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을 이용한 교리 (4) – 성령: 과학기술 시대에 하나님께로 가는 길

성령: 과학기술 시대에 하나님께로 가는 길

마 니토바 주, 스타인벡에 사는 세 명의 숙모님들이 왜 크라이네게마인데 (Kleinegemeinde) 메노나이트를 떠나서 오순절 교회로 갔는지 나는 무척 궁금했었다. 러시아의 주류 메노나이트로부터 분리되었던 클라이네게마인데 (단어의 뜻은 “작은 교회”)는 나의 선조인 크라쓰 라이머 (Klaas Reimer)께서 시작하셨다. 도대체 이 오순절교회가 메노나이트들에게 끼친 영향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그들이 영적인 면에서 더 역동적이었는가? 아니면 여성들을 위해 배려하는 면이 더 많았는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한 사람이 성령의 은사를 소유했는가 그렇지 못했는가 (주로 “방언을 말”하는가에 대한 내용)에 대해 라이머 가족 간에 있었던 논쟁과 긴장이 전부이다. 이 얼마나 요상한 성령의 열매인지! 이것이 성령에 대한 교리를 다루면서 소개하고 싶은 첫 번째 이야기이다.
각 세대는 그 세대 마다 종교적 선입견이 있다. 예를 들어 중세시대의 사람들은 죄, 사면, 순례, 그리고 구원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 루터가 말한 “사람의 노력 (by work)”에 의해서가 아닌, “오직 믿음(only faith)”으로 의에 이를 수 있다는 소식은 즉시 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전에 없었던 일로써, 하나님에 대한 문제는 현대인들을 매우 불쾌하게 하였다. 우리와는 동떨어진 하나님의 그 실존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즉 세상을 만드시고 (창조), 세상을 돌보시고 (보존), 목표를 따라 인도하시는 (섭리) 하나님에 대한 실존의 문제가 제기 되었다. 사람들이 이 문제를 신중하게 받아 들이든 혹은 개의치 않든 간에, 우리와 동떨어진 신의 실존은 더 이상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다. .

실존 의 문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실로서 과학기술 (생산의 예술)은 신의 도움 없이 혹은 신의 실존에 전혀 관계없이 사람들이 세상을 움직여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제 하나님 대신 바로 우리가 세상을 만드는 존재들이 된 것이다! “과학기술”의 영어 표현인 테크날러지 (Technology)는 두 개의 라틴어가 합해져서 만들어 진 말이다: 즉 테크 (techne, 만들다는 뜻) 와 로고스 (logos, 생각이라는 뜻)가 합해져 새로운 개념이 만들어 지게 된 것이다. 생각하는 것은 곧 만드는 것과 동일시 되었는데 이는 묵상으로 이성을 이해해왔던 이전의 전통과는 아주 다른 입장이 되었다. 과학기술은 단지 기계, 컴퓨터와 같은 하드웨어 뿐 아니라, 유용성 및 효율성과 같은 사고방식을 함께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것은 기도가 하나의 묵상이라기 보다는 “기술”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부르는 노래들, 드리는 기도들, 그리고 일요일 아침에 듣는 설교들이 우리들의 원하는 바 목적을 위해 하나님을 조정하는 것 보다 종종 덜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즉 하나님의 신적인 신비함이 우리들이 결정과 세계관으로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역설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존재가 가장 부적절해 보이는 바로 지금이 초월적인 하나님에 대한 질문이 가장 필요로 하는 때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그러한 신적인 실존을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을까? 영적인 존재로서의 하나님을! 우리의 영혼에 가장 가까우면서도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어떤 것과도 같지 않은 그 영적인 하나님을. 사랑으로 일상의 경험 세계에 분명히 존재하면서도 시간과 공간의 영역 너머에 존재하는 그 영적인 하나님을. 어느 누구도, 아니 교회라 할지라도, 독점할 수 없는 그 영적인 하나님을….
성령은 자유케 하고, 가능하게 하고, 무엇이든 기꺼이 받아들이는 존재이다. 성령은 관대하지 못하다든지 사람의 의식 밖에서 황홀경으로 이끌게 하는 것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경직성을 반대한다. 성령은 관습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성령은 어떤 면에서는 단편적으로 존재하는 것 같지만, 가장 깊은 곳에서 언제나 일치와 연합의 상태로 존재한다.
과 학기술은 자연, 세계, 인간을 다룰 때 마치 어떤 죽은 물체나 폐물처럼 다루거나,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진행과정”의 수단으로써 우리를 다룬다. 반면에 성령은 죽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어 살리시는 하나님의 생명력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세기 2:7). 우리 자신의 생명은 바로 하나님의 호흡인 것이다.
성경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은 아주 뚜렷하게 나타난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 성령은 수면 위를 운행 하셨고, 무질서에서 질서를 창조하시도록 도우셨다. 성령은 첫번째 인간에게 생명을 부여하셨다. 마른 뼈들이 있는 골짜기로 에스겔을 인도하여 이 뼈들에게 생명을 주시도록 하셨다. 선지자 요엘은 주의 날에 모든 사람들 (아들과 딸들, 남종과 여종)이 성령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을 하였다.
성령은 예수의 수태에 없어서는 안될 역할을 하셨다. 성령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 강림하셨고, 그를 광야로 이끌어 내사 시험을 받게 하셨다. 예수의 가르침과 치유 사역은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였다. 성령은 그리스도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 이후에도 역사하셨던 분이시다.
예수께서도 그가 떠나가고 나면 성령께서 오실 것이라는 약속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다. 성령에 의해 예수는 죽음으로부터 부활 하셨고, 같은 성령에 의해 우리도 죽은 자들 가운데서 구원을 받고, 앞으로 오는 세대도 일으키실 것이다. 오순절에 모든 사람들에게 찾아오신 분도 성령이시며, 교회를 시작하신 분도 성령이시다. 사도행전이 기록하고 있듯이 첫번째 선교사를 보내신 분도 바로 성령이시다. 여러 세대에 걸쳐 교회가 있게 하신 분도 성령이시며 교회 내에 개혁의 운동을 지속적으로 일으키시며 여성들로 하여금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게 하셨던 분도 성령이시다.
요한에게 큰 비전을 보게 하신 분도 성령이시다. 성령께서 이 세상의 시작이 되셨던 것처럼 오는 새 세상의 시작도 성령께서 하실 것이다.
대 개 우리는 성령을 에너지, 힘, 그리고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에 따르면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 기록되어 있다. 교회가 성경의 인용 구절들에 의해서 쉽게 답변할 수 없는 심각한 도덕과 윤리적 딜레마에 직면하게 되면 (예를 들어 복제, 동성애, 안락사 등), 우리는 성령의 통찰력과 지혜로 하여금 결정하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성령은 우리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도록 자유를 주신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떠나는 것이 그의 제자들에게 더 좋을 것이라고 하신 이유이다. 이르실 것이 많았으나 제자들이 아직 준비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은 그가 떠난 후에 진리의 성령을 받게 되었다. (요한 16:12-13) 사실상, 제자들은 예수가 하셨던 일보다 더 큰 일들을 하게 되었다. (요한 14:12)
이것은 단순히 어떤 정신, 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단순히 “세상의 영”이나 “인간의 영” 혹은 “어머니인 땅의 영”을 말함도 아니다. 그것은 은사에 의해 정의되는, (고전 12:4-11) 그리고 그 열매에 의해 정의되는 성령 (갈 5:22-23)을 말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며, 온 세상을 향해 자신을 드러내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영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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