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함석헌의 평화”와 함께 하는 리본모임

9월에는 함석헌의 평화를 전공하신 김대식 교수님께서 오셔서 한국형  평화의 이야기를 함석헌 선생의 사상을 통해 들려 주십니다. 함석헌 선생의 존함은 많이 알려졌지만 깊이 있게 함석헌 선생의 평화 사상에 대해 말해주는 사람이 주변이 많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특별히 춘천 출신이신 함석헌 선생의 전문가이신 김대식 교수님을 초대하였습니다.

김대식 교수님은 대구가톨릭대학원 종교학과 겸염교수이며 함석헌 평화포럼 공동대표이며, 함석헌 평화연구소 부소장이십니다.  철학과 종교학 박사로서 종교 간의 대화에도 관심을 많이 갖고 활발하게 활동하십니다.

메노나이트의 평화에 대해 많이 들었지만 우리나라의 함석헌 선생님의 평화이야기를 듣는 것은 또 다른 설렘을 선사합니다.

9월 24일 화요일 오후 7시 한국아나뱁티스트 센터에서 뵙겠습니다.

읽으실 책으로는 김대식 교수님의 저서로 <함석헌의 이성의 해방>, <함석헌의 평화론>, <치명적 자유의 향연: 아나키즘과 함석헌>입니다. 이 중에 하나를 고른다면 <함석헌의 평화론>을 읽어 오시라고  강추합니다. ^^



					

메노나이트와 바캉스

올 여름은 바캉스를 다녀오지 않았습니다. 이유를 대자면 여러 핑계거리가 있지만 가장 정확한 이유는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노나이트와 바캉스>라는 주제의 글을 부탁받아서 써보았습니다.
지인들은 바캉스를 다녀와야 진정한 글이 나온다고 우스개 소리를 해 주셨는데, 어쩌다보니 몸보다는 글로 배우고 글로 움직이는 삶이 더욱 용이해지는 현실을 봅니다.
글로만 바캉스인 이번 여름, <메노나이트와 바캉스>글을 이제 링크해 봅니다.
NCCK의 사건과 신학이라는 웹진에 실린 글입니다. 저의 개인적인 견해이기에 다른 메노나이트분들과 다를 수 있다는 점 양해말씀으로 먼저 드립니다. ^^

8월 리본모임 정리

69552735_3007170976020881_3671332847710371840_o책 <분별(대장간)>의 저자 박준형 형제님과의 리본모임 정리

 

어제 리본모임은 ‘분별’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했습니다. 분별이라는 주제는 한국기독교인들에게는 낯선 주제입니다. 어떻게 분별할 것이며 무엇을 분별할 것이며, 그 결과는 누가 확증할 것이며 온통 난해한 질문일색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어려운 주제를 어제 리본모임에서 가졌습니다. 일방적인 강의형식이 아니라 강사가 질문하고 청중들이 반응하는 내용에 따라 이야기의 내용이 진행되는 형식이었기에 일목요연한 정리보다는 어제 있었던 대화의 흐름을 따라 내용을 정리해서 올려 드립니다. 참석하신 분에게는 재음미의 기회를, 참석하지 못 하신 분에게는 나름의 궁금증해소의 기회가 되길 기대해 봅니다. (단, 저자의 의도와 말하신 내용과 다르게 정리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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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대한 두 증인 (한 분은 저의 막내누님이시고, 다른 한 분은 저의 아내)과 함께 하는 ‘분별’강의라 거짓을 말 할 수 없는 시간이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

제 책 <분별>은 분별에 대한 교과서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한국이나 외국 서적을 통틀어 ‘분별’에 관한 한 전문가가 되자는 생각으로 책을 썼습니다. 이 한 권을 위해 전문서적을 수없이 찾아 보았고 그 내용을 정리하고 소화하여 분별에 대하여 집대성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보니 이 책을 반으로 줄일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지금은 부끄러운 마음이 있습니다. 곧 기독교서회를 통해서 후속편이 나올 텐데는 그 때는 분량을 반으로 줄였고 적용면을 강조했으며 동시대성에서 저의 관점으로 시대의 문제를 풀어 놓은 내용이라 보시면 됩니다. 곧 출간될 분별에 대한 두 번째 책이 더 수월하게 읽힐 것입니다.

 

오늘은 저의 일방적인 강의보다는 함께 대화를 나누며 이야기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다른 준비는 없이 어떤 성경말씀으로 시작할지만 준비해 왔습니다.

분별에 관한 최고의 성경구절은 로마서 12장 2절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또 다른 하나의 성경구절은 누가복음12:56입니다.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우리는 분별에 대한 많은 질문을 갖습니다. ‘한국교회는 어떻게 분별하는가?’ ‘분별에 왜 실패하는가?’ ‘시대적 상황-조국의딸-은 어떻게 분별해야 하는가?’ ‘왜 미국 메노나이트 중에는 트럼프를 지지하는가? 그들은 과연 어떻게 분별했을까?“ 이런 여러 질문을 마음에 품은 채, 우리는 로마서 12장을 다시 보겠습니다.

 

성경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즉 conforming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순종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즉 이 세상의 pattern에 종속되지 말라고 합니다. 이 시대의 패턴은 무엇인가요? 메노나이트 신학교 AMBS의 예배당은 모든 벽면이 서로 각도를 달리 하여 건축되었습니다. 그 상징적인 의미는 세상에 종속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마음을 새롭게 하라고 하십니다. 새롭게 된다는 것을 영어로 transform한다고 합니다. 생각의 변화가 마음으로 변화로 이어지는 원리를 우리를 경험합니다. 생각이 바뀌면 마음이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새롭게 될 수 있을까요? 의지로 가능한 것인가요? 딤후2:15에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라고 하는데 진리의 말씀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롬12:2은 무엇인 좋은지, 무엇이 acceptable한지, 무엇이 perfect한지를 분별하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이 분별을 선과 악을 구별하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분별은 선과 악을 구별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것 중에서 더 좋은 것을 취하는 것이 분별입니다. 선과 악의 구별은 초보수준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선과 악을 구별하는 단계를 넘어서 많은 좋은 것들 중에서 더 좋은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뭐가 나쁘고 뭐가 좋으냐가 아니라 뭐가 덜 좋고, 뭐가 가장 좋은 가를 구별하는 것이 분별에 더 가까운 개념인 것입니다. 무엇이 더 좋은가?를 고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청중과의 대화 중: “그리스도인으로서 더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은 뭔가 욕심 사나운 모양새로 보여서 그런 일에 우리는 머뭇거리는 경향이 있었는데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더 좋은 것을 당당히 선택할 수 있다는 말씀에 자유가 느껴졌습니다. 에너지를 더 좋은 것을 선택하는데 써야 합니다.” “맞습니다. 분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우리에게 자유가 있다라는 확신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가? 무엇이 acceptable한가? 이 문제에 관한 한 저는 공동체에 의해 acceptable 즉 받아들여지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무슨 차를 사고, 어떤 옷을 입고 어디서 살 것인가는 지극히 개인적인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그런 개인적인 결정이 공동체 community에 의해 수용될만한 내용인가 고민하는 것이 분별의 일부라고 믿는 바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 즉 perfect은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which is the best to God을 고민하는 것이 분별입니다.

분별을 위해서 Good for the world, Acceptable to the community, perfect to God!을 기억합시다.

 

우리의 마음은 어떻게 하면 새로워질까요? renew될까요? 새로워지는데 우리가 할 일은 없을까요?

시편 51편에 다윗의 회개가 나옵니다. 새롭게 됨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기도를 보면 새롭게 된다는 것은 비우는 행위입니다. 그 비우는 행위는 회개라는 말로 표현됩니다. 이 세상의 것을 채워서 새로워질 수 없으며 오히려 이 세상의 것을 비울 때, 우리는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conforming하지 말라는 의미는 서로 상통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쓰기 위해 2015년부터 2019년 지금까지 분별을 붙들고 살아왔습니다. 저는 분별은 성숙의 표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이들에게 분별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훈련을 시켜야 할 단계입니다. 그러나 장성한 사람에게는 분별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분별은 종교적 열성으로 가늠이 될 수 있을까요?

종교적 열성과 분별은 상관이 없습니다. 프란치스코단의 더불어 사는 공동체는 사람을 보는 기준을 분별을 잘 하는지 아닌지에 두었습니다.

 

하지만 분별은 만져지지 않는 것이고 공식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오해와 추측이 난무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분별이라고 하면 어떤 생각, 어떤 기대,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되시나요?

분별은 선택이나 decision making이나 대화와 혼동될 수 있습니다. 회중들이 같이 논의하는 시간, 지금 한국교회는 월례회라고 부르지만 그것도 분별의 시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공동체라고 무조건 다 분별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시는 것은 오해입니다.

만장일치제도가 또 하나의 굴레가 되어서 만장일치라는 지리한 경험을 무조건 실천한다고 분별을 잘 하는 공동체가 자동적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분별을 위해 지금까지도 여러 책들을 읽고 있습니다.

제가 읽는 책들의 제목을 나열해 보면 ‘worshiping a hidden God’ ‘프란치스칸 기도’ ‘ 그리스도교의 묵상’ ‘신의 영역’ ‘My vocation is love’ ‘The role of Benedict’ ‘영혼을 돌보는 영성지도’

이런 책들을 보면서 제가 확신하는 바는 분별은 회의를 통해서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과는 분명하게 다른 것입니다. 분별은 대단한 영적인 수행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묵상의 전통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이미 있는 성경의 씨앗을 불러내면서 나에게는 주시는 감화, 감동이 우선적이 되는 것이 분별입니다. 그러기에 분별은 소위 성인들이 해 왔던 일들입니다.

‘My vocation is love’라는 책의 소화 테레사는 24살의 젊은 나이에 죽어가면서 어떻게 하나님과 교제를 이어갔는지를 보여 줍니다. 분별은 습득되어지지 않지만 우리의 삶에 발견되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신비적인 성령의 활동을 재현시키는 것인 분별은 어린 아이가 할 수 없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분별의 전통은 공동체의 만장일치로 결정되는 단순한 과정이라기 보다는 공동체의 공통분모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필수로 거쳐야 합니다.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 (예수회의 창시자)가 죽게 되었을 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 때 쓴 책이 ‘영성훈련들’인데 이 책은 500년 동안 공동체의 분별의 교과서가 되어 왔습니다.

결국 어던 기초 foundation 위에서 만나고 이야기 되어야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그것이 없이 분별을 시도하다가는 무정부상태가 됩니다. 분별하기 위해서 우리 안에서 어떤 공통의 분모를 세울까를 먼저 고민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15장이 표면적으로 우리 의사결정, 만장일치제도를 위한 사례가 된다면 그것은 무모한 바보같은 행위입니다. 문자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 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기계적, 합리적, 상식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습니다.

퀘이커교도들은 만장일치제도를 시행하고 있는데 그것은 수 백년동안 만들어 온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문화를 세워왔는가를 돌아보지 않고 표면적인 만장일치제도를 급하게 도입하여 적용하는 일은 위험할 뿐 분별의 과정이라고 보고 싶지 않습니다.

 

만약 문자주의적인 만장일치로 어떤 일을 결정하면 은혜로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장일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분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반대의견일지라도 공동체가 결정한 일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 분별하는 거야? 라고 묻는다면 공동체에 순종하기 위해 배우는 거야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메노나이트나 회중교회의 가치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놓치면 그 또한 우상이 됩니다.

공동체성의 분별은 개인이 훌륭해야 한다. 각 개인이 분별을 잘 하고 훌륭하면 공동체성 분별은 시끄럽지 않게 됩니다. 물질적인 성취나 기복은 분별의 목적이 절대 아닙니다.

 

분별을 위한 원칙을 함께 나누지만 이것을 적용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기에 새롭고 신선하게 실용적으로 자신만의 분별의 원칙을 세워나가는 것이 진정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별의 원칙을 나누고자 합니다.

1. 분별하기 전에 먼저 자신에게 물어라. 분별의 주체이신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순종과 순종의 마음이 준비되어 있는지를 점검해야 하는 것이다. 분별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일은 문제를 하나님께 가져 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함부로 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의지를 다시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2. 크리스찬의 분별은 혼자 하는게 아니라라는 것을 잊지 말라. 어쩌면 ‘나’가 가장 좋은 분별을 방해할 수도 있다. 악마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 공동체와 동행하는 겸손과 순종의 영역이다. 무슨 분별을 하든 고민해 줄 자들을 찾고 자신의 결정이 올바른지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할 믿음의 공동체를 찾으라.

 

3. 선과 악 사이에서 분별은 필요없다. 악은 버리고 선은 취하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해서 세상의 윤리와 상식으로부터 자유한 것이 아니다. 도덕이나 윤리나 상식은 우리가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선이다.

 

4. 크리스챤의 분별이 세상 것과 다른 것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일분일초를 다투는 세상에서 우리의 분별의 시계는 하나님에게 고정되어 있어야 한다. 시간에 쫓겨서 결정해선 안 된다. 믿음이 좋은 사람들은 결코 서두르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의 초점은 하나님께만 고정되어 있다. ‘바로 결정하지 못해 사라질 기회라면 그건 의미없는 기회일거라고’ 생각하라.

그렇다고 무조건 100% 무작정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정 시간이 안되고 이제는 결정해야 할 때라고 생각되면 우선 주님께 기도하고 결정하라. 마음에 평화와 기쁨이 찾아올 것이다.

 

5. 크리스천의 분별은 이성으로 하지 않고 감정으로 한다. 이것은 내가 배운 최고의 분별의 지혜이다. 성령이 주시는 마음은 늘 변함이 없고 그 끝이 아름답다. 마음의 평화와 기쁨. 이 감정은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우리로부터 빼앗아 갈 수 없다.

 

6. 영적인 낙담이나 절망이나 실망 중에는 어떤 결정도 하지 않는다. 마음의 평화와 기쁨이 없다는 것은 결절할 때가 아니라는 적신호이다. ‘충동’, ‘즉흥’이라는 단어는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것들이다.

 

7. 분별의 노하우는 대단한데 있지 않다. 하루를 잘 사는 사람이 소위 가장 중차대한 분별도 잘할 수 있다. 가장 작은 문제부터 분별하면서 우리는 분별의 지혜를 키울 수 있다. 가장 사소한 문제부터 고민하기 시작할 때 큰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8. 분별은 현재의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이다. 잘못된 과거에 집착하지 말라. 모든 문제는 새롭다. 모든 문제는 다르다. 그래서 겸손하게 창의적이고 신선한 분별의 지혜를 찾아야 한다. A-B-C와 같은 기계적이거나 공식적인 방법에서 벗어나야 한다. 모든 틀에서 자유로울 때 성령은 우리 안에서 숨을 쉬시고 우리를 인도하신다.

 

9. 완전한 분별은 없다. 우리는 ‘어느 정도’의 확신을 가지고 결정할 수밖에 없다. 완벽주의 기질은 필요치 않다. 사소한 결정에도 벌벌 떨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100% 다 알 수도 없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세상은 혼탁하다. 뭐가 되든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만을 바라며 결과로부터 자유 해야 한다.

 

10. 그렇다고 분별하는 과정에서 쉽게 타협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의지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결정을 의존한다는 것과 모든 것을 설렁설렁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우리 마음에 주님이 주시는 평화와 기쁨, 그리고 이 문제를 둘러싼 모든 자들로부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란 일체된 동의와 확신을 얻기까지는 집요하게, 단 지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라.

 

11. 분별할 때 무조건적으로 문제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믿음의 연수가 더할수록 배우는 지혜는 우리가 당면한 문제에서 초연해지거나 영적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문제를 통해서 주님을 더 알기를 바라시는데, 그리고 더욱 성숙해지기를 바라시는데 도리어 우리는 스스로 무덤을 계속 파며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연습을 한다면 너무 멍청한 짓이 되는 것이다.

 

12.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과 다른 것을 주실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 우리의 분별에도 융통성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크시다라는 겸손한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은 결과중심주의이지만 결과가 당장 좋지 않아도 실망할 필요가 없다. 최종 결과와 열매는 주님만 아신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때를 기다리는 게 믿음이다.

 

13. 분별이 안 될 경우 무엇이 분별을 방해하는지 그 원인을 분명히 해라. 무엇이 문제이든 현상적으로 고민하지 말고 근본적으로 그 문제가 뭔지 알고 근본적으로 해결하라는 뜻이다.

뭐가 문제인가? 왜 나는 무엇을 분별하려고 하는가?와 같이 “왜”나 “무엇”에 대해서 분명히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속인다면 양심을 속이는 것이다. 자신 안에 있는 깊은 욕망, 욕심, 자만을 드러내라. 하나님 앞에서 가장 양심적인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한다.

 

14. 결정할 때 한 가지 기준(원천)에만 의존하지 말라. 최소한 말씀을 중심으로 2-3가지의 다른 분별의 원천이나 기준에 맞는 것을 찾아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신중하고 지혜롭다 할 수 있다.

 

15. 분별의 가장 근본적인 권위는 예수님이시다. 분별의 과정은 주님과의 완전한 연합을 이루려는 시도이다. 우리 안의 주님께서 행동하게 하시고, 우리 안의 주님께서 결정하게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이시라면”이 우리가 문제에 봉착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질문이어야 한다. 분별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스스로 예수님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평범한 삶이 우리의 삶에서도 재현되어야 한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예수님을 살아내야 한다.

 

16. 한번 결정한 문제는 쉽게 번복하지 말라.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진다는 것은 인내할 수 있다는 것이다.

 

17. 우리의 모든 문제를 분별하는 것은 아니다. 분별이 필요없을 때도 있다. 분별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역은 성립되지 않는다.

 

18. 가장 현실적이고 지혜로운 분별을 원하는가? 성인 혹은 영적인 대가들의 삶을 본받으라고 말하고 싶다. 나 스스로 분별을 잘 할 수 있다는 것은 착각이다. 주님에게만 물어보면 된다고 믿는 것도 교만이다. 우리보다 먼저 산, 믿음의 성인들의 삶을 꾸준히 연구하고 모방하려 애써야 한다.

 

19. 분별하는데 가장 간과하기 쉬운 원칙이 하나 있다. 그것은 침묵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입만 닫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말한다. 나이가 들면서 느는 것은 말뿐이라고 한다. 할 말이 너무 많아 귀 기울일 시간이 없다. 침묵의 목적은 듣기 위함이다. 온 몸과 맘을 다해 듣는 것을 의미한다. 상대방에게 몰입하게 된다. 가장 희미하고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침묵이 분별이다.

 

20. 마지막 원칙은 여러분이 만드는 것이다.

 

 

정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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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의 강의를 들을 때 우리들 맘 속에는 분별을 잘 하는 스킬을 탐내는 마음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분별의 강의를 듣고 보니, 분별은 내 속에 계신 하나님의 원래 모습을 발견하여 그 하나님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 하나님의 뜻을 나의 삶 속에서 구현해 내는 영적인 삶의 부르심이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쉽고 간단한 묘책을 기대했던 얄팍한 욕심이 부끄럽게 드러난 시간이었습니다. 분별은 하나님을 더 사모하고 하나님을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 분별하며 삽시다!!

분별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들은 대장간에서 출간한 <분별>을 읽어 보세요.

다음 달에는 9월 24일 화요일에 리본 모임이 있습니다.

강사는 춘천출신이신 김대식 교수님으로 <함석헌의 평화학>에 대해 이야기해 주실 것입니다.

추천도서로는 김대식 교수님의 저서로 <함석헌의 이성의 해방> <함석헌의 평화론>, <치명적 자유의 향연: 아나키즘과 함석헌>입니다. ㅎㅎㅎㅎ

너무 버거우시면 <함석헌의 평화론>을 추천합니다.

 

캐나다 박준형님과 함께 하는 8월 리본모임

회중이 사라진 교회를 위한 공동체적 분별의 지혜를 나눕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을 혼자 결정해야 하는 우리에게  분별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것도 현실에 뿌리 박은 분별말입니다.지난  달에는 리본모임에서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번에는 그런 공동체가 없이 살아가기 십상인 우리의 삶에 공동체적 분별의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강사를 모십니다. 캐나다에 있는 메노나이트 교회에서 목회자로 섬기신 박준형 형제님이 오셔서 메노나이트들의 공동체적 분별의 지혜를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헤매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실 것입니다.

꼭 참석하실 수 있는 분별의 지혜가  8월 27일 오후 7시에 임하시길 바랍니다. 장소는 종전대로 KAC 사무실입니다.

읽으실 책은 대장간의 박준형 저 <분별>을 읽으시고 오세요!!

분별의 원칙 12

  1. 분별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분별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라!
  2. 선과 악 사이에서 분별은 필요 없다. 악은 버리고 선을 취하는 것이다.
  3. 분별은 이성과 상식으로 하지 않고 성령이 주시는 감정인 평화와 기쁨으로 한다.
  4. 영적인 낙담이나 절망이나 실망 중에는 어떤 결정도 하지 않는다.
  5. 크리스천의 분별이 세상의 의사결정과 다른 것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6. 분별의 노하우는 대단한 데 있지 않다. 하루를 잘 사는 사람이 가장 중차대한 분별도 잘 할 수 있다.
  7. 분별은 현재의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이다. 과거에 묶이지 마라!
  8. 완전한 분별은 없다. 우리는 ‘어느 정도’의 확신을 가지고 분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라!
  9.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과는 다른 것을 주실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
  10. 분별할 때 한 가지 권위나 원천에만 의존하지 마라!
  11. 분별의 과정을 거쳐 한번 결정된 문제는 쉽게 번복하지 마라!
  12. 분별의 가장 근본적인 권위는 예수님이시고, 그 분의 말씀이고, 그 분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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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준 형

이문화/국제매너 전문가, 저자, 교회사역자
서강대 졸업 후 삼성그룹의 국제화 전도사로 인정받은 그는 방송 및 각종 매체를 통해 이문화 및 글로벌 에티켓(‘원칙 좀 지킵시다!’) 교육의 필요성을 피력해 왔다. 이문화 컨설턴트로서의 폭넓은 경험과 학문적인 토대 구축을 위해, 삼성 시절 독일에 파견되어 유럽 전반에 대해 배웠고, 세계의 많은 나라를 여행/연구하기도 했으며, 국내 거주 외국인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한 단체인 외국인 노동자 대책 협의회에서 전문위원으로 봉사했다. 국내의 대기업들과 정부기관 그리고 서울대, 카이스트 등에서 강의했고, 중앙공무원 교육원 출강 강사 중 최고의 평가를 받기도 했다.
2002년 미국 동부 버몬트 SIT대학원에서 ‘이문화 관계학’을 공부하고, 캐나다 밴쿠버로 이주해 노스밴쿠버 시청의 ‘다양성 위원회’의 위원으로, 이민자들의 현지 적응과 정착을 돕는 ‘멀티컬츄럴 소사이어티’의 이사로 문화간 적응을 위한 각종 자문을 했다.
다양한 커뮤니티 봉사 경험을 바탕으로 2004년 캐나다 작가들과 함께 [어린이를 위한 창의적 글쓰기 사회(CWC)]라는 비영리 교육기관을 설립해 [One Child, One Book: 어린 시절에 책 한 권을 쓰게 하자!]는 캠페인을 전개하면서 사회공헌가가 됐다. 2009-2014년 미국 인디애나 주에 있는 아나뱁티스트/메노나이트 신학대학원(AMBS)과 밴쿠버 리젠트 칼리지에서 그간 쌓아온 문화적인 지식과 경험을 신학과 접목시키는 공부(M.Div.)를 했으며, 그 와중에 과테말라 어린이들의 교육과 복지를 돕는 글로벌 교육 프로젝트를 런칭했다. 가장 최근까지 밴쿠버 셜부룩 메노나이트 교회 지역사회 개발 및 연계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목회자로 사역했다.
책은 경계 없이 써왔다. 『볼프강의 글로벌 비즈니스 에티켓 1,2』(김영사, 2000), 『나는 매일 매너를 입는다』(한올출판사, 2002), 『변화의 타도를 타라 1,2』(SFC, 2004), 『글로벌 에티켓을 알아야 비즈니스에 성공한다』(북쏠레, 2006), 『내 아이 창의력을 키우는 영어 글쓰기』(웅진리더스북, 2008), 『크로스 컬처』(바이북스, 2010), 영어 eBOOK으로는 『Cultural Detective: South Korea』(Nipporica Associates USA, 2004), 번역서로는 조직의 다양성을 다룬 『팽귄나라로 간 공작새』(진명출판사, 2002)가 있다. 이 책은 그의 첫 번째 신학적인 시도이다.

7월 리본모임정리

조현기자님과 함께한 “우리는 다르게 살기로 했다” 공동체 강의내용요약

 

이곳에 오니 “예수건물”이 아니라 “예수마음”이 통하는 곳이라 너무 마음에 듭니다. 개인적으로 메노나이트에 마음이 가서 메노나이트에 관련된 기사를 많이 썼습니다.

몸이 안 좋아서 2-3년 전에 요양 차 1년간 해외 공동체에서 시간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공동체를 경험하게 되었고 관심을 더욱 깊게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홀로’는 너무 무력한 인간입니다. 침팬지와 인간의 DNA 차이는 1.6%밖에 나지 않습니다. 다만 확연한 다른 점은 침팬지는 태어나면서 뇌의 65%가. 인간의 뇌의 20%만이 완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인간의 뇌는 자라면서 계발되고 발달된다는 의미이겠지요.

말은 태어나자마자 10분 후에 발로 툭 치면 두 발로 서서 뛸 수 있고 1년 후에는 수레를 끕니다. 고양이도 1년 키우면 쥐를 잡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1년 키워야 겨우 걷고, 30년을 키워도 요즘 같은 세상은 견적이 안 나옵니다.

사람은 야생에 둔다면 한 입거리 밖에 안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공동체성이 없으면 결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의미가 됩니다.

 

50여 년간 우리 사회는 어떤 변화를 겪었습니까? 지구상에서 우리 한국처럼 큰 격동의 변화를 경험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KTX를 타면 그 속도를 체감하지 못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속도를 느끼지 못 했습니다. 그러나 뇌 속에 그 격동의 변화에 대한 스트레스가 고스란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6인 이상이 사는 집이 1980년대에는 5집에 하나씩 있었습니다. 그러나 2015년에는 6인 이상은 1.5%가 되었습니다. 1인 가구가 압도적으로 많은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요즘 시대는 유희하는 인간을 표방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그 유희 이면에 자살, 고독사, 저출산은 왜 함께 등장하는 것일까요?

유독 대한민국만이 자살, 고독사, 저출산이 심한데 그 원인을 3-40년 만에 경험한 격동의 분화에 두고 있습니다.

100배 정도의 경제속도가 1970년에서 2019년까지 이루어져 왔습니다. 1970년이 되기 전까지 우리나라의 지형은 눈에 띄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70년 초반 새마을운동이 지붕개량사업을 시작하면서 40년 만에 상상할 수 없는 큰 Gap이 발생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도시화율은 세계 1위입니다. 92%가 도시화되었습니다.

1964년 뉴욕 맨하탄에서 키티 제노비스라는 여성이 퇴근 후, 아파트를 가는 동안 괴한이 찌른 칼을 맞았습니다. 항거했지만 아무 도움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도망가던 괴한이 다시 돌아와서 그 여성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 이 사건을 목격한 사람은 38명이나 되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 러바인 교수팀의 조사(시각 장애인으로 가장하여 도움을 청한 실험)결과에 의하면 인구밀도가 높을수록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결과를 얻어냈습니다.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에 살수록 도움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뜻입니다.

 

해리 할로우의 원숭이 격리실험을 예로 들겠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어린 원숭이를 어미원숭이로부터 격리했습니다. 단, 먹을 것을 충분히 공급해 주었습니다. 어느 정도 자란 다음, 무리 속에 다시 넣어주었습니다. 그러나 관찰 결과, 어미와 격리된 원숭이는 제대로 된 사회성이 없었기에 무리 속에서 바보처럼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실험에서는 두 개의 모형을 넣어 주었습니다. 하나는 부드러운 천으로 싸인 젖이 나오지 않는 모형이었고, 다른 하나는 부드럽지 않디만 젖이 나오는 모형이였습니다.

원숭이는 부드러운 엄마와 같은 모형에 달라 붙어 하루종일을 보냈고 배가 고파 먹어야 할 때만 부드러운 모형에 달라붙은 채, 입만 젖을 주는 모형에 갖다 되었습니다. 잘 먹지 못 해서 빼빼 말라가면서도 원숭이는 부드러운 엄마 쪽 욕구가 훨씬 크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우리의 부모 세대는 생존의 욕구가 잘 채워지지 않아서 그 욕구를 크게 봅니다. 그 결과, 요즘 세대는 관계회피, 결혼포기, 출산율감소 (0.9%)라는 참담한 현실에 당도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학자들은 고용불안, 남녀불평등, 복지혜택의 부족 등 외적인 이유를 나열합니다. 모두 동의합니다. 그러나 내적인 원인도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외적인 이유들이 불충분한 방글라데시나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에서는 높은 출산율이 있지 않나요?

공동체 붕괴, 내적인 트라우마, 내적인 번아웃. 이제는 내적인 것을 일으켜 세워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옛날 우리 윗세대가 살던 시대는 부모님과 대가족을 이루며 마당이나 마을은 사람들이 그저 자연스럽게 모이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도시로 몰리면서 맞벌이 부모로 인해 아이들은 오랜 시간 방치되기 일쑤였습니다. 아이들에게 있어 부모는 신이고 구원자입니다. 그러나 그 방치된 아이들에게는 신도 없고, 구원자도 없는 것입니다. 내면의 트라우마는 상상 그 이상입니다.

부모님이 맞벌이로 자녀들을 친척집에 맡기는 일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모들이 주말에 잠시 들렀다. 아이들 몰래 한눈 파는 사이에 도망가듯 일터로 줄행랑치듯 사라집니다. 부모가 말도 하지 않고, 설명 없이 사라지는 일을 수없이 경험합니다.

그들이 느끼는 상실감과 분리공포는 상상 그 이상입니다. 우리는 상처받은 인간들이며 내면에 통곡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경제발전기에 겪었던 방치된 아이들읜 충격은 크나큰 상실감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유기당한 세대입니다. 그들에게는 안전기지가 없습니다. 커다란 바다의 돛단배와 같은 인생살이에서 그들은 외부의 시련을 이겨낼 내면의 힘, 안전기지를 확보해 본 적이 없습니다.

어린 시절 애착으로 형성된 안전기지가 평생의 마음 건강을 지배합니다. 그런데 우리시대는 그런 마음의 건강에 빨간불이 켜진 상태입니다. 위로와 공감이 몹시 필요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은 불통의 시대입니다. 나만 이렇게 힘든가?

현대인의 가장 큰 고통원인은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그 관계를 피하기 위해 ‘혼삶’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상태는 ‘상처받음’의 상태입니다. 상처를 받으면 보통 동굴에서 회복될 때까지 웅크리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은 너무나 오랜 시간 동굴에 머물다가 그 시간이 길어지면서 고독사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자본(기업)은 왜 홀로 살도록 부추길까요?

6명이 한집에 살면 건축가들은 많은 집을 지을 수 없기에 홀로 사는 1인 가족을 부춥니다.

다른 전기제품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식구들이 함께 살면 그만큼 소비가 줄어들게 됩니다. 하지만 가장 위험한 질병은 외로움이라고 합니다. 심리적일 뿐 아니라 육체적인 질병도 동반하게 됩니다. 외로움은 매일 담배 15개비를 피는 것과 같은 위험성이라고 합니다. 치매도 그만큼 빨리 발생합니다.

 

이렇듯 혼자는 정말 외롭습니다. 그러나 함께 하는 것은 괴롭습니다. 이게 우리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접촉을 피하고 ‘접속’하면서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접속으로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인간 DNA는 접속만으로는 안 됩니다. 반려동물 1천만 시대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제 노동도 봉사도 하기 힘들어 그런 일을 로봇에게 맡기는 로봇시대에 당도했습니다.

일본이 우리사회보다 15년이 앞서 있다고 하는데, 지금 일본은 60세 이상의 신규수감자가 3-4배가 늘었다고 합니다. 혼자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 수감생활을 원하는 것입니다.

 

행복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불행한 사람은 인간관계망이 끊어진 사람이라고 합니다. 반면, 행복한 사람은 힘든 일이 있을 때, 인간관계망이 든든히 연결된 사람입니다.

저는 자가면역성질병이 있을 때 민들레 학교 김인수 선생님의 제안으로 태국에 있는 아속공동체에 들어갔습니다. 맨발로 다니고, 관장하고 단식하며 지내다 보니 건강도 좋아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인도 오로빌공동체도 보았습니다. 세계 최대의 공동체 마을로서, 마더와 오로빌이 세운 공동체입니다.

부르더호프에서는 일이 정말 힘들었습니다. 초자라고 봐주지 않았고 다 자기가 맡은 일을 해야 했습니다.

학생들을 유수한 대학에 보낸 마운드스쿨이라는 공동체는 다른 학교와 별 다른 점이 없었지만

대걸레를 아이들이 직접 들고 학교를 구석구석 청소한다는 차이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일본의 야미기시 공동체는 무에서 시작하여 결론을 이끌어 내는 연찬회를 시작한 곳인데 지금은 경제적으로 부유해져서, 이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다시 시작한 공동체가 일본의 애즈원 공동체입니다. 이들도 연찬회를 갖고 이를 사이엔즈라고 부르는데 과학적 본질의 탐구를 목적으로 하는 모임입니다. 어머니 도시락 사업으로 생활을 하고 있으며 12년째, 위계나 명령이나 규율이나 상하가 없는 회사를 운영해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눈치보지 않고 살아가는 사회를 실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공동체에 대해 나눈다면, 공동체의 흐름이 바뀌어서 전환마을형태나, 코하우징의 형태를 갖춘 공동체도 있습니다.

예전의 공동체 형태를 유지하지 못 하는 이유는 집값 상승을 가장 큰 원인으로 뽑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코하우징형태를 띈 공동체로 방문한 공동체 중에 가장 밀착형 공동체였던 은혜공동체를 소개합니다. 50여 명이 한 집에서 같이 사는 코하우징형태이고 상담을 전공하신 목사님 내외의 영향으로 핵심멤버들이 대부분 이런 상담에 노하우를 갖고 있어서 서로 상담해 주면서 공동체를 건강하게 이끌어 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밝은 누리 공동체는 공동체의 가치를 분명하게 공유하고 세우기 위해서 가장 치열하게 공부하는 공동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파주시 문발동에 공방골목은 전환마을의 특징을 가진 공동체였습니다. 탁구대 하나를 시작으로 하여 여러 다양한 문화활동이나 취미활동이 전개되었고 지금은 치유가 일어나는 장소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성남 남한산성 아래 첫마을 논골이라는 공동체는 10평짜리 빌라가 6천가구 모여 있는밀도로 보면 세계 최고의 공동체인데 이 마을에서 자란 윤수인 활동가가 마을에 들어가서 직접 그들의 need를 살핀면서 필요한 활동들을 전개하면서 행복한 공동체로 탈바꿈하였습니다.

 

이렇게 함께 살면서 공동체가 형성되었을 때, 그들이 느끼는 행복지수와 만족감은 혼삶에 익숙해 지고 있는 우리에게 큰 도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공동체에 대한 구체적인 소개는 PPT를 통하여 생동감 있게 묘사되었기에 지면으로 그 내용을 다 담지 못 함에 대해 양해의 말씀을 구합니다. 대신 “우린 다르게 살기로 했다”라는 책을 통해 더 자세히 볼 수 있다는 말씀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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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리본 모임 안내

녹음이 짙게 푸르러 가는 7월의 리본모임을 안내드리고자 합니다.

7월 23일 화요일에 한겨례 종교기자로 일해 오신 조현 기자님을 모십니다.

세계의 여러 공동체를 방문하시고 우리나라의 여러 공동체를 방문하신 후에 책을 한 권 쓰셨는데 이름하여 “우리는 다르게 살기로 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커질 수 밖에 없는 개인주의 사회 속에서 조현기자가 경험한 공동체는 어떠했고, 그들의 다른 점은 무엇이었는지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밑에 책에 대한 소개글을 퍼왔습니다. 읽어 보시고 7월에는 공동체에 관한 책으로 더위를 식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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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공동체 18곳, 세계적인 공동체 5곳을
총망라한 단 한 권의 책!! 

세상에서 가장 기운이 좋은 수도 터와 성지들을 다니고
최고의 영성가들을 만나 수행하면서 선(禪)적인 글을 써온 종교전문기자 조현!!
3년에 걸친 공동체 탐사 취재와 3백여 명의 깊이 있는 인터뷰로
함께하는 삶의 가치와 행복의 의미를 짚어보다.

자살률, 세계 최고인 나라에서 죽지 못해 산다는 사람들,
금수저의 갑질에 분노하면서도 빈곤층 대우를 받기 싫어하는 사람들,
임대주택 사람들과 한 동네에서 살거나 난민을 받아들이는 것도 거부하는 사람들,
자신이 약자일 때는 정의의 투사이지만 개인으로 돌아와서는
자신도 모르게 차별하고 박해에 가담해버리는 사람들,
혹 당신도 자본주의에 얽매여 반공동체적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동서양 문화는 물론 인도와 이집트, 이스라엘과 티베트, 중국과 우리나라의 오지 등을 순례하며 ‘정신의 원형’을 탐구해온 종교전문기자 조현이 자본주의 방식과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복한 삶과 그 비결을 담아낸 책으로 돌아왔다. 신간 [우린 다르게 살기로 했다]는 혼자는 외롭고 더불어 살아가자니 괴로운 사람들에게 함께하는 삶의 가치와 행복의 의미를 되짚어보게 한다. 저자는 1999년 대안문명 시리즈로 영국 브루더호프공동체를 신문에 소개하면서부터 최근까지 대안적 삶을 살아가기 위해 만든 마을과 공동체를 탐사 취재해왔다. 특히 이 책을 집필하려고 최근 3년간 국내 마을과 공동체를 재방문하여 함께 어울려 살아보았고, 외국 언론들조차도 접근이 어려운 해외 공동체만을 찾아 순례했다. 농사도 짓고, 밥도 해 먹고, 공동체 일자리에서 직접 일도 해보면서 그들의 행복감은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인지 그 비결을 하나하나 파헤쳤다. 재산과 학력 수준, 능력, 체력, 사회성이 달라도, 서로 의지하고 돌보고 협조하고 힘이 되어주고 위로해주고 사랑해주면서 행복해지고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의 삶을 통해 보여준다. 남녀노소 3백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과의 깊이 있는 인터뷰로 담아낸 생생한 사례와 명쾌한 분석, 시원한 통찰은 힘겨운 시대를 견뎌내는 우리들에게 삶의 가치와 방향, 행복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한다.

한국아나뱁티스트저널 18호가 나왔습니다.

한국아나뱁티스트 저널 18호 발행합니다.
아래의 두 곳에서 내려받으실 수 있습니다.

http://wkaf.net/board_pZUq18/1761544
http://anabaptist.kr/index.php…

웹버전을 발행하고 종이 저널은 별도 발송합니다.

이번호의 특집은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통일과 평화”의 묵직한 글도 있습니다.

발행인: 남상욱
편집장: 문선주
편집위원: 배용하 한준호 염혜정

6월 강남순 교수님과 함께 리본모임 정리

어제 25일은 텍사스 크리스챤 대학의 교수님으로 계시는 강남순교수님이 오셔서 <예수는 페미니스트였다:책임적 기독인의 과제>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페미니즘에 대한 강의로 채워질 줄 알았던 시간은 실은 우리 크리스챤들이 놓치고 있는 삶의 긍정에 대한 도전들로 더 많이 채워졌습니다. 페미니즘에 대한 단순한 이해나 오해의 차원을 넘어서 최후의 심판에 판가름의 기준이 되는 삶의 실천 원리들을 간과한 제도화된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반성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약자를 연민의 마음으로 볼 수 있는 그 세심한 시선이 우리가 예수로 부터 배울 수 있는 삶이고 그 삶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는 도구가 페미니즘이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도전을 받았습니다.

교수님의 강의를 열심히 옮겨 적어 보았습니다. 함께 하지 못한 분들을 위해 강의내용을 임의로 정리하여 올려 봅니다. 도움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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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페미니스트였다: 책임적 기독인의 과제

6월 25일 리본모임 강남순 교수

한국에서 교회가 왜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묻는 사람이 많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집단을 보면 대부분 기독교인이 있기 때문이다. 국가인권위 해체를 위해 항의하러 매일 오는 사람들은 목사님들이다.

사람들은 기독교를 많은 종교 중의 하나라고 하지만 실은 많은 종교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없다. 서구에서 건너온 기독교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서구는 지역적인 서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경제, 문화적 영역의 서구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19세기 초에는 영토적으로 서구가 침범해서 식민지를 만들어 나갔다면 지금은 영토는 아니라 할지라도 문화적으로 깊숙이 침투해 있다. 이제는 서구와 비서구의 경계가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의 옷을 보아도 다들 서구 스타일의 옷을 입고 있다. 서구는 무소부재한 개념이다.

미국대통령의 영향력을 감안해 볼 때, 문자적인 의미는 아니라 할지라도 전 세계 사람이 미국 대통령 투표에 참여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그 이유는 그 영향력이 세계 곳곳에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미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 났는지 모른 척 할 수 있는 사치는 없다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세계의 유수한 인재들은 미국으로 유입되고 있다.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의 전체 1년 예산은 하버드 대학 도서관의 1년 예산 밖에 되지 않는다. 캠브리지에서는 교수라 할지라도 한 번에 몇 십권의 책 밖에 빌릴 수가 없다. 그러나 하버드에서는 한 번에 300여권을 빌릴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지식을 생산하는 미국의 대학들을 볼 때, 사회의 토대를 놓는 일을 미국이 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 안에서 기독교를 여러 종교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나?

이런 막강한 파워를 가진 서구의 초석을 놓은 두 사상이 있는데, 하나는 아리스토 텔레스의 사상이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이다.

서구에서 온 제도화된 기독교를 말할 때, 우리는 서구가 더 이상 “서구”가 아니라는 점과 기독교는 이 서구 사상의 중요한 초석 중의 하나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전제 하에 기독교는 어떤 책임이 있나?

예수 vs. 제도화된 종교로서의 기독교 안의 예수! 이 둘 사이에는 엄청난 갭이 있다. 우리는 2000년 전의 예수를 제대로 알기도 어렵고, 제도화된 종교 안의 예수를 따르기도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둘 사이의 중간 즈음에 있어야 한다.

니체는 제도화된 종교를 비판하면서 the first and the last Christian은 예수라고 말했다. 니체가 쓴 <Anti-Christ>라는 책을 읽어 보면 예수가 보여 준 “How to live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를 강조한다. 제도화된 교회는 인간의 삶을 부정하고 그 삶을 초월해 있는 무엇인가를 주기를 원한다.

그러나 예수는 삶을 긍정하는 존재이다. 생명을 긍정하는 존재가 바로 예수이다.

모든 제도에는 딜레마가 있다. 무엇이든지 제도화하자마자 운동에 위계가 형성된다. 그 조직을 운영하기 위해 고정해서는 안 될 것을 고정시키게 된다. 믿는 바에 교리가 생기고, 조직화 된다. 우리가 믿는 믿음을 조직신학의 미명 아래 여러 갈래로 나누어 놓았다. 신론, 기독론, 성령론, 교회론, 구원론 등등

글을 쓰지 않고 남기지 않은 유명한 두 사람이 있는데 그 중 한 명이 소크라테스이고, 다른 한 명이 예수다. 말은 화자의 현존이 필요하다. 그런 화자의 현존이 없는 ‘쓰기’는 오독과 오해에 항상 노출되어 왔다. 나의 강의를 들어도 여기 있는 사람 모두가 다 다르게 표현하고 강조점을 달리 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소크라테스는 쓰기는 부차적인 것으로 보았고, 말하기를 현존적인 것으로 보았다. 쓰기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소크라테스는 의도적으로 글을 쓰지 않았고 예수는 아마 쓰기를 못 했기 때문에 쓰지 않았든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쓰지 않았든지 간에 남긴 글이 없다.

니체는 포스트 모던 사고방식의 문을 열게 되는 한 구절의 말을 남긴다.

“사실은 없다. 오직 해석만 있을 뿐이다.”

그는 근대 인식론의 한계를 지적하며 현대 포스트 모던의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나의 강의를 듣고 똑같이 전달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들 자기가 아는 만큼, 자기 그릇의 한계대로 이해하고 그 말을 전달할 뿐이다.

그런 한계를 전제하면서 예수를 만나야 한다. 기독교는 전체 종교의 30%이지만 그 힘은 다른 종교와 비교할 수 없다. 그런 조건에서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은 한계가 있다.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알고 있다는 것은 제한된 것을 본다. 결국은 우리의 선택이 되는 것이다.

예수가 우리를 구속시켜(redeem) 주셨지만 우리도 이런 선택의 과정을 통해서 예수를 구속시켜 (redeem) 드려야 한다. 예수를 읽는 시각이 필요하다.

이 강의의 제목인 <예수는 페미니스트였다>라는 말은 레오나르드 스위들러라는 남성 신학자가 가톨릭 잡지에 1971년에 싣게 되면서 나온 말이다. 여러분은 예수가 페미니스트인가? 아닌가? 대한 대답을 어떻게 하실 것인가?….

이 대답을 하기 전에 생각할 것이 있다. 예수는 어떤 예수를 말하는가? 페미니스트는 무엇인가? 좋은 질문을 가져야 한다.

‘동성애를 찬성하십니까’ 이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다. (편집자 주:동성애에 대한 이해가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질문은 판단과 정죄를 낳기 십상이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은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을 것을 알면서 왜 그 나무를 만들었나?라는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다. (시를 읽으며 사실을 구하는 것과 같은 우를 범하고 있다.)

오늘 나의 강의는 예수는 누구인가? 페미니스트는 무엇인가?라는 이 질문을 생각하면서 열어가는 것이다.

예수는 삶을 긍정하며 많은 죄인들과 약자들과 이방인들을 환대했다. 그는 제도화된 종교에는 관심이 없었다. 최후의 심판을 다룬 성경본문을 보면 종교적인 냄새가 나지 않는다. 단지 목마른 사람, 배고픈 사람, 갇힌 사람들, 이방인들을 어떻게 대했는지에 대한 것으로 기준을 삼는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How to live with others와 관계된 기준들이다.

기독교는 이제 혐오와 저주의 교회가 되었다. 목사가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만약 예수가 목사가 되려고 했다면 그는 바로 1차에서 떨어졌을 것이다. 그는 세상의 고정관념이나 사회적 규범을 따르지 않았다. 그는 안식일에 대해 말하면서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이 사람을 위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종교의 눈으로 보면 아주 이단적이다. 그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이기도 했다.

따스한 연민을 가진 예수의 시선을 회복하면서 우리도 예수님을 구속해야 (redeem) 한다. 사람 취급을 못 받는 사람들을 살려 내야 한다. 선한 사마리안을 보라. 그는 지금 말로 한다면 무슬림이나, 무종교인이나 성소수자와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선한 사마리안을 언급하셨다. 종교적인 경계를 넘어섰던 예수님이시다.

교리라는 것은 하나의 가이드라인이다. 참고할 수 있는 사항이지, 절대화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실제로 교리는 계속 바뀌어 왔다. 기독교 안에서도 보면 성소수자를 인정하는 교회, 성소수자를 반대하는 교회가 있다. 기독교라는 말은 절대 단수가 아니다. ‘기독교들’이라는 표현으로 사용될 복수이다.

4복음서의 제한된 소스에서 어떤 예수를 만날 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나에게 누구인가? 예수는 해답이 아니고 질문이다. 소크라테스는 끊임없이 질문했다. 예수도 제자들에게 질문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개인적으로 예수님이 모두에게 반말하는 것으로 번역된 한국어 성경은 문화의 산물이다. 예수님은 아무에게나 반말하는 분이 아니셨다.) 이 질문은 굉장히 중요하다.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말합니까?“ 예수님은 각자의 생각이 어떠한지 궁금해 하셨다. 우리나라 교육에서는 내 생각은 중요하다고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을 이야기하는데는 뛰어나지만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것은 훈련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했다. 예수는 내가 누구라는 답을 주지 않고 듣기만 했다. 우리는 우리만큼만 이해한다. 사실을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레오나르도 스위들리에게 페미니스트는 무엇인가?

그는 이렇게 썼다. “Feminism is the radical notion that women are people.”

radical이라는 의미는 “going to the root”이다. 근원적인 뿌리에 접근하다는 뜻이다.

여성이 사람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여성도 사람으로서 모든 권리를 다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상식적인 말인데도 급진적이라는 말을 써야 했나? 그렇다. 너무나 상식적인 말인데도 여성도 사람이라는 말은 전혀 상식적이지 않은 가부장제에 이 사회가 물들여 있었다.

여성이 가장 먼저 찾고자 했던 권리는 참정권이였고, 그 다음이 교육권이었다. 지금까지도 참정권을 주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성인이 되지 못한 미성년자, 금치산자과 같은 사람이다. 이들은 자기 결정을 정확하게 할 수 없는 열등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성도 그렇게 열등한 존재로 이해되었다. 교육을 받는다면 남성과 여성의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교육이 확대되었지만 최근까지 열리지 않는 분야가 있었는데, 법대, 의대. 신학대였다. 이 모든 분야는 생명과 연관된 분야다. 여성들은 열등하기 때문에 이런 생명을 다루는 분야는 쉽게 문이 열리지 않았던 것이다. 1955년에 마지막으로 신학대가 여성에게 열렸다.

모든 종류의 혐오사상에는 두 가지 전제가 존재한다. 하나는 열등한 존재라는 생각, 다른 하나는 위험한 존재라는 생각이다. 여성혐오, 난민혐오, 성소수자 혐오 등 모든 혐오는 이런 패러다임에 갇혀 있다.

여성혐오는 남성만 갖는 것은 아니다. 가부장적 가치를 내면화하게 된 여성도 여성혐오사상을 갖는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페미니즘은 여자를 소중한 존재로 보는 입장이며, 모든 여성도 사람으로 보고자 하는 시각이다.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의 페미니즘을 따르는 것이다. 복음서에는 여성의 많은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예수의 주변에는 여성제자들이 따르고 있었다. 부활이 첫 증인들도 여성들이었다.

반면,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의 여성인식은 어떠했는가?

한 랍비는 이렇게 말했다. “토라가 여성에게 읽혀진다면 차라리 토라를 불태우는 것이 낫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사람의 숫자를 셀 때, 여성은 사람 수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 당시 성경기자들은 사회상을 반영하였다.

유대인은 하루 3번 기도 할 때, 이방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 무지한 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여성들의 존재는 비존재와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왜 존재했는가?

역사를 보면 두 가지 기대가 있다. 하나는 사창가 모델이다. Lookism(외모차별주의)을 통해 여성이 남성들에게 섹스어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느낌을 강요받고 있다. 그래서 경제가 아무리 어려워도 다이어트 사업과 성형외과는 망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 다른 하나의 모델은 농장모델이다. 여성을 출산과 육아의 책임자로만 보는 것이다.

시몬느 보봐르는 남성은 주체이고 여성은 타자라고 이 세상을 꼬집어 말했다. 남성은 First sex이고 여성은 second sex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주변의 여성을 보면, 부활사건의 증인도 여성이었다. 죽은 사람을 일으키는 사건에도 여성의 역할과 설득이 중요했다. 여성들에게 지적 활동이 허락되지 않던 시기에 예수님은 마르다의 강구에도 불구하고 마리아가 지적호기심으로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 예수는 혁명적이고 과격한 사람이었다. 고로 우리는 예수님을 페미니스트로 선택해야 한다.

바울은 양가적인 사람이다. 한편에서는 여성을 억압하는 표현을 쓰고 다른 한편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없다라는 말을 했다. 많은 성소수자와 여성혐오자들은 예수님을 인용하지 않고 바울을 인용한다. 다행히도 (물론 약간 위험한 소지의 표현들이 있기도 하지만) 예수님은 노골적인 차별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남성인 예수가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을까?

여성중심주의적 페미니즘 (gymocentric feminism)은 womanhood를 강조했다. 처음에는 ‘여성’과 ‘남성’만 보였는데, 너무나 다양한 intersectionality (교차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한 사람이 백인이고 남성이고, 이성애자이고, 기독교인이어서 모든 면에서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가 매우 가난해서 학교를 다니면서도 2-3개의 job을 가지고 힘들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페미니즘의 출발점은 gender였지만 모든 사람과 모든 형편은 교차성 (Intersectionality)으로 봐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당사자성’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당사자성만으로는 변혁을 일으킬 수 없다. 흑인 문제도 백인의 도움이 있었을 때 더 큰 변혁을 이끌 수 있었다.

사람중심주의적 페미니즘(humanistic feminism)이 있다. 이것은 humanhood를 강조한다. 이것은 feminism은 본질(essence)이 아니라 입장(position)이라고 본다. sex라는 말은 생물학적 성별을 말한다면 gender는 사회학적 성별을 말한다. 시몬느 보봐르는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지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다.

당사자성을 강조하는 곳도 있지만 당사자만의 힘으로는 변혁을 불러 일으키지 못 한다. 흑인, 여성 문제는 다 연대해서 일어났다. 동질성(sameness)의 연대에서 다름 (alterity: difference는 기준이 있어서 우열을 가리지만 alterity는 다름 그 자체를 타자로 보면서 그대로 인정하는 어휘)의 연대로 전환되었을 때 변혁의 힘이 생겼다.

우리가 에큐메니칼 운동을 많이 하지만 조심해야 하는 것은 공통점을 보면서 연대를 하다 보니 서로 고유한 다름(alterity)를 간과하거나 축소하게 된다.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절대 말하지 말아야 하는 두 가지 taboo가 있다. 하나는 성 (sex)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소수자문제이다. 균질성을 만들기 위해 편협하게 되는 우를 범한다.

예수를 페미니스트로 redeem해야 한다. 예수가 최후의 심판에서 말한 6가지 기준으로 볼 때, 그를 페미니스트로 만들어야 한다. 주류에 속하지 않은 사람과 연대하는 일이 필요하다. 장애인, 성소수자들, 아이들, 여성들..

책임적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바울교가 아닌 예수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먼저는 연민의 종교가 되어야 한다. 주변부를 연민의 시선으로 보아야 한다. 연민과 동정의 차이는 무엇인가? 연민은 영어로 compassion이다. 즉 suffer-with의 개념이 있다. 그러나 동정에는 시혜자와 수혜자가 생겨서 윤리적인 위계가 생긴다.

연민은 ‘왜’이런 일이 생겼는가를 묻는다. root question이 정의로 이어진다. 고통의 원인을 변화시키고자 연대하는 된다. 하지만 동정인 구제는 ‘왜’를 묻지 않는다.

둘째로는 책임성으로서의 종교가 되어야 하다. 예수의 최후의 심판을 보면 주변인들에게 어떻게 했는가에 관심이 있지, 교리부분을 확인하지 않으신다. 타자에게 어떻게 책임적인 삶을 살았는가? 교회는 구원 club이 돼서는 안 된다.

셋째로는 불가능성의 열정으로서의 종교가 되어야 한다. 가능성의 축과 불가능성의 축이 있은데 교회는 그 중간에 위치해야 한다. 새로운 소명감과 열정의 장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예수가 던진 how to live의 교훈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가 이 문제와 씨름하지 않았다면 죽을 이유가 없다.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편한 삶을 살기 힘들다. 사유하지 않고, 힘들지 않게 사는 사람은 자기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도 막는다. 한나 아렌트는 비판적 사고의 부재가 악의 뿌리라고 했다.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무지가 다른 사람의 존재를 악에 가담하게 만든다.

사람은 함께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나의 무지나 비판적 사고의 부재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이 유한한 삶에 어떻게 유의미한 삶을 살 것인가가 문제인 것이다.

예수는 노숙자였다. 성공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렇기에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고생길이다. 타자에게 무관심할 수 없고 타자에 대해 책임적 의식을 가지고 있기에 그렇다.

성경에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알 수 있는 단서를 하나 주셨다. 그렇다. 바로 “너희가 사랑할 때 (love one another)”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된다.

사랑이 뭔가? 골치 아픈 삶을 사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하나의 도구이다. 지적인 오만에 빠지라고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ism은 연장, 도구일 뿐이다. 이것으로 집을 지을 수도 있고 폭력을 가할 수도 있다. 사람을 살리며, 생명을 확장하는 도구로서 -ism을 관심을 갖고 공부해야 한다. 특히 페미니즘은 전 분야에 걸쳐져 있다. 예를 들어 약의 용량을 정할 때도 그 기준이 성인 백인 남성을 그 기준으로 한다. 여성은 제외되어 있는 상태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모든 분야의 문제를 볼 때 우리는 지적 패배주의에 빠지기 쉽다. 내가 뭘 할 수 있나? 이걸 한다고 뭐가 변하겠느냐? 등등

그러나 내 방에는 이런 글귀가 써 있었고 지금은 아예 내면화되어 있다.

“Small change can make a big difference.”

대부분의 씨를 뿌린 사람은 열매를 보지 못한다. 그저 내가 나를 보는 시각이 바뀌고 타자를 보는 시각이 바뀌는 것이 변화이다. 좌절은 조금 하고 변화를 위해 일어서자.

Redeem! 예수를 Redeem해야 한다. 제도화된 교회의 Christian보다는 예수의 삶을 따르는 Jesusian이 되자.

강남순 교수님과 함께 하는 6월 리본모임안내

이번 6월 KAC 주관 리본독서모임은 드디어(!!!!) 강남순 교수님께서 오셔서 ‘오랫동안’ 기다려온 기독교 페미니즘의 주옥같은 말씀을 들려 주실 예정입니다. 강남순 교수님께서는 현재 미국 텍사스 크리스챤 대학에서 교수로 재임중이시며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한국 신학의 건강한 토양을 위하여 고군분투하시고 계십니다.

6월 리본모임의 주제는 “예수는 페미니스트였다”: <책임적 기독교인의 과제>입니다. 강남순 교수님과의 만남이 크리스챤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부르심에 깊은 울림이 있는 시간이 될 줄 믿습니다.

이번 리본(Reborn)모임에서는 동녘 출판사에서 나온 <페미니즘과 기독교> 나 <젠더와 종교> 를 읽어 오시면 좋겠습니다. 한 권만 읽으실 수 있다면 <젠더와 종교>를 읽어 오세요. 그리고 12월 초에 출판된 <21세기 페미니스트 신학>도 좋습니다.

춘천에서 만나 뵙기 쉽지 않은 교수님이 오시는 만큼 주변의 많은 관심자들에게도 알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주제: 예수는 페미니스트였다:책임적 기독교인의 과제
강사: 강남순 교수 (Texas Christian University)
시간: 6월 25일 오후 7시
장소: 한국 아나뱁티스트 센터 (춘천시 춘천로 34, 3층)

참고)
강남순 교수님 소개: 현재 미국 텍사스 크리스천대학교 브라이트 신학대학원(Texas Christian University Brite Divinity School)의 교수이다. 미국 드루대학교(Drew University)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신학부에서 가르쳤다. 2006년부터 텍사스 크리스천대학교에서 자크 데리다 사상, 코즈모폴리터니즘,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콜로니얼리즘, 페미니즘과 같은 현대 철학적·신학적 담론들을 가르치고 있다. 특히 임마누엘 칸트, 한나 아렌트, 자크 데리다 등의 사상과 연계한 코즈모폴리턴 권리, 정의, 환대 등의 문제들에 학문적·실천적 관심을 두고 다양한 국제 활동을 하고 있다.

5월 리본모임의 정리요약

지난 5월 23일 목요일에 ‘춘천 더불어 숲’이라는 기독인문학강좌모임과 ‘한국아나뱁티스트센터주관의 리본모임’이 연합으로 전 감신대 이정배 교수님을 모시고, ‘역사 위의 기독교, 역사의식이 사라진 기독교’라는 주제로 모임을 가졌습니다.

교수님의 많은 연구와 고심의 결과로 나누어 주신 귀한 말씀은 정말로 다 받아 적지 않으면 안 되는 소중한 글들이었습니다.
좀 긴 글이긴 하지만 함께 하지 못하셨던 분들도 읽으시면 중요한 통찰력을 얻게 되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눕니다.
즐독하세요! (물론 긴글 주의요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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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 교수님의 ‘역사 위의 기독교, 역사의식이 사라진 기독교’ 강의내용

세월호 이후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큰 교회가 세월호 가족의 친구가 될 수 없었던 것을 보았다. 오히려 작은 교회가 그들의 새로운 교회가 되었다. 우리 나라는 작은 교회가 희망이다. 그 작은 교회 안에서는 ‘탈성장, 탈성직, 탈교단’의 일들이 이루어진다.
500년 전, 개신교가 가톨릭 교회에 대하여 종교개혁을 이루어냈지만 이제는 개신교 안에서 다시 종교개혁을 해야 한다.  2019년은 3.1절운동이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섰는가?’ ‘우리는 독립을 했는가?’ ‘교회는 무엇으로부터 독립해야 하는가?’
‘나라는 무엇으로부터 독립해야 하는가?’

이제는 자본으로부터 독립할 시기라고 생각한다. 신학은 이런 질문 앞에 대답할 시기이다.
나는 세월호 이후 거리 신학자요, 거리 설교자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아픈 현장에 가서 거리 설교를 하다 보니 붙은 별명이다. 그리고 그 거리에서 한 설교가 33편의 설교가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을 거리에서 만났다. 이 33편의 설교가 책을 나왔다.

또 학교를 일찍 퇴직하고 나오니 읽고 싶은 책들이 너무 많았다. 그런 책을 중심으로 책을 읽었고 그 감상문을 에큐메니안 잡지에 실었다. 그 글도 33편이 되었다. 거기에는 분단체제에 길들어진 부분, 자본과 기독교의 싸움, 루터로의 회귀가 아니라 새로운 루터와의 만남, 페미니즘, 생태문제 등 기독교가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써보았다.

십년 전, 오늘 나는 ‘고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대하는 어느 장로의 이야기를 듣고 기독교에 대한 고민이 이어졌다. 그 장로는 “노통은 살아서도 우리에게 부끄러움을 주더니 죽어서도 우리에게 부끄러움을 준다”라고 말했다. 한 사람의 죽음 앞에 연민과 슬픔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차갑고 냉소적인 기독교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베드로전서 3:15에 보면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2가지를 고민해야 한다.
하나는, 우리의 소망은 무엇인가?라는 문제이다. 그것은 기독교의 essence는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영어는 기독교만을 Christianity라고 말하며 유일한 계시의 종교이고, 나머지는 다 사람이 말한 -ism이라고 표현한다. Buddhism, Hinduism, Islamism. 그렇다면 다른 종교와 분명하게 구별지을 수 있는 차이점 그 essence가 무엇이냐에 대한 부분을 고민해야 한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은 소망을 드러내는 방법과 태도에 대한 문제이다.

힌두교는 모든 개체가 신이다라고 믿는 종교이다. 개체 자체가 절대적이다. 이 말은 아무리 비천한 불가촉 천민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 ‘나는 곧 신이다’라는 확신이 있는 종교이다.
불교는 그런 힌두교의 절대성에 한계를 느끼고 나온 종교로서, 절대성 보다는 관계를 강조한 관계의 종교이다. 모든 것은 관계 가운데 존재한다라고 믿으며, 개체성을 부정한다. 고통은 집착에서 나온다. 세상에는 집착할 것이 없다. 개체성을 강조하는 실체론적 삶은 집착을 불러 일으킬 뿐이다. 관계성을 강조한 불교는 생태학적인 종교이기에 요즘 불교의 생태에 대한 관심이 많은 각광을 받는다. 불교는 상호의존적이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어떤 종교인가? 힌두교처럼 각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한다.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확신하며 하나님이 우리 안에 내재하신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불교처럼 관계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만큼 그 힌두교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궁극성과 불교의 관계성이 전부를 차지하지는 않는다.
기독교는 이 모든 궁극성과 관계성이 깨진 곳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기독교는 역사성과 우발성의 종교이다. 처음에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은 세상을 향해 한없는 애정을 드러내셨지만 노아의 시대에 세상은 노아가족만 남고 다 멸절된다.
하나님은 노아와 다시 약속을 통해서 관계를 정리하신다.
노아와 맺은 약속은 하나는 사람들의 눈에서 억울한 눈물을 흘리게 하지 말라는 것과 또 하나는 동물을 피 채 먹지 말라는 것이었다.
기독교에서의 인간은 처음부터 하지 말아야 하는 한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원초적인 한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근본적인 내용이다. 인간은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궁극성과 관계성이 깨진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그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는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의 출발점인 것이다.

중국한자에 보다를 표현하는 두 글자가 있다. 하나는 볼 見(견),이고 다른 하나는 볼 觀(관)이다. 볼 견은 낮에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것을 볼 때 사용하는 글자이고, 볼 관은 밤에 볼 수 있는 것을 뜻한다.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일부만 볼 수 있는 것을 말할 때 ‘관’자를 사용하는 것이다. 예수가 우리에게 말하는 신앙은 바로 이런 ‘관’을 갖는 것이다. 남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시야를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다.

독일말로 부활은 ‘생물학적 죽음’에서 살아 났다는 의미도 있지만, ‘사회의 총체적인 불의‘에서 새롭게 되었다는 의미도 내포한다. 90%가 이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기독교의 부활은 사회의 총체적인 불의에 대하여 부활한다는 의미로 이어진다.
“궁극성과 관계성”이 깨어진 곳에서 살고 있다라는 것을 보고(觀), 세 세상을 꿈꾸는 것이 기독교의 소망이다. 이것이 원죄의 진정한 현실이다. 기독교의 원죄는 태어나면서부터 죄를 짓는 존재라는 의미뿐 아니라, 기울어진 운동장과 같은 궁극성과 관계성이 깨어진 현실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말한다.

베드로전서 나오는 기독교의 소망은 이 자본주의 세상에서 그저 잘 먹고 잘 사는 것인가? 아니면 죽었다가 육체로 다시 살아나는 것뿐인가?
어느 대형교회처럼 3만5천원의 땅값이 3백5십만원이 되게 해다랄고 기도하는 욕심꾸러기가 되는 것이 소망이 아니다.
기독교는 이 기울어진 세상에 어떻게 관계성과 궁극성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하는 종교이다.
이제는 태도와 방법의 문제로 넘어가겠다.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
이것은 많은 목회자들이 호소하듯이 감정노동자가 되라는 뜻인가?
소망의 이유를 위해서 감정노동자로 살아야 하는 것도 포함되지만 우리가 묻고 답하는 모든 신학적 행위는 구체적 시간과 공간 안에서 행해진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우리가 말하는 신학이 변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 때 온유와 두려움이 생긴다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 바뀌면 우리가 주장하는 신학은 변화될 수 있기에 우리의 소망에 대한 대답은 온유와 겸손을 겸비한 두려움으로 준비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독립선언문에는 자기 我(아) 자를 쓰지 않고 대신 자기 吾(오)를 쓴다. ‘아’자아에는 창이 들어있다. 이것은 남을 배타하면서 자기를 보호하는 이기심을 드러내는 ‘아’라면 ‘오’자는 창이 없다. 배타하지 않는다. 우리 선조들은 독립선언서를 쓰면서도 압제하는 일본을 배타하지 않는 수용의 마음으로 독립선언을 하였다.
모든 신학적 대답은 시간적인 공간 안에서 일어난다. 끊임없이 묻고 대답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많은 교회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라고 하지만 정작 무엇을, 어느 시점을 초대교회라 할 것인가?
로마의 국교화가 일어나기 전인, 로마에 의해 핍박받던 시절을 의미할 것이다.
세상은 기독교가 로마를 기독교화 시켰다 생각하지만 실은 로마가 기독교를 로마화시켰다. 진짜 그리스도인들은 그 때 다 사막으로 갔다. 제도권 속에 들어간 기독교는 제대로 된 기독교가 될 수 없다.
국교화되기 전의 초대교회는 2가지 특성이 있었다. 하나는 해석의 다양성, 다른 하나는 복음의 정치학이다.
초대교회 당시는 성서가 정경화되지 않았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도마복음, 마리아복음 등 그들이 따르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그 공동체에서 읽히는 복음서가 있었다. 이런 다양한 해석이 공존했고, 다양성은 존중되었다.
도마의 복음서에서는 잃어버린 1마리 양이 죄인이 아니라, 그 잃어버린 1마리 양이 되어야 함을 이야기 한다. 교회가 제도화되려는 상황에서는 차라리 잃어버린 1마리처럼 소수가 되는 것이 낫다라는 말이다. 제도화, 군중화, 교권화되지 말고 자유의 길로 가라는 뜻이다. 함께 공존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마리아복음처럼 여성의 복음이 같이 공존했고 그들의 해석이 존중되었다.
초대교회는 마리아를 예수님의 제자로 세웠다. 이런 이야기가 마리아 복음서에서 많이 나온다. 여성에게 이런 역할이 주어졌던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가부장적 구조가 더욱 공고히 되면서 마리아의 이름은 점점 지워져 나갔다. 초대교회가 이렇게 해석의 다양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안에 그 해석을 하나로 묶어 주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것이 복음의 정치학이다.
교회는 로마지배 속에 있었다. 그래도 율법만 있으면 자유인이라고 생각한 유대인들은 스스로 속고 있었으며 ‘진리 안에서 자유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 했다.
로마의 제국이 그러했듯이 우리도 자본주의의 제국의 속박 가운데 살고 있다. 능력이 있으면 마음대로 사람을 부리며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 수 있다. 그러나 로마식민지에 살던 유대인을 향해 말씀하셨듯이,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자본주의의 논리대로 살면 안된다고 하신다.
초대교회의 기독교는 종을 부리는 것이 불편해졌다. 종의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로마제국에서 사는 기독교인들의 고민이었다. 가부장적 문제도 기독교인들에게는 고민이 되었다. 바울은 남편들에게 아내를 너 마음대로 하면 안된다고 권면한다. 일방적인 힘으로 아내를 제압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법제재는 없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은 가부장제가 불편해진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살면 제국주의와 가부장제가 불편해지는 것이었기에 해결해야 한다.
복음의 정치학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로마와는 다르게 살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도 자본주의에 살면서 자본주의와 씨름해야 한다. 돈을 펑펑 쓰며 하고 싶은 대로 살면 뭐라고 할 사람이 없지만 기독교인은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예수님은 천국을 비유하면서 포도원주인의 이야기를 비유로 든다. 아침에 온 사람이나, 저녁에 온 사람이나 동일한 삯을 받는다. 하루의 품삯은 누구나 필요한 것이죠. 하나님나라와 이와 같다. 체제 바깥에서 이 체제를 구하기 위해서 오는 삶이다. 교회의 메시지는 체제 밖에서 오는 이야기여야 한다.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어야 한다.

기독교인으로 세상을 살면서 불편하게 없다면 슬픈 일이다. 죄와 자본의 문제가 심각함을 깨닫고 그 체제 밖의 소리를 내야한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화하면서 획일성과 제국의 틀 안에 갇히고 말았다.
기독교 안에서 자본주의가 나왔지만, 자본주의가 기독교를 자본화시켰다. 기독교의 소망은 체제 밖의 이야기에서 힘을 얻는다. 영과 육을 나눌 수 없다. 신앙과 삶은 분리될 수 없다.
진정한 기적은 이기심으로 움추렸던 손을 펴는 것이 진정한 기적이다. 100세 되신 김형석 선생은 65-75세가 되어서 행복해졌다고 하셨다. 그 이유는 그때서야 자신의 손이 펴졌기 때문이라 하셨다.

기독교신학을 창조적으로 왜곡한 대표적인 두 사람이 있다. 한 명은 어거스틴이고, 다른 한 명은 루터다.
이들의 사고틀에서 벗어나 다른 기독교를 꿈꿔야 하는 시기에 당도했다. 어거스틴은 제국이 된 로마의 대표교구사제였다. 외부의 야만인들이 로마를 굴복시키는 것을 로마시민들은 목격했고 시민들은 분노에 찼다. 이 상황을 정리한 신학자가 어거스틴이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이 아니라, 저 하늘에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원죄의 개념을 강화하여 인간은 모두 죄인이라고 정죄했다. 원죄와 하나님 앞에서의 죄인이라는 말은 다른 말이다.
초기 교부들은 창1-3의 말씀을 보면서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했지만 어거스틴은 똑같은 본문을 보면서 원죄이야기로 만들어 버렸다. 목회자들에게 머리를 들면 안 되고, 교회는 계속 해서 원죄의 교리로 평신도의 머리를 숙이게 했다.
물론 어거스틴의 공로를 무시하고 싶지 않다. 그에게서 우리가 받은 유산이 많다. 하지만 어거스틴이 한 말을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 원죄(original sin)보다 창조의 원리(original blessing)을 강조해야 한다.

루터의 문제는 무엇이었나? 루터의 적은 가톨릭의 행위와 유대교의 율법이었다. 그래서 루터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였다. 하지만 지금 와서 루터의 ‘오직 믿음’이 루터시대의 ‘면죄부’보다 더 타락했다고 말한다.
천년이나 이어져 온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믿은 가톨릭신앙을 쉽게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은 구원비용이 적게 들었기 때문에 개신교에 빠르게 흡수될 수 있었다고 말하는 사회학자도 있다. 지금은 개신교의 구원비용이 너무 비싸졌다.
루터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개만도 못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 말은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말살하려는 정책에 힘을 보태어 주었고 히틀러는 루터의 말을 인용했다. 물론 그 당시 유대인들이 미움받을 짓을 한 것도 사실이지만.
성서는 ‘오직 믿음’만 가지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사람은 행하는 것만큼 믿는 것이다. 믿음과 행위는 별개가 될 수 없다.
한 종교학자는 어느 한 지역에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이 4명 중 1명꼴로 있어도 그 지역사회가 그 종교문화를 갖게 만든다고 하였다.
강남지역의 기독교인은 40%에 육박한다. 그 강남지역의 문화는 실컷 먹고, 실컷 땀빼고, 실컷 즐기고, 실컷 용서받을 데로 가득하다.
기독교는 이런 향락문화에서 벗어나 생명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기독교가 자본주의에 철저히 기생하고 있는 문화와 맞서서 싸워야 한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가장 큰 차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원죄 (기울어진 운동장과 같은)의 현실에 오셨고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성육신의 신비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재현되어야 한다. 강도만난 사람을 보라! 사마리안은 자신의 원수 유대인을 치료한다. 성육신의 신비는 현장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0_0b4Ud018svc155l6dh5j2kj9_rhh1u0.jpg0_0b4Ud018svcrsnr7qtrvypv_rhh1u0.jpg