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리본모임 보고

지난 5월 26일 화요일에 2020년 첫 리본모임이 있었습니다.
메노나이트의 ‘걸어다니는 리소스센타’ 김복기 선교사님이 번역하신 3권의 시리즈 책 <믿음>, <역사>, <실천>을 다루었습니다. 그 중에 <믿음>에 더 많은 할애를 했습니다.

강의를 녹화하여 유투브에 올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강의의 일부를 요약정리하였습니다.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다음 6월에는 23일 화요일에 전기호 목사님을 모시고 <함석헌 선생님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한번 더 시도하여 리본모임으로 하고자 합니다.
꼭 읽어 보시라고 강추드립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강의 정리 및 요약ㅡㅡㅡㅡㅡㅡㅡㅡㅡ

<믿음> <역사> <실천>

2020년 5월 26일 리본모임
김복기 형제님

(이 강의는 3권의 시리즈 중 주로 <믿음>에 대한 내용입니다. 강의정리요약내용은 실제 강의나 강사의 의도와 다를 수 있다는 점도 양해를 구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책은 답을 주지는 않습니다. 질문을 던지며 독자 스스로 답을 찾게 하는 여정의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은 메노나이트의 신앙과 실천에 대해서, <역사>는 메노나이트의 존재 방식에 대해서, <실천>은 메노나이트의 삶과 예배에 대해서 이야기를 풀어 갑니다.
아나뱁티스트 운동은 16세기 유럽에서 시작된 개혁운동으로서 매일 삶 속에서 예수를 따르는 실천을 강조한 운동입니다. 그래서 유아세례를 도전하며 신자들의 세례를 강조했습니다. 메노나이트들의 신앙의 기초이자 핵심가치는 공동체, 제자도, 평화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세례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기존의 가치에 도전을 주는 개혁운동이 되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어디로 갈 것인가?의 도전 앞에 있습니다. 저는 예수의 길을 따름, 제자도가 그 도전에 대한 응전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 말하는 교회나 공동체는 가시적인 교회를 말합니다. 3권의 책이 공통적으로 견지하는 흐름은 이야기방식으로 사람들을 초청하고 자발성에 강조한다는 데 있습니다.

<믿음>
여러분에게 믿음은 무엇인가요? 내 믿음은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요? 성경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믿는다는 것은 의미가 없겠지요. 메노나이트는 그래서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분별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아주 simple합니다. 그리스도가 가르치고 행하신 것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기에 한국교회는 그리스도로부터 너무 멀어졌습니다.
한국교회에서는 교리 논쟁으로 인해 예수교와 그리스도교로 나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메노나이트는 일상에서 어떻게 예수를 따를 것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교회에서 이단성을 판가름 짓는 기준으로 사도신경을 삼습니다. 사도신경을 고백하느냐, 하지 않느냐로 말입니다. 그러나 아나뱁티스트는 입으로 고백하지 않고 삶으로 고백하는 것을 기본으로 합니다.
한국의 ‘은혜와 평화 교회’는 사도신경에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 고난을 받으시고’로 고백되는 중간 부분에 예수님의 생애를 집어 넣었습니다.
기존의 믿음은 삶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해 침묵합니다. 성육신의 사역과 하나님나라가 이땅에 임하는 현장에 대해서는 생략된 신앙고백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메노나이트가 강조하는 것은 ‘Here and Now’입니다. 현장성을 강조합니다. 이 땅 위에서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강조합니다.
한국에서 아나뱁티스트에 대한 책은 90년대에는 딱 1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150여권의 아나뱁티스트와 관련된 책이 있습니다. 이 아나뱁티스트 책들인 매일 예수님을 따르는 삶과 공동체를 가르쳐 줍니다. 효율성이 아니라 신실함을 가르쳐 줍니다. (Being faithful as community)
그래서 메노나이트 교회에 가면 퀼트를 이용한 누비이불을 만드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옷을 계속 수선해서 고쳐 입고, 고쳐 입지만 더 이상 수선이 불가능한 옷은 누비이불을 만든느 곳으로 보내집니다. 이것은 절약하는 삶을 보여 주기도 하지만 이 누비이불이 상징하는 바는 일상생활 속에서 신실하게 살아가는 그들의 삶과 각기 다른 여러 story가 있는 아름다운 조각을 엮어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키는 것입니다. 자기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공동체가 되어 일상생활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아나뱁티스트의 관점은 성경을 읽으면서 형성된 것입니다. 16세기이전 대부분의 신자들은 자국어로 성경을 읽을 수 없었습니다. 그럴 때에, 아나뱁티스트드은 그들만의 포켓 성경을 자국어 만들어 냈습니다. 온타리오주에 가면 “Amish 박물관”이 있습니다. 루터가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한 때는 1531년인데, 아나뱁티스트는 그 이전에 이미 포켓용 성경을 만들어 복음서를 1529년 번역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사건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열심히 읽고 성경교사들과 debate를 하면서 성경해석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p. 62부터 보면, *성경은 생활의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성경은 교회에 속해 있다.
*신약은 구약을 해석한다: 그리스도 중심적 성경읽기
*생명의 책: 우리는 제자가 되기 위해 성경을 연구한다.
*공식의 안전지대를 넘어서 지속적인 과정으로서의 성
경해석

아나뱁티스트들은 삶이 변화되고 고쳐지지 않으며 세례를 주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를 오랫동안 연구한 알란 크라이더 박사는 believing- behaving-belonging에서 신앙을 갖기로 하고 점검기간을 3년이나 가졌던 초대교회에 대해 알려 주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기 위해서 그런 점검의 시간을 갖는 것을 놓쳤습니다.
성경 안에서 제자라는 것도 놓쳤습니다. 성경은 제자가 되기 위해서 읽는 책이며, 성경연구는 평생동안 진행되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필수행동입니다.
한국교회는 목사님에게 설교권과 축도권이 있어서 그 부분을 내려 놓는 것을 어려워 합니다. 만인제사장설을 믿고 행동에 옮긴 사람들이 아나뱁티스트들입니다. 그들은 성경 이외의 것은 없었습니다.

신자들의 세례의 핵심은 유아세례 거부가 아니라 신자들의 세례를 하자는 것입니다. 제도로서도 아니고 누구의 가르침에 따라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신자의 세례를 통한 거듭남이 말로만이 아니라 목숨을 거는 작업이었습니다. 그러나 313년 콘스탄틴의 밀라노 칙령이후, 유아세례는 국민의 의무가 되었으며 자연스럽게 호적신고의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지 않을 경우, 국가에 대한 명령 불복종이 되는 범법행위가 되었던 때입니다.
진정한 세례는 정체성이 변화되어, 내가 더 이상 죄인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새사람으로 살아가는 첫 단추가 됩니다.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 때문에 부활의 생명으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분자체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으며 그 생명의 삶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건강하게 그리스도의 공동체로서 자신의 연약함은 공동체의 징계를 거치면서 성숙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세례를 통해 신분과 정체성의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보통 교회에서는 세례를 2종류로 봅니다. 하나는 물세례, 다른 하는 불세례입니다. 아나뱁티스트는 여기에 피세례를 덧붙입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하며 실제로 그들의 신앙으로 인해 죽음으로 연결되기도 하였습니다.
슐라이트하임 고백서(1527)를 작성한 리더들은 모두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이 모임을 순교자들의 모임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21세기는 유아세례를 여전히 베푸는 교단도 있고, 대신에 헌아식을 하는 교단이 있습니다.
아나뱁티스트교회는 헌아식을 하는데, 헌아식에서는 부모의 신앙을 묻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아이가 내 아이이기도 하지만 공동체의 아이이기도 한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제자도로서의 믿음은 매일 예수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말씀묵상을 철저히 합니다. 메노나이트 사람들은 각자 말씀 묵상을 하고 나서, 가족들이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나눕니다. 바쁜 사람들은 <rejoice>라고 하는 책자를 활용하여 묵상을 합니다. 말씀 묵상이 메노나이트 사람들의 신앙의 근간이 됩니다.
생각뿐 아니라 삶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작은 것도 놓치지 않고 예수의 제자로 살아갑니다.
구세주라는 고백 보다 주님이라는 고백이 더 강합니다. 매순간에 예수를 주님으로 인정하는 삶입니다.
믿음에는 2종류의 믿음이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과 행함이 있는 산 믿음입니다.
2006년 니켈 마인즈라는 곳에 아미쉬 총격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때, 학교에 있던 아미쉬의 어린 소녀들이 사망하거나 총상을 당했습니다. 이 사건은 용서의 실천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아미쉬들이 용서를 실천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주기도문을 외우는데 그치지 않고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New creation이라는 말을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보아 왔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창조라는 말로 메노나이트들은 이해합니다.
새로운 창조 속에는 구체적으로, 윤리적으로 우리의 삶이 점검되는 것입니다.
제자도는 개인적일 뿐 아니라 공동체적입니다.
discipleship에 stewardship이 함께 따라 다닙니다.
일에 대한 충실함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바로 아나뱁티스트들입니다. 영육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통합적으로 봅니다. 그래서 평화의 복음이 됩니다.

메노나이트들은 교회를 가시적인 교회로 회중중심의 교회를 이룹니다. 춘천의 예수촌교회가 한국에서 25년간 그런 회중교회로 정착해 왔습니다. 교회는 늘 언제든지 함께 식사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져야 하며 삶이 나누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local church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에게 상호책임을 질 수 있는 관계가 됩니다.
의식으로서가 아니라 자연스레 성찬식이나 훈계(권징), 세족식등이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역사>
이 책은 초대교회에서부터 현재 21세기 메노나이트 교회까지의 내용을 이야기로 풀었습니다.
원래 교회는 운동이었습니다. 교회는 조직이 아닙니다. 특히 코로나 이후, 제도교회, 조직교회, 건물교회는 무너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운동성을 가진 작은 교회, 시골교회가 살아남습니다.
역사 속에서 볼 때, 운동으로 자기 집을 지을 때, 교회는 생명력이 있었습니다.
아나뱁티스트는 대항문화, 대안문화, 대조문화로서 교회 안에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내면의 확신 말고, 표시나는 문화가 없습니다. 비그리스도인과 차이가 나는 삶의 형태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나뱁티스트는 이런 기독교 안에 제 3의 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개인과 공동체의 회심을 다 강조합니다. 한쪽만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항상 질문하고 분별하는 공동체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제자도의 수준이 높아집니다.

<실천>
교회에는 6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연결하는 의식의 기능(ritual)
교육의 기능
구제구호의 기능
상담의 기능
교제의 기능
공동체의 기능

하지만 이 모든 기능들이 사회에 넘겨지고 있습니다. 코로나 이후 시대에는 “영성”만이 분명한 색을 가진 교회의 기능이 될 것입니다.
영적인 기능을 잘 감당하기 위해 작은교회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시간 관계상 <역사>와 <실천>은 가볍게 소개하는 형식으로 이어졌고 강의내용을 다 요약하지 않았다는 점 주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