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강남순 교수님과 함께 리본모임 정리

어제 25일은 텍사스 크리스챤 대학의 교수님으로 계시는 강남순교수님이 오셔서 <예수는 페미니스트였다:책임적 기독인의 과제>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페미니즘에 대한 강의로 채워질 줄 알았던 시간은 실은 우리 크리스챤들이 놓치고 있는 삶의 긍정에 대한 도전들로 더 많이 채워졌습니다. 페미니즘에 대한 단순한 이해나 오해의 차원을 넘어서 최후의 심판에 판가름의 기준이 되는 삶의 실천 원리들을 간과한 제도화된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반성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약자를 연민의 마음으로 볼 수 있는 그 세심한 시선이 우리가 예수로 부터 배울 수 있는 삶이고 그 삶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는 도구가 페미니즘이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도전을 받았습니다.

교수님의 강의를 열심히 옮겨 적어 보았습니다. 함께 하지 못한 분들을 위해 강의내용을 임의로 정리하여 올려 봅니다. 도움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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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페미니스트였다: 책임적 기독인의 과제

6월 25일 리본모임 강남순 교수

한국에서 교회가 왜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묻는 사람이 많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집단을 보면 대부분 기독교인이 있기 때문이다. 국가인권위 해체를 위해 항의하러 매일 오는 사람들은 목사님들이다.

사람들은 기독교를 많은 종교 중의 하나라고 하지만 실은 많은 종교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없다. 서구에서 건너온 기독교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서구는 지역적인 서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경제, 문화적 영역의 서구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19세기 초에는 영토적으로 서구가 침범해서 식민지를 만들어 나갔다면 지금은 영토는 아니라 할지라도 문화적으로 깊숙이 침투해 있다. 이제는 서구와 비서구의 경계가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의 옷을 보아도 다들 서구 스타일의 옷을 입고 있다. 서구는 무소부재한 개념이다.

미국대통령의 영향력을 감안해 볼 때, 문자적인 의미는 아니라 할지라도 전 세계 사람이 미국 대통령 투표에 참여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그 이유는 그 영향력이 세계 곳곳에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미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 났는지 모른 척 할 수 있는 사치는 없다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세계의 유수한 인재들은 미국으로 유입되고 있다.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의 전체 1년 예산은 하버드 대학 도서관의 1년 예산 밖에 되지 않는다. 캠브리지에서는 교수라 할지라도 한 번에 몇 십권의 책 밖에 빌릴 수가 없다. 그러나 하버드에서는 한 번에 300여권을 빌릴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지식을 생산하는 미국의 대학들을 볼 때, 사회의 토대를 놓는 일을 미국이 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 안에서 기독교를 여러 종교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나?

이런 막강한 파워를 가진 서구의 초석을 놓은 두 사상이 있는데, 하나는 아리스토 텔레스의 사상이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이다.

서구에서 온 제도화된 기독교를 말할 때, 우리는 서구가 더 이상 “서구”가 아니라는 점과 기독교는 이 서구 사상의 중요한 초석 중의 하나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전제 하에 기독교는 어떤 책임이 있나?

예수 vs. 제도화된 종교로서의 기독교 안의 예수! 이 둘 사이에는 엄청난 갭이 있다. 우리는 2000년 전의 예수를 제대로 알기도 어렵고, 제도화된 종교 안의 예수를 따르기도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둘 사이의 중간 즈음에 있어야 한다.

니체는 제도화된 종교를 비판하면서 the first and the last Christian은 예수라고 말했다. 니체가 쓴 <Anti-Christ>라는 책을 읽어 보면 예수가 보여 준 “How to live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를 강조한다. 제도화된 교회는 인간의 삶을 부정하고 그 삶을 초월해 있는 무엇인가를 주기를 원한다.

그러나 예수는 삶을 긍정하는 존재이다. 생명을 긍정하는 존재가 바로 예수이다.

모든 제도에는 딜레마가 있다. 무엇이든지 제도화하자마자 운동에 위계가 형성된다. 그 조직을 운영하기 위해 고정해서는 안 될 것을 고정시키게 된다. 믿는 바에 교리가 생기고, 조직화 된다. 우리가 믿는 믿음을 조직신학의 미명 아래 여러 갈래로 나누어 놓았다. 신론, 기독론, 성령론, 교회론, 구원론 등등

글을 쓰지 않고 남기지 않은 유명한 두 사람이 있는데 그 중 한 명이 소크라테스이고, 다른 한 명이 예수다. 말은 화자의 현존이 필요하다. 그런 화자의 현존이 없는 ‘쓰기’는 오독과 오해에 항상 노출되어 왔다. 나의 강의를 들어도 여기 있는 사람 모두가 다 다르게 표현하고 강조점을 달리 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소크라테스는 쓰기는 부차적인 것으로 보았고, 말하기를 현존적인 것으로 보았다. 쓰기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소크라테스는 의도적으로 글을 쓰지 않았고 예수는 아마 쓰기를 못 했기 때문에 쓰지 않았든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쓰지 않았든지 간에 남긴 글이 없다.

니체는 포스트 모던 사고방식의 문을 열게 되는 한 구절의 말을 남긴다.

“사실은 없다. 오직 해석만 있을 뿐이다.”

그는 근대 인식론의 한계를 지적하며 현대 포스트 모던의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나의 강의를 듣고 똑같이 전달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들 자기가 아는 만큼, 자기 그릇의 한계대로 이해하고 그 말을 전달할 뿐이다.

그런 한계를 전제하면서 예수를 만나야 한다. 기독교는 전체 종교의 30%이지만 그 힘은 다른 종교와 비교할 수 없다. 그런 조건에서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은 한계가 있다.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알고 있다는 것은 제한된 것을 본다. 결국은 우리의 선택이 되는 것이다.

예수가 우리를 구속시켜(redeem) 주셨지만 우리도 이런 선택의 과정을 통해서 예수를 구속시켜 (redeem) 드려야 한다. 예수를 읽는 시각이 필요하다.

이 강의의 제목인 <예수는 페미니스트였다>라는 말은 레오나르드 스위들러라는 남성 신학자가 가톨릭 잡지에 1971년에 싣게 되면서 나온 말이다. 여러분은 예수가 페미니스트인가? 아닌가? 대한 대답을 어떻게 하실 것인가?….

이 대답을 하기 전에 생각할 것이 있다. 예수는 어떤 예수를 말하는가? 페미니스트는 무엇인가? 좋은 질문을 가져야 한다.

‘동성애를 찬성하십니까’ 이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다. (편집자 주:동성애에 대한 이해가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질문은 판단과 정죄를 낳기 십상이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은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을 것을 알면서 왜 그 나무를 만들었나?라는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다. (시를 읽으며 사실을 구하는 것과 같은 우를 범하고 있다.)

오늘 나의 강의는 예수는 누구인가? 페미니스트는 무엇인가?라는 이 질문을 생각하면서 열어가는 것이다.

예수는 삶을 긍정하며 많은 죄인들과 약자들과 이방인들을 환대했다. 그는 제도화된 종교에는 관심이 없었다. 최후의 심판을 다룬 성경본문을 보면 종교적인 냄새가 나지 않는다. 단지 목마른 사람, 배고픈 사람, 갇힌 사람들, 이방인들을 어떻게 대했는지에 대한 것으로 기준을 삼는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How to live with others와 관계된 기준들이다.

기독교는 이제 혐오와 저주의 교회가 되었다. 목사가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만약 예수가 목사가 되려고 했다면 그는 바로 1차에서 떨어졌을 것이다. 그는 세상의 고정관념이나 사회적 규범을 따르지 않았다. 그는 안식일에 대해 말하면서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이 사람을 위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종교의 눈으로 보면 아주 이단적이다. 그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이기도 했다.

따스한 연민을 가진 예수의 시선을 회복하면서 우리도 예수님을 구속해야 (redeem) 한다. 사람 취급을 못 받는 사람들을 살려 내야 한다. 선한 사마리안을 보라. 그는 지금 말로 한다면 무슬림이나, 무종교인이나 성소수자와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선한 사마리안을 언급하셨다. 종교적인 경계를 넘어섰던 예수님이시다.

교리라는 것은 하나의 가이드라인이다. 참고할 수 있는 사항이지, 절대화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실제로 교리는 계속 바뀌어 왔다. 기독교 안에서도 보면 성소수자를 인정하는 교회, 성소수자를 반대하는 교회가 있다. 기독교라는 말은 절대 단수가 아니다. ‘기독교들’이라는 표현으로 사용될 복수이다.

4복음서의 제한된 소스에서 어떤 예수를 만날 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나에게 누구인가? 예수는 해답이 아니고 질문이다. 소크라테스는 끊임없이 질문했다. 예수도 제자들에게 질문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개인적으로 예수님이 모두에게 반말하는 것으로 번역된 한국어 성경은 문화의 산물이다. 예수님은 아무에게나 반말하는 분이 아니셨다.) 이 질문은 굉장히 중요하다.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말합니까?“ 예수님은 각자의 생각이 어떠한지 궁금해 하셨다. 우리나라 교육에서는 내 생각은 중요하다고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을 이야기하는데는 뛰어나지만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것은 훈련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했다. 예수는 내가 누구라는 답을 주지 않고 듣기만 했다. 우리는 우리만큼만 이해한다. 사실을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레오나르도 스위들리에게 페미니스트는 무엇인가?

그는 이렇게 썼다. “Feminism is the radical notion that women are people.”

radical이라는 의미는 “going to the root”이다. 근원적인 뿌리에 접근하다는 뜻이다.

여성이 사람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여성도 사람으로서 모든 권리를 다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상식적인 말인데도 급진적이라는 말을 써야 했나? 그렇다. 너무나 상식적인 말인데도 여성도 사람이라는 말은 전혀 상식적이지 않은 가부장제에 이 사회가 물들여 있었다.

여성이 가장 먼저 찾고자 했던 권리는 참정권이였고, 그 다음이 교육권이었다. 지금까지도 참정권을 주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성인이 되지 못한 미성년자, 금치산자과 같은 사람이다. 이들은 자기 결정을 정확하게 할 수 없는 열등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성도 그렇게 열등한 존재로 이해되었다. 교육을 받는다면 남성과 여성의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교육이 확대되었지만 최근까지 열리지 않는 분야가 있었는데, 법대, 의대. 신학대였다. 이 모든 분야는 생명과 연관된 분야다. 여성들은 열등하기 때문에 이런 생명을 다루는 분야는 쉽게 문이 열리지 않았던 것이다. 1955년에 마지막으로 신학대가 여성에게 열렸다.

모든 종류의 혐오사상에는 두 가지 전제가 존재한다. 하나는 열등한 존재라는 생각, 다른 하나는 위험한 존재라는 생각이다. 여성혐오, 난민혐오, 성소수자 혐오 등 모든 혐오는 이런 패러다임에 갇혀 있다.

여성혐오는 남성만 갖는 것은 아니다. 가부장적 가치를 내면화하게 된 여성도 여성혐오사상을 갖는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페미니즘은 여자를 소중한 존재로 보는 입장이며, 모든 여성도 사람으로 보고자 하는 시각이다.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의 페미니즘을 따르는 것이다. 복음서에는 여성의 많은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예수의 주변에는 여성제자들이 따르고 있었다. 부활이 첫 증인들도 여성들이었다.

반면,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의 여성인식은 어떠했는가?

한 랍비는 이렇게 말했다. “토라가 여성에게 읽혀진다면 차라리 토라를 불태우는 것이 낫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사람의 숫자를 셀 때, 여성은 사람 수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 당시 성경기자들은 사회상을 반영하였다.

유대인은 하루 3번 기도 할 때, 이방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 무지한 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여성들의 존재는 비존재와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왜 존재했는가?

역사를 보면 두 가지 기대가 있다. 하나는 사창가 모델이다. Lookism(외모차별주의)을 통해 여성이 남성들에게 섹스어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느낌을 강요받고 있다. 그래서 경제가 아무리 어려워도 다이어트 사업과 성형외과는 망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 다른 하나의 모델은 농장모델이다. 여성을 출산과 육아의 책임자로만 보는 것이다.

시몬느 보봐르는 남성은 주체이고 여성은 타자라고 이 세상을 꼬집어 말했다. 남성은 First sex이고 여성은 second sex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주변의 여성을 보면, 부활사건의 증인도 여성이었다. 죽은 사람을 일으키는 사건에도 여성의 역할과 설득이 중요했다. 여성들에게 지적 활동이 허락되지 않던 시기에 예수님은 마르다의 강구에도 불구하고 마리아가 지적호기심으로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 예수는 혁명적이고 과격한 사람이었다. 고로 우리는 예수님을 페미니스트로 선택해야 한다.

바울은 양가적인 사람이다. 한편에서는 여성을 억압하는 표현을 쓰고 다른 한편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없다라는 말을 했다. 많은 성소수자와 여성혐오자들은 예수님을 인용하지 않고 바울을 인용한다. 다행히도 (물론 약간 위험한 소지의 표현들이 있기도 하지만) 예수님은 노골적인 차별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남성인 예수가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을까?

여성중심주의적 페미니즘 (gymocentric feminism)은 womanhood를 강조했다. 처음에는 ‘여성’과 ‘남성’만 보였는데, 너무나 다양한 intersectionality (교차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한 사람이 백인이고 남성이고, 이성애자이고, 기독교인이어서 모든 면에서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가 매우 가난해서 학교를 다니면서도 2-3개의 job을 가지고 힘들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페미니즘의 출발점은 gender였지만 모든 사람과 모든 형편은 교차성 (Intersectionality)으로 봐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당사자성’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당사자성만으로는 변혁을 일으킬 수 없다. 흑인 문제도 백인의 도움이 있었을 때 더 큰 변혁을 이끌 수 있었다.

사람중심주의적 페미니즘(humanistic feminism)이 있다. 이것은 humanhood를 강조한다. 이것은 feminism은 본질(essence)이 아니라 입장(position)이라고 본다. sex라는 말은 생물학적 성별을 말한다면 gender는 사회학적 성별을 말한다. 시몬느 보봐르는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지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다.

당사자성을 강조하는 곳도 있지만 당사자만의 힘으로는 변혁을 불러 일으키지 못 한다. 흑인, 여성 문제는 다 연대해서 일어났다. 동질성(sameness)의 연대에서 다름 (alterity: difference는 기준이 있어서 우열을 가리지만 alterity는 다름 그 자체를 타자로 보면서 그대로 인정하는 어휘)의 연대로 전환되었을 때 변혁의 힘이 생겼다.

우리가 에큐메니칼 운동을 많이 하지만 조심해야 하는 것은 공통점을 보면서 연대를 하다 보니 서로 고유한 다름(alterity)를 간과하거나 축소하게 된다.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절대 말하지 말아야 하는 두 가지 taboo가 있다. 하나는 성 (sex)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소수자문제이다. 균질성을 만들기 위해 편협하게 되는 우를 범한다.

예수를 페미니스트로 redeem해야 한다. 예수가 최후의 심판에서 말한 6가지 기준으로 볼 때, 그를 페미니스트로 만들어야 한다. 주류에 속하지 않은 사람과 연대하는 일이 필요하다. 장애인, 성소수자들, 아이들, 여성들..

책임적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바울교가 아닌 예수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먼저는 연민의 종교가 되어야 한다. 주변부를 연민의 시선으로 보아야 한다. 연민과 동정의 차이는 무엇인가? 연민은 영어로 compassion이다. 즉 suffer-with의 개념이 있다. 그러나 동정에는 시혜자와 수혜자가 생겨서 윤리적인 위계가 생긴다.

연민은 ‘왜’이런 일이 생겼는가를 묻는다. root question이 정의로 이어진다. 고통의 원인을 변화시키고자 연대하는 된다. 하지만 동정인 구제는 ‘왜’를 묻지 않는다.

둘째로는 책임성으로서의 종교가 되어야 하다. 예수의 최후의 심판을 보면 주변인들에게 어떻게 했는가에 관심이 있지, 교리부분을 확인하지 않으신다. 타자에게 어떻게 책임적인 삶을 살았는가? 교회는 구원 club이 돼서는 안 된다.

셋째로는 불가능성의 열정으로서의 종교가 되어야 한다. 가능성의 축과 불가능성의 축이 있은데 교회는 그 중간에 위치해야 한다. 새로운 소명감과 열정의 장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예수가 던진 how to live의 교훈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가 이 문제와 씨름하지 않았다면 죽을 이유가 없다.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편한 삶을 살기 힘들다. 사유하지 않고, 힘들지 않게 사는 사람은 자기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도 막는다. 한나 아렌트는 비판적 사고의 부재가 악의 뿌리라고 했다.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무지가 다른 사람의 존재를 악에 가담하게 만든다.

사람은 함께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나의 무지나 비판적 사고의 부재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이 유한한 삶에 어떻게 유의미한 삶을 살 것인가가 문제인 것이다.

예수는 노숙자였다. 성공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렇기에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고생길이다. 타자에게 무관심할 수 없고 타자에 대해 책임적 의식을 가지고 있기에 그렇다.

성경에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알 수 있는 단서를 하나 주셨다. 그렇다. 바로 “너희가 사랑할 때 (love one another)”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된다.

사랑이 뭔가? 골치 아픈 삶을 사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하나의 도구이다. 지적인 오만에 빠지라고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ism은 연장, 도구일 뿐이다. 이것으로 집을 지을 수도 있고 폭력을 가할 수도 있다. 사람을 살리며, 생명을 확장하는 도구로서 -ism을 관심을 갖고 공부해야 한다. 특히 페미니즘은 전 분야에 걸쳐져 있다. 예를 들어 약의 용량을 정할 때도 그 기준이 성인 백인 남성을 그 기준으로 한다. 여성은 제외되어 있는 상태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모든 분야의 문제를 볼 때 우리는 지적 패배주의에 빠지기 쉽다. 내가 뭘 할 수 있나? 이걸 한다고 뭐가 변하겠느냐? 등등

그러나 내 방에는 이런 글귀가 써 있었고 지금은 아예 내면화되어 있다.

“Small change can make a big difference.”

대부분의 씨를 뿌린 사람은 열매를 보지 못한다. 그저 내가 나를 보는 시각이 바뀌고 타자를 보는 시각이 바뀌는 것이 변화이다. 좌절은 조금 하고 변화를 위해 일어서자.

Redeem! 예수를 Redeem해야 한다. 제도화된 교회의 Christian보다는 예수의 삶을 따르는 Jesusian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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