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평화, 예수의 평화 pax Romana, pax Christi

이상규 (고신대학교 신학과 교수, 역사신학)

그리스도: 평화의 왕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은 지상의 진정한 평화를 주는 사건이었다. 그래서 누가는 예수의 탄생을 “하늘에서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평화”라고 했다(눅2:14).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다. 선지자 이사야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평화의 시대를 예고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이는 우리에게 한 아기가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prince of peace)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사9:2-7).

샬롬 (Shalom)

‘평화’라는 용어와 그 파생어는 신약에서 100회 이상 나온다. 우리말 성경에는 평화, 평강, 화평 등 각기 다른 번역이 있지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Peace be with you, 눅24:30, 요20:19,21,26), “평강의 하나님” 등과 같은 이 평화에 대한 빈번한 용예는 이 평화의 개념이 신약성경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반증한다. 하나님은 거듭 평화의 하나님으로,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성령은 평화의 영으로 언급되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안하뇨”라고 인사했는데, 평화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주된 인사말이었고, 이 인사말의 사용은 메시야적 평화를 이루시는 주님을 따르는 실천적 행위였다. 사도바울은 이방인이었던 고넬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말씀하면서 복음의 핵심을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화평(평화)의 복음”이라고 정리했다(행10:36).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신자들에게 화평의 복음으로 신을 신으라고 했다(엡6:15). 바울은 에베소 2장 이하에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화평케 하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 이 둘로 자기 안에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셨다”고 했다(엡2:14-15).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평화를 말하고, 구원의 복음을 화평의 복음이라고 동일시 할 때 이들은 구약의 평화개념 곧 샬롬의 메시아적 적용을 의미했다.

평화라는 의미의 희브리어 ‘샬롬'( )은 흔히 전쟁의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 보다 광범위한 의미를 담고 있다. 샬롬은 전쟁이 없는 상태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 속에서도 모든 갈등과 대립이 없는 평안과 기쁨을 의미한다. 그것은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복지와 안녕, 건강한 상태를 포함하며, 종교생활, 법질서와 사회적 관계, 국제관계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모든 것이 잘되고 풍요로운 행복한 상태를 의미한다. 샬롬은 복지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번영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네 성 안에는 평강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이 있을찌어다”(시122:7)가 바로 그런 의미었다. 따라서 샬롬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사람들과의 온전한 관계에서 오는 안녕(well-being)의 상태를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샬롬이라는 단어가 난공불락의 요세를 뜻하는 예루살렘(yer shalom)이 될 수 있었다. 구약 선지자들에 의하면 참된 평화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세우신 언약 안에서 의와 공의가 이루어지고, 공동의 복지가 이루어지고, 모든 사람에 대한 평등과 경의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미가선지자는 이스라엘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은 “생명과 평화의 언약”이라고 말한다(미가2:5). 반면에 불의한 소득을 탐하고, 돈을 받고 재판하고, 모든 이들에게 공평이 없고, 사회적, 경제적 억압때문에 고통당한다면 거짓 선지자들이 평안하다 평안하다 하나 실상은 평화가 없다(렘6:13-14). 평화는 하나님과 바른 교제 속에서 이웃과도 바른 관계를 누리는 완전함이다. 그래서 평화, 곧 샬롬이란 단어는 아예 구원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을 때가 많다.

신약에서 평화, 에이레네(?ιρ νη)는 구약의 샬롬처럼 복합적인 의미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연합’이라는 어근에서 나온 이 말의 어의는 전쟁이 없고, 적대관계나 갈등이 해소됨으로서 이루어지는 질서와 조화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전쟁이나 분쟁의 반대개념(눅14:32, 행12:20)으로서 인간공동체 내의 화합(마19:34, 눅12:51, 고전7:15)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래서 에이레네는 샬롬처럼 그 의미가 포괄적이지는 않지만 구약의 샬롬과 크게 다르지 않다.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헬라어역인 70인역에서는 샬롬이 거의 에이레네로 번역되었다.
로마인들은 평화를 팍스(pax)라고 불렀다. 이 팍스라는 단어는 계약, 곧 서로 사우지 않겠다는 동의와 같은 어근에서 파생되었다. 그래서 팍스라는 단어는 ‘안전'(securitas), ‘평정'(tranquilitas), ‘쉼'(quies), ‘안식'(otium) 등과 연결될 수 있다고 베인톤은 지적한다. fhd마인에게도 평화(pax)는 단순한 전쟁의 없는 상태 그 이상의 어떤 것이었다.

고대사회에서 평화는 일종의 종교적 개념이었는데, 이것은 백성들의 끊임없는 원망(願望)이었던 것이다. 고대 헬라인들이나 로마인들은 평화를 인격화하거나 신격화하기도 했으나 희브리인들은 평화를 하나님의 선물로 이해했고(레26:6), 그 진정한 평화는 메시야의 내림에 서 보았다. 그것이 바로 메시아적 평화(Messianic shalom)다.

로마의 평화, 예수의 평화

우리는 인간의 역사 속에 오랜 전통으로 남아 있는 두 종류의 평화를 말할 수 있다. 첫째는 평화에 대한 로마적 개념인 ‘로마의 평화'(pax Romana)이며, 다른 하나는 예수그리스도가 주시는 진정한 평화, 곧 예수의 평화(pax Christi)이다. 로마의 평화는 제국의 군사적 우위에 기초한 정치적 평화이며, 잠제적 적을 폭력으로 제압함으로서 경쟁적 대상의 제거를 통해 이루어지는 비전(非戰)의 상태일 뿐이다. 물론 팍스 로마나는 아우구스투스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특히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엄청난 도약이 이루어졌다. 그는 내란을 종식시켰으며, 혼돈과 폭동이 사라졌고, 질서가 확립되었고, 예술과 상업, 농업이 발전했으며, 법의 구현되었다. 아우구스투스의 평화(pax Augusta)라는 이름이 여기서 유래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로마의 평화, 곧 파스 로마나라는 개념이 생겼다. 이 개념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다름 아닌 세네카(Seneca)였다. 세네카는 “전쟁영웅으로서의 황제를 “국가를 결속시키는 기반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호흡하는 삶의 숨”이라고 말하고, “그가 제국에서 떠난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고난과 착취를 당할 수밖에 없으며, 왕이 살아 있을 때만 모든 것이 하나의 의미를 갖게 된다”고 했다. 말하자면 로마의 평화란 로마제국의 권력, 그리고 로마제국의 군사력과 분리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로마의 평화란 피로 물든 평화였다.

팍스 로마나는 공평과 정의에 기초한 평화가 아니라, 제국의 힘이 공의요, 제국의 군사력이 선이었다. 이 로마의 평화라는 이름으로 엄청난 폭력이 자행되었으며, 경쟁적인 나라들은 군사력으로 궤멸되었다. 군사력에 의해 쟁취되고 지켜지는 평화는 한시적인 평화일 뿐이다.팍스 로마나의 기간은 불과 2백여년에 불과했다. 로마의 평화를 진정한 평화로 간주할 수 있을까?

그러나 ‘예수의 평화’는 사랑과 자비에 기초한 진정한 평화다. 그는 평화의 왕으로 오셨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평화를 이룩했다(골1:20). 예수의 탄생과 삶과 가르침, 그리고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우주적인 화해와 포괄적인 평화의 기초가 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없는 세계에는 진정한 평화가 있을 수 없다. 클라우스 벵스트(Klaus Wengst)가 그의「팍스 로마나」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과 선포의 중심으로서 평화에 대한 표상과 특별한 방법으로 결합되어 있다.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그를 죽이려는 헤롯의 음모나,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처형은 적어도 제국의 관점에서 볼 때는 팍스 로마나의 운동 속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탄생과 그의 활동은 로마의 통치자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로마의 평화를 위협하는 반란이었다. 예수는 로마의 평화라는 이름으로 폭력의 희생자가 되었지만, 예수님은 용서와 화해로서 폭력에 대응했다.

평화를 이루어가는 교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시다(엡12:14ff).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담을 여시고 하나되게 하사 적대와 불신의 고리를 끊으사 화해케 하셨고, 분리되었던 집단들을 하나되게 하셨다. 그는 노예와 자유인, 남자와 여자, 야만인과 희랍인의 차이와 대립과 차별을 없이하셨다(갈3:28, 고전12:13, 골3:11). 그의 부활은 폭력과 전쟁사의 무자비한 연속에 반기를 드셨다. 로마의 평화란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폭력의 희생자이신 예수님은 화해와 평화를 실현시켰다. 그는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실현시킨 것이다. 교회는 평화를 이루어가는 공동체여야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은 “한 몸으로 그리스도의 평화 속으로 부름 받은 자들이라”(골3:15)고 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의 유기체, 곧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고 있다는 점과, 교회는 ‘예수의 평화’의 장(場)임을 난타낸다.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통해 하나님과 화해되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자들의 공동체이다. 이 평화는 인간관계속에서도 외연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그는 우리의 평화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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