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차 아나뱁티스트 컨퍼런스

1월 21일-22일 오후 8시-10시 <성경이 말하는 평화>에 등록을 원하시는 분은 아래 링크를 눌러 주세요.

https://docs.google.com/forms/d/1mTmQBT359j-gHlnsFg-LOXRKItVOYz05Vs9LfTHdS74/ed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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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리본독서모임 줌링크공유

내일 11월 24일 화요일 오후 8시에 설은주 목사님과 함께 <예수 공동체, 그 삶으로의 초대>라는 책을 가지고 공동체의 본질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을 나누고자 합니다.

내일 저녁식사 마치시고, 여유있게 8시에 만나요!!!

SunJu Moon이(가) 예약된 Zoom 회의에 귀하를 초대합니다.

주제: KAC 리본 독서 모임
시간: 2020년 11월 24일 08:00 오후 서울

Zoom 회의 참가
https://us02web.zoom.us/j/87065203966?pwd=SkRZRTllM0tMalBuSEhCWXlNcDFHQT09

11월 리본독서모임 안내

<<<11월 리본모임 안내:공동체로서의 교회 >>>

펜더믹 이후,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빈번하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언택트시대에 돌입하며 함께 먹고 마시고 위로를 위해 건네던 손은 위험한 매개가 되었고, 우리의 얼굴은 마스크로 가린 채 되도록이면 접촉을 줄이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런 변화 속에서 교회는 편만한 경계심과 의심을 넘어 어떻게 서로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대한 본질을 고민해야 하는 가장 적절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공동체로 살면서 그 본질에 대해 고민하셨던 아더 기쉬(1939-2010)의 책 <예수 공동체, 삶으로의 초대>를 읽으며 또한 공동체로 살고 계신 역자이신 설은주 목사님과 함께 11월의 리본 독서 모임을 갖고자 합니다.

이번 모임도 줌으로 진행될 예정이오니 책도 읽으시고 리본모임에도 관심가져 주시기 바랍니다.

책: 예수 공동체, 삶으로의 초대 (도서출판 대장간)
강사: 설은주 목사님
시간: 11월 24일 화요일 저녁 8시 (7시가 아닙니다!!)

10월 리본 독서 모임 안내

*** 10월 KAC 리본독서모임 안내 ***”사유하지 않음, 이것이 바로 악이다!”악의 평범성을 언급한 한나 아렌트의 정치 사상에 대해 듣고 배우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숭실대 철학과 김선욱 교수님을 모시고 10월의 리본모임을 갖습니다. 날짜는 10월 29일 목요일 오후 7시이며,함께 읽을 책은 김선욱 교수님의 <한나 아렌트의 생각, 한길사>입니다. 모임방식은 zoom을 통해 진행될 예정입니다. 한나 아렌트에 평소 관심이 있으셨고, 더 알고 싶은 마음이 있으신 분들은 누구나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참여를 원하시는 분은 kac@kac.or.kr로 이멜을 보내주세요!

6월 리본모임안내

**** 2020년 6월 리본독서모임 안내****

갑자기 서울발 코로나 확진환자들이 춘천에서도 발생하면서 과연 6월에 리본독서모임을 할 수 있을까 머뭇거리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방역수칙을 잘 지키면 소그룹모임은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어서 지난 4월 책이였던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가지고 다시 리본독서모임을 갖고자 합니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꾸준한 스테디 셀러로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으나 여전히 읽어보지 못 한 사람도 많습니다. ^^;;;
한국인이며 한국의 역사와 한민족의 소명에 대한 관심이 있는 분들을 위해 6월 모임을 준비했습니다.

씨알사상과 평화사상을 알려 주신 함석헌 선생님의 고난을 통한 한국역사에 대한 이해를 심도있게 풀어보고자 합니다.
작년 김대식교수님을 통해서는 아나키스트로서 함석헌을 보았다면 이번에는 민족을 사랑하고 한국이 인류에 끼칠 역사적 의미를 고민한 평화사상가로서의 함석헌 선생님을 만나볼 예정입니다.

강사는 전기호 목사님이십니다.
NCCK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이시고, 한일반핵평화연대 사무국장이시며 한국 AVPㆍAlternatives to Violence Project 활동가이자 함석헌선생의 연구가이십니다.

책: 뜻으로 본 한국역사
강사: 전기호 목사
시간: 2020년 6월 23일 화요일 오후 7시
장소: 한국아나뱁티스트센터 사무실

방역수칙을 준수하고자 하오니 마스크를 착용하시고 오세요!!6월 리본 독서 모임 2020001

5월 리본모임 보고

지난 5월 26일 화요일에 2020년 첫 리본모임이 있었습니다.
메노나이트의 ‘걸어다니는 리소스센타’ 김복기 선교사님이 번역하신 3권의 시리즈 책 <믿음>, <역사>, <실천>을 다루었습니다. 그 중에 <믿음>에 더 많은 할애를 했습니다.

강의를 녹화하여 유투브에 올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강의의 일부를 요약정리하였습니다.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다음 6월에는 23일 화요일에 전기호 목사님을 모시고 <함석헌 선생님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한번 더 시도하여 리본모임으로 하고자 합니다.
꼭 읽어 보시라고 강추드립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강의 정리 및 요약ㅡㅡㅡㅡㅡㅡㅡㅡㅡ

<믿음> <역사> <실천>

2020년 5월 26일 리본모임
김복기 형제님

(이 강의는 3권의 시리즈 중 주로 <믿음>에 대한 내용입니다. 강의정리요약내용은 실제 강의나 강사의 의도와 다를 수 있다는 점도 양해를 구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책은 답을 주지는 않습니다. 질문을 던지며 독자 스스로 답을 찾게 하는 여정의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은 메노나이트의 신앙과 실천에 대해서, <역사>는 메노나이트의 존재 방식에 대해서, <실천>은 메노나이트의 삶과 예배에 대해서 이야기를 풀어 갑니다.
아나뱁티스트 운동은 16세기 유럽에서 시작된 개혁운동으로서 매일 삶 속에서 예수를 따르는 실천을 강조한 운동입니다. 그래서 유아세례를 도전하며 신자들의 세례를 강조했습니다. 메노나이트들의 신앙의 기초이자 핵심가치는 공동체, 제자도, 평화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세례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기존의 가치에 도전을 주는 개혁운동이 되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어디로 갈 것인가?의 도전 앞에 있습니다. 저는 예수의 길을 따름, 제자도가 그 도전에 대한 응전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 말하는 교회나 공동체는 가시적인 교회를 말합니다. 3권의 책이 공통적으로 견지하는 흐름은 이야기방식으로 사람들을 초청하고 자발성에 강조한다는 데 있습니다.

<믿음>
여러분에게 믿음은 무엇인가요? 내 믿음은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요? 성경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믿는다는 것은 의미가 없겠지요. 메노나이트는 그래서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분별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아주 simple합니다. 그리스도가 가르치고 행하신 것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기에 한국교회는 그리스도로부터 너무 멀어졌습니다.
한국교회에서는 교리 논쟁으로 인해 예수교와 그리스도교로 나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메노나이트는 일상에서 어떻게 예수를 따를 것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교회에서 이단성을 판가름 짓는 기준으로 사도신경을 삼습니다. 사도신경을 고백하느냐, 하지 않느냐로 말입니다. 그러나 아나뱁티스트는 입으로 고백하지 않고 삶으로 고백하는 것을 기본으로 합니다.
한국의 ‘은혜와 평화 교회’는 사도신경에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 고난을 받으시고’로 고백되는 중간 부분에 예수님의 생애를 집어 넣었습니다.
기존의 믿음은 삶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해 침묵합니다. 성육신의 사역과 하나님나라가 이땅에 임하는 현장에 대해서는 생략된 신앙고백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메노나이트가 강조하는 것은 ‘Here and Now’입니다. 현장성을 강조합니다. 이 땅 위에서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강조합니다.
한국에서 아나뱁티스트에 대한 책은 90년대에는 딱 1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150여권의 아나뱁티스트와 관련된 책이 있습니다. 이 아나뱁티스트 책들인 매일 예수님을 따르는 삶과 공동체를 가르쳐 줍니다. 효율성이 아니라 신실함을 가르쳐 줍니다. (Being faithful as community)
그래서 메노나이트 교회에 가면 퀼트를 이용한 누비이불을 만드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옷을 계속 수선해서 고쳐 입고, 고쳐 입지만 더 이상 수선이 불가능한 옷은 누비이불을 만든느 곳으로 보내집니다. 이것은 절약하는 삶을 보여 주기도 하지만 이 누비이불이 상징하는 바는 일상생활 속에서 신실하게 살아가는 그들의 삶과 각기 다른 여러 story가 있는 아름다운 조각을 엮어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키는 것입니다. 자기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공동체가 되어 일상생활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아나뱁티스트의 관점은 성경을 읽으면서 형성된 것입니다. 16세기이전 대부분의 신자들은 자국어로 성경을 읽을 수 없었습니다. 그럴 때에, 아나뱁티스트드은 그들만의 포켓 성경을 자국어 만들어 냈습니다. 온타리오주에 가면 “Amish 박물관”이 있습니다. 루터가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한 때는 1531년인데, 아나뱁티스트는 그 이전에 이미 포켓용 성경을 만들어 복음서를 1529년 번역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사건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열심히 읽고 성경교사들과 debate를 하면서 성경해석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p. 62부터 보면, *성경은 생활의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성경은 교회에 속해 있다.
*신약은 구약을 해석한다: 그리스도 중심적 성경읽기
*생명의 책: 우리는 제자가 되기 위해 성경을 연구한다.
*공식의 안전지대를 넘어서 지속적인 과정으로서의 성
경해석

아나뱁티스트들은 삶이 변화되고 고쳐지지 않으며 세례를 주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를 오랫동안 연구한 알란 크라이더 박사는 believing- behaving-belonging에서 신앙을 갖기로 하고 점검기간을 3년이나 가졌던 초대교회에 대해 알려 주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기 위해서 그런 점검의 시간을 갖는 것을 놓쳤습니다.
성경 안에서 제자라는 것도 놓쳤습니다. 성경은 제자가 되기 위해서 읽는 책이며, 성경연구는 평생동안 진행되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필수행동입니다.
한국교회는 목사님에게 설교권과 축도권이 있어서 그 부분을 내려 놓는 것을 어려워 합니다. 만인제사장설을 믿고 행동에 옮긴 사람들이 아나뱁티스트들입니다. 그들은 성경 이외의 것은 없었습니다.

신자들의 세례의 핵심은 유아세례 거부가 아니라 신자들의 세례를 하자는 것입니다. 제도로서도 아니고 누구의 가르침에 따라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신자의 세례를 통한 거듭남이 말로만이 아니라 목숨을 거는 작업이었습니다. 그러나 313년 콘스탄틴의 밀라노 칙령이후, 유아세례는 국민의 의무가 되었으며 자연스럽게 호적신고의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지 않을 경우, 국가에 대한 명령 불복종이 되는 범법행위가 되었던 때입니다.
진정한 세례는 정체성이 변화되어, 내가 더 이상 죄인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새사람으로 살아가는 첫 단추가 됩니다.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 때문에 부활의 생명으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분자체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으며 그 생명의 삶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건강하게 그리스도의 공동체로서 자신의 연약함은 공동체의 징계를 거치면서 성숙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세례를 통해 신분과 정체성의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보통 교회에서는 세례를 2종류로 봅니다. 하나는 물세례, 다른 하는 불세례입니다. 아나뱁티스트는 여기에 피세례를 덧붙입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하며 실제로 그들의 신앙으로 인해 죽음으로 연결되기도 하였습니다.
슐라이트하임 고백서(1527)를 작성한 리더들은 모두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이 모임을 순교자들의 모임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21세기는 유아세례를 여전히 베푸는 교단도 있고, 대신에 헌아식을 하는 교단이 있습니다.
아나뱁티스트교회는 헌아식을 하는데, 헌아식에서는 부모의 신앙을 묻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아이가 내 아이이기도 하지만 공동체의 아이이기도 한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제자도로서의 믿음은 매일 예수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말씀묵상을 철저히 합니다. 메노나이트 사람들은 각자 말씀 묵상을 하고 나서, 가족들이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나눕니다. 바쁜 사람들은 <rejoice>라고 하는 책자를 활용하여 묵상을 합니다. 말씀 묵상이 메노나이트 사람들의 신앙의 근간이 됩니다.
생각뿐 아니라 삶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작은 것도 놓치지 않고 예수의 제자로 살아갑니다.
구세주라는 고백 보다 주님이라는 고백이 더 강합니다. 매순간에 예수를 주님으로 인정하는 삶입니다.
믿음에는 2종류의 믿음이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과 행함이 있는 산 믿음입니다.
2006년 니켈 마인즈라는 곳에 아미쉬 총격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때, 학교에 있던 아미쉬의 어린 소녀들이 사망하거나 총상을 당했습니다. 이 사건은 용서의 실천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아미쉬들이 용서를 실천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주기도문을 외우는데 그치지 않고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New creation이라는 말을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보아 왔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창조라는 말로 메노나이트들은 이해합니다.
새로운 창조 속에는 구체적으로, 윤리적으로 우리의 삶이 점검되는 것입니다.
제자도는 개인적일 뿐 아니라 공동체적입니다.
discipleship에 stewardship이 함께 따라 다닙니다.
일에 대한 충실함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바로 아나뱁티스트들입니다. 영육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통합적으로 봅니다. 그래서 평화의 복음이 됩니다.

메노나이트들은 교회를 가시적인 교회로 회중중심의 교회를 이룹니다. 춘천의 예수촌교회가 한국에서 25년간 그런 회중교회로 정착해 왔습니다. 교회는 늘 언제든지 함께 식사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져야 하며 삶이 나누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local church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에게 상호책임을 질 수 있는 관계가 됩니다.
의식으로서가 아니라 자연스레 성찬식이나 훈계(권징), 세족식등이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역사>
이 책은 초대교회에서부터 현재 21세기 메노나이트 교회까지의 내용을 이야기로 풀었습니다.
원래 교회는 운동이었습니다. 교회는 조직이 아닙니다. 특히 코로나 이후, 제도교회, 조직교회, 건물교회는 무너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운동성을 가진 작은 교회, 시골교회가 살아남습니다.
역사 속에서 볼 때, 운동으로 자기 집을 지을 때, 교회는 생명력이 있었습니다.
아나뱁티스트는 대항문화, 대안문화, 대조문화로서 교회 안에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내면의 확신 말고, 표시나는 문화가 없습니다. 비그리스도인과 차이가 나는 삶의 형태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나뱁티스트는 이런 기독교 안에 제 3의 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개인과 공동체의 회심을 다 강조합니다. 한쪽만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항상 질문하고 분별하는 공동체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제자도의 수준이 높아집니다.

<실천>
교회에는 6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연결하는 의식의 기능(ritual)
교육의 기능
구제구호의 기능
상담의 기능
교제의 기능
공동체의 기능

하지만 이 모든 기능들이 사회에 넘겨지고 있습니다. 코로나 이후 시대에는 “영성”만이 분명한 색을 가진 교회의 기능이 될 것입니다.
영적인 기능을 잘 감당하기 위해 작은교회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시간 관계상 <역사>와 <실천>은 가볍게 소개하는 형식으로 이어졌고 강의내용을 다 요약하지 않았다는 점 주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5월 리본모임 안내

올해 리본모임은 계획만 했을 뿐 실행으로 옮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5월의 리본모임은 할 수 있다는 희망과 기대를 안고 조심스레 리본독서모임을 안내합니다.
 
5월에는 미국 인디아나 고센대학의 역사학 교수이여, 대학의 메노나이트 역사 도서관장과 학술 메노나이트 계간지 “Mennonite Quarterly Review”의 편집장이신 존 D. 로스 교수님의 <믿음> <실천> <역사>라는 책의 시리즈를 함께 다루고자 합니다.
 
강사는 메노나이트 선교사로 캐나다에서 파송받으신 후, 평화사역과 메노나이트신학을 알리는 일에 바쁘게 활동하시며, 이 시리즈 전체를 번역하신 김복기 목사님이십니다.
 
시간은 5월 26일 화요일 오후 7시입니다.
 
장소는 한국아나뱁티스트 센터를 일순위로 정하고, 상황에 따라 온라인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믿음>편은 아나뱁티스트/메노나이트의 삶과 신학 입문서입니다.
“예수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왜 그가 비참하게 죽은 것을 사람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합니까? 왜 사람들은 여전히 이것을 믿습니까? 그런 죽음이 많은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겁니까?”라는 질문에 의미있게 답해줄 것입니다.
 
<실천>편은그리스도인의 ‘실천’에 있어서 예배와 실천하는 삶은 서로 분리되지 않기에 아나뱁티스트-메노나이트 전통에 속한 예배를 면밀하게 조사하고 세례, 성찬, 발씻김, 공동의 식사와 같은 교회의 실행예식들이 어떻게 현재의 독특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세상으로 넓혀질 수 있는지 고찰하였습니다.
 
<역사>편은 16세기가 아닌 예수와 그를 따랐던 첫번째 제자들의 이야기로 메노나이트의 이야기를 시작하며 그리스도교의 첫 3세기를 요약합니다. 아나뱁티스트가 어떻게 개신교 개혁자들과 단절되었는지를 과장하지 않고 박해과정을 통해 직접 설명하는 방식을 취합니다.
 
평소 메노나이트 신앙에 관심이 있으셨던 많은 분들의 참여를 기대합니다.5월 리본독서모임안내001

2020년 2월 리본독서모임 안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사람끼리의 접촉을 두려워하게 만들며, 차라리 격리와 단절과 회피라는 새로운 수단으로 생존하게끔하는 시절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사람끼리 모여야 살 수 있다는 말을 KAC에서 드리고자 합니다.

오랫만에 리본독서모임을 갖습니다.
강사는 ‘샬롬가정교육문화원’과 ‘하늘샘-좋은 나무 공동체’ 대표이신 <설은주 목사님>께서 오십니다.
함께 읽을 책은 아더 기쉬(Arthur G. Gish) (1939-2010)가 쓴 <예수 공동체, 삶으로의 초대>입니다.
설은주 목사님께서 번역하셨습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 책은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서술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공동체, 즉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탐구하고자 한다. 철저한 교회론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교회가 취하여야 할 하나의 구체적인 모습은 교회는 예수의 공동체이어야 한다.’라고 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피해야 사는 험난한 시절에, 사람과 더불어 공동체로 살아야 한다는 역설적인 선지자의 음성을 들어보시지 않을실런지요?

주제: 공동체로서의 교회
강사: 설은주 목사
시간: 2020.2.25(화요일) 오후 7시
장소: 한국아나뱁티스트센터 (춘천시 춘천로34, 3층)2020년 2월 리본독서모임 안내001

11월 리본모임 보고

11월 리본모임을 끝으로 2019년 리본독서모임을 마무리했습니다.

2019년 마지막 강사님으로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의 김형원교수님께서 오셔서 10여 년 고민하신 주제인 소명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한국교회가 오해하고 있는 ‘소명’에 대한 교정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고, 나이를 초월한 우리를 일상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소명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강의를 들으며 받아적은 내용을 올려봅니다. 본 강의와 다른 내용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즐독하세요!b_8afUd018svc11qxsxut49y5u_sp0ezp소명, 그 거룩한 일상

 

김형원 교수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하나의 교회 담임목사)

 

 

소명이라는 주제는 10여 년 전부터 관심을 가진 주제였습니다.

교회에서 소명스쿨이라는 과정을 6-8주 진행했습니다. 2017년에 성서한국에서 3일간 이 주제로 전체 강의를 했었습니다. 그것에 살을 붙인 것이 이 책 <소명, 그 거룩한 일상>이며, 10여 년의 고민의 과정이 고스란히 담긴 책입니다.

 

소명은 교회에서 아주 익숙한 주제입니다. 청년들에게도 귀에 익숙한 주제입니다. 보통 vision이라는 말과 함께 말입니다.

저는 신학을 하면서 목사님이나 강사님들이 말씀하신 소명이 성경에서 말하는 내용과 ‘맞나’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소명이라는 말은, 제가 신학에서 시작한 사람이면 캘빈이나 루터로부터 시작했겠지만 목회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삶과 연관된 말로 이해가 됩니다.

 

한국교회에서 소명, 비전은 거창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청년집회에서 다니엘이나 요셉은 항상 소환되는 인물입니다. 바울이 소환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전임사역자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반면, 다니엘과 요셉은 전임사역자도 아니고 세상적인 관점에서 봐도 지위가 나라에서 서열 2, 3위로 높이 올라간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이나 베드로는 청년집회가 아니라 선교한국에서 소환되는 사람입니다. ^ ^)

한국에서 ‘다니엘’은 정말 바쁩니다. 다니엘 기도회, 다니엘 학습 등. 둘 다 잘못된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별명이 ‘꿈꾸는 자’입니다. 맞습니까?

재미있는 것은 꿈이 꾸고 싶다고 꾸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꿈은 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꿔지는 것입니다. 요셉은 어떤 꿈을 꾸고 싶다고 해서 꿈을 꾼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꿈을 꾸었던 것입니다. 요셉의 의도와 전혀 관계가 없었습니다.

 

17살의 요셉에게 꿈을 물었다면 부모님과 함께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라헬의 늦게 낳은 자식이였기에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전혀 예기지 못 하게 팔려가고 감옥에 갇히고 꿈을 해석하다가 총리까지 되었는데 요셉은 한번도 자신이 총리가 되어야지라고 꿈꿀 수 있는 사람이 아니였습니다.

 

청년집회에서 요셉을 소환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형제를 보고, 베냐민을 보고 요셉은 통곡을 하지 않습니까? 그게 요셉의 정확한 정서입니다. 요셉은 비전이나 소명과 관계가 없는 사람입니다.

삶을 살다보니깐 기근이 들고 형제와 부모님을 모시고 와서야 자신의 굴곡진 인생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내 고향은 저기인데 내가 여기 왜 이러고 있지?’라고 고민했을 것입니다.

형제들을 만난 요셉은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는 소심한 복수였습니다. 둘째는 소망이었는데, 베냐민과 아버지를 볼 수 있다는 소망이었습니다. 그 때에 비로소 내 삶이 꼬여서 이렇게 흘러온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오스 기니스가 ‘소명’에서 우리의 삶이 살아질 때는 잘 모르고, 돌아볼 때야 퍼즐이 풀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며 살아왔는지는 정말로 중요합니다. 뒤돌아 보았을 때,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요셉은 절대로 자신의 꿈을 위해 애쓰고 노력한 사람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 하신 것을 요셉을 고백합니다. 요셉이 마치 자기가 한 것처럼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신성모독입니다. 한국교회가 청년을 기만하면 안 됩니다.

 

그렇다고 요셉의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요셉의 성품, 신실함은 우리가 배워야 할 큰 장점입니다. 언제 그 성실함을 볼 수 있습니까? 바로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입니다.

사실 유혹이 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집안의 실세는 보디발이 아니라 아내였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유혹 속에서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할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도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형들이 자신을 팔고, 노예신세로 하루 아침에 전락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을 했는가? 그 때 하나님이 나를 돌보신다는 것을 어떻게 고백할 수 있는가? 라는 회의가 가득할 법합니다.

어쨌든, 요셉은 믿음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통해 들은 그 말씀을 붙들고, 시궁창 속에서도 그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요셉을 사용하시고 붙드신 부분이 이 부분이라고 믿습니다. 요셉은 언약의 그 끄트머리를 붙들고 있었습니다.

70명에서 60만명으로 대민족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요셉의 실날같은 믿음이 연유가 되어서 말입니다.

여기서 비전, 소명, 특별히 영웅적인 소명을 말하면 안 됩니다.

 

소명과 비전에 대한 또 하나의 오류는 소명을 성직과 관계된 목회적 소명이라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이런 소명에 대한 오해로 인하여 목회자들이 선택받은 특권층으로 있게 됩니다. 종교개혁가들이 만인제사장설을 주창했으며 그것은 종교개혁의 중요한 개혁포인트였습니다. 중세 가톨릭을 무너뜨릴 수 있었습니다.

500여 년이 지나서 한국 개신교는 중세 시대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이 성직적 소명관을 깨야 합니다.

어떻게 하다가 목사가 되었습니까?라는 질문을 저는 개인적으로 많이 받습니다. 어쩌다 목사가 되셨어요?는 종종 받는 질문입니다. 거기에는 2가지 뉘앙스가 들어 있습니다. 의도가 뭘까요?

하나는 서울대 나와서 왜 목사가 되었나? 즉 잘 나갈 수 있었는데… 라는 뉘앙스로서 목사를 비하하는 의도가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그런데도 목사가 되었다면 엄청난 은혜와 섭리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습니다. 특별한 선택이 있었다고 말하면 힘이 생깁니다. 이것은 속고 속이는 것입니다.

목사는 고생을 하도 많이 했기에 어쩌다 목사가 되었습니까?라고 종종 묻는 것입니다.

저는 정확히 그 대답을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다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면 ‘그러니깐 부흥이 안 된지!’라고 반응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경영학을 하는 것과 목사가 되는 것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소명 중에서 성직적 소명과늘 깨뜨리면 모든 일이 다 소명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이 아니라, 그 일을 어떻게 하느냐가 훨씬 중요합니다.

성경은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목사나 선교사가 제대로 못 한다면 더 큰 벌을 받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 하나님이 주신 소명입니다. 그 일을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섬기는 마음으로 하십시오.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종교개혁을 통해서 소명이 일반화되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여러분이 가진 직업이 다 하나님의 거룩한 소명이 됩니다. 이 말까지는 맞는 말입니다.

루터는 직업의 고귀함을 재발견했습니다. 그러나!!!! 딱 여기까지만 OK!입니다.

 

그 다음에는 직업만이 소명이 되어 버렸습니다. 직업이 없는 사람도 있고, 직업적인 활동을 안 하는 사람도 있고, 직업을 가질 수 없는 어린 사람들, 신체적 정신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

사회에서 직업을 못 가졌다면 하나님 앞에서도 소명이 없는 것이 됩니다.

중세시대나 지금의 제 3국에 가면 어린이 노동이 일상이 되어있습니다. 그 어린이들은 하루종일 일해야 1달러를 법니다. 돌을 깨는 일이 보통입니다. 돌을 깨면 그것이 건축자재가 됩니다. 망치만 쥘 수 있으면 하루종일 아동도 노동을 해야 합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30대가 되어도 대학생일 경우가 있습니다. 직업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 이들은 하나님의 소명과 상관없는 삶을 사는 것인가요?

요즘은 100세 시대입니다. 80세는 일찍 돌아가시는 편입니다. 사회가 변하면서 일의 개념도 바뀌었습니다. 직업이 없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일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소명이 사회에 구속당하고 있습니다. 소명을 직업 속에만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소명은 훨씬 큽니다. 직업이 아닌 것도 통합됩니다. 직업적, 성직적, 영웅적 소명은 모두 오류입니다.

 

소명은 무엇입니까?

소명은 다중적 소명이 맞습니다. 소명은 하나가 아닙니다. multiful calling이 맞습니다. 이것은 굉장한 개념의 전환입니다.

소명으로서 우리가 감당할 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다양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과 관련이 있습니다. 소명과 관련이 없는 우리의 삶은 없습니다.

 

—거룩한 삶에의 소명

우리를 부르실 때, 일을 위해 부르시기 보다는 어떤 사람이 되길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Doing 보다는 Being이 먼저인 것입니다. 예수가 제자를 부르실 때도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가서 뭔가를 하게 하셨습니다. 먼저 하신 일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일이었습니다.

제자훈련의 기초는 Doing이 아니라 Being입니다. 먼저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거룩이라는 단어는 중요합니다. 특별히 호렙산에서 모세를 불렀을 때, “네가 밝은 땅은 ‘거룩한 곳’이니 네 신을 벗으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때문에 거룩한 곳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뵐 때, 제사장도 목욕하고 규정을 지켜야 했습니다. 지성소를 들어갈 때는 방울과 줄을 매달아서 들어갔습니다. 그것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피조물과 다른 하나님! 범접할 수 없는 존재!

존재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룩함이란 존재 자체가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거룩하다는 것은 ‘존재’에 대한 의미입니다. 그래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달라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를 거룩한 자라고도 하고, 거룩한 자가 되라고도 합니다.

의롭다라고도 하고, 의롭게 되라고도 합니다.

구원을 받았다라고도 하고, 구원을 받으라라고도 합니다. 마치와 ‘왕자와 거지’의 동화처럼 신분은 바뀌었지만 행동이 안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우리가 의인임과 동시에 죄인이라고 합니다. 즉 도덕적, 윤리적으로 구별된 자로 살라고 합니다. Being의 측면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인격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성품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은 은사와는 구별됩니다.

은사를 발휘하는 것은 그 사람 자체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 사람과 관련된 것은 그 사람의 삶에 연관된 열매인 것입니다. 이런 성품의 열매가 거룩한 삶입니다.

세상과 다르게 살아가는 방식 (로마서12:1-2) 즉,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living sacrifice로 살아가라고 합니다.

그 방식은 이 시대의 가치관을 따라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높은 자리에서 부려 먹을려 하지만 너희는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높은 데 있을 수 있지만 섬기는 삶의 방식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선생의 자리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권위를 섬기는 방식으로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사자으로서, 교장으로서 각자의 위치에서 섬기는 것이 어떤 것인지 고민을 해봐야 합니다. 어떻든 세상의 고정관념적 사고에 대해 문제제기를 해야 합니다.

 

한국의 부모는 자녀입시에 대해 올인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가느냐는 다른 문제인 것입니다. 원하는 것을 못 얻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을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식” 이것이 아니라면 놓은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일상적 소명

진정한 소명과 대조되는 영웅적 소명입니다.

우리는 뭔가 하는 것에만 꽂혀 있습니다. 역할이 있습니다. 집에서나 교회에서 내가 원치 않는데 요구되는 역할과 일이 있습니다.

내 친구가 대학을 못 갔습니다. 우리 시대만 해도 70%는 고졸 후, 직장을 잡았습니다. 내 친구는 대학을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한량이라 돈을 가져다 주지 못 했기에 이 친구는 대학갈 엄두를 내지 못 했습니다. 그리고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대학을 가려고 시도했다가 원하는 대학에 가기 쉽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고 결국 포기했습니다.

지금 직장생활한 지 38년 째입니다. 10여 년을 친정을 위해서 일했고 나머지는 자녀를 위해 일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그런 희생을 경험한 많은 처자들이 있습니다. 공장에서 일한 여성들, 버스 안내양 등은 대부분 10대 후반이었습니다. 그 분들은 어떻게 소명과 관련된 이해를 자신의 삶을 보면서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 분의 삶이 하나님의 소명을 성취하는 삶이었다고 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주변사람을 섬기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 즉 수평적으로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수직적 섬김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힘이 없고 약한 자를 섬기는 것이 ‘나’를 섬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졸이후 38년 째, 쉬지 않고 일한 내 친구가 더 소명의 삶을 잘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이사’가 되었는데 도와주어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아져서 쉴 수가 없다고 하니, 더 소명의 삶을 잘 살고 있습니다.

자기의 삶을 녹여서 다른 이를 섬겼잖아요.

일상적인 삶이 거룩이며 소명인 것입니다.

이 세상의 많은 ‘경단녀들!“ 엄마는 대체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신앙적인 관점에서 아이들을 낳고 키우는 것은 소홀해지기 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사회적으로 알아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하나님 앞에서 고민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소명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육아는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입니다. 어머님들이 자기 인생을 갈아서 준 것입니다. 이게 소명의 삶인 것입니다. 사회가 알아 주지 않는다고 해서 기독교가 따라가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의 가치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가치입니다. 사회적 잣대로 무시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귀하고 의미있는 삶을 산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의 세대의 노고를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너무나 귀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일상의 소명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50대 중반의 교수가 있었습니다. 너무나 잘 나가는 유망한 교수였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유전적 병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아내의 케어를 위해 그의 찬란한 career를 모두 접었습니다. 그리고 신학계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신학의 꽃을 피워야 하는 그 순간에 사라졌습니다. 또 한분도 아내가 류마티즘 때문에 건조한 아리조나로 가야 했습니다. 50대 중반에 유명한 신학교에서 작은 신학교로 옮겨 가셨습니다. 본인의 경력을 아내의 건강을 위해 포기하고 이동하였습니다. 한국사회는 남자의 일만을 소명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multiful calling! 자기 아내를 돌보는 것은 자기만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소명이 됩니다.

정말 믿음이 좋은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신앙의 저력은 정말로 무서운 것이며, 우리가 따라가기 어려운 것입니다. 공동체에서도 맡은 것이 작아 보여도 소중한 것입니다.

 

 

—비전적 소명

이것은 일상적인 소명을 넘어선 것입니다.

내가 안해도 되는데 부르시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변호사인데 난민들의 상황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는 난민신청자의 3%만이 난민으로 인정되는 곳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주업이 있으면서도 점점 그 일에 몰입하게 됩니다. 결국 난민담당 전문 변호사가 되기도 합니다.

가정주부도 노숙자나 장애인을 돕기시작하면 vision적 소명이 있는 것입니다. 일상을 넘어 안해도 되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이 비전적 소명의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직업적으로 왕의 의전담당 장관급 술맡은 관원이었습니다. 페르시아의 장관급으로 살아도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무너진 성벽을 구축해야겠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하면서 고생하며 성을 완성합니다.

안해도 뭐라하지 않지만 살다보면 그런 message를 받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소명을 잘 발견하게 됩니다.

 

거룩한 소명, 일상적 소명, 비전적 소명 (다중적 소명 multiful calling)이 맞고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좇아야 할 소명에 대한 바른 지침이라고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