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 왜그러세요? (이재영 형제의 억양으로 읽으시길)

오늘은 캐네디언 Thanksgiving Day.
오랜만에 지나간 99년 졸업식 비디오를 보다
여름에 적어놓은 글이 생각나 실어봅니다.
이글의 주인공은 재영형제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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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이나 유학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현안 중 하나는, 과연 첫 정착지(학교)를 어디로 결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사실 온갖 좋은 정보를 다 수집해도 현지에 정착하기까지는 사실 이민이란 것이 그리 실감이 나질 않는 법이다.
그 래서인지, 사람들에게는 처음 정착지가 참으로 중요하다. 그 정착지에서의 경험이 어려웠던 것이든, 아름다웠던 것이든 지나고 나면 가슴 속 아련히 자리하는 것이 처음 정착지이다. 세월이 흘러가면 갈수록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더해가듯이, 북미에서 몇 번 이사를 다녔던 우리들에게 첫 정착지였던 위니펙은 정말로 가고 싶은 고향과도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다.

지 난 주에는 위니펙에서 한 시간 정도 더 떨어져 있는 스타인벡 (Steinbach)이란 지역에서 온 한 대학생을 만났다. 99년 대학을 함께 졸업했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의 이종 사촌 여동생이었다. 아주 작은 도시 스타인벡에서 2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토론토로 온다고 해서 공항으로 마중을 나갔다. 토론토에 와서 하숙집을 찾기 까지 약 한주간 동안 우리집에 머물렀는데, 그 친구 사촌 여동생의 방문이 지나간 과거의 추억을 자극하게 되어 몇자 적어본다.

지금 서울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그리운 친구.

해 병대 출신에 인생의 방향을 놓고 고민하던 96년 당시, 아버지로부터 등 떠밀려 물설고 낯설고 말까지 설은 위니펙으로 유학을 오게 된 친구였다. 영어도 백지상태, 대학 공부도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하루하루 살던 그 친구가 캐나다 위니펙의 그 작은 학교에 전설적인 인물이 된 것은 그의 3년이란 결코 짧지 않은 삶에서 비롯되었다.

영어라고는 How are you? 정도나 겨우 할까말까 하던 그 친구.
96년 7월 채 해병대 군기가 빠지기도 전에 위니펙에 도착해서 한달 정도의 여름을 보내고 곧바로 수업을 들어왔던 그 친구는 그때부터 영어의 위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뼈아프게 느껴야 했다.

그 래도 다행인 것은 젊음이라는 패기가 있었고, 살아 가야한다는 숙명이 있었기에, 매일 도서관에서 불면의 밤을 세워나갔다. 젊은 청춘도 맥을 못출 정도로 머리에 허연끈, 꺼먼끈질끈 동여매고 도서관에서 비실대기까지 공부를 해나갔다. social이란 social을 무조건 참가하게 되었고, 군에서 다져진 근육질 몸매에 날아가는 축구 실력으로 작은 신학교에서 첫 영웅이 되었다. 대학별 체육대회에 헤트트릭으로 최우수 선수가 되면서, 버벅대는 영어로 축구를 배우겠다는 캐네디언 친구들의 선생이 되어나갔다.

아 무리 영어를 못해도 잘하는 것 하나만 있으면 친구가 될 수 있고 그 부분은 부러움과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곳이 북미이다. 못하는 것을 가지고 그런 것도 못하냐고 타박하기 보다는 잘하는 것 하나라도 있으면 이를 높이 사주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 문화가 북미의 문화이다.

어쨋든 축구 공차는 것 하나도 설명하기 힘든 것을 몸으로 때워가던 그 친구. 날씨가 쌀쌀해지고 겨울이 문턱을 지났을 때는 이미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게 되었고, 고단한 언어의 현실 속에서 하나하나 의사소통의 방법들이 생기게 되었다.

낮 에는 열심히 강의 듣고, 영어공부 + 수강에 열을 올렸던 친구. 가능한한 모든 사교모임에는 다 참석하고, 기숙사 생활에 공동식사와 룸메이트와 방을 함께 써가며 살았던 그 친구. 그는 대개 아무도 없는 도서관에서 밤을 새다 쓰러지곤 했었다. 안쓰러워 이불을 덮어주기도 했지만, 동생 같고 학업 동기이기에 우리 집의 주빈이 되어 3년을 같이 지냈던 지기가 되었다.

우 리 집은 학교 아파트에 위치해 있었고, 거의 3년 내내 문을 잠그지 않고 살았었다. 우리집을 찾아 들었던 많은 손님도 손님이거니와 그 친구가 언제든지 필요한 것을 함께 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때는 피곤에 지쳐 소파에 누워있기도 했고, 카펫에 쓰러져 있기도 했다.

그래도 늘 감사해 하며, 쉬지 않고 노력하는 친구의 모습은 보기에도 좋았고,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성격도 좋아서 캐네디언 여학생들과도 금새 친해지고, 유학온 여학생들과 염문(?)을 뿌리기도 했다. 워낙 후각이 잘 발달된 내가 냄새를 맡으면 개코라했고, 이리 저리 눈치를 채면 귀신이라고 빈정대면서도 자기 할일을 잘 해나갔다.

여 름이면 4개월 동안 몸으로 때우는 일로 현장에 뛰어들었다. 특히 캠프가 잘 발달되어 있는 캐나다에 캠프 발런티어로 일을 하면서 친구의 언어 실력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늘어만 갔다. 물론 그 순간 순간의 타는 애간장을 어떻게 말로 설명을 다 할 수 있겠냐마는, 나름대로 삶을 즐기는 지혜가 그 친구에게 있었다.

캘 거리 북쪽에 위치한 캠프 발라쿠아라는 곳에서 97년 여름을 보내며, 암벽타기, 승마, 장작패기, 캠프장 정리, 캠프 리더를 도와가면서 현장감각을 익히는 동안 그의 영어는 괄목할 만한 진보를 보여주었다. 뿌린대로 거둔다는 것은 진리중의 진리이다. 눈물을 흘리며 흘린 씨는 언젠가 기쁨이 되어 돌아오는 법이다. 그의 영어가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인 것은 그의 쉬임 없는 노력에 기인하고 있다는 평범한 진리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피곤한 몸에도 불구하고 영어를 공부하겠다는 일념에 그는 남다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매일 남들이 잠자리에 들고 난 밤 12시. 보일러실에 잠적해서 발음연습을 하는 그의 피나는 노력이 들통나면서부터 신화는 서서히 싹트기 시작했다.
어 느 날 밤. 잠자는 시간에 홀로 사라지는 이 친구의 행적을 수상히 여긴 같은 학교 출신의 캠프 리더였던 한 여학생이 그의 뒤를 밟게 되었다. 잠을 자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이 친구의 행적이 묘연하여, 여러 친구들이 수상히 여겨 뒤를 밟아보니, 영어 성경책을 들고 보일러 실로 사라지더라는 것.
결국은 보일러실 문을 벌컥 연 친구에게 직고한 이실은 이제 막 두 학기를 마치고 나름대로 영어를 열심히 했지만, 현장에서 너무나 버겁고 발음도 되지 않아 남들이 자는 동안 성경이라도 열심히 읽어야 겠다는 것이 그의 각오였다고….

보일러실은 찾는 사람도 없을 뿐 아니라 시끄럽게 돌아가는 소리는 모두 소음에 흡수되어 아무도 알아차릴 수 없고, 자신은 소리를 내어 영어 발음 연습을 해야겠기에 선택한 장소라나…

어 쨌든 수상히 여겨 뒤를 밟았던 친구는 그만 감동을 먹어버렸고, 스스로 친구의 귀한 영어 선생님이 되기로 했다. 물론 이 소문은 금새 캠프 스태프들과 여러 식구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이를 안 모든 사람들의 특별한 배려로 자연스럽게 영어 선생님들을 얻게 된 셈…

4 개월이 지난 후, 그의 영어는 눈에 띠게 변해 있었다. 8개월 간의 학교 수업과 social life. 다시 방학 때 캠프 발런티어며, 인디안 마을 자원봉사일을 하게 되면서 4개월씩 3년을 한국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보내게 되었다.

이 친구의 첫 시작은 정말 영어 한마디 하기에도 가슴을 졸여야 했지만, 졸업할 때는 Graduation speaker (졸업식 때 학생 대표로 연설을 하게 되는데, 학생들이 뽑는 영예의 자리)가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또 다른 감동을 먹여주었다. 한 마디 영어를 잘 표현하지도 못했던 그 친구가 graduation speaker가 되기까지 그 삶을 이렇게 글로써 표현한다는 것은너무나 분명한 한계가 있다.

졸 업 이후 한국으로 돌아간, 그 친구는 자신의 동생의 등을 떠밀어 같은 학교에 보내 자신이 걸은 길을 다시 걷게 했다. 형에게 뒤질 세라 동생도 “황금박쥐”라는 자기 나이와 비슷한 나이의 아주 오래된 황금색 승용차를 구해 캐나다 밴프 여행에 모험을 즐기기도 했다. 형처럼 캠프에서 일을 하고 온갖 대학 생활을 즐기며 공부를 하였다. 비록 졸업을 하지는 않고 2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갔지만, 나름대로 영어를 부족함 없이 배워간 듯 싶다. 친구의 동생이 막 위니펙에 도착할 즈음에 우리 가족은 미국으로 내려가 긴 시간동안 함께 하지 못했지만, 몇 번의 만남으로 친구 동생의 변화를 감지할 수가 있었다.

그 이후로 오랫동안, 우리는 변함없이 친구가 되어 있다. 친구와 그 친구의 동생, 그리고 나는 MSN과 이 메일로 지금까지 서로의 동향을 확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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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친구와 그 동생이 사건을 저질렀다.
2년 전.

자 기들이 위니펙에서 한국으로 돌아가,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종 사촌여동생의 등을 떠민 것이다. 그것도 인구 60만되는 위니펙이 아닌 그곳에서 남동쪽으로 한 시간 더 들어가야 하는 인구 10,000명의 작은 타운 Steinbach으로 사촌 여동생의 등을 떠민 것이다. 한번 이름을 들은 적이 있는, 그 사촌 여 동생이 약 20개월의 대학 생활을 마치고 토론토로 오게 되었다.

친구의 사촌 여동생.
비록 이제 만난지 2주 조금 더 지났지만, 내가 만난 한국 학생 중, 20개월 만에 영어를 그렇게 잘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스 타인벡으로 등떠밀려 왔던 처음 1달은 매일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단다. 눈물범벅이 되어 가슴을 쥐어짜는 생활을 했단다. 말은 하나도 통하지 않지. 앉아서 듣는 강의도 도통이해가 가지 않지. 그렇게 몇 개월은 벙어리 냉가슴으로 불면의 밤을 새우며 사촌 오빠들을 원망도 했단다. 그 생활을 어떻게 다 말로 형용할 수 있으랴!

그 런데 20개월이 지난 그 모습은 상상도 하기 힘든 만큼 변해 있었다. 1년 3개월이 지났을 때, 음식 문제로 속병이 생겨 한국을 방문하려고 비행기를 탔는데 한국말이 생각이 안나더란다. 하기야 한국 사람이라고는 찾아 볼 수도 없는 작은 도시에서 대학 1,2년 친구들이랑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지냈으니 얼마나 큰 도전이 되었으랴… 그래도 “공부하다가 만약 친구들이 놀러가자면 모든 것 다 팽개치고 책 붙들고 있지 말고 함께 어울리라”던 오빠들의 조언을 충실히 따랐단다. 기숙사 식당에 함께 모여 밥을 먹고, 함께 강의듣고, 함께 지껄이고….

그래서 토플 시험을 보았더니 한국 사람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듣기 점수가 가장 높게 나왔단다.

그 친구의 사촌 여동생.

토론토에 와서 눈이 휘둥그래진 그 동생의 모습을 보면서, 친구의 모습이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면서 새삼스레 빙그레 웃음이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장난끼 어린 친구의 모습에 그 어린 사촌 여동생의 등을 떠미는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러면서도 정말 사촌 여동생의 인생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그의 모습이 함께 눈에 어른거린다.

공 항에 마중을 나가고 하숙집을 찾아 주기까지, 열심히 이메일에 채팅을 하면서, 친구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었다. 등을 떠미는 짖궂은 사촌 오빠들도 그렇지만, 그 오빠들을 믿고 낯선 곳에 와서 인생 모험을 건 그 여동생의 모습도 참으로 대견해 보였다.

오늘도 그 여동생을 만났다.
토론토를 경험하면서, 정말 대도시에서 마음을 다시 잡지 않으면 영어를 쓸일이 없다는 경각심을 갖으면서 공부에 정진하는 모습이 대견하다.

만약 내가 젊은 나이에 공부를 하러 온다면?
만약 내가 정말로 어학 연수만을 목적으로 캐나다엘 온다면 정말 어디로 가길 원할까?

친구의 사촌 여동생이 가져다 준 과거의 추억.
다시 한번 그 과거의 소중함을 기억해본다.
그리고 그 짖궂었던 친구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빙그레 웃음 웃으며 일하고 있을 친구의 모습을 그려보며….

큰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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