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리본모임의 정리요약

지난 5월 23일 목요일에 ‘춘천 더불어 숲’이라는 기독인문학강좌모임과 ‘한국아나뱁티스트센터주관의 리본모임’이 연합으로 전 감신대 이정배 교수님을 모시고, ‘역사 위의 기독교, 역사의식이 사라진 기독교’라는 주제로 모임을 가졌습니다.

교수님의 많은 연구와 고심의 결과로 나누어 주신 귀한 말씀은 정말로 다 받아 적지 않으면 안 되는 소중한 글들이었습니다.
좀 긴 글이긴 하지만 함께 하지 못하셨던 분들도 읽으시면 중요한 통찰력을 얻게 되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눕니다.
즐독하세요! (물론 긴글 주의요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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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 교수님의 ‘역사 위의 기독교, 역사의식이 사라진 기독교’ 강의내용

세월호 이후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큰 교회가 세월호 가족의 친구가 될 수 없었던 것을 보았다. 오히려 작은 교회가 그들의 새로운 교회가 되었다. 우리 나라는 작은 교회가 희망이다. 그 작은 교회 안에서는 ‘탈성장, 탈성직, 탈교단’의 일들이 이루어진다.
500년 전, 개신교가 가톨릭 교회에 대하여 종교개혁을 이루어냈지만 이제는 개신교 안에서 다시 종교개혁을 해야 한다.  2019년은 3.1절운동이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섰는가?’ ‘우리는 독립을 했는가?’ ‘교회는 무엇으로부터 독립해야 하는가?’
‘나라는 무엇으로부터 독립해야 하는가?’

이제는 자본으로부터 독립할 시기라고 생각한다. 신학은 이런 질문 앞에 대답할 시기이다.
나는 세월호 이후 거리 신학자요, 거리 설교자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아픈 현장에 가서 거리 설교를 하다 보니 붙은 별명이다. 그리고 그 거리에서 한 설교가 33편의 설교가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을 거리에서 만났다. 이 33편의 설교가 책을 나왔다.

또 학교를 일찍 퇴직하고 나오니 읽고 싶은 책들이 너무 많았다. 그런 책을 중심으로 책을 읽었고 그 감상문을 에큐메니안 잡지에 실었다. 그 글도 33편이 되었다. 거기에는 분단체제에 길들어진 부분, 자본과 기독교의 싸움, 루터로의 회귀가 아니라 새로운 루터와의 만남, 페미니즘, 생태문제 등 기독교가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써보았다.

십년 전, 오늘 나는 ‘고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대하는 어느 장로의 이야기를 듣고 기독교에 대한 고민이 이어졌다. 그 장로는 “노통은 살아서도 우리에게 부끄러움을 주더니 죽어서도 우리에게 부끄러움을 준다”라고 말했다. 한 사람의 죽음 앞에 연민과 슬픔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차갑고 냉소적인 기독교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베드로전서 3:15에 보면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2가지를 고민해야 한다.
하나는, 우리의 소망은 무엇인가?라는 문제이다. 그것은 기독교의 essence는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영어는 기독교만을 Christianity라고 말하며 유일한 계시의 종교이고, 나머지는 다 사람이 말한 -ism이라고 표현한다. Buddhism, Hinduism, Islamism. 그렇다면 다른 종교와 분명하게 구별지을 수 있는 차이점 그 essence가 무엇이냐에 대한 부분을 고민해야 한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은 소망을 드러내는 방법과 태도에 대한 문제이다.

힌두교는 모든 개체가 신이다라고 믿는 종교이다. 개체 자체가 절대적이다. 이 말은 아무리 비천한 불가촉 천민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 ‘나는 곧 신이다’라는 확신이 있는 종교이다.
불교는 그런 힌두교의 절대성에 한계를 느끼고 나온 종교로서, 절대성 보다는 관계를 강조한 관계의 종교이다. 모든 것은 관계 가운데 존재한다라고 믿으며, 개체성을 부정한다. 고통은 집착에서 나온다. 세상에는 집착할 것이 없다. 개체성을 강조하는 실체론적 삶은 집착을 불러 일으킬 뿐이다. 관계성을 강조한 불교는 생태학적인 종교이기에 요즘 불교의 생태에 대한 관심이 많은 각광을 받는다. 불교는 상호의존적이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어떤 종교인가? 힌두교처럼 각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한다.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확신하며 하나님이 우리 안에 내재하신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불교처럼 관계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만큼 그 힌두교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궁극성과 불교의 관계성이 전부를 차지하지는 않는다.
기독교는 이 모든 궁극성과 관계성이 깨진 곳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기독교는 역사성과 우발성의 종교이다. 처음에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은 세상을 향해 한없는 애정을 드러내셨지만 노아의 시대에 세상은 노아가족만 남고 다 멸절된다.
하나님은 노아와 다시 약속을 통해서 관계를 정리하신다.
노아와 맺은 약속은 하나는 사람들의 눈에서 억울한 눈물을 흘리게 하지 말라는 것과 또 하나는 동물을 피 채 먹지 말라는 것이었다.
기독교에서의 인간은 처음부터 하지 말아야 하는 한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원초적인 한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근본적인 내용이다. 인간은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궁극성과 관계성이 깨진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그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는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의 출발점인 것이다.

중국한자에 보다를 표현하는 두 글자가 있다. 하나는 볼 見(견),이고 다른 하나는 볼 觀(관)이다. 볼 견은 낮에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것을 볼 때 사용하는 글자이고, 볼 관은 밤에 볼 수 있는 것을 뜻한다.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일부만 볼 수 있는 것을 말할 때 ‘관’자를 사용하는 것이다. 예수가 우리에게 말하는 신앙은 바로 이런 ‘관’을 갖는 것이다. 남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시야를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다.

독일말로 부활은 ‘생물학적 죽음’에서 살아 났다는 의미도 있지만, ‘사회의 총체적인 불의‘에서 새롭게 되었다는 의미도 내포한다. 90%가 이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기독교의 부활은 사회의 총체적인 불의에 대하여 부활한다는 의미로 이어진다.
“궁극성과 관계성”이 깨어진 곳에서 살고 있다라는 것을 보고(觀), 세 세상을 꿈꾸는 것이 기독교의 소망이다. 이것이 원죄의 진정한 현실이다. 기독교의 원죄는 태어나면서부터 죄를 짓는 존재라는 의미뿐 아니라, 기울어진 운동장과 같은 궁극성과 관계성이 깨어진 현실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말한다.

베드로전서 나오는 기독교의 소망은 이 자본주의 세상에서 그저 잘 먹고 잘 사는 것인가? 아니면 죽었다가 육체로 다시 살아나는 것뿐인가?
어느 대형교회처럼 3만5천원의 땅값이 3백5십만원이 되게 해다랄고 기도하는 욕심꾸러기가 되는 것이 소망이 아니다.
기독교는 이 기울어진 세상에 어떻게 관계성과 궁극성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하는 종교이다.
이제는 태도와 방법의 문제로 넘어가겠다.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
이것은 많은 목회자들이 호소하듯이 감정노동자가 되라는 뜻인가?
소망의 이유를 위해서 감정노동자로 살아야 하는 것도 포함되지만 우리가 묻고 답하는 모든 신학적 행위는 구체적 시간과 공간 안에서 행해진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우리가 말하는 신학이 변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 때 온유와 두려움이 생긴다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 바뀌면 우리가 주장하는 신학은 변화될 수 있기에 우리의 소망에 대한 대답은 온유와 겸손을 겸비한 두려움으로 준비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독립선언문에는 자기 我(아) 자를 쓰지 않고 대신 자기 吾(오)를 쓴다. ‘아’자아에는 창이 들어있다. 이것은 남을 배타하면서 자기를 보호하는 이기심을 드러내는 ‘아’라면 ‘오’자는 창이 없다. 배타하지 않는다. 우리 선조들은 독립선언서를 쓰면서도 압제하는 일본을 배타하지 않는 수용의 마음으로 독립선언을 하였다.
모든 신학적 대답은 시간적인 공간 안에서 일어난다. 끊임없이 묻고 대답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많은 교회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라고 하지만 정작 무엇을, 어느 시점을 초대교회라 할 것인가?
로마의 국교화가 일어나기 전인, 로마에 의해 핍박받던 시절을 의미할 것이다.
세상은 기독교가 로마를 기독교화 시켰다 생각하지만 실은 로마가 기독교를 로마화시켰다. 진짜 그리스도인들은 그 때 다 사막으로 갔다. 제도권 속에 들어간 기독교는 제대로 된 기독교가 될 수 없다.
국교화되기 전의 초대교회는 2가지 특성이 있었다. 하나는 해석의 다양성, 다른 하나는 복음의 정치학이다.
초대교회 당시는 성서가 정경화되지 않았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도마복음, 마리아복음 등 그들이 따르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그 공동체에서 읽히는 복음서가 있었다. 이런 다양한 해석이 공존했고, 다양성은 존중되었다.
도마의 복음서에서는 잃어버린 1마리 양이 죄인이 아니라, 그 잃어버린 1마리 양이 되어야 함을 이야기 한다. 교회가 제도화되려는 상황에서는 차라리 잃어버린 1마리처럼 소수가 되는 것이 낫다라는 말이다. 제도화, 군중화, 교권화되지 말고 자유의 길로 가라는 뜻이다. 함께 공존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마리아복음처럼 여성의 복음이 같이 공존했고 그들의 해석이 존중되었다.
초대교회는 마리아를 예수님의 제자로 세웠다. 이런 이야기가 마리아 복음서에서 많이 나온다. 여성에게 이런 역할이 주어졌던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가부장적 구조가 더욱 공고히 되면서 마리아의 이름은 점점 지워져 나갔다. 초대교회가 이렇게 해석의 다양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안에 그 해석을 하나로 묶어 주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것이 복음의 정치학이다.
교회는 로마지배 속에 있었다. 그래도 율법만 있으면 자유인이라고 생각한 유대인들은 스스로 속고 있었으며 ‘진리 안에서 자유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 했다.
로마의 제국이 그러했듯이 우리도 자본주의의 제국의 속박 가운데 살고 있다. 능력이 있으면 마음대로 사람을 부리며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 수 있다. 그러나 로마식민지에 살던 유대인을 향해 말씀하셨듯이,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자본주의의 논리대로 살면 안된다고 하신다.
초대교회의 기독교는 종을 부리는 것이 불편해졌다. 종의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로마제국에서 사는 기독교인들의 고민이었다. 가부장적 문제도 기독교인들에게는 고민이 되었다. 바울은 남편들에게 아내를 너 마음대로 하면 안된다고 권면한다. 일방적인 힘으로 아내를 제압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법제재는 없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은 가부장제가 불편해진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살면 제국주의와 가부장제가 불편해지는 것이었기에 해결해야 한다.
복음의 정치학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로마와는 다르게 살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도 자본주의에 살면서 자본주의와 씨름해야 한다. 돈을 펑펑 쓰며 하고 싶은 대로 살면 뭐라고 할 사람이 없지만 기독교인은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예수님은 천국을 비유하면서 포도원주인의 이야기를 비유로 든다. 아침에 온 사람이나, 저녁에 온 사람이나 동일한 삯을 받는다. 하루의 품삯은 누구나 필요한 것이죠. 하나님나라와 이와 같다. 체제 바깥에서 이 체제를 구하기 위해서 오는 삶이다. 교회의 메시지는 체제 밖에서 오는 이야기여야 한다.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어야 한다.

기독교인으로 세상을 살면서 불편하게 없다면 슬픈 일이다. 죄와 자본의 문제가 심각함을 깨닫고 그 체제 밖의 소리를 내야한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화하면서 획일성과 제국의 틀 안에 갇히고 말았다.
기독교 안에서 자본주의가 나왔지만, 자본주의가 기독교를 자본화시켰다. 기독교의 소망은 체제 밖의 이야기에서 힘을 얻는다. 영과 육을 나눌 수 없다. 신앙과 삶은 분리될 수 없다.
진정한 기적은 이기심으로 움추렸던 손을 펴는 것이 진정한 기적이다. 100세 되신 김형석 선생은 65-75세가 되어서 행복해졌다고 하셨다. 그 이유는 그때서야 자신의 손이 펴졌기 때문이라 하셨다.

기독교신학을 창조적으로 왜곡한 대표적인 두 사람이 있다. 한 명은 어거스틴이고, 다른 한 명은 루터다.
이들의 사고틀에서 벗어나 다른 기독교를 꿈꿔야 하는 시기에 당도했다. 어거스틴은 제국이 된 로마의 대표교구사제였다. 외부의 야만인들이 로마를 굴복시키는 것을 로마시민들은 목격했고 시민들은 분노에 찼다. 이 상황을 정리한 신학자가 어거스틴이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이 아니라, 저 하늘에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원죄의 개념을 강화하여 인간은 모두 죄인이라고 정죄했다. 원죄와 하나님 앞에서의 죄인이라는 말은 다른 말이다.
초기 교부들은 창1-3의 말씀을 보면서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했지만 어거스틴은 똑같은 본문을 보면서 원죄이야기로 만들어 버렸다. 목회자들에게 머리를 들면 안 되고, 교회는 계속 해서 원죄의 교리로 평신도의 머리를 숙이게 했다.
물론 어거스틴의 공로를 무시하고 싶지 않다. 그에게서 우리가 받은 유산이 많다. 하지만 어거스틴이 한 말을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 원죄(original sin)보다 창조의 원리(original blessing)을 강조해야 한다.

루터의 문제는 무엇이었나? 루터의 적은 가톨릭의 행위와 유대교의 율법이었다. 그래서 루터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였다. 하지만 지금 와서 루터의 ‘오직 믿음’이 루터시대의 ‘면죄부’보다 더 타락했다고 말한다.
천년이나 이어져 온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믿은 가톨릭신앙을 쉽게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은 구원비용이 적게 들었기 때문에 개신교에 빠르게 흡수될 수 있었다고 말하는 사회학자도 있다. 지금은 개신교의 구원비용이 너무 비싸졌다.
루터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개만도 못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 말은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말살하려는 정책에 힘을 보태어 주었고 히틀러는 루터의 말을 인용했다. 물론 그 당시 유대인들이 미움받을 짓을 한 것도 사실이지만.
성서는 ‘오직 믿음’만 가지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사람은 행하는 것만큼 믿는 것이다. 믿음과 행위는 별개가 될 수 없다.
한 종교학자는 어느 한 지역에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이 4명 중 1명꼴로 있어도 그 지역사회가 그 종교문화를 갖게 만든다고 하였다.
강남지역의 기독교인은 40%에 육박한다. 그 강남지역의 문화는 실컷 먹고, 실컷 땀빼고, 실컷 즐기고, 실컷 용서받을 데로 가득하다.
기독교는 이런 향락문화에서 벗어나 생명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기독교가 자본주의에 철저히 기생하고 있는 문화와 맞서서 싸워야 한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가장 큰 차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원죄 (기울어진 운동장과 같은)의 현실에 오셨고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성육신의 신비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재현되어야 한다. 강도만난 사람을 보라! 사마리안은 자신의 원수 유대인을 치료한다. 성육신의 신비는 현장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0_0b4Ud018svc155l6dh5j2kj9_rhh1u0.jpg0_0b4Ud018svcrsnr7qtrvypv_rhh1u0.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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