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콘라드 그레벨이 이해한 교회론
“갓 태어난 아기에게 세례를 주고 그와 동시에 아기들을 교회의 구성원으로 여긴 것은 교회와 일반 사람들 사이에 아무런 구분이 없고 교회는 모든 사람들의 교회가 되었다. 그러나 신약 성경 마태복음 7장 14절에 의하면 교회는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고 따르는 소수 사람들의 교제(fellowship)를 의미하지 많은 다수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그레벨이 교회에 대해 새롭게 이해한 부분이다. 그러나 쯔빙글리는 대중을 위한 국가 교회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고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나뱁티스트 신자들은 교회가 국가와 권력으로부터 자유하기를 원했다. 즉 국가의 강요나 국가의 법에 지배 받지 않는 신자들이 구성원이 되는 교회를 원했다. 그들의 진정한 관심은 세례가 아니라 교회에 있었다. 그들은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함께 하는 교제, 즉 믿음과 행함이 일치하는 복음을 증거하며 참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의 교제를 추구하였다. 신자들의 세례는 단순히 이러한 새로운 교회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외적인 표시로써 강하게 인식되었을 뿐이다.
아나뱁 티스트 신자들이 발견한 교회의 절대 핵심은 참된 회심과 거룩한 삶, 제자도의 헌신 된 삶에 바탕을 둔 자발적인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것에 있었다. 이것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법과 권력에 의해 국민 전체가 자동으로 교회 구성원이 되는 중세 종교 개혁자들의 교회론과는 첨예하기 대립되는 것이었다. 아나뱁티스트 신자들이 유아세례를 반대했던 배경이 올바로 해
석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교회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개념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유 아세례는 국가 교회를 거부한 원인이 아니라 국가 교회를 거부하게 된 근본적인 상징에 불과했다. 어떻게 갓 태어난 아기가 참 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삶을 헌신할 수 있단 말인가? 아이들이 상상 가능한 범위 내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수동적으로 경험할 수는 있겠지만 (이것조차도 아나뱁티스트 신자들은 의구심을 가질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삶의 서약은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유아 세례는 의미 없을 뿐 아니라 실제로 교회 구성원이 되거나 기독교의 참된 본질을 이해하는데도 심각한 장애가 될 뿐이다. 오직 믿음에 기초한 성인 세례만이 의미 있는 삶의 헌신을 하게 할 뿐이다.” [메노나이트 이야기, 63-6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