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평화, 미국의 평화

2002년 10월

이상규 교수(고신대학교)

지난해 9월 11일,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에 대한 자살 테러 공격은 전세계인을 새로운 전쟁의 공포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다. 미국은 비행기 테러 공격의 주체를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끄는 알-카에다로 이슬람 과격 무장 단체로 지목하였다. 그리고 미국은 곧바로 테러에 대한 보복을 다짐하고 불리는 구체적인 증거없이 힘없고 가난한 나라 아프가니스탄을 향하여 ‘정의로운 전쟁’을 선포, 감행하였고 지금은 그 범위를 더 넓게 확대하려 하고 있다. 한편 미국은 이번 전쟁을 반테러 전쟁으로 규정하고 자국에 대한 공격을 문명 대 반문명 세력 간의 전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와같이 미국에 의한 전쟁이 정당화되어 거대한 폭력으로서 지구 전체를 뒤덮고 있고 그로 인하여 모두가 신음하며 탄식하고 있다는 것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샬롬의 회복을 갈구하는 것을 상징하는 언어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번 미국의 보복 전쟁의 성격과 요인에 대한 분석과 전망을 통하여 총체적이며, 우주적인 하나님의 샬롬의 임재를 기대하며 성경이 말하는, 신학이 말할 수 있는 평화의 의미를 더듬는 일은 중요하다.

1. 미국의 평화

*지난 9월11일 미국에 대한 자살 테러가 일어난 요인

작년 9월11일 테러 공격과 관련된 몇 가지 의문점을 제기해 볼 수 있다. 먼저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은 왜 미국을 공격 대상으로 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몇가지 요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이슬람의 반 유다주의, 특히 반이스라엘 전선 문제가 그 하나의 해답이 될 수 있다. 곧 전세계 맹주로 자처하는 미국이 중동 분쟁에서 일관되게 이스라엘을 지원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반이스라엘 무장 단체들의 공격 대상이 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두 번째는 반기독교, 반서구주의를 표방하기 위해 상징적으로 기독교 문명과 서방세계를 대표하는 미국을 공격한다는 분석이다. 이러한 공격으로써 테러 집단들이 노리는 것은 반미 공동 연대, 반기독교 공동 연대, 반서방 공동 연대를 자극하고 그들의 단결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반자본주의 또는 자본주의적 근대화에 반대하기 위하여 자본주의 세계화를 이끌고 있는 미국을 공격 대상으로 한다는 분석이다. 자본주의는 기술 문명을 시장제도와 결합시킴으로써 인류 역사상 가장 찬란한 경제적 성과를 가져오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근대화는 여러 가지 부작용과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테러 조직들은 이러한 점을 노려서 자본주의의 상징탑인 세계무역센터를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항공기 테러 사건이 서방세계 국민들의 테러에 대한 공포심을 확산시켰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테러 주체들이 노리고 있었던 전략적 성공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반문명, 반미, 반자본주의적 세계 연대 구축을 지향했다면 그것은 명백히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한 점에서 그들의 테러 공격은 허무주의적이다. 그러한 허무적인 공격은 일반적으로 절망적인 조건에서 시도된다.

우선 테러를 지지하고 있는 국가들의 실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알-카에다 요원들을 양성하는 군사 기지를 제공하고 있는 수단은 전세계 나라 가운데 가장 가난한 나라이다. 소말리아는 무정부 상태가 지속되고 있고 경제는 최악의 상태이다. 아프가니스탄은 구소련의 지배와 10년 전쟁이 끝나고 서방세계들의 전략적 관심이 멀어지고 난 뒤 내전과 종교적 폭력이 지배하고 있던 최극빈 국가이다

9.11테러의 진정한 원인은 ‘가난’이 ‘풍요’에 대한 증오심을 폭발시킨 것으로 보아야 한다. 세계적 가난은 세계적 풍요의 그늘이다. 세계화 성공의 축포는 가난한 국가들의 상대적 박탈람을 더욱 조장시키고 있다. 서방 세계의 자만과 멸시, 그리고 무관심은 소외된 사람들의 소외감과 증오심을 자극하고 있다. 다이어트 산업이 번창하고 얼굴 성형 산업이 수조 원대의 시장을 형상하고 있는 사회가 있는 반면, 12세가 넘은 여자 아이들을 학교에서 쫓아내고 옥수수 몇 알을 훔쳐먹은 사람들을 공개 처형하는 사회가 있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국의 무차별 폭격을 생각하며- 빛과 어둠의 갈등인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국의 무차별 폭격은 국제질서 혹은 문명질서의 유지를 위한 정의로운 전쟁인가? 미국과 회교권 과격분자(이라크, 리비아, 그리고 탈레반 세력)의 갈등을 선악, 빛과 어둠의 갈등으로 보는 것이 온당한가?

많은 미국의 우익적/애국적시민들(대부분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과 이에 편승하는 한국의 언론들도 아주 빈번하게 미국의 적을 곧 정의와 질서의 적, 다시 말해 어둠과 혼돈의 세력이라고 보려는 경향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해석일 뿐이다.

왜 미국은 전세계의 테러조직체들을 문명세력에 대한 적대세력이라고 단죄하고 자신을 문명질서의 수호자로 자임하며 나아가 선악간의 판단행위를 독점하려는 것일까? 잘 알려진 바대로 국제 분쟁에 대한 미국의 경찰국가적인 간섭과 군사력 행사는 미국의 신학적인 자기 정체성에 있다.
많은 정치학자들과 이를 뒷받침하는 보수신학의 저류에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새로운 세계질서의 수호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집단의식이 흐르고 있음을 주목한다.

예를 들어 미국 신학자인 라인홀드 니이버는 (도덕적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책에서 집단과 집단 사이에서 통하는 최고의 윤리는 사랑이 아니라 공의라고 주장한다. 어떤 단체가 현실세계에서 진정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선한 세력이 되기 위해서는 물리적 강제력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선함의 완성은 힘의 구비에 있는 것이다. 라인홀드 니이버의 기독교적 현실주의는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국무성의 대외정책의 기조가 되었다.

또한 미국은 이사야2장에 나오는 야웨의 보좌를 대표하려는 유사 메시야적 사명감을 가지고 국제 분쟁에 개입한다. 그러나 사회과학적인 상상력을 동원해 보면 이런 신학적이고 현실정치적인 사명감과 짝을 이루는 하부 구조가 미국의 거대한 군수산업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군산정 복합체라는 정치구조는 미국의 대외간섭적인 입장을 충실하게 떠받치며 호혜적으로 제휴한다. 미국의 군수산업이 상시적으로 가동되는 산업이 되기 위하여서는 세계의 어디에선가 무기 수요를 발생시키는 전쟁들이 일어나야 한다. 미국의 국제 분쟁의 개입은 이런 이중적인 계산과 맞물려 있다. 미국은 현재 국민 총생산의 0.07%인 100억 달러를 해외에 원조하고 있는데 2000년도 미국의 군사비 총액은 미국 국내 총생산의 3%로 냉전 시기보다는 줄어든 2,000억 달러를 조금 웃돌고 있다. 그러나 2002 회계 연도 안보 예산 지출 요구액은 3,000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금액은 전세계 군사비 지출 30%에 해당하는데 러시아, 중국, 일본, 영국, 프랑스 등 나머지 상위 5개국의 군사비 총액을 합친 액수보다 많다.

새로운 세계 평화는 전략적으로 미국이 주도하는 평화를 의미한다. 미국은 자본주의적 세계화와 군사적 패권을 추구한다. 이 두 가지 조건은 미국이 말하는 평화의 기본적 원칙이다. 앞으로도 이러한 평화의 원칙에 도전하는 세력은 미국의 보복을 받게 될 것이다.

2. 하나님의 평화

평화란 무엇인가? 특별히 기독교 성서가 요구하고 있는 하나님의 평화란 무엇인가?
평화는 여러 가지 용어로 표현되는데, 히브리어 ‘샬롬, 아랍어’살람’, 헬라어’에이레네’, 라틴어’팍스’, 그리고 중국어’평안’등이다. 샬롬은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소극적인 개념이 아니라 건강하고 온전한 상태를 가리키는 적극적 개념이다.

*평화는 타자의 아픔에 대한 공감적 인식으로부터 시작한다.

폭력은 대체로 자신의 이익이나 욕망에 사로잡혀 타자의 입장에 서지 못한다. 타자의 아픔은 더더욱 공감하지 못한다. 이로 인하여 분노와 복수와 증오는 깊어지고 복수는 복수를 낳고 전쟁은 전쟁을 낳는다. 타자의 아픔에 대한 공감적 인식을 평화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고통과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응답하셨다.

타자의 아픔에 대한 공감적 인식은 생명에 대한 외경이다. 생명이 있다는 것은 살아있음이며, 모든 생명이 있는 것은 살고자 한다. 생명을 상실케하는 폭력은 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생명의 존중을 명령하고 있다.

생명, 그것은 우리가 매우 존중해야 할 하나님의 선물이다. 오늘날, 평화로운 세계를 위한 하나의 발걸음은 타자의 아픔에 대한 공감적 인식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에 대한 외경이다.

* 평화는 절제와 제한과 타자의 가치인정을 요구한다.

절제 없는 인간의 욕심은 결국 인간을 파국으로 몰아갈 것이다. 절제는 샬롬을 회복하기 위한 인간의 기본 전제이다.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와 함께 나는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도 동시에 생각하여야 한다. 화해는 자기제한과 절제로부터 타자의 인정으로 나아가야 한다. 타자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에만 화해와 평화가 존재하게 된다.

평화는 비폭력과 폭력의 없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기독교의 참된 정신은 비폭력이다. 폭력의 사용을 통한 평화는 위장평화이며 강요된 평화이지 진정한 평화가 아니다. 비폭력 정신에는 힘을 가진 자의 자기 제한이나 절제가 필수적이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평화가 아니다. 이것은 다만 증오일 뿐이다. 증오는 참된 평화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악을 선으로 이기는, 원수 사랑의 정신이 바로 평화의 정신이다.

* 평화의 근거는 예수그리스도 이다.

참된 평화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의 성육신은 이땅에서의 하나님의 평화 사역의 시작이다. 그는 삶속에서 육체적, 영적, 정신적,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억압과 소외속에 있는 자들에게 자유와 해방과 평화를 선포하였다.

그의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의 화해와 평화를 성취하셨다. 십자가는 억압과 단절과 죽음의 폭력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평화를 위한 것이었으며 부활은 영원한 평화의 희망의 선취적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화평케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엡2:14-17)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화해와 평화사역은 자연을 포함한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을 통하여 화해되어진다. 단순히 인간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즉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화해의 사역속에 있음을 성서는 말하고 있다(골1:20). 만물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화해되었다.
그리스도의 화해의 사역은 인간과 인간사이에, 인간과 자연사이에,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평화를 이루고 샬롬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것에 평화를 수여하시는 분이다.

*진정한 평화는 정의로운 평화이다.

예수는 이웃을 사랑할 뿐 만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자신이 자신에게 폭력을 가한 자들의 용서를 빌면서 십자가에서 죽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에서 물건을 매매하는 자들의 상을 뒤엎어 버리셨다. 당시의 정치, 종교지도자들을 비판하였다. 이것은 예수의 평화적 이미지와 다른 것이 아닌가? 아니다. 이것은 의로운 분노의 사건이다. 불의와 평화는 양립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정의와 평화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분리되어 있다면 그것은 참된 평화가 아니다. 그래서 로마서 14:17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로움과 평화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의가없는 위장된 평화를 인정할 수 없었다.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처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6:13-14) 정의없는 평화를 말함은 거짓이다. 사회적 약자와 정치적으로 억압받는 자를 배려하지 않는 평화, 파괴되어진 하나님의 피조물을 배려하지 않는 평화, 미래 세대를 배려하지 않는 평화, 달리 말해서 소수만이 특권처럼 누리거나, 신음하는 자연은 내버려둔 채 인간의 복리 만을 추구하거나 자신의 세대만의 안녕을 추구하는 평화는 정의로운 평화가 아니며, 이는 참된 평화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이 비판하고 있는 것은 종교적 위장 평화이다. 평화 없는 자들, 상처받은 이들의 상처를 진정으로 치료하지 않으면서 샬롬, 샬롬이라고 외치는 종교지도자들의 위선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정의는 눌림을 당한 사람들이 정의가 실현되었다고 인정할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지, 제1세계가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제임스 콘은 말한다. 성서가 말하는 평화(샬롬)는 바로 정치적으로 억눌림을 당한 사람들이 정의에 입각하여 인간성을 다시 찾고, 정치적인 구조가 변하여 정치적 탄압을 하지 아니하는 상태를 말한다.

즉, 힘 있는 자가 힘 없는 자를 힘으로 억압하고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를 착취하고 강대국들이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약소국을 착취하여 제국을 이루고 그것을 오히려 세계평화를 이루었다고 주장하는 역상의 현장에서, 약자들을 위한 정치적인 평화, 가난하고 없는 자들과 군사력이 없는 민족과 나라들이 탈취당하지 않고 식민지가 되지 아니하게 하는 정의가 있는 세계정치적 평화를 말하는 것이다.

3. 평화를 위한 교회의 과제

성경은 하나님과 이웃의 이익보다 자신을 중심에 놓고 우선시하는 태도를 죄라고 규정한다. 타자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하여 벌어지고 있는 국제간의 전쟁과 갈등은 가장 포괄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을 반역한 인류가 자구책으로 강구하는 전형적인 죄악인 셈이다. 교회는 전쟁이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게는 생명의 경외 없이 죽음(노예화)을 강요하고 자신에게는 안식과 평화를 확보하려는 가장 야만적인 행위이므로 지금 미국이 말하는 정의로운 전쟁은 절대로 정당화 될 수 없음을 선포해야 한다.

기독교적 평화는 군사적 힘을 통해 이루어지는 안정과 질서가 아니다. 고대 로마제국의 Pax Romana 세계경찰국가로서 미국의 Pax Americana는 한편에서의 안정 뒤에 다른 편에서의 희생과 눈물과 분노가 있는 강요된 평화에 불과하다. 따라서 교회는 미국처럼 탁월한 무기와 군사력이 있어야 나라의 안전과 평화가 보장된다고 강조하면서 무기 개발과 방어 체계를 확립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힘의 논리와 사고에 에 맞서야 한다.

교회 교육의 핵심은 평화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끊임없는 전쟁 속에서 살아온 인류에게 평화를 이룩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까닭이다.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던 천사들과 목자들은 ‘하늘에는 영과, 땅에는 평화’를 찬양하였다. 예수는 전쟁과 투쟁의 왕이 아니라 평화의 왕으로 오신 것이다.

평화를 만드는 자가 되라고 하는 성서의 명령은 열강의 압제에 대하여, 그리고 불의한 억압을 ‘체념’하고, ‘한숨’지으면서 사는 것이 평화라고 하는 것은 전연 아니다. 평화를 만드는 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행동하여서 평화를 쟁취하는 사람으로 살라는 말이지, 체념형 인간, 무조건적 적응형의 인간, 한숨형의 인간이 되라고 하는 것과는 전연 다른 것이다.

평화는 정의와의 관계에서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그 첫째는 정의 없는 평화요, 둘째는 정의로운 평화이다. 미국이 주장하는 평화는 제3세계의 정의를 파괴시키고 박탈함으로써 실현된 평화이다. 이러한 정의없는 평화를 진정한 성서적 평화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전쟁을 일으켜 아프가니스탄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끌어넣었으면서도 그들의 목표는 ‘세계평화’를 실현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거짓평화, 위장평화의 논리를 가지고 세계졍복의 야욕을 숨겨보려 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평화란 단순히 무력충돌을 하는 전쟁이 벌어져 있지 아니한 상태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불의한 정치, 경제, 사회적 구조에 의하여 억눌림을 당하고 있지만 무력투쟁으로 나타나지 아니하고, 눌린 자들이 침묵하고 참고 견디는 상태도 평화는 깨어진 상태인 것이다.

따라서 (제3세계의) 교회는 평화교육을 통하여 바로 위와 같은 평화가 파괴되어진 상태를 진단할 줄 알도록 하는 ‘평화진단’의 기준들을 가르쳐야 한다.

*참고서적
노정선 저. 통일신학을 향햐여. 한울
장로회 신학대학 기독교교육연구원. 교육교회. 2002, 1
한국성서학연구소. 성서마당. 2002,1
기독교사상 2002,1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사목. 2002.2
녹색평론 2002년 1-2월
창작과 비평 2001년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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