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을 이용한 교리 (2) 성경: 사실인가 아니면 허구인가?

몇 해전에, 나는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나찌 치하 죽음의 수용소인 아우스비츠에서 십대에 아주 끔찍한 경험을 한 유태인 소설가 엘리 위젤 (Elie Wiesel)의 밤 (Night)이라는 책을 읽으라는 과제를 낸 적이 있다. 이웃의 대학에서 위젤의 강연이 있었고, 나는 그의 강연을 들으러 학생들을 데리고 갔었다.
그것은 정말로 놀라운 경험이었다! 1년 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위젤은 노아와 대홍수, 그리고 무지개가 나오는 창세기의 이야기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책 읽기로 수 많은 대학생들과 교수들을 매혹시켰었다.
위 젤은 성경의 본문과 씨름을 하고 있었으며, 특히 다시는 세상을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과 씨름하고 있었다. 그 당시는 냉전이 한창 진행 중일 때였으며 그의 강의는 임박한 핵전쟁의 공포가 근거없는 생각이라며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었다. 그러나 그런 위젤의 안전에 대한 위안은 다시금 검토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홍수에 의해 세상을 결코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약속하셨지만, 핵전쟁에 대해서는 아무런 보증도 하지 않으셨다. 그의 책 중, 삼분의 일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그것은 만약 하나님이 아닌 우리 자신이 세상을 멸망시키게 된다면? 하는 내용이었다.

이 러한 것이 바로 성경이 싸우고 있는 것들이다. 신적인 진리를 전달하는 수단으로써 우리는 성경 본문을 참고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자신을 발견하게 하는 이러한 특별한 상황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되돌아 가도록 그리고 성경의 본문으로 돌아가도록 재촉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을 읽는 것은 쉽지 않다. 거기엔 빠른 해결책도 없다. 그 본문이 우리의 경험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도 피할 수 없는 것이며, 그 본문을 신성시하는 것 또한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독자들인 우리들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이 채택된 역사적 과정은 아주 흥미진진하며, 때로는 그리 편치 만은 않은 놀라움들로 가득 차 있으며, 인간의 책임이 결여되어 있지도 않다.
최 근에 나는 메노나이트 문학서들을 읽으며, 그들이 가져다주는 신학적인 적절성에 의해 아주 깊은 감명을 받았다. 많은 저자들이 우리들에게 문자와 무미건조한 저편의 언어를 선사하고 있었다. 그것은 교회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실제 삶에 가까운 경험의 언어였다. 그것은 시적인 언어였고, 이야기 였고, 비유, 은유, 그리고 유추의 언어였다.
이 러한 언어는 통상적으로 허구라고 일컬어 진다. 얄궂게도 소위 말하는 “허구 (fiction)”라는 것은 종종 “실제의 이야기 (nonfiction)”보다 삶에 더 진실되이 다가온다. 한 작가는 “교리들이 마른 뼈들이 가득한 골짜기로 우리를 인도”하는 반면, 이야기들은 “사람들을 보다 실제적인 삶으로, 혹은 정열적인, 슬픈, 혹은 유쾌한 경험으로 인도”한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우 리에게 오는 도전은 교회의 가르침 (교리)을 던져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이들과 관련된 우리의 상상력을 어떻게 다시금 살아나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 즉 우리의 언어를 풍부하게 함에 의해 더욱 깊은 곳으로 가야 하는 것이다. 미국의 소설가 프래너리 오 코너 (Flannery O’Connor)는 교회가 현실에 깊이 스며들어 우리를 돕기 위해 믿음을 공식화하는 것에 문제가 있음을 이야기 하였다. “기독교 교리는 단지 신비함을 선호하거나 보호하려는 세상에 남겨진 그 무엇”이라고 지적하였다.
나 는 토론토 대학 신학대학원에 첫번째로 발을 들여 놓았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나는 철학과 역사학을 공부하였던 몇 년의 경험을 갖고 있었고, 더 솔직히 이야기 하자면 철학적 회의론과 역사적 문자주의에 나 자신을 몰입하고 있었다. 한 번은 내가 들은 뭔가에 의해 말문이 꽉 막힌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의 변명답지 않은 변명이었다. 그 후, 나는 역사학을 공부하는 것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유혹을 지속적으로 받게 되었다.
그 것은 이러한 교리 (교회의 신조들에 대한 공식화된 전통) 가 신학적인 언어, 과학과 경험적 언어와는 아주 다른 언어로 표현되어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때까지 나를 괴롭혔다. 이것은 인간 실존의 가장 깊은 차원에 대하여 말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일상적인 삶과 경험에 영적인 실재가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것은 내가 자랄 때 사용했던 언어에 관한 것이었지만 대부분 잊혀진 언어였다.
신학적인 언어는 이야기 문학과 많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풍부한 상상의, 다차원적인 언어이며, 투명한 언어이다. 그것은 성경의 언어이다.
나 는 비록 교육은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한자리에서 아주 긴 성경구절을 암송할 정도로 “마음에 간직 (암송 – 지적인 지식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의 표현)”함으로써 성경을 잘 이해하는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다. 그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지만 아주 생생한 상상력을 사용하여 읽는다. 이들은 성경의 수 많은 부분을 왔다 갔다 하면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사람들이다. 나는 때때로 그들의 성경을 읽는 직관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비록 이들이 하나님께, 본문에, 그리고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그 성경의 단어와 본문에 온갖 지식적인 정보들을 제공하기 위해 많은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성경학자들 보다 좀 못 할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놀람을 금치 못한다.
성 경은 인생의 중간에 하나님을 만난 그 만남을 표현하기 위해 많은 다른 문학 장르들과 언어들 (이야기, 비유, 속담, 노래, 편지, 고백, 비전, 꿈 등)을 사용하고 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성경이 문자적이며 동시에 숨겨진/우주적인 의미가 있다고 믿었다. 이 문자라는 것은 보다 솔직한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솔로몬의 아가서는 실제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사랑을 시로 적은 것이다). 그러나 문자적 읽기란 단순히 딱딱하게 고정되어 있는 경직된 의미를 전달해주는 모든 글자를 읽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고대 사람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지는 않았다.
이 문자적이라는 것에 덧붙이자면, 이들은 그 본문에 숨겨져 있는 의미를 찾아내었다. 예를 들면 솔로몬의 아가서는 하나님과 영혼의 관계를 묘사하고 있거나 (비유적 해석 /도적이나 윤리적 읽기) 또는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징적 해석 – 영적인 혹은 신비적인 읽기, 소위 영해라고 함).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가장 탁월한 성경 읽기 방법은 성경을 솔직하게 읽는 것이다. 그러나 상상력을 이용하여 숨겨진 의미를 찾아 함께 역동적으로 읽을 것을 격려하고자 한다.
이 것은 마치 바하 (J.S.Bach)의 음악과 같다. 다른 악기들이 높게, 그리고 음악을 활기차게 해주는 동안 베이스 (continuo – 음악 전체에 흐르는 저음) 의 저음을 전체 음악의 기본으로 자리하게 하는 방식이다. 성경에서 이 콘티뉴오 (continuo) 란 하나님께서 이러한 본문을 통해 아주 독특하고, 독창적이며, 역동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다는 크리스천의 믿음을 말한다. 1장에서 이미 언급한 적이 있는 게임의 비유로 돌아가보자. 비록 그 게임에 많은 다양한 변수들이 존재하지만 스크래블 게임은 거기에 계획 및 목적이 있음을 이미 전제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크리스천은 우주적인 의미의 실존을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의 본문에 있어서 인간의 단어는 영원한 언어를 위한 매개가 되는 것이며, 이 영원한 언어는 끊임없이 인간의 의미를 견제하는 것이다. (최근에 합창 지휘자인 로버트 쇼 (Robert Shaw)가 한 다른 역동적인 아이디어를 제안하였는데 그것은 육신이 말씀이 되었다는 아주 독창적인 행동이었다).
영 원한 말씀이 육신이 되었고, 육신이 말씀이 되었다는 것 – 그것은 성경의 본문을 왔다 갔다 하면서 이야기 하고 있는 일종의 연주인 것이다. 수많은 진리들과 언어의 방식들이 함께 엮어지는 이러한 신적인 것은 마지막 때가 되어야만 최종적으로 완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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