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을 이용한 교리 (5) 하나님 아버지: 남성 혹은 여성?

1992 년 봄, 나는 아들과 함께 독일의 “낭만의 거리”라 불리는 Romantische Strasse를 거닐었던 적이 있다. 그 거리는 뷔르쯔부르그 (Würzburg) 에서 시작하여 미친 루드비히 왕이 살았던 저 유명한 성 노이슈반스타인 (Neuschwanstein)이 있는 퓌센 (Füssen)에서 끝이 난다. 이 거리는 로던부르그 (Rothenburg)와 비스 (Wies)와 같은 바로크 시대의 교회들이 많기로 잘 알려져 있는 아름다운 거리이다.
어 떤 시대든 건축은 그 시대의 정신을 반영해주고 있다. 이와 같이 17세기와 18세기의 교회들은 현란한 건축 장식품들과 더불어 이 세상의 모든 것에 정신이 빼앗겨 있음을 잘 반영해주고 있다. 사실 나는 전 역사에 걸쳐 존재하는 이러한 건축 양식들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변화하고 있으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중 후한 아치 모양의 요새와도 같은 중세기 로마네스크 (Romanesque)식 교회들은 안전하고, 영원하며, 요동치 않는 믿음의 감각을 전달해 주고 있다. 육중한 벽들은 교리적으로나 제도적으로 교회가 영원한 진리이신 하나님을 확실히 믿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드러내 주고 있다.
르 네상스와 종교개혁, 그리고 근대 초기에는 고딕 건축 양식이 발달하였다. 이것은 내가 좋아하는 건축양식이다. 단순하고, 날씬하며, 수직 선이 강조되어 있는 건축 양식으로 건축물 그 위에 무엇인가가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붕은 마치 막, 혹은 늑골식으로 우아하게 받쳐지고 있다. 고딕 양식의 교회를 들어가노라면, 사람들은 스테인그라스 창문을 통해 발산되는 빛과 더불어 이내 무한하고 초월적인 높은 공간이 가져다 주는 신비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이것은 그 건물이 지어진 시대가 더 이상 교리적인 영원성을 즐기는 시대가 아니라는 것을 시사해준다. 새로운 것에 대한 개방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바 로크 이후의 교회들은 낮고, 장식적이며, 보다 분방한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로코코 양식의 촌스러운 장식이 두드러진 특징이라 하겠다. 천정에 그려진 신들의 세계는 사람들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해 놓은 것이며, 믿음이 사람들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음을 쉽게 읽을 수 있다.
메 노나이트들은 항상 자신들의 교회 건물이 실용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신학적인 이유로도 아주 단순하게 지어져 있음을 긍지로 여기고 있다. 단순한 건물들은 그들의 단순한 생활양식과 예배, 그리고 인간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우리들 중 어떤 그룹들은 아주 낮은 천정과 다용도의 공간에서 예배를 드리기도 한다. 하나님에 대한 어떠한 이미지들이 이러한 것을 가능케 하였는가? 소비주의와 사치, 그리고 정치적인 정확성으로 규정되어지는 우리 사회는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실 우리 사회는 그리 세속적이지 않다. 설문에 따르면, 북미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이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인가?
만 약 히브리 성경이 하나님에 대하여 최우선적으로 확신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야훼 하나님이 우리가 상상하고 이해하고 형상화하는 그 이상의 존재라는 것이다. 모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두렵건대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하여 아무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되 남자의 형상이라든지 여자의 형상이라든지 만들지 말라.” (신명기 4:16)
성 경은 거듭해서 하나님을 어떤 일상적인 감각으로 만들 수 있는 물체가 아닌,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나” (an “I”)라는 대상으로 말해질 수 있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여호와께서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되 음성 뿐이므로 너희가 그 말소리만 듣고 형상은 보지 못하였느니라” (신명기 4:12). 이것은 신비다. 하나님께서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여 계시며 남자도 여자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말씀하시며, 행동하시며 자신을 인격적 존재로 표현하고 계시는 것이다.
지 금 사용하고 있는 최근의 메노나이트 찬송가 (Hymnal: A Worship Book)를 엮은 찬송가 위원회에서 있었던 가장 열띤 토론은 하나님을 칭할 때 어떤 언어를 사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가능한 한 포괄적인 용어 (Inclusive language)를 사용하도록 하였으나, 어떤 부분에서는 하나님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다양한 텍스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새로운 한 곡은 “나를 낳으신 어머니 하나님”으로 하나님을 표현하고 있다. 어느 누구도 성경이 아버지 하나님으로 표현한 남성 위주의 표현이 우세하게 사용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이제는 내가 해산하는 여인같이 부르짖으리니” (이사야 42:14)나 “너를 낳은 하나님을 네가 잊었도다.” (신명기 32:18)와 같은 여성의 이미지 또한 사용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창 조이야기에 사용되고 있는 창세기의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는 정말 흥미롭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7) 고대의 저자는 하나님이 남자도 여자도 아닌 그러나 인간의 형상 너머에 존재하고 계신 분임을 너무나도 잘 앍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단순히 돌보시는 하나님, 인격적인 하나님, 그리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방식들에 불과한 것들이다.
이 스라엘은 당시 주변 문화들 속에 있었던 자연 종교들과 자신들의 신앙을 구별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남성성을 강조하였다. 히브리 인들에게 남성성은 초월성 (transcendence – otherness)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반대로 여성성은 내재성 (immanence – nearness, 혹은 편재성)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사 실 이 주제는 하나님이 남성이냐 여성이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은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의 초월성 (otherness)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인데 왜냐하면 이는 하나님을 자연 (친근한 자연)과 매우 가깝게 생각하고자 하는 우리들의 시대가 갖는 환경적 염려와 관련이 있다. 성령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생각하는 세 번째 방식)은 우리와 매우 가까이 계신 그리고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이다. (4장 참고) 전통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언급한 이 첫번째 하나님의 존재 방식은 바로 신비적인 초월의 하나님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묘사하고자 함이었다. 이러한 신비한 하나님을 가장 잘 인식하도록 하는 이미지를 우리 시대에서 어떻게 발견할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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