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서 함께한 평화좌담회 이야기

지난 5월 1-2일은 북장로교 평화좌담회에서 광주에 방문하여 1박하며 호신대 명예총장님이신 차종순교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떤 역사의 경로를 거쳐서 전라도 광주가 좌파의 도시가 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하시면서 진정한 의미의 좌파라기 보다는 역사의 질곡 가운데서 눌리고 밟히고 짓이겨진 사람들의 몸부림이 힘을 가진 사람들 입장에서 좌파라 불리게 되는 안타까운 심경을 토로하셨습니다.
여기에 차종순 교수님이 함께 참여한 평화좌담회 사람들과 함께 나눈 이야기를 정리요약한 내용을 올립니다. 비록 꼼꼼히 다 받아적지 못했고, 제가 오해한 부분이 있을 수 있어 정확한 강의 내용과 차이가 있지만 약간의 이해를 돕는데 사용하시라 올려 봅니다.

우리는 강의가 끝나고 이제는 광주의 아픔보다는 동서의 화합과 통합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하지 않습니까? 하는 질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광주시민의 아픔이 충분히 토로되어지고 공감되어지기 전에 화합과 통합으로 나간다는 것은 폭력에 가까운 주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5.18 이후 세월이 벌써 39년이나 흘렀습니다. 이제는 통합과 화합을 말할 수 있는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광주에 와서 광주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지 않고 언론과 보수정당이 흘리는 정보로 광주에 대한 오해를 품은 채, 이제 그만 슬퍼하고 미래로 나아가자고 한다면 그것은 슬픔을 다루는 가장 나쁜 방법 중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특히, 호신대에서 공부하는 젊은 학생들의 트라우마는 유전된 슬픔이었습니다. 그들은 518을 직접 겪은 세대가 아니지만 그 부모님으로부터 전달되는 슬픔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유없이 광주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바깥으로 나가면 위축되는 마음이 있다고 합니다. 관에서부터 시작되는 형식적이고 이벤트성의 5.18의 기념식으로는 충분히 낼 수 없는 목소리가 있다고 합니다.

이미 39년이 흘렸지만 우리가 시간이 될 때마다 광주에 내려가서 광주의 아픔과 소리에 더 예민하게 반응할 줄 아는 감수성부터 길러야 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이하 교수님의 강의 내용을 실어봅니다.

—-호신대 명예 총장이신 차종순 교수님의 강의 —–

호남, 광주, 목포가 좌익도시라 불리는데 이런 이야기들의 근거는 일제 침략과 미군정이 그 핵심이 된다. 이것을 빼고는 말할 수 없다.
일본이 호남을 가장 많이 탐냈고, 호남 영토에서 지속적인 식량보급을 받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1907년 이준을 비롯한 몇 명 사람들이 일본의 속내를 알고 헐버트 선교사와 함께 을사조약의 허구성을 등사해서 알리고자 하는 노력을 많이 했다. 1904년 황무지 개간법을 고종 때에 일본이 통과시키려고 했지만 고종의 반대로 무산되자, 순종 때 그 법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전라도 지방에 측량고등학교를 세워 본격적으로 일본이 우리 땅을 자신들의 땅으로 가지고 가기 시작했다. 1905년에 구식 군대를 해체 시키고 일본이민이 시작되게 되었다. 토지조사 후에 일어난 일이며 일본농사가구를 모집애서 교육하고 한국에 파견하는 절차를 거쳤다. 그 첫 시기에 일본이 한국에 목포를 통해 일본인 10만 명을 한국에 보냈다. 일본은 들어와서 절과 신사를 세우기 시작했다. 자기 동네마다 신사가 있게 되었다. 1913년 광주공원에 신사가 세워졌다. 1930-33년 신사가 다 완성되었다. 절과 신사를 세운 이후로 일본은 창녀촌을 세우기 시작했다.

러일전쟁은 일본이 미국에게 잘 보이게 된 계기가 되었다. 처음에 선교사들은 하나같이 ‘일제로 말미암아 한국이 잘되고 있다’라고 선교보고를 하였다. 후에 일제시대에 재판과정을 보면서 통역없이 일본어로 진행되는 105인 사건이 얼마나 부당했는지 선교사들이 본부에 보내게 되는 일이 생겼다.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일제치하가 생각보다 길어지자 변절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윤웅렬 도지사의 아들 윤치호가 감옥에서 나와 가장 많이 변절하였다. 나중에 남작작위까지 받았다. (Baron Yoon)
변절의 7인의 앞잡이에는 최남선과 이광수 같은 사람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소설 이인직(이완용의 비서)이 쓴 ‘혈의누’는 일본친화정책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순수문학의 가치를 폄훼한 부분이 많다.

다시 땅 이야기로 돌아오면 1907년 본격적으로 토지 측량 조사를 했다. 일본인들은 한국사람의 땅을 헐값에 사갔다. 그러면서 한국인은 직장을 잃고 꿈을 잃고 일본인의 소작농이 되면서 사회적 지위가 약화가 되었다.
결국 가난이 좌파(?)를 형성하게 되었고, 1919-21 YMCA, 신협, 노동공제회(보험)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노동공제회는 1925년 조선 공산당으로 발전되었고 지역단위 하부구조는 기독교인으로 구성되었다. 그 때는 교회가 모일 수 있는 유일한 공동체였다. 그 후에 소작협의회, 소작쟁의가 등장한다.
1921-1927년 3.1 운동후 산미증산계획을 실시한다. 뚝방을 올려 하천계발을 도모하고 농업생산력을 증가했다. 이로 인해 한국인 개간업자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한국인 지주들이 나왔다.
1923년까지 제주도에서 오사카에 바로 들어가는 배가 있었다. 일본에서 볼세비키 혁명 소식이 들어와서 좌파 성향을 제주도가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또한 일본에 붙어서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이 나오기 시작했다. 영암대지주의 외손녀가 지금 나경원이다. 한국사람도 땅 개간을 배워 부호가 된 사람들이 현준호, 박흥식 등이다.

호남의 토지 재벌들이 땅을 가지고 등장하게 되었고 여기에서 소외돈 사람이 좌파계열의 투쟁세력이 되었다. 그 당시, 노동자, 농민, 하층민의 대변인 역할을 한 사람들이 기독교 지식층이었고 기독교 학교가 이에 큰 공이 있는 것이다.
광주에 김현승의 시비가 있는데 김현승씨의 아버지가 광주 양림교회의 목사였다.
그리고 정율성이라는 양림교회 사람이 연안곡이라는 모택동해방군가를 작곡했다. 이 모든 기독교 지식층의 활동 근간에 YMCA가 있었다. YMCA는 한국의 희망은 농업에 있다고 주장했다.

만주국에 일본이 세운 육군사관학교와 대동학원이 있었는데 육군사관출신이 정일권, 백선엽, 박정희이고, 대동학원출신이 최규하이다. 이들은 친일, 친미 제일 공화국을 탄생시켰다.
친일적인 공화국은 1946년 6월을 기준으로 38선 통행이 안 되게 하는 결정에 참여했다. 그리고 미국 프리스턴 출신의 한경직, 윤하영이 1945.9월 기독교 사회당을 만들었다.
한경직은 북에서 내려와 서울에 베다니 교회와 해방촌교회를 시작했다.
해방 후, 일본의 재산, 적산의 관제국 총책임자는 남궁혁 목사였다. 그래서인지 일본의 모든 종교시설이 기독교시설로 바뀌었다.
북한은 1946년 3월에 토지분배를 하였다. 토지가 만오천평 이상인 사람의 땅을 빼앗아 3천평씩 나누어 분배하였다. 남한도 그렇게 분배하라고 하는 요청들이 생겼다.
또 땅을 빼앗긴 평안도의 지주들이 남한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이 서북청년단이 되었고 그들의 거점지가 한경직 목사의 영락교회였다.

차종순 교수님은 개인적으로 5.18의 모든 열흘 간의 과정을 눈으로 본 증인이셨다. 지렁이도 밟히면 꿈틀거리지 않는가? 한국에 진짜 좌익이 있을까? 다들 먹고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다. 호남의 좌익은 좌익이 아니다. 차별에 대한 Strike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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