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을 이용한 교리 (6) 예수-그리스도: 밑그림 그리기

최근에 한 노인이 슬픔에 잠긴 채 내게 말을 건네왔다. “요즘에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보이는데, 예수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은 더 이상 없는 것 같다” 는 내용이었다.
흥 미롭게도 메노나이트들은 하나님 보다 예수에 대하여 더 많이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은 낳게 한다. 예수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서 올자가 없느니라” (요 14:6) 라는 아주 자주 인용되는 성경구절 또한 같은 질문을 낳게 한다. 이 성경구절은 예수의 진리에 대한 독점적인 권리 주장으로 인식되어 다른 종교들로부터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리고 우리에게 조차도 예수의 참 모습은 어떤 것일까 하는 궁금증을 유발시키기도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에 대한 수많은 그림들을 보여주고 있다: 말씀인 예수 (요한복음 1장), 종된 예수 (빌립보서 2:5-7), 양자된 예수 (마태복음 3:17), 모범이 되신 예수 (히브리서 12장), 유일한 길 예수 (요한복음 14:6), 모든 것을 통일하는 예수 (에베소서 1:10), 하나님이신 예수 (요한복음 20:28) 등. 그러나 이러한 것은 예수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는 수많은 성경의 그림들 중 몇 가지 예에 불과하며, 예수를 존경하여 부르는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사람의 아들, 메시야, 주와 같은 이름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예수는 자신이 할일과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하여 매우 신중했으며, 사람들에게도 자신이 그리스도인 것을 말하지 말도록 요구하였다.

이 러한 것은 종종 “메시아적 비밀”로 언급되기도 한다. 한때 그는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이가 없느니라” (마가복음 10:18)고 말씀하시기도 하였다. 이 구절은 내 아들이 어렸을 적에 “나는 예수가 싫어” 하고 반응을 나타낼 정도로 내 아들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심어주었었다. “왜” 하고 묻자, “예수는 너무 건방져.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말야” 하고 대답을 하였다. 비록 예수는 하나님과 하나됨을 이야기 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그 자신이 아버지와 동등하게 지낸 적은 없었다.
그러면 이러한 예수를 묘사하는 서로 다른 그림들이 하나가 될 수 있는가? 이 질문이 바로 초대 교회가 던졌던 바로 그 질문이다. 우리가 예배하는 예수는 누구인가? 처음 몇 세기 동안 교회가 행한 것은 예수에 대한 밑그림 그리기, 특히 하나님과 성령과 관련된 그림을 그리는 작업이었다. 우리는 경찰들이 목격자들과 단서들을 근거로 작성한 “현상범” 포스터에 그려진 스케치가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초기 교회는 이러한 그림과는 달리 원래의 예수에 대하여 알기를 원했을 뿐 아니라 어떻게 예수를 지속적으로 경험하며, 어떻게 그가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 어떻게 그가 잘못 이해되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 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그들이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살아있는 예수에 대한 총체적인 것을 알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나사렛의 예수 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이단들로부터 보호하기 원했던 그리스도이신 예수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성(姓)이 아니라 그를 존경하고자 표현했던 이름으로 하이픈을 넣어서 표기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단”이란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나치게 잘못된 것을 판단하는 심판의 언어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가 뭔가를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너무 폭 넓은 시각으로 혹은 너무나 자유로운 시각으로 이단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단은 매우 좁은 관점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수 많은 그림들 중의 하나만을 택한 것이며, 그 하나의 그림은 우리에게 매우 최선의 것이거나 그래서 그것만을 의미해야 하거나, 파이중의 한 조각만을 선택하고 그것이 전체인양 생각하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삼위이신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진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그림은 가능한 한 모든 것을 포용하고 이해하려는 시도로써, 하나님의 유일성과 복수성을 포용하고자 하려는 시도로써, 가능한 한 편협성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시도였다.
최 근의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캐나다 전 수상, 피에르 트루도우의 전기에 따르면, 그가 젊었을 적 교리문답 공부를 할 때에,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또 다른 소년을 때렸다고 한다. 내가 만약 그와 함께 있었던 젊은 메노나이트였다면 아마 그에게 맞았을 지도 모른다. 메노나이트들은 삼위일체의 교리에 대해 약간 꺼리는 면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 이해의 중심에는 삼위일체가 자리하고 있고 이러한 것이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의 역사적인 발전과정 뒤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신념이 자리하고 있다:
1) 유대인과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유일하시며 초월적인 유대인의 하나님 야웨를 믿었다.
2) 예수-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경험 (죄의 용서와 부활)했던 사람들로서, 그들은 예수 안에서 유대인의 하나님을 경험했다고 믿었다.
3) 오순절에 성령 충만을 경험한 신자들로서, 이들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야훼의 성령이 예수-그리스도의 바로 그 성령임을 경험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최 초의 그리스도들은 세 가지로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초월적인 신비의 하나님과 창조주 하나님), 성령 (지속적인 통찰력과 교회의 영적 원동력이 되는 역동적인 영적 힘의 근원), 그리고 아들 (특별하고 역사적인 인격-사건).
이 러한 것들은 음악의 세계에 대한 비유로 보다 더 생생하게 시각화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지휘자 혹은 콘서트마스터와 같다. 하나님은 분리되어 있지만 전체를 지휘하고 조절하는 분이시다. 혹은 콘서트마스터로서 하나님은 연주자 중의 하나이시지만 일반 연주자들과는 달리, 민감하게 모든 것을 하나로 연합하도록 음을 조절하고, 간접적으로 영감을 주고 영향력을 미친다. 하나님은 실제로 지휘자요 콘서트마스터이다. 하나님에게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신비하게도 전체 심포니를 연주하는 감각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가까이 계셔서 우리들 중에 하나로 (내면의 성령으로), 즉 콘서트마스터로서의 감각도 갖고 계시다.
그 러면 그리스도에 대한 다른 구성 요소에는 어떠한 것이 있을까? 내 강의를 듣는 학생 중 하나가 위의 은유를 조금 더 확장해 볼 것을 제안하였다. 예수를 작곡과도 같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출생, 삶, 가르침, 죽음, 그리고 부활의 사건 안에서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에 대한 보표, 가사, 및 특별한 내용들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음악에 있어서 지휘자 (아버지)요, 콘서트마스터 (성령)요, 작곡 (아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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