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뱁티스트와 제자도

김복기 (캐나다 메노나이트 교회, 선교사)


초기 교회의 역사에 따르면 스데반에게 가해진 박해 때문에 흩어진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다. 특별히 페니키아와 키프로스와 안디옥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말씀을 전하면서 믿는 사람들이 생겨났다(행11:19). 바나바와 사울이 안디옥에 일 년 동안 머물면서 많은 사람을 가르친 결과 많은 신도가 생겨났고, 거기에서 처음으로 예수를 믿는 신도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행11:26). 신도들은 어려울 때 힘닿는 대로 서로를 도우며 살았다.

2천 년이 넘는 교회의 역사에는 수많은 이정표가 존재한다. 교회에 대한 역사를 언급할 때마다 등장하는 마태복음 16장의 베드로의 고백은 현재 신약성서 순서상 에클레시아에 대한 첫 기록으로 교회의 정체성을 언급할 때마다 등장한다. 실제로 예수께서 직접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여야하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온전한 표지가 되어야 한다. 이 마태복음 16장의 말씀에 뒤이어 마태복음 18장에서 그리스도는 교회의 표지이자 하나님 나라의 통치 원리로서 섬김, 돌봄, 사랑, 용서의 방식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다(마태복음 18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겠다고 약속하셨을 때, 제자들은 그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우선은 성육신으로 오신 것과 메시아로 오신 분이 갑자기 자신들을 떠나면서 약속하신 성령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부족했고, 그 실체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가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기능해야 하는지 그 뜻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사도들이 십자가 사건으로 모두 흩어졌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하면서부터였다. 무엇보다도 예수께서 살아계실 때 약속하신 성령을 몸소 체험하면서(사도행전 2장) 교회의 실체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제대로 깨닫기 시작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고,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면서부터였다. 우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1차로 약속하신 성령을 직접 제자들에게 부어주시는 장면(요 20:22)은 죽음의 공포로 인해 도망가 숨어버렸던 제자들에게는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각자가 그리던 인간적인 차원의 만남과 모임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로는 불가능한 새로운 성령의 공동체와 부활을 경험한 생명의 공동체를 맛보게 된 모임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는 새 세상, 새 교회, 새 공동체의 탄생함을 알리는 신호탄이자 창조적 선언으로 자리한다. 흩어졌던 제자들이 부활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다시 모였고 역사에서 처음으로 예수가 약속한 성령의 공동체가 태동하였다.

결국, 인간적인 종말을 고했던 사도들의 공동체는 가룟인 유다 대신, 맛디아를 뽑음으로써 보수되었고, 이어서 경험한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이 오순절 성령 강림을 체험한 사람들은 이전에 없던 새로운 영(정신)에 의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성령의 공동체적 체험과 사도들의 열정적인 가르침으로써 믿는 자들의 수가 늘어났고, 이전에 없던 새로운 유형의 공동체가 생겨났다. 사도행전 2장의 기록에 따르면 신도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였고,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

초기 교회를 연구한 교회사가들은 이 사도행전 2장의 사건을 그리스도 교회의 태동으로 이해하였고, 이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으로 인해 형성된 공동체를 교회의 원형으로 이해하였다. 당시 성령을 경험한 사람들이 즉시로 실천하기 시작한 신도들의 공동생활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사도행전 2:44-47)

여기에서 믿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을 의미하며, 수년 후에 비로소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사도행전 11장과 그 이전의 기록에 따르면 사람들은 이들을 제자들이라고 불렀다(행11:26, 9:1,10,19,25,26.28,36,38). 사도행전에 기록된 제자라는 용어는 크게 사도행전 전반부인 1:10,12 및 2:6의 기록과 한참 뒤인 9장 이후의 기록을 나뉘어서 생각해야 한다. 그 이유는 전반부의 제자는 주로 열두 사도를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던 용어로서 9장 이전까지는 사도라는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9장 이후부터 사도와 제자들의 구분이 생겨났고, 열두 제자들은 사도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신자, 제자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렸다.

이러한 분기점으로서 사도행전 11장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가져다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전 사도들과는 뭔가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것이 바로 성경이 사용하기 시작한 ‘제자’라는 말을 통해 그 특성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든, 믿는 사람들이라 부르든 이들이 가진 어떤 특징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 삶의 방식으로서의 ‘제자도’이다.

이 논문은 아나뱁티스트 아카데미의 한 부분으로 아나뱁티스트와 제자도를 설명하기 위해 준비되었다. 16세기 아나뱁티스트 운동이 발견한 아주 중요한 핵심가치 중 하나가 제자도인데, 이 운동이 드러내는 제자도의 핵심이 무엇인지 설명하려는 목적이 있다. 그러나 원래의 제자 됨, 즉 제자도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 가르침, 죽음 그리고 부활과 연관되어 있으므로 아나뱁티스트 운동의 제자도가 1세기 제자도의 원형에 비추어 볼 때 그 양상이 특별하지는 않다. 그러기에 이 논문은 아나뱁티스트와 제자도라는 제목을 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서의 가르침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에 근거하여 제자도를 설명할 것이다. 또한 아나뱁티스트 운동의 핵심 가치로 자리하는 제자도라고 하면서 다른 교단이 이해하는 제자도와는 뭔가 다른 특별한 것으로 설명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여 이 글은 우선 1. 제자도란 무엇인가? 라는 제목아래 제자도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개괄하고 2. 제자도를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이분법적 제자도에 대해 설명한 뒤 3. 16세기 아나뱁티스트들이 견지했던 제자도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는 방식을 취할 것이다.

우선 1. 제자도란 무엇인가라는 첫 번째 단락에서는 제자도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성경의 기록 중에 첫 번째 제자들로 선택된 열 두 제자들의 삶을 살펴보고, 사도들과 제자의 차이에 대해 살펴보게 될 것이다. 또한 용어상 제자라는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의미상 사도들을 지칭하는 제자들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제자들에 대한 미묘한 차이를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한다. 아울러 초기교회와 사도시대를 넘어선 기록, 즉 신약성서의 기록 이후부터 현재까지 기독교가 이해하고 있는 제자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기독교 잡지, 논문, 책에 실린 제자도 관련 제목을 통해 제자도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돕고자 한다.

2. 제자도에 대한 이분법적 이해라는 두 번째 단락에서는 제자도를 설명할 때 자주 혼동되기도 하고, 애매하게 설명되는 제자도의 두 유형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여기에서는 김경진 교수가 연구한 “유랑제자”와 “정착제자”라는 용어를 통해 역사 속에 존재하는 제자들의 두 유형을 간략하게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3. 아나뱁티스트와 제자도라는 세 번째 단락에서는 소위 급진적 개혁운동 혹은 근원적 개혁으로 불리는 아나뱁티스트들이 이해하였던 제자도에 대해 살펴보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이 글은 학문적인 이론을 다시 살펴보려는 의도보다는 그동안 삶과 유리되어 있던 그리스도의 제자도, 즉 일상 속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결국 제자도의 핵심임을 드러내고자 함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현장 속에필요한 것이 제자도 임을 강조하기 위한 작은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이 글이 매일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의 자기 정체성에 명확한 이해를 돕는 작은 선물이 되기를 희망한다.

1. 제자도란 무엇인가?

제자도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기독교 역사 내내 끊임이 없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제자도(discipleship)라는 단어의 어근인 제자(disciple)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 사용하는 제자라는 단어는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배우는 학생으로서의 제자와는 뭔가 다른 독특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일반적인 교육기관인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 더 나아가 대학교에서조차도 학생이라는 말은 쓰지만 제자라는 말은 잘 쓰지 않는다. 가끔 선생님과 학생, 교수와 학생의 특수한 관계 혹은 돈독한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스승과 제자라는 말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그들의 관계를 ‘제자도’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더 나아가 현재 존재하는 여러 종교에서도 이러한 교사와 학생,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존재할지 모르지만, 이들의 관계를 두고 제자도라는 표현을 쓰거나 ‘이것이 바로 제자도다’라는 식으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용법과 맥락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제자도라는 용어에 그리스도교에서 사용하는 어떤 특정한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제자도”에는 기독교 역사나 교회가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어떤 가치나 정신이 깃들어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제자들이란 어떤 사람들이며, 과연 제자도란 무엇인가?

우선 제자 및 제자도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제자들로 선택된 열두 제자들의 삶을 살펴보고, 사도들과 제자의 차이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용어상 제자라는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의미상 사도들을 지칭하며 그 무엇으로 대체할 수 없는 예수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이었던 열두 제자(사도)들과, 그 후 이들의 가르침을 받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또 다른 제자들에 대한 미묘한 의미 차이를 나누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울러 초기 교회와 사도 시대를 넘어선 기록, 즉 신약성서의 기록 이후부터 현재까지 기독교가 이해하고 있는 제자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기독교 잡지, 논문, 책에 실린 제자도 관련 제목을 살펴봄으로써 제자도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그리스도교에서 사용하는 제자는 아주 특이한 개념이다. 그리스도교에서 우선 제자라고 하면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불러 세우신 열두 명의 제자를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복음서의 기록에 따르면 이 열두 제자들은 스스로 제자가 되겠다고 나선 사람이 아니라, 선생님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선택되고, 지명되고,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자 그 부름에 응답한 사람들을 말한다. 스스로 제자가 되겠다고 나선 사람이라기보다는 예수의 부르심이 선행되었고,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듣고 그를 따라다니겠다고 결정한 사람들을 뜻한다. 이들 주변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부자 청년과 같이 스스로 예수를 따르겠다고 한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모두가 제자가 될 수 없었던 것을 보면, 이 열두 제자들의 위치와 지위는 독보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위치와 지위는 부르심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시몬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 빌립을 부르심 (요한복음 1장), 열두 사람을 택하여 사도라 부르심(눅 6:13-16), 네 제자를 부르심(마4:18-22, 막1:16-20, 눅5:8-11), 마태를 부르심(마 9:9-13, 막2:13-17, 눅5:27-32), 열두 제자를 보내심(마 10:5-42, 막 8:7-13, 눅 9:1-6) 등의 기록을 통해 동역자로서 이들의 역할이 잘 드러나 있다.

무엇보다도 열두 제자들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따라 배우는 사람들임을 잘 알 수 있다. 특별히 마태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두 번째 강화로서 등장하는 마태복음 10장의 기록은 이러한 제자들의 특성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그 마태복음 10장에 기록된 구체적인 지침은 다음과 같다.

이방 사람의 길로 가지 말 것, 사마리아 사람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 것, 길 잃은 양 떼인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갈 것, 선포의 내용은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앓는 사람을 고쳐 주며, 죽은 사람을 살리며,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낼 것, 저저 받았으니, 거저 줄 것,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 전대에 금화도 은화도 동전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 것, 여행용 자루도, 속옷 두 벌도, 신도, 지팡이도, 지니지 말 것, 아무 고을이나 아무 마을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서, 그 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 있을 것, 그 집에 들어갈 때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할 것,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않거나 너희의 말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 버릴 것,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할 것, 사람들을 조심할 것, 법정에 넘겨지고, 회당에서 매질을 당하고, 또 그리스도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나가서, 그들과 이방 사람 앞에서 증언할 것, 사람들이 너희를 관가에 넘겨줄 때에, 너희가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그때에 지시를 받을 것이니 어떻게 말할까, 또는 무엇을 말할까, 하고 걱정하지 말 것,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서 미움을 받더라도 끝까지 견뎌 구원을 얻을 것, 이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고을로 피할 것,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 것, 몸은 죽일지라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이를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도 몸도 둘 다 지옥에 던져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할 것,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거나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지 말 것,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를 것.

마태복음 10장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처음 부름을 받은 열두 제자들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특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1) 예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

2)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받고, 온갖 질병과 온갖 허약함을 고치는 사람

3) 구체적인 그리스도의 지침을 받은 사람들이다.

마태복음 10장의 지침은 모든 그리스도인들 즉 모든 제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사도라고 부름을 받은 열두 제자들에게만 해당하는 사항으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엄격한 의미에서 그들만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직접적으로 선택받은 제자들이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름을 받은 사도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할 때, 우리는 이 열두 사람으로 그 범위를 축소해서 생각해야 할지 아니면, 훗날에 언급된 폭넓은 의미의 제자들을 의미하는지 따져보고, 그들에게만 주어진 제자도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만약 성서의 기록이 이 열두 제자를 두고 제자도를 이야기한다면, 사도성으로 그 의미를 대치해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제자라고 할 때, 열두 사람에게 주어진 사도성과 제자됨에 머무를 수 없는 이유는 그 외의 제자들이 존재하였고, 특별히 사도행전 이후 열두 제자들의 가르침을 통해 또 다른 제자들 즉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부른 사람들이 여러 곳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2) 열두 제자들 외의 다른 제자들

성경을 읽다 보면 열두 사도로 칭함을 받은 제자들 외에 또 다른 제자들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다른 제자들에 대한 설명은 사도행전 9장 이후부터 등장하는데, 소위 말해 사도들이 전한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의미한다(행13:52; 14:20,21, 22,28; 15:10; 16:1; 18:27; 19:1,9,30; 20:1,2,30, 21:4,5,16).

소위 말해 이들은 사도들의 복음을 전해 들음으로써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따르기로 한 사람들로서 앞서 말한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 외에 또 다른 부류의 제자들로 불렸다. 이들은 사도행전 11장에서 최초로 그리스도인들이라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 이후로부터 신도, 신자, 믿는 이들로 표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주변 사람들이 조롱조로 부른 말이었지만, 예수쟁이가 됨으로써 예수처럼 사는 사람들 그리스도(Christ)의 사람들(ian)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서가 제자들이라고 부를 때 거기에는 열두 제자들 외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또 다른 부류의 제자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이나 서신서보다 나중에 기록된 것으로 여겨지는 복음서에도 열두 제자 외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들 못지않게 잘 섬기고 복음을 전파했던 예들이 많이 있다. 비록 복음서는 이들에게 제자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예수의 공적인 사역을 든든히 지원한 또 다른 제자들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이 보여준 제자도는 열두 제자들처럼 말씀과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지는 않지만, 일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갔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자명하다. 즉 이들이 보여주는 제자도의 특성은 사도들과 구분되는 기능적 차원과 그리스도인의 성품이라는 차원으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다. 우선 교회의 리더로 부름을 받은 일곱 명의 또 다를 섬김이들 (사도행전 6장), 서신서의 집사, 장로, 감독들의 자격조건과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의 성품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이 글에서 그들에 대한 구체적인 집사의 자격, 장로나 감독의 자격은 생략하기로 한다.

3) 사도 시대 이후 현재까지 기독교가 이해하는 제자도

위에서 우리는 열두 제자들에게 해당되는 내용과 그 외의 다른 제자들에게 해당되는 제자도가 있음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성서의 기록을 근간으로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제자도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역사의 흐름에 따라 기독교에 대한 오해, 뒤틀려진 교회의 모습뿐만 아니라, 제자도에 대한 이해 또한 뒤틀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 천 년의 역사 속에서 자리하게 된 기독교의 제자도란 과연 무엇일까 질문할 필요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제자들인 사도들이 죽고 난 후, 사도들의 제자들이었던 초대교회 교부들의 시대에 이미 기독교에 대한 오해와 제자들에 대한 오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오해는 기독교 공인이라는 크리스텐덤(Christendom 기독교제국) 기간에 더욱 가속화되었고, 처음 조롱조로 자리했던 그리스도인이 자부심과 영예의 타이틀이 될 정도로 왜곡되고 변질되었다. 이러한 변질을 초기교회 역사가인 알렌 크라이더는 『회심의 변질』로 정리하였고, 윌리엄 에스텝[1]이라든가, 프랭클린 리텔[2], 도날드 던바[3], 존 하워드 요더 등 신자들의 교회나 자유교회 전통에 속한 많은 교회사가들은 복음의 변질로 설명하기도 했다.

이들의 교회론과 제자도에 대한 설명을 일일이 살펴보는 일은 의미가 있지만, 이 글에서는 현재까지 기독교 잡지나, 논문에 발표된 많은 제목들을 살펴보는 것으로 그 흐름을 잡는 정도로 논의를 제한하고자 한다. 2020년 현재, 영문 데이터베이스인 EBSCO를 이용하여 영어 단어 discipleship을 검색한 결과 이에 대한 논문이 총 1,238개가 검색되었다. 그 검색한 내용을 분류해 보면, 제자도인 discipleship은 다양한 주제와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제자도가 얼마나 중요하며 그 분야가 얼마나 광범위하고 다양한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직업에 있어서의 제자도 Vocational discipleship, 복음주의와 제자도 Evangelism and discipleship, 감정과 제자도 Emotional health and discipleship, 성령이 이끄는 제자도 Spirit-driven discipleship, 자연보호 제자도 Creation care discipleship, 예전과 제자도 liturgy and discipleship, 진짜 제자도 Authentic discipleship, 소명과 제자도 Call and discipleship, 가장 신실한 제자도 The most sincere form of discipleship, 선교를 부양하는 제자도 Mission-shaped discipleship, 선교와 제자도 Mission and discipleship, 하나님과 동행으로써의 제자도 Discipleship as living with God, 리더십으로써의 제자도 Discipleship as leadership, 갈등 상황에서의 제자도 Discipleship in the midst of conflict, 제자도의 비용 The cost of discipleship, 제자도의 과정 The process of discipleship, 급진적 제자도 Radical discipleship, 공동체와 제자도 Community and discipleship, 미셔널 제자도 Missional discipleship, 부활 후의 제자도 Discipleship after resurrection, 창조적 제자도 Creative discipleship, 성육신적 제자도 Incarnational discipleship, 내러티브 제자도 Narrative discipleship, 제자도의 정치학 The Politics of discipleship, 제자도와 나이듦 Discipleship and aging, 신실한 제자도 Faithful discipleship, 가족의 제자도 The family discipleship, 21세기 제자도 The 21st Century discipleship, 포스트모던 제자도 Post-modern discipleship, 십자가와 제자도 The cross and discipleship, 제자도와 영성 Discipleship and spirituality, 우정과 제자도 Friendship and discipleship, 제자도와 목회 Discipleship and ministry, 일상의 제자도 Daily discipleship, 디지털 제자도 Digital discipleship, 제자도의 부담 Burden of discipleship, 제자도로서의 자녀양육 Parenting as discipleship

이상의 목록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 하나는 제자도란 어떤 특정한 프로그램이나 특정한 사람들만이 갖고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삶의 전 영역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다양한 주제들과 연관되어 있는 제자도란 과연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것만이 절대적인 제자도라고 제시할 수 있는 특별한 개념을 도출해내려는 노력보다는 과연 이 모든 논문들이 표현해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제자도라는 단어에 갇혀 있기 보다는, 과연 앞서 설명한 제자도의 원래 그림으로써 존재하는 스승의 가르침, 그리고 그 길을 따르는 제자라는 원의미를 올바로 잡아줄 절대적인 개념의 스승, 선생님의 모습을 설명하는 것이 더 절실하다. 이 말은 그리스도교에만 존재하는 제자도는 결국 유일한 길, 진리, 생명으로 칭해지는 살아계신 주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라는 선생님의 삶과 가르침을 끊임없이 언급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즉 제자나 제자도에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승, 선생님의 존재와 그분의 삶과 가르침과 죽음과 부활에 방점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제자 됨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인 개념일 뿐이며, 이는 오로지 절대적인 개념의 선생님, 스승론에서 모든 것이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제자도를 언급할 때는 제자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방법론의 차원이나 인식론의 차원보다는 생명의 근원이시고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조명하는 존재론적인 차원이 먼저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제자도란 선생님의 길을 따르기 위해 그리스도론과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애초부터 뭔가를 가르치기보다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존재로 이 세상에 오셔서, 자신의 삶을 따르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한마디 외침, 즉 “나를 따르라! Follow me!”라는 말씀에 모든 것이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모든 가르침이나, 행동이나, 신학이나, 그 무엇을 이야기한다고 할지라도 기독교의 핵심은 제자도이고 그 제자도는 결국 “예수 따름”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2. 두 종류의 제자도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제자도가 “예수 따름”이라면 예수의 제자들은 어떤 방식으로 예수를 따라야 할까? 한편으로 제자가 되려면 예수 외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모든 가치를 예수께 두어야 한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모든 현재의 삶을 뒤로 하고 무작정 집을 떠나야만 하는 것인가? 앞서 설명한 마태복음 10장의 열두 제자처럼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만이 제자의 길인가? 만약 그러한 방식만이 제자의 길이라면 지금 수백만 수천만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일상의 삶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라는 두 가지 상반된 삶의 방식에서 갈팡질팡, 우왕좌왕하거나, 좌고우면할 수밖에 없다. 이는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이 고민하는 바요, 삶 속에서 갈등으로 경험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정말로 어느 정도까지 그리스도를 따라야 제대로 제자가 되는 것일까?

이는 현재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고자 매일 묵상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두고 끊임없이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특별히 말씀을 설교하는 설교자들이나, 신학자들의 논점을 따라가다 보면 삶을 전적으로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따라나서든지, 아니면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가는 속세의 그리스도인으로 늘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든지 양자택일의 문제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는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도에 대해 설명할 때 자주 범하는 오류 중 하나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야 한다는 설명이 한 편에 있고, 일상을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기는 어려우므로 제자도는 일반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책임과 삶의 길이 아니라, 특별히 믿음 좋은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그 무엇이 또 다른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형국이다. 실제로 많은 논문이나 설교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성서의 가르침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도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어느 때는 이 쪽편을 강조하고, 어느 때는 저 쪽편을 강조하여 설명하다가, 결론은 청중들이 그냥 알아서 선택하도록 얼버무리고 마는 경향을 보여왔다.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성서의 가르침도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더더욱 아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초기 기독교에 등장한 두 종류의 제자도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장신대학교의 김경진 교수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던 사람들을 크게 두 종류로 분류하였는데, 열두 제자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여행하고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일에 모든 일을 집중했던 제자들을 위한 제자도가 한편에 있고, 그 외 일상생활을 영위하면서 삶의 전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했던 제자도가 또 다른 한편에 있다고 설명하였다. 그는 전자를 순례자의 성격을 띤 Itinerant disciple로, 후자를 직업을 갖고 한 장소에 오래 살면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소임을 다하는 sedentary disciple로 설명하였다. Itinerant disciple은 순례제자, 순회제자, 혹은 유랑제자로 번역할 수 있다면 sedentary disciple은 일상의 제자, 정착제자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약 성서 특별히 복음서가 이 두 종류의 제자들을 어떻게 규정하는지 살펴보자.

1) Itinerant disciple / 유랑제자

유랑제자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에 함께 먹고 함께 사역했던 제자들을 말한다. 특별히 이들은 주님의 부름과 선택을 따라 제자로 부름을 받았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전도 여행을 준비하고, 돕고, 직접 동참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하나님 나라의 강화로 잘 알려진 마태복음 10장에 그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이들은 “사명의 완수를 위하여 가정과 재산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들로서 (막 3:21, 31-35; 눅 9:58), 하나님 나라와 복음의 선포를 위하여 가진 바 모든 재산과 가정 그리고 직업을 포기하고 문자적으로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동안 동고동락한 사람들이다. 이처럼 스승을 따르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는 태도는 매우 독특하고 이례적인 삶의 모습으로써 이들은 스승-제자라는 특별한 관계에 삶의 모든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로 이해된다.” 따라서 이들 유랑제자들은 예수님과 같은 운명을 택한 사람들로 이해되며 처음에는 열두 제자로 불리다가 후에 열두 사도로서 사도라는 특성상 역사적으로 반복될 수 없는 형태의 제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이 유랑제자들의 특성을 따르도록 요구되거나 특별한 열심을 강요받곤 한다. 이는 성서가 가르치는 삶의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의 삶을 주로 기록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사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분명 자신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여김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유랑제자의 삶을 그대로 살 수 없다. 그러기에 이 첫 번째 종류의 제자도는 믿음의 공동체가 유랑제자로 부르지 않는 한, 일반적인 신자들에게 요청할 수 있는 제자도가 될 수는 없다. 물론 헌신과 열심이라는 차원에서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두 주인을 섬기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주로 섬기며 따르겠다는 마음의 결심이나 결단의 차원에서는 이해되지만, 실제적인 삶의 방식으로서 첫 번째 제자도는 “선교사” “순회설교자” 혹은 고교회와 같은 제도 교회의 직제상 “수도사”나 “신부” “수녀”등의 구별된 직제를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제자도라고 할 수 있다.

2) Sedentary disciple / 정착제자

위의 유랑제자와 다른 종류의 제자로서 정착제자가 있다. 이들은 유랑제자인 사도들처럼 문자적으로 주님을 따르거나 모든 재산과 가정과 직업을 포기하지는 않으나, 자신이 처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 주님의 말씀과 그 가르침을 따라 제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복음서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순례하던 제자들이 있는 반면, 이들을 공궤하고 섬기던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들을 정착제자라고 할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갈릴리 여인들을 들 수 있다.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막달라 마리아 등의 갈릴리 여인들은 다른 남성 제자들과 함께 주님의 전도 여행에 동참한 여제자들이었으나, 자신들의 소유를 전부 포기하거나 3년 내내 예수를 따라다니지는 않았다. 대신에 자신들의 살던 지역에 예수와 제자들이 방문하면 자신들의 집에 그들을 받아들였고 예수님과 제자들의 일행을 섬겼다. 복음서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지는 않지만, 예수와 그 제자 일행이 어떻게 전도여행을 3년 이상 긴 세월 동안 지속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단서를 얻게 된다.

이러한 여제자들의 지속적인 헌신, 봉사, 희생, 물질적인 도움이 없이 전도여행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부분적으로 이 여인들은 예수의 여행에 잠깐 참여하기는 하였지만, 주님을 지속적으로 따라다녔다는 증거는 성서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아 이들은 유랑제자라기보다는 정착제자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우리가 잘 아는 누가복음 10장의 마리아와 마르다에 대한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의 일행을 영접하는 제자들이 여러 마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할 때, 어느 마을에 들어가거든 한집에 유숙하라는 가르침이 있는데, 이들을 정착제자들의 그룹이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이 외에도 김경진 교수는 여리고의 삭개오라든가, 아리마대 요셉을 정착제자의 예로 들었다.

이처럼 정착제자들은 비록 자신이 가진 모든 소유를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나그네가 된 (눅9:58; 9:3; 10:4) 예수님과 그 제자들 일행을 포함하여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하여 기꺼이 자신들의 재물을 사용하였다(눅 19:8; 8:3; 10:38; 23:52-53). 정착제자들은 실제로 재산을 수중에 소유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그 재산의 소유권은 포기한 것과 다름없이 살았다.

김경진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유랑제자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역할에 국한하여 반복될 수 없는 단회적인 인물로 제한하였는데, 이는 잘못된 이해이며 위에서 간단하게 설명하였듯이 역사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순회설교자, 선교사 혹은 고교회와 같은 제도 교회의 직제상 수도사, 신부, 수녀 등 자신을 삶을 온전히 하나님 나라에 드리기로 작정한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제자도로 이해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이 두 종류의 제자도는 기독교 역사에 뚜렷이 드러나는 제자도의 유형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이 두 종류의 제자를 한 사람에게 동시에 요구할 수는 없으며, 성경에서 기능하는 것처럼 상호보완의 제자도로 이해하면 큰 무리 없이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한 편만이 옳은 것으로 설명하는 것은 제자도에 대한 온전한 이해라고 볼 수 없다.

3. 아나뱁티스트와 제자도

1) 아나뱁티스트에 대한 이해

아나뱁티스트 운동은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과 그 맥락을 같이하며 시작되었다. 종교개혁 기념일이 1517년 10월 31일이라면, 아나뱁티스트 기념일은 1525년 1월 21일이다. 종교개혁 기념일이 루터의 95개 논제를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게시한 날을 기념한 것이라면, 아나뱁티스트 기념일은 스위스 취리히 시의회의 유아세례 반대가 불법임을 판결한 데 대해 몇 명의 사람들이 펠릭스 만츠의 집에 모여 성인 세례를 시행한 것을 기념한 날이다.

이렇게 아나뱁티스트 운동은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적 흐름을 배경으로 스위스에서 시작이 되었다. 초기 교회 때,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불린 것처럼, 16세기 종교개혁 당시에 관행이었던 유아세례 대신에 신앙고백을 근거로 성인세례를 시도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붙여진 이름이 아나뱁티스트였다. 비록 겉으로 드러난 운동의 시작은 유아세례를 거부하는 모습이었지만, 실제로 더 중요한 것은 성경적 교회의 회복이었다.

아나뱁티스트들은 종종 제3의 종교개혁가들이라고 소개되는데, 이는 동시대의 종교개혁이 온전한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뒷걸음 칠 때, 성경의 가르침을 온전히 시행함으로써 종교개혁을 완성하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나뱁티스트들이 누구인가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매일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따라 살고자 애쓴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 “따름”을 가장 소중히 여겼던 이들은 초기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자신들의 삶을 직접 연결시켜, 사도행전 5장 29절의 말씀과 산상수훈을 실천하고자 애썼다. 그렇게 그리스도 따름을 실천하기 위해 그들은 먼저 말씀을 옳게 해석하고, 해석한 말씀에 제대로 반응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들은 사람의 말을 듣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좋아했으며(행5:29), 일상생활 속에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따르며,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범을 통해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를 이루고자 애썼다. 박해 중에서도 그리스도의 평화를 실천하며 살고자 애쓴 평화의 사람들로 기억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500년을 지내오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아나뱁티스트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신앙의 핵심은 제자도, 평화, 공동체로 요약할 수 있다. 무엇보다 아나뱁티스트들은 기독교를 이해할 때, 가장 먼저 “제자도”를 언급한다. 여기에서 제자도는 우리에게 익숙한 제자 훈련이나, 어떤 프로그램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제자들이 모인 곳을 교회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아나뱁티스트들은 교회를 형제 됨과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신앙공동체이자 가족으로 이해한다. 교회를 이루기 위해 구성원은 우선 그리스도께 자신을 헌신하는 것은 물론 공동체인 그리스도의 몸에 기꺼이 헌신하고자 애쓴다. 그리고 그 헌신의 방법은 항상 세상의 원리가 아닌 그리스도의 원리로서 평화의 하나님과 맞닿아 있다. 제자도를 말로만 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원수 사랑을 말로만 외치는 것이 아니라, 무저항과 사랑의 윤리 (ethic of love and nonresistance)를 실천하고자 애써왔다. 그래서 아나뱁티스트들에게 주어진 별명 중 하나가 “산상수훈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어찌 보면 이상주의자들이었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성서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는 기독교실존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아나뱁티스트들은 그리스도를 매일의 삶 속에서 따르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2) 한국의 아나뱁티스트 운동

한국의 아나뱁티스트 역사는 1952년 한국전쟁의 난민들을 돕기 위해 들어온 메노나이트 중앙위원회 (Mennonite Central Committee –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교육, 개발, 구제를 담당하는 메노나이트 구호기관)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메노나이트 구호기관이었던 MCC는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약 20년간 전쟁고아들과 난민들에게 물자를 공급하였고, 전쟁미망인들을 대상으로 재봉기술교육,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메노나이트 직업중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한국전쟁직후 복음의 핵심인 고아와 과부를 도우라는 말씀에 반응하여 구호활동을 전개하였다. MCC가 한국에 발을 디디면서 펼친 첫 활동은 전쟁 피난민을 대상으로 가장 시급한 물자 구제사업이다. MCC는 집을 잃고 먹을 것조차 없었던 전쟁난민들에게 필요한 물자를 제공하였고,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위해 메노나이트 직업훈련학교를 세우고, 가족/어린이 지원프로그램을 만들고, 전쟁미망인들을 위한 재봉기술 교육의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이러한 활동 외에도 병원 자문봉사, 지역개발봉사, 기독교 어린이 위탁 훈련교육 등 대구와 부산지역을 중심으로 다양한 구제, 교육, 지역개발, 사업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빠른 경제개발과 더불어 MCC 사역은 더 많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나라로 옮겨 가면서 사역을 마감하기에 이르렀다. 1971년, 20년 동안 시행했던 메노나이트 직업훈련학교의 마지막 수업이 진행되었고, 당시 한창 전쟁의 피해로 씨름하던 베트남 등 더 많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나라로 사역을 옮기게 되었다.

MCC 사역 이후, 메노나이트 직업훈련학교 졸업생을 중심으로 메노나이트 정신을 이어가려는 노력이 있었다. 구호사역으로서의 목적은 달성하였으나, 선교사역과 구호사역을 분리하여 시행하는 메노나이트 교회의 전통에 따라 아나뱁티스트 운동은 이렇다 할 교회운동으로 정착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990년대에 직업훈련 학교 동문을 비롯하여 메노나이트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기독교인들이 생겨났고, 캐나다 메노나이트 교회와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공식적인 교류는 1996년 캐나다 메노나이트 교회로부터 선교사가 파송되면서 재개되었다. 이러한 관계속에서 한국 메노나이트 교회에 대한 관심이 싹트게 되었고, 현재 캐나다와 미국 메노나이트 교회는 물론 세계 메노나이트 교회 협의회 Mennonite World Conference와 형제애를 나누고 있다. 현재 한국 아나뱁티스트와 전 세계의 메노나이트 교회는 가능한 여러 형태를 통해 형제애를 나누고 있다. 무엇보다도 성서가 말하는 교회회복을 꿈꾸며, 제자도, 평화, 공동체의 핵심가치를 실천하는 자생적인 아나뱁티스트 운동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고 있다.

비록 한국에서의 활동이 구호활동을 중심으로 펼쳐졌지만, 성서의 관점에서 보자면 세계 도처의 어려움과 돌봄이라는 필요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3) 아나뱁티스트 제자도

위에서 설명한 열두 제자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명령(마태복음 10장)과 기타 복음서의 내용을 살펴볼 때, 우리가 알고 있는 제자도와 성경이 알려주는 제자도는 사뭇 다름을 알 수 있다. 역설적이지만 제자도discipleship란 무엇인가? 를 정의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 중에 무엇이 제자도가 아닌가를 설명함으로써 제자도를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다음의 설명은 그 몇 가지 예이다.

  1. 제자도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2. 제자도는 교회성장학의 어떤 분과가 아니다.
  3. 제자도는 학생에 관한 무엇이 아니다.

이를 좀 더 상세하게 부연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제자도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우선 제자도는 어떤 특정한 교회의 프로그램이나, 학교에서 전문적으로 양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위해 학교를 개설하지 않고 삶의 자리를 내어 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제자도는 교회에서 막대한 예산과 뜨거운 열정과 몇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만들어 내면 되는 그 어떤 프로그램이 아니다. 그러므로 제자학교, 제자훈련프로그램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2. 제자도는 교회성장학의 어떤 분과가 아니다.
특정한 교회에서 교회 성장을 위한 방식으로 제자를 양성하기 위해 어떤 분과를 마련하여 제자들을 배출한 적이 있다. 제자 훈련 과정으로서 인기를 구가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것처럼 제자도는 훈련 프로그램도 교회성장을 위한 도구로는 더더욱 사용되어서도 안 되고 그럴 수도 없다. 교회 성장은 성령께서 일하시는 결과물이지, 그 자체로 목적이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만큼 현재 교회는 제자도에 대한 오해를 하고 있거나, 진정한 의미의 제자가 결여된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제자도는 학생에 관한 무엇이 아니다.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제자도는 학생에 관한 무엇이 아니라, 제자로서 선생님의 길을 따르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과연 선생의 길은 무엇인가 질문할 수밖에 없으며, 그 선생님의 모습에 따라 제자도가 결정되는 것이 당연하다.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유일무이한 선생님, 주인, 교사가 누구이며 그 가르침의 본령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간디가 그리스도인들을 두고 한 말로 인해 뼈아픈 상처를 안고 있다. “나는 예수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닮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기독교인이 예수와 같이 행했다면 저는 기독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I like your Christ. I do not like your Christians. They are so unlike your Christ.”

간디의 지적처럼 우리가 말로 “예수는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아주 쉽다. 그러나 삶으로 “예수는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렇다면 과연 제자도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 제자도는 매우 실제적인 모습으로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표현되어야 한다.
  • 그러므로 제자도는 매일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어야 한다.
  • 또한 그 모습은 어떤 프로그램이나 도구가 아니라, 또 누군가에 의해 통제되거나 조정되는 모습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본받는 모습이 자발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이러한 내용은 16세기에 1세기 교회의 모습을 다시 복원하고자 노력했던 아나뱁티스트의 삶에 잘 드러나 있는데, 무엇보다 아나뱁티스트가 말하는 제자도는 아주 단순하며, 성경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다지 낯설지 않을 것이다. 사실 16세기 아나뱁티스트들이 모진 박해를 받은 이유는 가톨릭이나 개신교 정부가 복음을 말한다하면서도 복음과는 너무 멀리 떨어진 당국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단순히 예수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라 살고자 하는 모습을 고집스럽게 반복한 것일 뿐이라서, 뭔가 기발하고 특별한 내용이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적잖이 실망스러운 모습으로 비치곤 한다. 이들의 제자도는 이론적인 정교함보다는 삶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습으로 자리하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조금 특이한 점이 있다면 아나뱁티스트 신학에서 제자도는 항상 십자가, 고난과 함께 이야기된다는 점이다. 이는 16세기에 아나뱁티스트들이 제자들로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아나뱁티스트들이 주장했던 제자도의 모습이 어떠한지 잠시 살펴보자.

한스 뎅크 (1500-1527)

한스 뎅크는 최초로 남부 독일의 아나뱁티스트 운동을 이끈 아주 매력적인 지도자 중 한사람이다. 그의 신비롭고 인간적인 성향은 루터의 가르침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그런 까닭에 그는 뉘른베르크에 있는 유명한 성 제발트 학교 교장으로 있는 동안에 ‘오직 믿음으로’를 주창했던 루터의 가르침을 신랄하게 비판하여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는 1526년 5월 아우스크부르크로 가서 후브마이어와 협력했고 프로테스탄트 당국에 의해 추방되어 스크라스부르에서 잠시 머무는 동안에는 보름스와 아우크스부르크 지역의 아나뱁티스트 지도자로 활동했다. 보름스에서 그는 구약의 예언서를 완역하는 일을 도왔다. 1527년 11월 전염병으로 사망하였다. 뎅크는 당시 혹독하고 증오스러울 만큼 맹렬한 논쟁에 휩쓸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저술은 영혼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특별히 한스 뎅크는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의 말씀에 복종해야 함을 Gelassenheit로 설명하였는데, 겔라센하이트는 그리스도의 권위에 온전히 항복함, 순종함, 복종함을 뜻하는 아나뱁티스트 신학의 핵심 사안이자 제자도의 정수이기도 하다. 그는 항상 “자신이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걸어가야만 한다.”고 제자도의 핵심을 설명하였다. 또한 “매일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는 결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아나뱁티스트로서 제자도를 가장 명쾌하게 설명한 내용이기도 하다.

조르그 바그너 (1527)

아나뱁티스트 리더 중 한 사람이었던 조르그 바그너는 아우스분트 찬송집에 다음과 같은 가사를 썼다.

누구든지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세상의 모욕과 고난이라는 수모를 겪어야 하며, 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네.

이것만이 보좌로 나아가는 길,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길.

그리스도의 종들은 죽기까지 그를 따르며

그들의 몸을 십자가 위의 삶과 죽음에 내어주어야 하리.

금이 정련되듯이 그리스도의 종들도 발의 시험을 견뎌야 하리.

모든 것을 포기하되 십자가는 선택해야 하며,

십자가를 붙들며 가정, 자녀, 아내 등 다른 모든 것을 버려야 하리.

이익을 포기하고 고통을 잊는 종들에게 생명이 주어지리.

이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 제자도의 내용은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로 요약할 수 있다.

마이클 잣틀러 (1490-1527)

스위스 형제단의 중요한 지도자이자 전도사였던 마이클 잣틀러는 1526년에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다. 그는 1527년 슐라이트하임에서 열린 아나뱁티스트 비밀 회합을 주관했고, 아나뱁티스트 역사 상 최초의 고백서로 알려진 슐라이트하임 고백서를 입안했다. 이 고백서는 주로 제자도, 새로운 공동체의 생활과 질서에 대한 질문을 다루고 있다.

이 회합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회의에 참여했던 다른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로텐부르크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의 재판과 사형은 아나뱁티스트 순교자들 중 가장 유명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높은 학식과 겸손한 비폭력 그리스도인이었다. 그에 관한 많은 기록이 있지만, 조르그 바그너처럼 그가 쓴 찬송가 가사가 아우스분트 찬송집에 실려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진정한 가르침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실 때,

그리스도께서 무리를 불러 모으실 때,

그리고 인내심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예수께서 우리에게 너희 참된 제자들은 매일의 삶을 점검하고 주의하라고 하셨네.

나보다, 나의 말보다 세상의 것을 더 사랑하면 내게 합당치 않으리.

…….

나의 말을 따르면 세상은 너희를 박해하고, 욕하고, 죽이게 될 것인데,

너희를 위해 상이 준비되어 있으니 기뻐하라!

누가 그리스도를 따를 것인가?

한스 후트 (1485-1527)

한스 후트는 남부 유럽의 유능한 아나뱁티스트 전도사로 다른 지도자들 전체가 인도한 사람들 수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회심시켰다. 그는 오스트리아와 모라비아에 존재했던 모든 아나뱁티스트 그룹을 시작한 사람이었다. 무역업을 경영하는 제본업자이자 도서판매상이었던 후트는 여행을 하면서 1520년대의 종교적 격동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1526년 한스 뎅크에게 세례를 받은 후, 아우크스부르크로 갔다. 그 후 18개월 동안 설득력 있는 순회 전도사로 활동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이끌었으며, 많은 재능 있는 리더들을 아나뱁티스트 운동으로 이끌었다. 1527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며, 감옥의 화재로 목숨을 잃었다. 그는 로마서 8장 17절을 근간으로 “누구든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진정으로 알기 원한다면,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자신에게도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해야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려면 그와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한다.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뜻”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레온하르트 시머 (1500-1528)

초기 아나뱁티스트 리더이자 평화주의자로 그의 글 역시 초기 아나뱁티스트 찬송가인 아우스분트에 남겨져 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경험하신 것과 똑 같은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선생님보다 제자가 더 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신 것은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신 것으로 우리도 그의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 그는 죄가 없으시고 그 입에 간사한 말이 없으신 분이시다. 그럼에도 그는 육체적인 질고를 짊어지셨다. 우리가 죄를 지어서 받게 되는 고통으로부터 자유하려면 스스로 준비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고난 그 자체가 우리를 죄에서 자유롭게 만들지 못한다.”고 하면서 제자도와 그리스도의 고난을 분리시키지 않았다.

한스 스라퍼 (???-1528)

가톨릭 사제였다가 아나뱁티스트가 된 한스 스라퍼는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침을 따르며 받게 될 고난을 준비해야 한다. 그럴 때 그리스도께서 하늘 아버지와 천사들 앞에서 그들을 모른다 하지 않으실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 하는 자는 나를 따라야만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들도 있어야 한다. 나를 따르는 자는 아버지께서 기억하실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는 자는 자신을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 간단히 말해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다. 이는 세상이 변한다 해도 결코 변치 않을 진리다.”라는 글을 남겼다.

제이콥 후터 (1500-1536)

모라비아 지역에서 활동했던 아나뱁티스트 리더로서 유무상통의 공동체인 후터라이트를 시작하였다. 모자를 만들어 파는 사람으로서 조지 블라우락의 뒤를 이어 티롤 지방의 아나뱁티스트들을 위한 목사가 되었다. 그는 박해가 한창이던 16세기에 모라비아가 아주 평화로운 지역이라는 소식을 듣고 티롤 지역의 아나뱁티스트 그룹과 연합하였다. 그에게 제자도란 성서의 가르침을 따라 그대로 살아가는 모습으로 이해되었고, 특별히 사도행전 2장의 가르침을 따라 기독교 공동체를 시작하였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독교 공동체들 중 하나로 알려진 후터라이트 공동체는 그의 이름을 따라 후터라이트가 되었다.

메노 시몬스 (1496-1561)

메노 시몬스는 16세기 네덜란드에 살았던 가장 중요한 아나뱁티스트 지도자였다. 그를 따랐던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따라 메노나이트라 부르게 되었다. 그는 아나뱁티스트 운동을 시작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2세대 아나뱁티스트 운동을 통합하고, 조직하고, 영적인 지침을 마련하였다.

1524년 그는 사제로 서품을 받았고, 곧 바로 몇 교구를 담당하였다. 네덜란드의 목회초기부터 화체설의 기적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된 것은 그다지 놀랄만한 일이 못되었는데 이는 주의 만찬에 대한 상징적인 관점을 변호하는 운동이 몇 년 동안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입장에 대해 성경의 확증을 찾은 후, 성경의 권위를 따를 것인지 아니면 교회의 전통을 따를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몇 년 뒤, 그는 세례를 다시 받았다는 이유로 아나뱁티스트들을 처형하면서 점화된 세례에 대한 관점을 바라봄에 있어 비슷한 위기를 겪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1531년, 그는 아나뱁티스트 입장이 맞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아나뱁티스트 운동에 가담하지 않았다. 아마도 당시에 이 운동이 점점 더 세상의 종말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가기 시작했고, 점차로 폭력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마침내 가톨릭교회를 떠난 것은 1536년에나 이르러서였다. 그는 비록 소행의 실수가 있기는 하지만 결국 자신들의 신념을 따라 고난과 죽음까지 받아들인 아나뱁티스트들의 용기를 따라 가톨릭을 떠나야 했다고 말하였다. 그는 세례를 받자마자 이내 네덜란드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아나뱁티스트의 중요한 리더가 되었다.

그는 뮨스터로부터 영광을 기대하다가 절망하게 된 여러 상처받은 심령들과 잘못 인도받은 아나뱁티스트들을 상대로 훈련받은 공동체를 이루도록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의 목에는 현상금이 걸려 항상 숨어 다녀야 했지만, 그는 말과 글로서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훈계하고, 설득하였다.

프로테스탄트들과 가톨릭에 의해 동일한 박해를 받으면서 그는 결국 1554년 홀스타인의 귀족의 영지에 은신처를 마련할 수 있었다. 말년에 그는 자신의 첫사랑이자 위대한 사랑인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글을 저술하고 출간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메노 시몬스는 위대한 학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저술들은 자신이 소유했던 믿음에 관해 분명하고 강한 어조로 기록되어 있다. 후브마이어와 마펙이 보다 훌륭한 신학자였지만 점도 없고 흠도 없는 교회를 위해 자신의 수고를 아끼지 않는 점에 있어서는 그 누구도 메노를 능가하지 못했다.

메노 시몬스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발자취를 따르며, 회개하고 위로부터 다시 태어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다. 이는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을 갖고, 그가 걸었던 길을 걸으며,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라야 한다. 누구든지 그보다 아버지, 어머니, 자녀, 혹은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합당치 않으며 그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1539년에 쓴 책 Foundation에서 그는 “나는 내 주께 공식적으로 고백합니다. 나는 그와 분리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만약 당신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았다면, 성령 안에서 믿음, 삶, 예배 등에 있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가 되지 못했다면, 여러분의 불쌍한 영혼들은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성경이 말하는 대로 가르치고 고백하는 것과 다른 모든 것은 당신을 속이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가 구원을 얻으려면 좁지만 올바른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 어떤 황제나, 왕이나, 제후나, 공작이나, 기사나, 귀족이나, 의사나, 목사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남자나, 여자나, 예외는 없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걸으셨던 길을 똑같이 걸어야 합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성령을 갖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대로 살지 않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함으로써 제자도는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대로 사는 삶으로 정의하였다.

또한 1540년에 제자도를 주제로 그가 지은 찬송이 있는데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이 세상에서 잠시 잔치를 누리기보다는.

바로의 창고에 있는 모든 것을 갖기 보다는.

나는 차라리 슬픈 상처를 선택하리라.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 고난을 선택하리라.

바로의 왕국은 영원하지 않으나,

그리스도의 왕국은 확실하고 영원하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팔로 자녀를 감싸 안으시며,

말씀으로 비판받는 성도들을 위로하시며,

신실한 자들을 보호하신다.

우리를 자유케 하시고

죄를 사하시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원수로부터 멸시를 받으셨으니

이제 원하면 당신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으리!

만약 당신이 불로 연단을 받는다면, 생명의 좁은 길로 들어가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며,

그가 하신 말씀을 굳게 붙들라.

만약 네가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으면,

사람들 앞에서 나의 말을 굳게 붙들면,

기쁨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다!

이상에서와 같이 아나뱁티스트 제자도는 그리스도를 따름과 십자가 및 고난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들에게 있어서 제자도는 보이지 않는 믿음을 보이도록 삶으로 드러내는 것이었고, 그러기 위해서 사랑과 복종(Gelassenheit)을 통해 그리스도를 매일 삶 속에서 따르는 삶을 살았다. ( 아놀드 스나이더, pp88-89)

4. 나가는 말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16세기에 아나뱁티스트 운동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운동과 아주 다른 점을 보인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제자도”라고 할 수 있다. 아나뱁티스트는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당연히 그의 길을 따라야 한다고 보았다. 그들은 제자도는 모든 영역에 걸쳐 요구되는 항목으로 이해하였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태어난 신자들이라면 하나님 나라의 기준을 따라 살아야 할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요청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성역이나 성속의 구분이 필요하다기 보다는 사회, 경제, 윤리적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의 모습은 당연히 서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들에게 교회의 경제정의 및 사회정의는 당연한 제자들의 삶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에도 아나뱁티스트들이 사회 운동에 관심이 많은 것은 그들이 사회운동을 일으켜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신앙과 삶이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드러난 모습일 뿐이다.

아나뱁티스트들에게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동,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활동 등은 모두 제자도와 연결되며 결혼 생활에 있어서도 제자도는 예외가 아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모든 것은 남녀 구분 없이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모두에게 요청되는 총체적인, 전인적인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보았다. (아놀드 스나이더, p232)

제자도에 있어서도 성령께서 남녀를 동일하게 부르셨으므로 동일하게 제자도를 요청하신다고 믿었다. 성령께서 부르실 때, 남자 여자 따로 구분해서 부르지 않으신다고 믿었다. Discipleship/Nachfolge (following after)는 결국 누군가의 뒤를 따르는 것 (335)이며 필그람 마르펙이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것처럼 사는 사람들이다.

이상의 내용으로 보아 “예수 따름”으로 요약 가능한 아나뱁티스트의 제자도는 결국 Christlikeness (예수처럼 되기)에 다름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처럼 되는 삶이어야 한다. 이것이 아나뱁티스트 제자도가 말하는 제자도다.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자라나는 것이 제자도다.

역사에 있어서 가정은 없다지만, 글을 마치면서 간디가 아나뱁티스트를 만났더라면 어떻게 말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해 나름의 상상력으로 답을 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만약 간디가 아나뱁티스트를 만났더라면…….., 아나뱁티스트들의 삶을 바라보며 뭐라고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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