 그 때 하나님이 나를 돌보신다는 것을 어떻게 고백할 수 있는가? 라는 회의가 가득할 법합니다.

어쨌든, 요셉은 믿음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통해 들은 그 말씀을 붙들고, 시궁창 속에서도 그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요셉을 사용하시고 붙드신 부분이 이 부분이라고 믿습니다. 요셉은 언약의 그 끄트머리를 붙들고 있었습니다.

70명에서 60만명으로 대민족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요셉의 실날같은 믿음이 연유가 되어서 말입니다.

여기서 비전, 소명, 특별히 영웅적인 소명을 말하면 안 됩니다.

 

소명과 비전에 대한 또 하나의 오류는 소명을 성직과 관계된 목회적 소명이라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이런 소명에 대한 오해로 인하여 목회자들이 선택받은 특권층으로 있게 됩니다. 종교개혁가들이 만인제사장설을 주창했으며 그것은 종교개혁의 중요한 개혁포인트였습니다. 중세 가톨릭을 무너뜨릴 수 있었습니다.

500여 년이 지나서 한국 개신교는 중세 시대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이 성직적 소명관을 깨야 합니다.

어떻게 하다가 목사가 되었습니까?라는 질문을 저는 개인적으로 많이 받습니다. 어쩌다 목사가 되셨어요?는 종종 받는 질문입니다. 거기에는 2가지 뉘앙스가 들어 있습니다. 의도가 뭘까요?

하나는 서울대 나와서 왜 목사가 되었나? 즉 잘 나갈 수 있었는데… 라는 뉘앙스로서 목사를 비하하는 의도가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그런데도 목사가 되었다면 엄청난 은혜와 섭리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습니다. 특별한 선택이 있었다고 말하면 힘이 생깁니다. 이것은 속고 속이는 것입니다.

목사는 고생을 하도 많이 했기에 어쩌다 목사가 되었습니까?라고 종종 묻는 것입니다.

저는 정확히 그 대답을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다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면 ‘그러니깐 부흥이 안 된지!’라고 반응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경영학을 하는 것과 목사가 되는 것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소명 중에서 성직적 소명과늘 깨뜨리면 모든 일이 다 소명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이 아니라, 그 일을 어떻게 하느냐가 훨씬 중요합니다.

성경은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목사나 선교사가 제대로 못 한다면 더 큰 벌을 받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 하나님이 주신 소명입니다. 그 일을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섬기는 마음으로 하십시오.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종교개혁을 통해서 소명이 일반화되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여러분이 가진 직업이 다 하나님의 거룩한 소명이 됩니다. 이 말까지는 맞는 말입니다.

루터는 직업의 고귀함을 재발견했습니다. 그러나!!!! 딱 여기까지만 OK!입니다.

 

그 다음에는 직업만이 소명이 되어 버렸습니다. 직업이 없는 사람도 있고, 직업적인 활동을 안 하는 사람도 있고, 직업을 가질 수 없는 어린 사람들, 신체적 정신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

사회에서 직업을 못 가졌다면 하나님 앞에서도 소명이 없는 것이 됩니다.

중세시대나 지금의 제 3국에 가면 어린이 노동이 일상이 되어있습니다. 그 어린이들은 하루종일 일해야 1달러를 법니다. 돌을 깨는 일이 보통입니다. 돌을 깨면 그것이 건축자재가 됩니다. 망치만 쥘 수 있으면 하루종일 아동도 노동을 해야 합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30대가 되어도 대학생일 경우가 있습니다. 직업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 이들은 하나님의 소명과 상관없는 삶을 사는 것인가요?

요즘은 100세 시대입니다. 80세는 일찍 돌아가시는 편입니다. 사회가 변하면서 일의 개념도 바뀌었습니다. 직업이 없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일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소명이 사회에 구속당하고 있습니다. 소명을 직업 속에만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소명은 훨씬 큽니다. 직업이 아닌 것도 통합됩니다. 직업적, 성직적, 영웅적 소명은 모두 오류입니다.

 

소명은 무엇입니까?

소명은 다중적 소명이 맞습니다. 소명은 하나가 아닙니다. multiful calling이 맞습니다. 이것은 굉장한 개념의 전환입니다.

소명으로서 우리가 감당할 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다양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과 관련이 있습니다. 소명과 관련이 없는 우리의 삶은 없습니다.

 

—거룩한 삶에의 소명

우리를 부르실 때, 일을 위해 부르시기 보다는 어떤 사람이 되길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Doing 보다는 Being이 먼저인 것입니다. 예수가 제자를 부르실 때도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가서 뭔가를 하게 하셨습니다. 먼저 하신 일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일이었습니다.

제자훈련의 기초는 Doing이 아니라 Being입니다. 먼저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거룩이라는 단어는 중요합니다. 특별히 호렙산에서 모세를 불렀을 때, “네가 밝은 땅은 ‘거룩한 곳’이니 네 신을 벗으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때문에 거룩한 곳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뵐 때, 제사장도 목욕하고 규정을 지켜야 했습니다. 지성소를 들어갈 때는 방울과 줄을 매달아서 들어갔습니다. 그것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피조물과 다른 하나님! 범접할 수 없는 존재!

존재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룩함이란 존재 자체가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거룩하다는 것은 ‘존재’에 대한 의미입니다. 그래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달라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를 거룩한 자라고도 하고, 거룩한 자가 되라고도 합니다.

의롭다라고도 하고, 의롭게 되라고도 합니다.

구원을 받았다라고도 하고, 구원을 받으라라고도 합니다. 마치와 ‘왕자와 거지’의 동화처럼 신분은 바뀌었지만 행동이 안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우리가 의인임과 동시에 죄인이라고 합니다. 즉 도덕적, 윤리적으로 구별된 자로 살라고 합니다. Being의 측면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인격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성품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은 은사와는 구별됩니다.

은사를 발휘하는 것은 그 사람 자체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 사람과 관련된 것은 그 사람의 삶에 연관된 열매인 것입니다. 이런 성품의 열매가 거룩한 삶입니다.

세상과 다르게 살아가는 방식 (로마서12:1-2) 즉,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living sacrifice로 살아가라고 합니다.

그 방식은 이 시대의 가치관을 따라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높은 자리에서 부려 먹을려 하지만 너희는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높은 데 있을 수 있지만 섬기는 삶의 방식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선생의 자리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권위를 섬기는 방식으로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사자으로서, 교장으로서 각자의 위치에서 섬기는 것이 어떤 것인지 고민을 해봐야 합니다. 어떻든 세상의 고정관념적 사고에 대해 문제제기를 해야 합니다.

 

한국의 부모는 자녀입시에 대해 올인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가느냐는 다른 문제인 것입니다. 원하는 것을 못 얻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을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식” 이것이 아니라면 놓은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일상적 소명

진정한 소명과 대조되는 영웅적 소명입니다.

우리는 뭔가 하는 것에만 꽂혀 있습니다. 역할이 있습니다. 집에서나 교회에서 내가 원치 않는데 요구되는 역할과 일이 있습니다.

내 친구가 대학을 못 갔습니다. 우리 시대만 해도 70%는 고졸 후, 직장을 잡았습니다. 내 친구는 대학을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한량이라 돈을 가져다 주지 못 했기에 이 친구는 대학갈 엄두를 내지 못 했습니다. 그리고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대학을 가려고 시도했다가 원하는 대학에 가기 쉽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고 결국 포기했습니다.

지금 직장생활한 지 38년 째입니다. 10여 년을 친정을 위해서 일했고 나머지는 자녀를 위해 일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그런 희생을 경험한 많은 처자들이 있습니다. 공장에서 일한 여성들, 버스 안내양 등은 대부분 10대 후반이었습니다. 그 분들은 어떻게 소명과 관련된 이해를 자신의 삶을 보면서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 분의 삶이 하나님의 소명을 성취하는 삶이었다고 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주변사람을 섬기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 즉 수평적으로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수직적 섬김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힘이 없고 약한 자를 섬기는 것이 ‘나’를 섬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졸이후 38년 째, 쉬지 않고 일한 내 친구가 더 소명의 삶을 잘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이사’가 되었는데 도와주어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아져서 쉴 수가 없다고 하니, 더 소명의 삶을 잘 살고 있습니다.

자기의 삶을 녹여서 다른 이를 섬겼잖아요.

일상적인 삶이 거룩이며 소명인 것입니다.

이 세상의 많은 ‘경단녀들!“ 엄마는 대체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신앙적인 관점에서 아이들을 낳고 키우는 것은 소홀해지기 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사회적으로 알아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하나님 앞에서 고민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소명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육아는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입니다. 어머님들이 자기 인생을 갈아서 준 것입니다. 이게 소명의 삶인 것입니다. 사회가 알아 주지 않는다고 해서 기독교가 따라가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의 가치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가치입니다. 사회적 잣대로 무시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귀하고 의미있는 삶을 산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의 세대의 노고를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너무나 귀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일상의 소명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50대 중반의 교수가 있었습니다. 너무나 잘 나가는 유망한 교수였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유전적 병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아내의 케어를 위해 그의 찬란한 career를 모두 접었습니다. 그리고 신학계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신학의 꽃을 피워야 하는 그 순간에 사라졌습니다. 또 한분도 아내가 류마티즘 때문에 건조한 아리조나로 가야 했습니다. 50대 중반에 유명한 신학교에서 작은 신학교로 옮겨 가셨습니다. 본인의 경력을 아내의 건강을 위해 포기하고 이동하였습니다. 한국사회는 남자의 일만을 소명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multiful calling! 자기 아내를 돌보는 것은 자기만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소명이 됩니다.

정말 믿음이 좋은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신앙의 저력은 정말로 무서운 것이며, 우리가 따라가기 어려운 것입니다. 공동체에서도 맡은 것이 작아 보여도 소중한 것입니다.

 

 

—비전적 소명

이것은 일상적인 소명을 넘어선 것입니다.

내가 안해도 되는데 부르시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변호사인데 난민들의 상황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는 난민신청자의 3%만이 난민으로 인정되는 곳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주업이 있으면서도 점점 그 일에 몰입하게 됩니다. 결국 난민담당 전문 변호사가 되기도 합니다.

가정주부도 노숙자나 장애인을 돕기시작하면 vision적 소명이 있는 것입니다. 일상을 넘어 안해도 되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이 비전적 소명의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직업적으로 왕의 의전담당 장관급 술맡은 관원이었습니다. 페르시아의 장관급으로 살아도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무너진 성벽을 구축해야겠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하면서 고생하며 성을 완성합니다.

안해도 뭐라하지 않지만 살다보면 그런 message를 받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소명을 잘 발견하게 됩니다.

 

거룩한 소명, 일상적 소명, 비전적 소명 (다중적 소명 multiful calling)이 맞고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좇아야 할 소명에 대한 바른 지침이라고 확신합니다!!!

11월 리본독서모임 안내

2019년 마지막 리본모임을 안내합니다.

11월 리본모임에는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의 조직신학 교수님이신 김형원 교수님을 모시고 진행됩니다.

특별히 복잡한 세상 속에서 꿈을 꾸는 것 조차 허락되지 않는 듯한 N포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 소명에 대한 외침은 이 시대를 향하여 소망과 기대를 품는 하나님의 뜻이라 믿습니다.

“내 꿈을 성취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마십시오. 나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편하고 쉬운 삶을 달라고 기도하지 마십시오. 힘겨운 세상을 돌파할 힘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나의 능력에 맞는 소명의 삶을 달라고 기도하지 마십시오. 내게 주신 소명의 삶에 맞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이 하는 일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뿐 아니라, 당신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회복되는 세상, 당신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그 속에서 보게 되는 빛나는 주님의 얼굴을 보면서 매일 매일 경탄할 것입니다. (Philips Brooks의 시를 기초로 하여 변환한 것)”

소명에 대한 3가지 오해를 넘어서 바른 소명에 대한 멘토링이 시작됩니다.

젊은 청년들도 환영하고, 백세시대를 누리며 제 2의 청년기를 맞이하는 분들도 환영합니다.

11월 26일 화요일 오후 7시에 한국 아나뱁티스트센터 사무실에서 만나겠습니다. ^^

 

 

11월 리본 독서 모임 안내001

9월 리본모임 정리

지난 9월 24일 김대식 교수님과 함께 하는 “함석헌 선생의 평화론”이라는 주제로 리본모임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아나키즘의 관점에서 함석헌 선생님의 생각을 풀어 주셔서 많이 어려운 듯 하면서도, 생각의 폭이 확장되는 모먼트를 접할 수도 있었습니다.

제가 교수님의 강의를 정리하고 질의 응답시간을 정리해서 좋은 분위기를 전달해 드리고자 하였으나 이번 리본모임은 몇 가지 키워드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강의의 본래 의미와 다를 수 있음을 양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1. 기표: 평화와 비폭력의 상황을 기대한다면 무엇보다 ‘기표형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기표’라는 것은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표현인데 이 기표라는 것이 함께 공유되지 않는다면 기표표출에서부터 폭력이 발생될 수 있다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리하여 세대와 성별과 신분을 아울러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기표를 찾아내고 형성해 가는 것이 비폭력의 중요한 출발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평화라는 기표를 다양한 형태로 발생시킬 수 있습니다.
간디의 경우는 비폭력의 형태를 시민 불복종, 납세거부, 불가촉천민의 파업, 비폭력이 언어적 수단, 정서적 공간에만 머물지 않고 나만의 기표를 통해 확산이 될 수 있습니다.
함석헌 선생도 아이디어를 얻어 군사정권시절에 단식을 하셨습니다.
퀘이커도 잠시 이야기 했는데 인상적인 점은 폭력적 방식에 대해 비폭력, 저항운동을 취합니다. 핵발전도 같은데서 피켓도 없이 도시락 먹고 행동을 하는데 그것도 기표가 될 수 있습니다. 전혀 없는 것 보다 기표발생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랑사랑 말하지만 기표를 발생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2. 뜻: 함석헌 선생은 장로교에서 출발하여 무교회주의였다가 퀘이커를 경험하시고 탈종교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저서 중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그 전에 <기독교 관점으로 본 한국역사>라는 제목이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기독교관점이라는 말을 뜻이라는 말로 대체하였습니다. 이는 무교회주의자들 조차도 서운하게 생각하였던 부분입니다.
여기서 ‘뜻’이란 보편성을 말하며, 종교를 초월하여 형이상학적 의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뜻이 가리키는 주요언어로는 생명, 평화, 사랑, 생태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뜻(정신이나 하늘, 하나님과 등치됨)은 비폭력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3. 비폭력은 놀이: 비폭력이 권태로서도 기능할 수 있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놀이로 봐야 하지 않는가 합니다.
놀이를 할 때는 권태나 지루함이 사라집니다. 놀이하는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놀이 자체가 놀이의 주체가 됩니다. 놀이가 놀이를 합니다. 어렸을 때, 놀이를 하다보면 놀이를 한다는 생각이 안 들잖아요. 평화도, 비폭력도 그런 것처럼 해방구, 탈출구, 해방감을 맛보게 하는 기구로서 경험되어야 합니다.

함석헌선생은 비폭력은 장치로서의 자리라는 말을 씁니다. 폭력은 위계적 질서나 지배적 관계가 드러나게 되고 체계와 힘의 불균형에 따라 생기는 것으로 보면서 자리를 원본 그 자체로 놔두고 누구의 자리도 될 수 있다고 한다면 비폭력적 놀이가 가능한 것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3. 씨알: 씨알사상에서 씨앗은 아르케라고 불리는데 시원, 시작과 같은 의미입니다. 어떤 것으로부터 나오는 게 아니라, 씨앗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존재가 주체가 되어서 폭력을 무화시키는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씨알과 연관되는 것이 도덕적 비판으로 상대를 변화시키기 보다는 가치를 쇄신하는데 포인트를 두는 것입니다. 같은 종교인이래도 추구하는 가치가 다를 수 있고 폭력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비폭력 저항에서는 가치를 쇄신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된다.
씨알이라고 하는 감성과 평등성을 함석헌 선생은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정치에도 감성의 5감각이 있는데, 가장 중요한 행동은 목소리입니다. 모든 씨알에게도 동일하게 있는게 목소리이고 그 목소리가 평등하고 수평적으로 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가치를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생명력있는 씨알로 살아가면서 하늘의 뜻을 분별하며 이 땅에 그 뜻의 가치인 평화, 생명, 사랑의 기표를 드러내며 비폭력의 가치로 다른 이와 함께 협화할 수 있는 삶. 그것이 궁극적인 씨알의 삶이라고 조심스레 정리해 보면서~~~ 휘리릭!5_e9hUd018svc1kv53io1ytuzu_sp0ezp

9월 “함석헌의 평화”와 함께 하는 리본모임

9월에는 함석헌의 평화를 전공하신 김대식 교수님께서 오셔서 한국형  평화의 이야기를 함석헌 선생의 사상을 통해 들려 주십니다. 함석헌 선생의 존함은 많이 알려졌지만 깊이 있게 함석헌 선생의 평화 사상에 대해 말해주는 사람이 주변이 많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특별히 춘천 출신이신 함석헌 선생의 전문가이신 김대식 교수님을 초대하였습니다.

김대식 교수님은 대구가톨릭대학원 종교학과 겸염교수이며 함석헌 평화포럼 공동대표이며, 함석헌 평화연구소 부소장이십니다.  철학과 종교학 박사로서 종교 간의 대화에도 관심을 많이 갖고 활발하게 활동하십니다.

메노나이트의 평화에 대해 많이 들었지만 우리나라의 함석헌 선생님의 평화이야기를 듣는 것은 또 다른 설렘을 선사합니다.

9월 24일 화요일 오후 7시 한국아나뱁티스트 센터에서 뵙겠습니다.

읽으실 책으로는 김대식 교수님의 저서로 <함석헌의 이성의 해방>, <함석헌의 평화론>, <치명적 자유의 향연: 아나키즘과 함석헌>입니다. 이 중에 하나를 고른다면 <함석헌의 평화론>을 읽어 오시라고  강추합니다. ^^



					

8월 리본모임 정리

69552735_3007170976020881_3671332847710371840_o책 <분별(대장간)>의 저자 박준형 형제님과의 리본모임 정리

어제 리본모임은 ‘분별’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했습니다. 분별이라는 주제는 한국기독교인들에게는 낯선 주제입니다. 어떻게 분별할 것이며 무엇을 분별할 것이며, 그 결과는 누가 확증할 것이며 온통 난해한 질문일색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어려운 주제를 어제 리본모임에서 가졌습니다. 일방적인 강의형식이 아니라 강사가 질문하고 청중들이 반응하는 내용에 따라 이야기의 내용이 진행되는 형식이었기에 일목요연한 정리보다는 어제 있었던 대화의 흐름을 따라 내용을 정리해서 올려 드립니다. 참석하신 분에게는 재음미의 기회를, 참석하지 못 하신 분에게는 나름의 궁금증해소의 기회가 되길 기대해 봅니다. (단, 저자의 의도와 말하신 내용과 다르게 정리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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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대한 두 증인 (한 분은 저의 막내누님이시고, 다른 한 분은 저의 아내)과 함께 하는 ‘분별’강의라 거짓을 말 할 수 없는 시간이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

제 책 <분별>은 분별에 대한 교과서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한국이나 외국 서적을 통틀어 ‘분별’에 관한 한 전문가가 되자는 생각으로 책을 썼습니다. 이 한 권을 위해 전문서적을 수없이 찾아 보았고 그 내용을 정리하고 소화하여 분별에 대하여 집대성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보니 이 책을 반으로 줄일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지금은 부끄러운 마음이 있습니다. 곧 기독교서회를 통해서 후속편이 나올 텐데는 그 때는 분량을 반으로 줄였고 적용면을 강조했으며 동시대성에서 저의 관점으로 시대의 문제를 풀어 놓은 내용이라 보시면 됩니다. 곧 출간될 분별에 대한 두 번째 책이 더 수월하게 읽힐 것입니다.

오늘은 저의 일방적인 강의보다는 함께 대화를 나누며 이야기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다른 준비는 없이 어떤 성경말씀으로 시작할지만 준비해 왔습니다.

분별에 관한 최고의 성경구절은 로마서 12장 2절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또 다른 하나의 성경구절은 누가복음12:56입니다.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우리는 분별에 대한 많은 질문을 갖습니다. ‘한국교회는 어떻게 분별하는가?’ ‘분별에 왜 실패하는가?’ ‘시대적 상황-조국의딸-은 어떻게 분별해야 하는가?’ ‘왜 미국 메노나이트 중에는 트럼프를 지지하는가? 그들은 과연 어떻게 분별했을까?“ 이런 여러 질문을 마음에 품은 채, 우리는 로마서 12장을 다시 보겠습니다.

성경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즉 conforming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순종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즉 이 세상의 pattern에 종속되지 말라고 합니다. 이 시대의 패턴은 무엇인가요? 메노나이트 신학교 AMBS의 예배당은 모든 벽면이 서로 각도를 달리 하여 건축되었습니다. 그 상징적인 의미는 세상에 종속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마음을 새롭게 하라고 하십니다. 새롭게 된다는 것을 영어로 transform한다고 합니다. 생각의 변화가 마음으로 변화로 이어지는 원리를 우리를 경험합니다. 생각이 바뀌면 마음이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새롭게 될 수 있을까요? 의지로 가능한 것인가요? 딤후2:15에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라고 하는데 진리의 말씀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롬12:2은 무엇인 좋은지, 무엇이 acceptable한지, 무엇이 perfect한지를 분별하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이 분별을 선과 악을 구별하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분별은 선과 악을 구별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것 중에서 더 좋은 것을 취하는 것이 분별입니다. 선과 악의 구별은 초보수준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선과 악을 구별하는 단계를 넘어서 많은 좋은 것들 중에서 더 좋은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뭐가 나쁘고 뭐가 좋으냐가 아니라 뭐가 덜 좋고, 뭐가 가장 좋은 가를 구별하는 것이 분별에 더 가까운 개념인 것입니다. 무엇이 더 좋은가?를 고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청중과의 대화 중: “그리스도인으로서 더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은 뭔가 욕심 사나운 모양새로 보여서 그런 일에 우리는 머뭇거리는 경향이 있었는데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더 좋은 것을 당당히 선택할 수 있다는 말씀에 자유가 느껴졌습니다. 에너지를 더 좋은 것을 선택하는데 써야 합니다.” “맞습니다. 분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우리에게 자유가 있다라는 확신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가? 무엇이 acceptable한가? 이 문제에 관한 한 저는 공동체에 의해 acceptable 즉 받아들여지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무슨 차를 사고, 어떤 옷을 입고 어디서 살 것인가는 지극히 개인적인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그런 개인적인 결정이 공동체 community에 의해 수용될만한 내용인가 고민하는 것이 분별의 일부라고 믿는 바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 즉 perfect은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which is the best to God을 고민하는 것이 분별입니다.

분별을 위해서 Good for the world, Acceptable to the community, perfect to God!을 기억합시다.

우리의 마음은 어떻게 하면 새로워질까요? renew될까요? 새로워지는데 우리가 할 일은 없을까요?

시편 51편에 다윗의 회개가 나옵니다. 새롭게 됨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기도를 보면 새롭게 된다는 것은 비우는 행위입니다. 그 비우는 행위는 회개라는 말로 표현됩니다. 이 세상의 것을 채워서 새로워질 수 없으며 오히려 이 세상의 것을 비울 때, 우리는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conforming하지 말라는 의미는 서로 상통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쓰기 위해 2015년부터 2019년 지금까지 분별을 붙들고 살아왔습니다. 저는 분별은 성숙의 표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이들에게 분별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훈련을 시켜야 할 단계입니다. 그러나 장성한 사람에게는 분별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분별은 종교적 열성으로 가늠이 될 수 있을까요?

종교적 열성과 분별은 상관이 없습니다. 프란치스코단의 더불어 사는 공동체는 사람을 보는 기준을 분별을 잘 하는지 아닌지에 두었습니다.

하지만 분별은 만져지지 않는 것이고 공식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오해와 추측이 난무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분별이라고 하면 어떤 생각, 어떤 기대,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되시나요?

분별은 선택이나 decision making이나 대화와 혼동될 수 있습니다. 회중들이 같이 논의하는 시간, 지금 한국교회는 월례회라고 부르지만 그것도 분별의 시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공동체라고 무조건 다 분별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시는 것은 오해입니다.

만장일치제도가 또 하나의 굴레가 되어서 만장일치라는 지리한 경험을 무조건 실천한다고 분별을 잘 하는 공동체가 자동적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분별을 위해 지금까지도 여러 책들을 읽고 있습니다.

제가 읽는 책들의 제목을 나열해 보면 ‘worshiping a hidden God’ ‘프란치스칸 기도’ ‘ 그리스도교의 묵상’ ‘신의 영역’ ‘My vocation is love’ ‘The role of Benedict’ ‘영혼을 돌보는 영성지도’

이런 책들을 보면서 제가 확신하는 바는 분별은 회의를 통해서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과는 분명하게 다른 것입니다. 분별은 대단한 영적인 수행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묵상의 전통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이미 있는 성경의 씨앗을 불러내면서 나에게는 주시는 감화, 감동이 우선적이 되는 것이 분별입니다. 그러기에 분별은 소위 성인들이 해 왔던 일들입니다.

‘My vocation is love’라는 책의 소화 테레사는 24살의 젊은 나이에 죽어가면서 어떻게 하나님과 교제를 이어갔는지를 보여 줍니다. 분별은 습득되어지지 않지만 우리의 삶에 발견되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신비적인 성령의 활동을 재현시키는 것인 분별은 어린 아이가 할 수 없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분별의 전통은 공동체의 만장일치로 결정되는 단순한 과정이라기 보다는 공동체의 공통분모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필수로 거쳐야 합니다.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 (예수회의 창시자)가 죽게 되었을 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 때 쓴 책이 ‘영성훈련들’인데 이 책은 500년 동안 공동체의 분별의 교과서가 되어 왔습니다.

결국 어던 기초 foundation 위에서 만나고 이야기 되어야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그것이 없이 분별을 시도하다가는 무정부상태가 됩니다. 분별하기 위해서 우리 안에서 어떤 공통의 분모를 세울까를 먼저 고민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15장이 표면적으로 우리 의사결정, 만장일치제도를 위한 사례가 된다면 그것은 무모한 바보같은 행위입니다. 문자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 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기계적, 합리적, 상식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습니다.

퀘이커교도들은 만장일치제도를 시행하고 있는데 그것은 수 백년동안 만들어 온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문화를 세워왔는가를 돌아보지 않고 표면적인 만장일치제도를 급하게 도입하여 적용하는 일은 위험할 뿐 분별의 과정이라고 보고 싶지 않습니다.

만약 문자주의적인 만장일치로 어떤 일을 결정하면 은혜로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장일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분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반대의견일지라도 공동체가 결정한 일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 분별하는 거야? 라고 묻는다면 공동체에 순종하기 위해 배우는 거야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메노나이트나 회중교회의 가치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놓치면 그 또한 우상이 됩니다.

공동체성의 분별은 개인이 훌륭해야 한다. 각 개인이 분별을 잘 하고 훌륭하면 공동체성 분별은 시끄럽지 않게 됩니다. 물질적인 성취나 기복은 분별의 목적이 절대 아닙니다.

분별을 위한 원칙을 함께 나누지만 이것을 적용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기에 새롭고 신선하게 실용적으로 자신만의 분별의 원칙을 세워나가는 것이 진정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별의 원칙을 나누고자 합니다.

1. 분별하기 전에 먼저 자신에게 물어라. 분별의 주체이신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순종과 순종의 마음이 준비되어 있는지를 점검해야 하는 것이다. 분별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일은 문제를 하나님께 가져 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함부로 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의지를 다시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2. 크리스찬의 분별은 혼자 하는게 아니라라는 것을 잊지 말라. 어쩌면 ‘나’가 가장 좋은 분별을 방해할 수도 있다. 악마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 공동체와 동행하는 겸손과 순종의 영역이다. 무슨 분별을 하든 고민해 줄 자들을 찾고 자신의 결정이 올바른지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할 믿음의 공동체를 찾으라.

3. 선과 악 사이에서 분별은 필요없다. 악은 버리고 선은 취하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해서 세상의 윤리와 상식으로부터 자유한 것이 아니다. 도덕이나 윤리나 상식은 우리가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선이다.

4. 크리스챤의 분별이 세상 것과 다른 것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일분일초를 다투는 세상에서 우리의 분별의 시계는 하나님에게 고정되어 있어야 한다. 시간에 쫓겨서 결정해선 안 된다. 믿음이 좋은 사람들은 결코 서두르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의 초점은 하나님께만 고정되어 있다. ‘바로 결정하지 못해 사라질 기회라면 그건 의미없는 기회일거라고’ 생각하라.

그렇다고 무조건 100% 무작정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정 시간이 안되고 이제는 결정해야 할 때라고 생각되면 우선 주님께 기도하고 결정하라. 마음에 평화와 기쁨이 찾아올 것이다.

5. 크리스천의 분별은 이성으로 하지 않고 감정으로 한다. 이것은 내가 배운 최고의 분별의 지혜이다. 성령이 주시는 마음은 늘 변함이 없고 그 끝이 아름답다. 마음의 평화와 기쁨. 이 감정은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우리로부터 빼앗아 갈 수 없다.

6. 영적인 낙담이나 절망이나 실망 중에는 어떤 결정도 하지 않는다. 마음의 평화와 기쁨이 없다는 것은 결절할 때가 아니라는 적신호이다. ‘충동’, ‘즉흥’이라는 단어는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것들이다.

7. 분별의 노하우는 대단한데 있지 않다. 하루를 잘 사는 사람이 소위 가장 중차대한 분별도 잘할 수 있다. 가장 작은 문제부터 분별하면서 우리는 분별의 지혜를 키울 수 있다. 가장 사소한 문제부터 고민하기 시작할 때 큰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8. 분별은 현재의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이다. 잘못된 과거에 집착하지 말라. 모든 문제는 새롭다. 모든 문제는 다르다. 그래서 겸손하게 창의적이고 신선한 분별의 지혜를 찾아야 한다. A-B-C와 같은 기계적이거나 공식적인 방법에서 벗어나야 한다. 모든 틀에서 자유로울 때 성령은 우리 안에서 숨을 쉬시고 우리를 인도하신다.

9. 완전한 분별은 없다. 우리는 ‘어느 정도’의 확신을 가지고 결정할 수밖에 없다. 완벽주의 기질은 필요치 않다. 사소한 결정에도 벌벌 떨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100% 다 알 수도 없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세상은 혼탁하다. 뭐가 되든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만을 바라며 결과로부터 자유 해야 한다.

10. 그렇다고 분별하는 과정에서 쉽게 타협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의지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결정을 의존한다는 것과 모든 것을 설렁설렁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우리 마음에 주님이 주시는 평화와 기쁨, 그리고 이 문제를 둘러싼 모든 자들로부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란 일체된 동의와 확신을 얻기까지는 집요하게, 단 지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라.

11. 분별할 때 무조건적으로 문제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믿음의 연수가 더할수록 배우는 지혜는 우리가 당면한 문제에서 초연해지거나 영적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문제를 통해서 주님을 더 알기를 바라시는데, 그리고 더욱 성숙해지기를 바라시는데 도리어 우리는 스스로 무덤을 계속 파며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연습을 한다면 너무 멍청한 짓이 되는 것이다.

12.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과 다른 것을 주실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 우리의 분별에도 융통성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크시다라는 겸손한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은 결과중심주의이지만 결과가 당장 좋지 않아도 실망할 필요가 없다. 최종 결과와 열매는 주님만 아신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때를 기다리는 게 믿음이다.

13. 분별이 안 될 경우 무엇이 분별을 방해하는지 그 원인을 분명히 해라. 무엇이 문제이든 현상적으로 고민하지 말고 근본적으로 그 문제가 뭔지 알고 근본적으로 해결하라는 뜻이다.

뭐가 문제인가? 왜 나는 무엇을 분별하려고 하는가?와 같이 “왜”나 “무엇”에 대해서 분명히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속인다면 양심을 속이는 것이다. 자신 안에 있는 깊은 욕망, 욕심, 자만을 드러내라. 하나님 앞에서 가장 양심적인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한다.

14. 결정할 때 한 가지 기준(원천)에만 의존하지 말라. 최소한 말씀을 중심으로 2-3가지의 다른 분별의 원천이나 기준에 맞는 것을 찾아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신중하고 지혜롭다 할 수 있다.

15. 분별의 가장 근본적인 권위는 예수님이시다. 분별의 과정은 주님과의 완전한 연합을 이루려는 시도이다. 우리 안의 주님께서 행동하게 하시고, 우리 안의 주님께서 결정하게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이시라면”이 우리가 문제에 봉착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질문이어야 한다. 분별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스스로 예수님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평범한 삶이 우리의 삶에서도 재현되어야 한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예수님을 살아내야 한다.

16. 한번 결정한 문제는 쉽게 번복하지 말라.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진다는 것은 인내할 수 있다는 것이다.

17. 우리의 모든 문제를 분별하는 것은 아니다. 분별이 필요없을 때도 있다. 분별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역은 성립되지 않는다.

18. 가장 현실적이고 지혜로운 분별을 원하는가? 성인 혹은 영적인 대가들의 삶을 본받으라고 말하고 싶다. 나 스스로 분별을 잘 할 수 있다는 것은 착각이다. 주님에게만 물어보면 된다고 믿는 것도 교만이다. 우리보다 먼저 산, 믿음의 성인들의 삶을 꾸준히 연구하고 모방하려 애써야 한다.

19. 분별하는데 가장 간과하기 쉬운 원칙이 하나 있다. 그것은 침묵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입만 닫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말한다. 나이가 들면서 느는 것은 말뿐이라고 한다. 할 말이 너무 많아 귀 기울일 시간이 없다. 침묵의 목적은 듣기 위함이다. 온 몸과 맘을 다해 듣는 것을 의미한다. 상대방에게 몰입하게 된다. 가장 희미하고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침묵이 분별이다.

20. 마지막 원칙은 여러분이 만드는 것이다.

정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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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의 강의를 들을 때 우리들 맘 속에는 분별을 잘 하는 스킬을 탐내는 마음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분별의 강의를 듣고 보니, 분별은 내 속에 계신 하나님의 원래 모습을 발견하여 그 하나님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 하나님의 뜻을 나의 삶 속에서 구현해 내는 영적인 삶의 부르심이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쉽고 간단한 묘책을 기대했던 얄팍한 욕심이 부끄럽게 드러난 시간이었습니다. 분별은 하나님을 더 사모하고 하나님을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 분별하며 삽시다!!

분별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들은 대장간에서 출간한 <분별>을 읽어 보세요.

다음 달에는 9월 24일 화요일에 리본 모임이 있습니다.

강사는 춘천출신이신 김대식 교수님으로 <함석헌의 평화학>에 대해 이야기해 주실 것입니다.

추천도서로는 김대식 교수님의 저서로 <함석헌의 이성의 해방> <함석헌의 평화론>, <치명적 자유의 향연: 아나키즘과 함석헌>입니다. ㅎㅎㅎㅎ

너무 버거우시면 <함석헌의 평화론>을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