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 것인가? – 2003-03-09 작성자: 손장훈

* 아래의 글은 독후감을 쓴 허현이 자신의 글에 스스로 리플을 단 글입니다.

김기현님의 서평을 퍼왔습니다.

[복음과 상황] 6월호에 투고했던 글입니다.

누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 것인가?
– 김두식의 [칼을 쳐서 보습을: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와 기독교 평화주의]를 읽고

나는 김두식의 [칼을 쳐서 보습을] 구입하여 읽으면서 몇 가지 감정이 교차하였다. 그것
은 기다림과 감사와 미안함, 의아함이었다. 기다림이란 기독교 평화주의 이해가 척박한
이 땅에서 일구어낸 최초의 성과라는 것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평화주의가 신학자의 전유
물은 아니지만, 법학자이자 평신도의 노력으로 소개되었다는 점에서 신학하는 사람으로
서 저자에게 감사함이, 한국 교회에는 미안함이 앞섰다. 그러나 이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아주 산뜻하게 정리된 평화주의에서 무언가 미흡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다시 주
의해서 읽으면서 기독교 평화주의 또는 존 요더의 평화주의의 신학적 근거를 보다 선명하
게 드러내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평화주의의 신학적 근거는 기독론
과 교회론, 제자도이다. 아나뱁티스트들에게 평화주의는 제자도의 본질이다. 이 점을 확신
하지 못하면 평화주의는 단지 불가능한 이상을 추구하는 완전주의자들의 과대 망상이 되
고 만다. 바로 이점이 라인홀드 니버의 문제점이자 요더와의 차이를 가르는 지점이다. 그
리고 김두식이 자신의 입장을 밝히면서 끝내 기독교 평화주의를 확신하지 못한 이유도 여
기에 있다.

나는 여기서 김두식의 책을 평화주의자의 입장에서 비판하려 한다. 아마 본서를 기독교 외
부의 관점에서, 그리고 정당한 전쟁론이라는 평화주의 바깥에서, 그리고 평화주의 안에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평화주의를 설명하기 위해 김두식의 약점을 최대한 부각시키
려 한다. 이런 전략을 흔히 의도적 흠집내기라 할 것이다. 괜한 트집잡기라고 할까. 쓸데없
는 부풀리기라고 할까? 내가 여기서 비판하려는 것이 실제로 김두식의 글 곳곳에 쓰여져
있다. 평화주의를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약간 미흡할 뿐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
것들을 문제거리로 삼으려 한다. 이를 통해서 평화주의가 보다 뚜렷하게 나타나기를 바란
다. 따라서 나는 서평이 지녀야 할 미덕으로 공감과 함께 이해가 비판에 앞서야 한다는 사
실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려 한다. 그러니 이 책의 내용을 간단하게라도 요약하는 작업을 아
예 포기하고 문제가 되는 곳만 정략적으로 공격한다는 것을 양해해 주기 바란다.

이 책의 미덕
트집잡기 또는 의도적 흠집내기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칭찬해야 할 것이 상당
히 많다. 우선 이 책은 선구적인 책이다. 기독교 평화주의와 양심적 병역 거부에 관한 첫
번째 책이다. 번역된 몇 권의 책과 정당한 전쟁론에 입각하여 전쟁에 대한 기독교의 시각
을 설명한 책들이 있었고, 평화주의적 시각으로 초대교회의 병역 거부와 로마와의 관계를
다룬 저작이 있었다.(오만규, [초기 기독교와 로마 군대]. 한국신학연구소, 1999). 그러나
평화주의의 역사와 신학, 양심적 병역 거부와 관한 전반적인 내용을 평화주의 입장에서 기
술한 첫 번째이므로 선구적인 업적으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다음으로 이 책은 용감한 책이다. 소수자의 인권과 생각을 억압하는 구조에서 보수적 기독
교 대학의 학자가 이런 책을 쓴다는 것은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양심적 병역 거부를
오로지 정통과 이단이라는 한 가지 잣대만을 가지고 판단하는 단세포적 발상의 소유자들
이 우글거리는 현실에서 말이다.

세 번째로 이 책은 쉬운 책이다. 그의 말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가벼운 교양 과목 강의를
듣듯 흐름을 따라갈 수 있다.(31) 문장이 구어체여서 읽기 편하고, 내용이 아주 명쾌하게
잘 정리되어 있다. 그러나 만만한 책은 아니다. 쉽다는 것이 내용과 품격마저도 평이하다
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평화주의 역사에 관한 2.3장은 교회사와 서양사에 대한 개략적
인 앎을 요구하고 있고, 평화주의를 변호하는 5장은 존 요더와 라인홀드 니버의 대결을 이
해하기 위해 신학적인 지식을 필요로 한다. 이 모든 것이 편한 문체와 남다른 노력으로 잘
녹이고 걸러서 전달하고 있기에 쉬운 것이다.

넷째, 이 책은 참 따뜻한 책이다. 나 같은 사람은 평화주의에 관한 책을 쓴다면, 딱딱하고
정보와 무미건조한 신학 지식을 나열했을 것이다. 반면에 김두식은 자신이 고등학교와 군
법무관 시절에 겪었던 폭력과 여호와의 증인의 병역 거부에서 시작한다. 이로써 평화주의
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통쾌한 책이다. 논증 책임에 있어서 평화주의자가 정당성을 입증해야
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정당한 전쟁론자에게 그 부담이 있다는 것은 유쾌하기까지 하였
다.(119-123) 실제로 논증 책임을 누가 갖느냐에 따른 결과는 크다. 신 존재 증명을 생각
해 보자. 알빈 플란팅가라는 개혁주의 인식론자는 지금까지 신 존재 증명의 논증 부담이
기독교에게 있었다면, 이제는 무신론자들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고 책임을 떠넘긴다.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입증하는 것이 어렵고, 또한 비판
하기란 쉽다. 하지만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것도 어렵고, 그
것을 비판하는 것도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다. 물론 플란팅가의 시도는 잠정적 추정이 신
이 존재한다는 것에 있기 때문에 결국 논증 책임은 기독교 유신론자에게 있다는 비판을 받
는다. 하지만 그 동안 무신론자들의 냉혹한 비판 앞에서 땀을 뻘뻘 흘려야 했던 신학자들
에게 자신감을 심어 준다. 마찬가지로 거의 생존의 차원에서 자신을 방어해야 하는 평화주
의자들에게 논증 책임이 정당한 전쟁론자에게 있다는 것은 과히 법학자다운 탁월한 식견
이며 아주 흥분되는 논리이다.

평화주의 이해
이러한 미덕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트집을 잡을 것이 있다. 저자는 평화주의를 전쟁에 반
대하는 일련의 사상적 흐름 또는 종교적 믿음으로 반전주의라고 정의한다.(36-37) 이 정의
에 따르면, 비폭력주의자는 평화주의자이지만, 평화주의는 반드시 비폭력주의자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전쟁뿐 아니라 폭력도 거부하는 것이 기독교 평화주의라고 생각한
다. 예수는 반전주의자인가 아니면 비폭력주의자인가? 칼을 거부하고 다른 뺨도 돌려대
는 것, 성전 정화 사건에서의 예수 행위를 평화주의라고 했을 때, 그것은 폭력 반대이고
그 귀결이 전쟁 반대이다. 예수를 평화주의자라고 했을 때, – 저자에 동의하는 바와 같이
예수에게 어떤 주의나 이데올로기를 부여하는 것은 주의해야 할 것이다. – 그분에게서 보
여지는 것은 전쟁보다는 폭력의 거부가 더 우선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의 평화주의는 반전
주의로 축소할 것이 아니라 비폭력적 평화주의라고 정의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초대 교회의 병역 거부가 평화주의에서 비롯된 것인지에 관해서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49) 하지만 나는 평화주의가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살인을 절대 용납하지 않
았던 교부들의 가르침과 군대 내 사병들에게는 일반 사회와 달리 우상 숭배가 그리 큰 위
협이 되지 않고 도리어 자유로웠다는 점, 그리고 기독교 박해가 집중된 지역은 이민족의
침입이 잦았던 변방 지역이라는 사실은 병역 거부가 단지 우상 숭배 거부로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오직 평화주의 때문이라고 말해서는 안되지만, 우상 숭배 못지 않
게 평화주의도 박해의 중요한 원인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메노나이트는 개인 구원 위한 평화주의자?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당혹스러운 오해 한가지를 지적하려 한다. 저자는 메노나이트와 퀘
이커의 유사성을 지적하면서 그들의 평화주의는 개인 구원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라고 한
다. “이미 부패하여 구원이 불가능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개인 구원을 이루
기 위한 방편으로 종교적 경건과 평화주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입장을 함께 했습니
다.”(81) 잘라 말해서 그것은 오해이다. 어떤 근거에서 이렇게 말하였는지 나로서는 받아
들일 수 없다. 메노나이트의 평화주의는 단순하다. 그것은 제자도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
스도를 닮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성령의 능력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제자의 삶이다. 모
든 피조물의 구원을 위해 폭력을 동원하실 수 있고, 도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에 순종하셨던 예수의 삶을 모방하는 것이다. 제자는 선생보다 더 높거나 위대할 수 없다.
우리는 예수의 삶에 더하거나 감하지 않고 그대로 순종해야 한다. 평화주의는 개인 구원
을 이루는 방편이 아니라 기독론과 교회론, 제자도에서 출발한다.

아마 내가 생각하기에 이런 구절이 등장한 것은, 그리고 저자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이들
이 분리주의적 경향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나뱁티스트들은 루터
와 같이 교회와 세상을 구별하지만, 루터와 달리 두 개의 삶의 원칙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도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야 한다는 점에서 칼빈과 같지만, 그리스도의 법을 불신
자에게 국가 체제와 동맹하여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칼빈과 다르다. 이러한 태도를 세
상과 분리한다는 오해를 주는 것 같다. 아나뱁티스트들의 생각은 간단하다. 교회가 참 교
회가 되는 것이 바로 세상을 변혁하는 것이다. 빛은 더 뚜렷이 빛이 되고자 하면 어둠은 사
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나뱁티스트들의 평화주의는 개인 구원의 수단이 아니라 제자
도의 요체이며, 세상의 구원을 포기하고 도피한 쿰란 공동체처럼 이해하는 것은 오해이다.

구약의 하나님 vs 신약의 하나님?
평화주의의 성서적 근거를 찾을 때 가장 어려운 난관은 구약이다. 저자는”구약 성경은 분
쟁을 해결하기 위해 무력 사용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도처에 명백히 하고 있”다고 말한다.
(48)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살인을 금하는 십계명이 그 증거이다. 하지만 정
당한 전쟁론자들은 이 살인이 종교적인 살인을 의미하므로, 비종교적 영역에서는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서 전쟁과 폭력은 인정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5계명은 모든 살
인의 금지이다. 그리고 구약에서 일부다처제가, 신약에서 노예 제도가 비판받지 않은 채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정당화될 수 없듯이, 구약에 무력 사용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 곧
그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도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대립하는 것은 더 큰 문제를 안고 있다. 신
약에 나타난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이 구약의 전쟁과 살인의 하나님이 대립된다면, 이는 마
르시온주의에 다름 아니다. 신약의 사랑으로 구약의 폭력을 거부한 그는 구약의 정경성 마
저 거부하였다. 야고보서의 말을 약간 패러디하여 말하자면, 하나님을 신약과 구약의 하나
님으로 구분하는 것은 귀신도 알고 떠는 일이며, 허탄한 일, 즉 하나님을 모독하는 참람한
죄이다.(2:18-20) 모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저자가 구약과 신약을 대립시킨다고 생각하
지 않는다. 저자의 한 두 문장으로 발언한 것을 부풀리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구약에
서 야훼의 전쟁과 평화주의 관계가 그리 쉽게 설명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내가 의도하는
것은 단순하게 구약은 신약과 달리 전쟁과 폭력을 용인하는 것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
을 말하기 위함이다.

나의 입장
이 책을 읽으면서 당혹스러웠던 것은 평화주의를 설파하면서도 평화주의를 확고한 신념으
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 큰 감동으로 읽다가 마지막에 가서 뒤통수
를 한 대 얻어맞는 심정이었다. “존 하워드 요더 교수의 편을 들면서 라인홀드 니버 교수
를 열심히 비판했지만, 이성이 아닌 감정에만 충실한 판단을 내린다면 제 생각은 오히려
니버 교수 쪽에 가깝습니다. (중략) 신앙적 이성의 눈으로 판단하면 요더 교수가 맞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막상 그런 완전한 이상을 추구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220-
21)

왜 저자는 평화주의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걸까? 바로 이점이 저자가 평화주의의 신
학적 근거를 제대로 부각시키지 못했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기독교 평화주의는 – 여기
서 평화주의는 아나뱁티스트의 평화주의이다. – 기독론과 교회론, 제자도에 기초한다. 저
자가 안타깝게도 평화주의를 확신하지 못하는 것도 산상수훈에 따른 평화주의를 완전한
이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윤리는 ‘완전 윤리’라는 범주가 부적절하고, 제자
의 ‘당연 윤리’라고 해야 적절하다. 완전 윤리라는 개념은 실현할 수 없다는 전제가 있다.
니버는 이를 불가능성의 윤리라고 했다. 어거스틴은 산상수훈을 개인의 내면 세계로 축소
함으로 피해가고자 한다. 그러나 너무 명백하게 산상수훈의 결론은 문자적인 실천과 순종
을 요구한다. 말로만 주여, 주여 하는 것은 순종이 아니다. 평화주의는 제자들의 윤리이
다. 가톨릭 신학자 로핑크에 따르면([산상설교는 누구에게?]. 분도출판사) 산상수훈에 대
한 두 가지 오해가 있다. 하나는 산상수훈을 일반 사회에 요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
면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산상수훈은 내면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지켜져야 하는 것이고,
모든 사람이 아닌 제자가 된 자들만이 따를 수 있는 윤리이다. 결국 산상수훈은 제자공동
체를 전제하지 않고서 제대로 독해할 수 없다. 평화주의는 그리스도만을 따르고자 하는 제
자들만이 실천할 수 있다. 그러므로 평화주의는 제자도이다.

그리고 예수 윤리를 인간이 성취할 수 없는 완전 윤리라고 보는 것은 부활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부족이지 예수 윤리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니버가 도덕적 인간마저도 사회라
는 구조 속에서는 비도덕적 인간이 되고 마는 상황을 지적한 것은 타당하다. 하지만 그는
부활의 그리스도를 간과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사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믿음이나 전
파하는 것이 헛것이듯이, 예수의 부활이 없다면 산상수훈 또한 헛것에 불과하다. 부활에
의해 불가능한 윤리가 가능해 진다. 니버는 마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같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희망과 능력이 타락한 인간의 비관적 현실을 압도한다. 그들은 부활의 시대에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다. 부활은 흉흉한 소문이지 좋은 소식이 아니다. 오히려 부활의
기쁜 소식이 그들을 더 괴롭게 하고 예루살렘을 떠나게 한다. 부활한 그리스도에 대한 확
신이 우리로 하여금 평화주의를 가능케 한다.

다음으로 평화주의는 평화 공동체를 요구한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교회 안에서 현실화되
었다.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빛이 어둠의 세상은 보고 있다. 평화주의를 우
리가 완전하게 성취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 이유가 우리의 여전히 죄 가운데 있고 또한
세상이 사악하기 때문이지만, 우리의 사명은 세상과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또 다른 세상
인 하나님 나라를 증언해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하나님 나라는 ‘이미'(already)와 ‘아직 아
니'(not yet)의 긴장에 속해 있다. 니버와 정당한 전쟁론자들은 ‘아직 아니’를 지나치게 강
조하여 ‘이미’의 차원을 간과할 뿐 아니라 제약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긴장을 유지하면
서도 하나님 나라의 현재가 미래를 앞당기도록 해야 한다.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한
국 교회가 저자의 바람대로 평화주의를 주장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관용을 보여 준다면,
그것은 사자들이 어린 양과 뛰노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하나의 징표
가 될 것이다.

누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 것인가?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나는 저자에게 두 가지를 말하고자 한다. 하나는 저자는 두 세계 사
이에서 그리 오래 있지 말기를 당부한다. 두 세계를 동시에 만족시키려고 했던 란 리히티
의 경험을 우리에게 들려주었다.(99) 그것이 오늘날의 아나뱁티스트 공동체의 딜레마라
고 하였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저자 김두식의 문제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것은 제자와 그들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
고 싶다. 여기서 로핑크는 이 평화의 의미를 다섯 가지로 설명하는데, 그 중 두 번째가 하
나님의 평화는 발상지가 있는데, 시온과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평화는 “세상에
서 서로 싸우는 민족들과 반대로 야훼에 의하여 가능해진 평화의 삶을 모범적으로 살기 시
작하는 한 백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의존한다.” 평화 교회 전통이 한국 교회에 더 많이 소
개되고 확산되기를 소망한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 하나는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자들에게
종교적이고 사회적 관용을, 그리고 평화주의 공동체에 대한 관심을 촉구한다. 그리고 본서
와 함께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한겨레신문사)과 함께 읽기를 권한다. 한국 사회
의 야만적인 폭력성을 신랄한 비판을 통해 우리 한국 교회가 얼마나 세상과 닮아 있는가
를 확연하게 보게 된다. 어둠을 밝히는 빛이 아니라 어둠 속의 불랙 홀이 되어버린 우리의
슬픈 자화상을 똑바로 보아야 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진정한 기독교 평화주의가 가능할
것이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날이 올 것이다. 누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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