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리본모임 보고

11월 리본모임을 끝으로 2019년 리본독서모임을 마무리했습니다.

2019년 마지막 강사님으로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의 김형원교수님께서 오셔서 10여 년 고민하신 주제인 소명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한국교회가 오해하고 있는 ‘소명’에 대한 교정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고, 나이를 초월한 우리를 일상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소명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강의를 들으며 받아적은 내용을 올려봅니다. 본 강의와 다른 내용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즐독하세요!b_8afUd018svc11qxsxut49y5u_sp0ezp소명, 그 거룩한 일상

 

김형원 교수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하나의 교회 담임목사)

 

 

소명이라는 주제는 10여 년 전부터 관심을 가진 주제였습니다.

교회에서 소명스쿨이라는 과정을 6-8주 진행했습니다. 2017년에 성서한국에서 3일간 이 주제로 전체 강의를 했었습니다. 그것에 살을 붙인 것이 이 책 <소명, 그 거룩한 일상>이며, 10여 년의 고민의 과정이 고스란히 담긴 책입니다.

 

소명은 교회에서 아주 익숙한 주제입니다. 청년들에게도 귀에 익숙한 주제입니다. 보통 vision이라는 말과 함께 말입니다.

저는 신학을 하면서 목사님이나 강사님들이 말씀하신 소명이 성경에서 말하는 내용과 ‘맞나’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소명이라는 말은, 제가 신학에서 시작한 사람이면 캘빈이나 루터로부터 시작했겠지만 목회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삶과 연관된 말로 이해가 됩니다.

 

한국교회에서 소명, 비전은 거창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청년집회에서 다니엘이나 요셉은 항상 소환되는 인물입니다. 바울이 소환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전임사역자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반면, 다니엘과 요셉은 전임사역자도 아니고 세상적인 관점에서 봐도 지위가 나라에서 서열 2, 3위로 높이 올라간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이나 베드로는 청년집회가 아니라 선교한국에서 소환되는 사람입니다. ^ ^)

한국에서 ‘다니엘’은 정말 바쁩니다. 다니엘 기도회, 다니엘 학습 등. 둘 다 잘못된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별명이 ‘꿈꾸는 자’입니다. 맞습니까?

재미있는 것은 꿈이 꾸고 싶다고 꾸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꿈은 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꿔지는 것입니다. 요셉은 어떤 꿈을 꾸고 싶다고 해서 꿈을 꾼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꿈을 꾸었던 것입니다. 요셉의 의도와 전혀 관계가 없었습니다.

 

17살의 요셉에게 꿈을 물었다면 부모님과 함께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라헬의 늦게 낳은 자식이였기에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전혀 예기지 못 하게 팔려가고 감옥에 갇히고 꿈을 해석하다가 총리까지 되었는데 요셉은 한번도 자신이 총리가 되어야지라고 꿈꿀 수 있는 사람이 아니였습니다.

 

청년집회에서 요셉을 소환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형제를 보고, 베냐민을 보고 요셉은 통곡을 하지 않습니까? 그게 요셉의 정확한 정서입니다. 요셉은 비전이나 소명과 관계가 없는 사람입니다.

삶을 살다보니깐 기근이 들고 형제와 부모님을 모시고 와서야 자신의 굴곡진 인생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내 고향은 저기인데 내가 여기 왜 이러고 있지?’라고 고민했을 것입니다.

형제들을 만난 요셉은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는 소심한 복수였습니다. 둘째는 소망이었는데, 베냐민과 아버지를 볼 수 있다는 소망이었습니다. 그 때에 비로소 내 삶이 꼬여서 이렇게 흘러온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오스 기니스가 ‘소명’에서 우리의 삶이 살아질 때는 잘 모르고, 돌아볼 때야 퍼즐이 풀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며 살아왔는지는 정말로 중요합니다. 뒤돌아 보았을 때,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요셉은 절대로 자신의 꿈을 위해 애쓰고 노력한 사람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 하신 것을 요셉을 고백합니다. 요셉이 마치 자기가 한 것처럼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신성모독입니다. 한국교회가 청년을 기만하면 안 됩니다.

 

그렇다고 요셉의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요셉의 성품, 신실함은 우리가 배워야 할 큰 장점입니다. 언제 그 성실함을 볼 수 있습니까? 바로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입니다.

사실 유혹이 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집안의 실세는 보디발이 아니라 아내였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유혹 속에서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할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도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형들이 자신을 팔고, 노예신세로 하루 아침에 전락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을 했는가? 그 때 하나님이 나를 돌보신다는 것을 어떻게 고백할 수 있는가? 라는 회의가 가득할 법합니다.

어쨌든, 요셉은 믿음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통해 들은 그 말씀을 붙들고, 시궁창 속에서도 그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요셉을 사용하시고 붙드신 부분이 이 부분이라고 믿습니다. 요셉은 언약의 그 끄트머리를 붙들고 있었습니다.

70명에서 60만명으로 대민족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요셉의 실날같은 믿음이 연유가 되어서 말입니다.

여기서 비전, 소명, 특별히 영웅적인 소명을 말하면 안 됩니다.

 

소명과 비전에 대한 또 하나의 오류는 소명을 성직과 관계된 목회적 소명이라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이런 소명에 대한 오해로 인하여 목회자들이 선택받은 특권층으로 있게 됩니다. 종교개혁가들이 만인제사장설을 주창했으며 그것은 종교개혁의 중요한 개혁포인트였습니다. 중세 가톨릭을 무너뜨릴 수 있었습니다.

500여 년이 지나서 한국 개신교는 중세 시대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이 성직적 소명관을 깨야 합니다.

어떻게 하다가 목사가 되었습니까?라는 질문을 저는 개인적으로 많이 받습니다. 어쩌다 목사가 되셨어요?는 종종 받는 질문입니다. 거기에는 2가지 뉘앙스가 들어 있습니다. 의도가 뭘까요?

하나는 서울대 나와서 왜 목사가 되었나? 즉 잘 나갈 수 있었는데… 라는 뉘앙스로서 목사를 비하하는 의도가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그런데도 목사가 되었다면 엄청난 은혜와 섭리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습니다. 특별한 선택이 있었다고 말하면 힘이 생깁니다. 이것은 속고 속이는 것입니다.

목사는 고생을 하도 많이 했기에 어쩌다 목사가 되었습니까?라고 종종 묻는 것입니다.

저는 정확히 그 대답을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다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면 ‘그러니깐 부흥이 안 된지!’라고 반응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경영학을 하는 것과 목사가 되는 것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소명 중에서 성직적 소명과늘 깨뜨리면 모든 일이 다 소명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이 아니라, 그 일을 어떻게 하느냐가 훨씬 중요합니다.

성경은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목사나 선교사가 제대로 못 한다면 더 큰 벌을 받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 하나님이 주신 소명입니다. 그 일을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섬기는 마음으로 하십시오.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종교개혁을 통해서 소명이 일반화되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여러분이 가진 직업이 다 하나님의 거룩한 소명이 됩니다. 이 말까지는 맞는 말입니다.

루터는 직업의 고귀함을 재발견했습니다. 그러나!!!! 딱 여기까지만 OK!입니다.

 

그 다음에는 직업만이 소명이 되어 버렸습니다. 직업이 없는 사람도 있고, 직업적인 활동을 안 하는 사람도 있고, 직업을 가질 수 없는 어린 사람들, 신체적 정신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

사회에서 직업을 못 가졌다면 하나님 앞에서도 소명이 없는 것이 됩니다.

중세시대나 지금의 제 3국에 가면 어린이 노동이 일상이 되어있습니다. 그 어린이들은 하루종일 일해야 1달러를 법니다. 돌을 깨는 일이 보통입니다. 돌을 깨면 그것이 건축자재가 됩니다. 망치만 쥘 수 있으면 하루종일 아동도 노동을 해야 합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30대가 되어도 대학생일 경우가 있습니다. 직업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 이들은 하나님의 소명과 상관없는 삶을 사는 것인가요?

요즘은 100세 시대입니다. 80세는 일찍 돌아가시는 편입니다. 사회가 변하면서 일의 개념도 바뀌었습니다. 직업이 없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일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소명이 사회에 구속당하고 있습니다. 소명을 직업 속에만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소명은 훨씬 큽니다. 직업이 아닌 것도 통합됩니다. 직업적, 성직적, 영웅적 소명은 모두 오류입니다.

 

소명은 무엇입니까?

소명은 다중적 소명이 맞습니다. 소명은 하나가 아닙니다. multiful calling이 맞습니다. 이것은 굉장한 개념의 전환입니다.

소명으로서 우리가 감당할 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다양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과 관련이 있습니다. 소명과 관련이 없는 우리의 삶은 없습니다.

 

—거룩한 삶에의 소명

우리를 부르실 때, 일을 위해 부르시기 보다는 어떤 사람이 되길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Doing 보다는 Being이 먼저인 것입니다. 예수가 제자를 부르실 때도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가서 뭔가를 하게 하셨습니다. 먼저 하신 일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일이었습니다.

제자훈련의 기초는 Doing이 아니라 Being입니다. 먼저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거룩이라는 단어는 중요합니다. 특별히 호렙산에서 모세를 불렀을 때, “네가 밝은 땅은 ‘거룩한 곳’이니 네 신을 벗으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때문에 거룩한 곳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뵐 때, 제사장도 목욕하고 규정을 지켜야 했습니다. 지성소를 들어갈 때는 방울과 줄을 매달아서 들어갔습니다. 그것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피조물과 다른 하나님! 범접할 수 없는 존재!

존재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룩함이란 존재 자체가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거룩하다는 것은 ‘존재’에 대한 의미입니다. 그래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달라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를 거룩한 자라고도 하고, 거룩한 자가 되라고도 합니다.

의롭다라고도 하고, 의롭게 되라고도 합니다.

구원을 받았다라고도 하고, 구원을 받으라라고도 합니다. 마치와 ‘왕자와 거지’의 동화처럼 신분은 바뀌었지만 행동이 안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우리가 의인임과 동시에 죄인이라고 합니다. 즉 도덕적, 윤리적으로 구별된 자로 살라고 합니다. Being의 측면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인격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성품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은 은사와는 구별됩니다.

은사를 발휘하는 것은 그 사람 자체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 사람과 관련된 것은 그 사람의 삶에 연관된 열매인 것입니다. 이런 성품의 열매가 거룩한 삶입니다.

세상과 다르게 살아가는 방식 (로마서12:1-2) 즉,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living sacrifice로 살아가라고 합니다.

그 방식은 이 시대의 가치관을 따라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높은 자리에서 부려 먹을려 하지만 너희는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높은 데 있을 수 있지만 섬기는 삶의 방식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선생의 자리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권위를 섬기는 방식으로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사자으로서, 교장으로서 각자의 위치에서 섬기는 것이 어떤 것인지 고민을 해봐야 합니다. 어떻든 세상의 고정관념적 사고에 대해 문제제기를 해야 합니다.

 

한국의 부모는 자녀입시에 대해 올인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가느냐는 다른 문제인 것입니다. 원하는 것을 못 얻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을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식” 이것이 아니라면 놓은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일상적 소명

진정한 소명과 대조되는 영웅적 소명입니다.

우리는 뭔가 하는 것에만 꽂혀 있습니다. 역할이 있습니다. 집에서나 교회에서 내가 원치 않는데 요구되는 역할과 일이 있습니다.

내 친구가 대학을 못 갔습니다. 우리 시대만 해도 70%는 고졸 후, 직장을 잡았습니다. 내 친구는 대학을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한량이라 돈을 가져다 주지 못 했기에 이 친구는 대학갈 엄두를 내지 못 했습니다. 그리고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대학을 가려고 시도했다가 원하는 대학에 가기 쉽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고 결국 포기했습니다.

지금 직장생활한 지 38년 째입니다. 10여 년을 친정을 위해서 일했고 나머지는 자녀를 위해 일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그런 희생을 경험한 많은 처자들이 있습니다. 공장에서 일한 여성들, 버스 안내양 등은 대부분 10대 후반이었습니다. 그 분들은 어떻게 소명과 관련된 이해를 자신의 삶을 보면서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 분의 삶이 하나님의 소명을 성취하는 삶이었다고 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주변사람을 섬기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 즉 수평적으로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수직적 섬김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힘이 없고 약한 자를 섬기는 것이 ‘나’를 섬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졸이후 38년 째, 쉬지 않고 일한 내 친구가 더 소명의 삶을 잘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이사’가 되었는데 도와주어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아져서 쉴 수가 없다고 하니, 더 소명의 삶을 잘 살고 있습니다.

자기의 삶을 녹여서 다른 이를 섬겼잖아요.

일상적인 삶이 거룩이며 소명인 것입니다.

이 세상의 많은 ‘경단녀들!“ 엄마는 대체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신앙적인 관점에서 아이들을 낳고 키우는 것은 소홀해지기 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사회적으로 알아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하나님 앞에서 고민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소명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육아는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입니다. 어머님들이 자기 인생을 갈아서 준 것입니다. 이게 소명의 삶인 것입니다. 사회가 알아 주지 않는다고 해서 기독교가 따라가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의 가치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가치입니다. 사회적 잣대로 무시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귀하고 의미있는 삶을 산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의 세대의 노고를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너무나 귀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일상의 소명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50대 중반의 교수가 있었습니다. 너무나 잘 나가는 유망한 교수였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유전적 병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아내의 케어를 위해 그의 찬란한 career를 모두 접었습니다. 그리고 신학계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신학의 꽃을 피워야 하는 그 순간에 사라졌습니다. 또 한분도 아내가 류마티즘 때문에 건조한 아리조나로 가야 했습니다. 50대 중반에 유명한 신학교에서 작은 신학교로 옮겨 가셨습니다. 본인의 경력을 아내의 건강을 위해 포기하고 이동하였습니다. 한국사회는 남자의 일만을 소명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multiful calling! 자기 아내를 돌보는 것은 자기만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소명이 됩니다.

정말 믿음이 좋은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신앙의 저력은 정말로 무서운 것이며, 우리가 따라가기 어려운 것입니다. 공동체에서도 맡은 것이 작아 보여도 소중한 것입니다.

 

 

—비전적 소명

이것은 일상적인 소명을 넘어선 것입니다.

내가 안해도 되는데 부르시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변호사인데 난민들의 상황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는 난민신청자의 3%만이 난민으로 인정되는 곳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주업이 있으면서도 점점 그 일에 몰입하게 됩니다. 결국 난민담당 전문 변호사가 되기도 합니다.

가정주부도 노숙자나 장애인을 돕기시작하면 vision적 소명이 있는 것입니다. 일상을 넘어 안해도 되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이 비전적 소명의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직업적으로 왕의 의전담당 장관급 술맡은 관원이었습니다. 페르시아의 장관급으로 살아도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무너진 성벽을 구축해야겠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하면서 고생하며 성을 완성합니다.

안해도 뭐라하지 않지만 살다보면 그런 message를 받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소명을 잘 발견하게 됩니다.

 

거룩한 소명, 일상적 소명, 비전적 소명 (다중적 소명 multiful calling)이 맞고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좇아야 할 소명에 대한 바른 지침이라고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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